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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화 습식 저장조


1. 동그랗게 솟아오른 3m 정도의 절벽 위에 선 우리들. 우어어어어어어— 우어어어어— 우어어어어어— 좀비들은 자기들끼리 서로를 밟으며 조금씩 올라오고 있었다. 그 모습을 관망하던 중, 검도장 삼인방이 한걸음 앞으로 나섰다. 세인 검도장의 관장이라고 소개했던 아버지 류진용과 딸인 류세인, 그리고 사범 서인호였다. "수는 많지만 전부 일반 좀비야. 변종은 없는 것 같군." "약 500마리쯤 되는 것 같습니다." "먼저 가볼게요." "엇, 세인아!" 랭킹 3위 류세인이 먼저 뛰어내리고, 나머지 두 사람도 뒤를 따른다.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그들이 자신들의 능력을 소개했을 당시, 류진용 관장이 머쓱하게 말하던 모습이 떠올랐다. 「우리 능력은, 그……. 혹시 무협지 같은 거 본 적 있나요?」 「무협지요?」 「그래요. 거기 나오는 무림인 같은 거라고 생각하면 대충 비슷합니다.」 「그럼 관장님은 무림인 능력이시고, 나머지 두 분은요?」 「셋 다 같은 능력입니다. …좀 특이 케이스지요?」 특이하긴 했다. 특수 능력이라는 것이 상대적으로 흔한 것들이 존재해서 능력이 겹치는 것 자체는 이상할 것 없었다. 그러나 같은 검도장의 세 사람이 모두 동일한 능력을 얻게 되었다는 것은 확실히 이상했다. 셋이 같은 능력인데 류세인 한 사람만 랭킹 3위까지 올랐다는 점도 수상했고. '무언가 숨기고 있는 게 있어…….' 물론, 숨기는 게 있다는 건 피차 마찬가지였지만 말이다. 지금 세 사람은 모두 검을 뽑아들고 좀비들을 종잇장처럼 베어 나가고 있었다. 정말 무협지 속에서 등장하는 무림인들처럼 몸놀림이 가볍고 빠르다. 게다가 검에서는 푸른색의 오오라가 솟아 나와서 실제 검의 길이보다 더 넓은 범위로 공격했다. 저것은 그야말로 무림인의 꽃이라고도 볼 수 있는…… 검기! "오오……." 검도장 삼인방의 싸움을 구경하던 것도 잠시, 랭킹 9위 장사운 아저씨가 앞으로 나섰다. "우리도 슬슬 움직이지." 장사운은 자신이 전직 특수부대 요원이며, 능력은 마력으로 구성된 군용 장비들을 만들어내는 것이라고 소개했었다. 그가 허공에 손을 내밀자 스코프가 달려있는 HK416 돌격 소총이 생겨났다. 차례로 입부터 코까지 덮는 검은색 복면, 방탄조끼, 헬멧까지 생겨났으며, 헬멧 위에는 4안 야간투시경도 달려 있었다. 그야말로 영화 속에서나 나올 법한 특수부대 요원의 모습이었다. 소총을 어깨에 견착한 장사운은 그대로 좀비들을 향해 난사하기 시작했다. 타타타타타타탕— 총알도 능력으로 만들어낸 것이니 저건 한 발 한 발이 강력한 마력탄이었다. 일반 소총은 탄환에 마력을 담을 수가 없어서 피부가 단단한 변종 좀비를 상대로는 무력한 반면, 장사운의 능력은 그런 약점이 없는 것이다. 그 모습을 본 97위 배성준이 휘파람을 한번 불더니, 내 어깨를 툭툭 쳤다. "1위께서는 구경만 하실 건가?" "아, 우리도 내려가서 싸워야죠." "먼저 갈 테니까 너무 비싸게 굴지 말라고." 배성준은 밑으로 뛰어내리며 바닥에 쪼그려 앉아 착지하더니, 위를 보면서 길게 하울링 소리를 냈다. 아우우우우우우우—! 그러자 그의 주둥이가 점점 길어지며 전신에서 회색 갈기가 솟아났다. 배성준이 소개했던 능력은 간단했다. 바로, '늑대인간이 되는 것'. 덩치도 좀 커져서 2m가 넘는 늑대인간이 된 그는 좀비들 사이로 뛰어들어 날뛰기 시작했다. 기다란 손톱을 한번 휘두를 때마다 좀비가 여러 갈래로 찢어지며 바닥을 나뒹군다. 이제 파티원들 대부분이 좀비들 사이에 뛰어들어 싸우고 있었다. 계속 구경만 하기에는 슬슬 눈치가 보이는 타이밍이었다. "우리도 가자." "네, 주인님!" 세레나는 백기사로 무장하지는 않은 채로 주먹을 휘둘러 좀비들의 머리통을 터트렸다. 나는 검을 뽑아서 좀비를 슬렁슬렁 베어넘기며 뒤쪽을 곁눈질했다. "살라만드라!" 21위 안지우는 불의 정령을 소환해서 싸우고 있었다. 아까 소환했던 노움이 사라진 것을 보면, 동시에 여러 정령을 소환하지는 못하는 모양이었다. 아니면 마력을 너무 많이 소모해서 평소에는 동시에 소환하지 않는 것이거나. 글자를 적어서 힘을 발휘하는 능력인 36위 현서희는 손에 든 쥘부채를 휘두르고 있었다. 쥘부채에는 수많은 글자들이 적혀있었는데, '화염 세례', '천둥 번개', '칼바람' 같은 문구들이었다. 그녀가 쥘부채를 휘두를 때마다 글자에서 빛이 나면서 능력이 쏟아졌다. 꽈릉—! 아마 방금 나간 것이 천둥 번개일 것이다. 이것으로 함께 들어온 랭커들의 능력은 모두 확인했다. 모두들 만만치 않은 실력자들인 만큼, 수백 마리는 되었던 일반 좀비들의 수도 빠르게 줄어들고 있었다. 2. 이번 균열 공략에서 내가 갖고 있는 포지션은 명확했다. '공략에 무리가 없는 선에서 방관자의 입장을 취할 것.' 애초에 세레나만 있어도 봉쇄할 수 있을 듯한데 10명이 넘는 파티로 구성한 것 자체가 상위 균열을 봉쇄하는 경험을 다른 랭커들과 나누기 위한 것이었다. 그렇기에 세레나와 시엘에게도 미리 언질을 해뒀다. '적을 섬멸하는 것보다는 아군이 위험하지 않게 보호하는 것을 우선할 것.' 그 명령은 일반 좀비들과의 싸움이 막바지에 달했을 때 빛을 발했다. 좀비들이 거의 정리되어 얼마 남지 않은 때였다. C급 균열에서도 30마리 정도의 변종 좀비들이 출현했었는데, B급 균열인 이곳에서는 일반 좀비들밖에 나오지 않아 이상하다고 생각하고 있던 찰나, 뒤쪽에서 세레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피해요!" 다급한 외침에 고개를 돌려보니 엉거주춤 서있는 현서희를 노리고 기다란 금속막대가 날아오고 있었다. 그것이 현서희의 머리를 관통하기 직전, 날아든 세레나의 발차기가 금속 막대의 궤도를 바꿨다. 태애앵—! "꺄아악—!" "뭐, 뭐야!" 일반 좀비들을 학살하며 모두가 방심해있는 사이, 하마터면 현서희가 죽을뻔했다. 세레나가 발로 찬 금속 막대는 하늘로 솟구쳐 몇 바퀴 돌더니 바닥에 떨어졌다. "습격이다!" "어디서 날아온 거지?" "모두 조심해요! 다음 공격이 올 수도 있어요!" "이 쇠막대는 대체—." 바닥을 구르는 4m 정도 길이의 금속 막대기. 다들 당황하여 분위기가 어수선한 가운데, 검도장 관장인 류진용 아저씨가 금속 막대에 다가서는 순간이었다. 균열에 함께 들어왔던 원전 직원인 D급 능력자 강민기가 소리쳤다. "멈춰—! 당장 거기서 떨어지세요!" "갑자기 무슨……?" 강민기가 손을 뻗자 허공에서 생겨난 물이 금속 막대를 감싸기 시작했다. 그는 물을 소환하고 다룰 수 있는 능력을 가진 물술사였다. 대지를 다루는 이진아의 물 버전이기도 했고, 정령사인 안지우의 하위 호환이었다. 강민기는 창백한 표정으로 금속 막대를 노려보면서 말했다. "이건 수조에 보관해둔 사용후 핵연료봉입니다. 지금도 안에 들어있는 방사성 물질이 붕괴를 계속하면서 열과 방사선을 내뿜고 있어요. 가까이 다가가면 피폭될 겁니다." "뭐, 뭐요!?" "아빠, 떨어져요!" 당황한 류진용을 류세인이 붙잡고 물러섰다. 계속해서 물을 소환해 핵연료봉을 두텁게 감싸는 강민기는 식은땀을 닦으면서 설명했다. "지금은 괜찮습니다. 방사선을 가장 잘 차폐해 주는 물질이 납과 콘크리트, 그리고 물이거든요. 그래서 사용후 핵연료봉을 수조 형태의 습식 저장조에 넣어두는 건데……." 나는 그 말을 듣자마자 원전 내의 한 공간을 바라봤다. 그곳에는 마치 실내 수영장이라도 되는 것처럼 직사각형 형태의 대형 수조가 존재했다. "세레나. 막대가 날아온 곳이 혹시 저 수조 안쪽이야?" "맞아요, 주인님. 물속에서 솟구친 막대가 현서희 씨를 노리고 날아왔습니다." "……." 모두가 침묵에 휩싸인 가운데 수조를 바라봤다. "이런……." "제발, 아니겠지……." 신음처럼 새어 나오는 혼잣말들. 모두가 같은 생각을 한 것 같았다. 물속에서 공격해왔다는 것은, 거기에 적이 있다는 뜻이었다. 그리고 아직까지 원전 내부에는 핵이라고 할 수 있는 고치가 보이지 않았다. 그렇다는 것은 설마……. 나는 애써 침착함을 유지하면서 말했다. "……일단 확인해 보죠. 다들, 적들이 언제 다시 공격해올지 모르니 대비하세요." 우리는 다시 한데 모여서 수조를 향해 천천히 다가갔다. 나는 내 뒤에서 걷는 시엘에게 물었다. "시엘. 저 핵연료봉에서 나오는 방사선으로 인한 피폭 피해, 혹시 은총의 빛으로 치유가 가능할까?" 시엘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아주 작은 입자가 몸을 뚫고 지나가면서 생기는 피해예요. 충분히 치유가 가능합니다." 반가운 소식이었다. 이것으로 피폭 피해에 대한 걱정은 덜었다. 계속해서 걸음을 옮기는 도중, 방금 전까지 얼어있던 현서희가 가늘게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세레나 씨, 고마워요. 덕분에 살았어요." "감사는 제가 아니라 주인님께 하시면 돼요." "아, 주인님이라면……." 현서희가 뻣뻣하게 고개를 돌려 내 쪽을 쳐다봤다. 그러자 세레나가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제 주인님이에요." "……그럼, 감사합니다. 김도하 씨." "……천만에요." 명명백백하게 드러난 주인님이라는 호칭에 모두가 내 얼굴을 힐끗거렸다. 심지어 배성준은 한마디 했다. "랭킹 1위께선 취향도 참 고상하시구먼." "……." 나는 그저 묵비권을 행사했다. 이런 시선에도 슬슬 적응이 되어가서 이제는 아무렇지도 않은 느낌이었다. 주인님 소동에 분위기가 풀어진 것도 잠시……. 수조에 가까이 다가갈수록 안쪽이 들여다 보이기 시작했다. 점점 드러나는 깊이를 알 수 없는 물속의 풍경에 사람들의 안색이 점차 굳어갔고, 원전 직원인 강민기는 떨리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뭐, 뭔가가 잘못됐습니다……!" 우리의 시선이 집중되자 그는 수조를 가리키며 소리쳤다. "습식 저장조는 이렇게 깊지 않아요! 원래 수심은 10m 정도일 텐데……!" 나는 패닉에 빠진 것으로 보이는 그가 침착할 수 있도록 최대한 차분한 어조로 대답했다. "…아무래도 균열 내부라서 변형을 일으킨 것 같습니다." "……." 대답은 없었다. 마침내 드러난 수조 밑바닥의 모습을 본 강민기는 그저 멍하니 입을 벌린 채로 우뚝 서있을 뿐이었다. 다른 랭커들도 가만히 멈춰 서서 저마다의 반응으로 현 상황을 받아들였다. "후우……." 한숨을 내쉬는 3위 류세인. "……." 조용히 눈살을 찌푸리는 9위 장사운. "하하, 곤란하게 됐네요." 어색하게 웃는 21위 안지우. "말도 안 돼……!" 경악하는 36위 현서희. "씨발. 이런 좆같은 일이……." 욕지거리를 내뱉는 97위 배성준. 그럴 만도 했다. 1위인 나조차 수조 내부를 감상하며 어이가 없을 지경이었으니까. '이거 C급 균열이랑 겨우 한 단계 차이인데 난이도가 너무 급격하게 올라간 거 아니야……?' 깊이가 최소 100m는 되어 보이는 수조의 밑바닥에는 사용후 핵연료봉이 빼곡하게 보관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 한가운데에는 핵연료봉 사이에 뿌리를 내린 거대한 고치가 두근거린다. 저것을 파괴해야 균열 봉쇄에 성공하는 것이었다. 게다가 놀랍게도, 약 50마리에 달하는 변종 좀비들이 수조 속에서 자유롭게 헤엄치고 있었다. 놈들은 환경에 맞추어 진화를 했는지 손발에는 물갈퀴가, 팔다리에는 지느러미가 달렸다. 무엇보다도 가장 충격적인 것은……. 고치 옆을 지키고 있는 5m 정도 되어 보이는 크기의 괴물. 상반신은 근육질의 거대 변종 좀비, 하반신은 물고기 형태의 인어 괴물은 양손에 핵연료봉을 한 자루씩 들고 수조 밖의 우리들을 바라보며 얼굴을 일그러트리고 있었다. 그 기괴한 표정이 마치 우리들을 비웃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 것은, 착각이 아니겠지. 저 거대한 괴물이 바로 B급 균열의 보스임은 분명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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