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9화 B급 균열로
1.
나는 뜬금없이 랭킹창이라는 새로운 시스템을 만들어낸 '여신 헤스테아'의 의도를 헤아려보려 했었다.
지금 주어진 부족한 단서들 만으로 알 수 있는 것들은 많지 않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이 있었다.
그건 바로 헤스테아가 '아시모네의 하수인'들을 처치하고 싶어 한다는 점.
그리고 아시모네의 하수인들은 변종 좀비. 즉, 인간을 멸망시키려는 존재들이다.
그런 점에서 볼 때 랭킹창의 상위권을 차지하는 랭커들은 모두 헤스테아의 의도에 맞게 열심히 활동해 준 사람들이었다.
실제로 그들이 균열을 봉쇄해 준 덕분에 자신들도 모르는 사이에 위기에서 벗어난 생존자들도 많을 터.
그런 면에서 나는 랭커들을 좋게 생각하고 있었다.
오만한 생각일 수도 있겠지만, 처음으로 나타난 B급 균열을 함께 봉쇄해서 랭커들에게 경험을 쌓게 해줘야 한다는 생각을 한 것도 그런 이유였고.
어찌 되었든 안일한 생각인 것은 맞았다.
결국, 세레나와 시엘만을 데리고 균열을 봉쇄하는 것보다는 내 능력이 드러나는 위험을 짊어지게 되는 셈이니까.
이게 옳은 판단인지는 모르겠다.
다만 선택을 할 뿐이다.
2.
아마 균열을 봉쇄하고 나면 세레나와 시엘이 내게 종속되어 있다는 사실이 공헌도를 통해서 드러나게 될 것이다.
그것이 목숨 걸고 지켜야 하는 비밀 같은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아는 사람은 적을 수록 좋았다.
내가 바라는 것은 한 마디로, '서로의 능력에 대해서는 비밀로 할 것'.
여기에 반대하는 사람들은 배제하고 출발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일단은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듯한 뉘앙스로 가볍게 떠보기만 했다.
처음부터 배제할 거라고 말했다가는 일단 의도를 숨기고 함께한 다음 나중에 폭로하는 사람이 나올 수도 있으니까.
그 결과…….
다행히도 만장일치로 의견이 모였다.
가장 먼저 고개를 끄덕이며 나선 것은 랭킹 3위인 류세인이 포함된 검도장 3인방의 중년 아저씨였다.
"찬성합니다. 좋은 일 하려고 모인 건데 굳이 우리만 능력을 드러낼 필요는 없지요."
아저씨가 먼저 말하자 같은 검도장의 류세인과 남자 한 명도 고개를 끄덕였다.
나머지 사람들도 한마디씩 했다.
"저도 찬성이요."
"아무래도 상관없어."
"찬성해요."
"찬성합니다."
그렇게 모두가 찬성 의사를 표했다.
물론 이렇게 한다고 해서 약속이 잘 지켜질 거라는 보장은 없었다.
사실상 약속을 깬다고 해도 누가 그랬는지 알 방법이 없으며, 제재를 가할 수도 없었으니까.
그러나 일단 우리 모두 서로 능력이 밝혀지기를 원하지 않는 입장이라는 점을 확인한 것만으로도 충분히 만족했다.
그때, 랭킹 36위 현서희가 손을 들었다.
"다들 의견이 일치하시는 거라면, 각서라도 쓰는 거 어때요? '균열 봉쇄를 통해서 알게 된 서로의 능력에 대해서는 외부에 발설하지 말 것.' 대충 이런 식으로요."
"……."
"……예, 뭐."
"그게 편하시면 그렇게 하시죠."
사람들은 모두 떨떠름한 반응이었다. 나도 마찬가지였고.
그야, 구두로만 약속하나 손으로 각서를 작성하나 매한가지 아닌가?
결국 약속을 안 지켰을 때의 제재가 불가능하다면 개인의 양심에 맡겨야 한다는 점은 동일했다.
그러나 현서희가 품에서 붓펜을 꺼내자 나를 포함한 몇몇 사람들의 안색이 변했다.
'설마…….'
현서희의 능력이 정확히 무엇인지는 모른다.
우리가 목격했던 것은 권석현의 배에 '치유'라는 글자를 적자 몸이 회복되기 시작했다는 것뿐.
그런데 그게 단순히 치유 능력이 아니라, 그녀가 쓰는 글자 전체에 마력의 힘이 담기는 능력이라면?
그녀는 왜 굳이 '각서'를 '쓰자'고 했을까?
사람들을 둘러본 현서희가 웃으면서 말했다.
"몇몇 분들은 벌써 제 능력을 짐작하신 것 같은데요? 다들 각서 쓰기로 동의한 거예요?"
3.
짐작한 대로 현서희의 능력은 '글자에 마력을 담는 것'이 맞았다.
현서희의 설명을 들어보니, 그녀가 각서를 작성하고 거기에 자의로 서명한다면 그 각서는 마력의 힘으로 강제성을 갖는다고.
그녀는 붓펜을 들고 마치 잉크젯 프린터라도 되는 것처럼 각서를 작성했고, 그걸 우리 모두에게 나눠주었다.
각서의 내용을 천천히 읽어보니 방금 우리들이 나눈 얘기를 구체적으로 적어둔 것이 대부분이었다.
그런데 그중에 눈에 띄는 것이 있었다.
그건 바로 위약 항목.
[이상의 약속을 지키지 않는 자는 가지고 있는 마력을 모두 잃고 능력을 사용할 수 없게 됩니다.]
각서를 읽고 있던 97위 배성준이 침음을 흘리더니 말했다.
"이 페널티…… 설마 진짜로 일어나게 되는 건가? 당신 능력으로?"
현서희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물론이죠! 서명을 하는 순간 스스로의 마력을 걸고 맹세하는 셈이에요. 각서의 내용을 어기면 마력이 자동으로 흩어지게 되는 거죠."
"……."
"뭐야, 왜요? 다들 동의하는 거 아니었어요?"
대부분의 사람들이 꺼림칙한 표정이 되었다.
물론 의견에 동의했다고는 하지만, 페널티가 워낙 강력하기에 찜찜한 기분이 드는 거겠지.
내가 먼저 나서서 분위기를 바꿀 필요가 있었다.
"당연히 동의하죠."
나는 각서에 단숨에 서명했다.
그런데 옆에서 내 사인을 지켜보던 세레나가 나한테 귓속말했다.
"주인님, 저 사인이 없는데 어떡하죠?"
"…저도요."
곤란한 표정으로 나를 올려다보는 세레나와 시엘.
"대충 지금 만들어도 되고, 아니면 그냥 이름만 써도 괜찮아."
"음……. 그러면……."
"알겠습니다."
세레나는 나름 내 사인을 보고 흉내 내면서 자기 이름을 흘려썼고, 시엘은 그냥 정자로 이름을 적었다.
"다 썼어요!"
"저도요."
"좋아."
나는 우리 셋이 쓴 각서를 현서희에게 내밀었다.
"우리는 다 썼습니다."
그녀는 웃으면서 손을 저었다.
"저한테 주실 필요 없어요. 내용을 읽고 이해한 후에 서명한 순간 능력이 자동으로 발동되거든요. 그 각서는 각자 보관하시면 돼요."
"오호, 그렇군요."
참으로 신기한 능력이었다.
나와 일행이 모두 각서를 쓰자 아까 가장 먼저 동의했던 검도장 아저씨부터 서명을 시작했다.
"뭐, 어차피 약속을 어길 생각은 없었으니까……."
결국 이 자리에 있는 10명이 모두 각서에 서명했다.
원래는 개인의 양심에 맡겨야 할 문제였으나, 이제는 능력을 잃기 싫다면 반드시 지켜야 하는 약속이 된 셈이었다.
결과적으로 나한테는 상황이 아주 좋게 풀렸다.
그때, 회의실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똑똑.
"들어오세요."
"실례합니다. 우리 직원 한 명을 지금 데려와서……."
들어온 것은 선종윤 소장과 원전 직원 복장을 입고 있는 30대 남자.
며칠 전에 본 기억이 있는 남자였다.
안 돌아가고 뻗대는 E급과 F급 능력자들을 상대하느라 같은 방에 있었던 D급 능력자 직원.
이름이…… 강민기였던가?
그러고 보니 선종윤 소장이 균열 봉쇄에 도움이 될 테니 같이 가라고 했었지.
까먹고 있었다.
나는 현서희에게 말했다.
"각서 한 장만 더 써주실래요?"
4.
11명 모두가 각서를 작성하고 나서는 돌아가면서 서로의 능력에 대해서 소개하는 시간을 가졌다.
자세히 설명하지는 않더라도 서로에게 방해가 되지 않기 위해서 필요한 과정이었다.
그리고 지금, 우리는 B급 균열을 둘러싸고 서있는 상태였다.
"……."
다들 긴장했는지 표정이 심각하다.
그야 그럴 만도 했다. 최초로 도전하는 B급 균열이니까.
나는 박수를 짝짝 치면서 분위기를 환기했다.
"자, 자. 너무 걱정들 하지 마세요. 여기 랭킹 1위가 있잖습니까."
나를 쳐다보는 사람들.
나는 세레나의 어깨를 탁탁 치면서 말했다.
"아까 제 여자친구가 싸우는 거 보셨죠? 다들 얼타고 있으면 우리가 싹 정리하고 공헌도 챙겨서 나올 겁니다. 랭킹 유지하고 싶으면 자기 몫은 자기가 챙기세요."
세레나는 눈을 깜빡거리다가 내 말에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김도하 씨 여자친구, 정말 귀엽네요."
"고마워요."
현서희가 세레나를 칭찬해 줘서 아무도 대답하지 않는 어색함은 피했다.
"그럼, 이제 들어가 보죠. 균열을 봉쇄하러."
"그럽시다."
검도장 아저씨의 대답과 함께, 우리들은 모두 균열을 향해 팔을 뻗었다.
어김없이 나타나는 시스템 메시지.
띠링-!
[B급 아시모네의 균열을 발견했습니다.]
[일정 기간 안에 균열을 봉쇄하지 못하면 내부에 있는 아시모네의 하수인들이 밖으로 빠져나오게 됩니다.]
[균열 활성화까지 남은 시간 : 3d 6h 28m]
[균열에 입장하시겠습니까?]
[수락 / 거절]
미리 약속한 대로 수락에 손가락을 올려둔 채 카운트를 셌다.
"셋…, 둘…, 하나!"
모두들 수락을 터치했다.
균열 안에 있던 검붉은 회오리가 우리들을 덮쳤지만, 균열을 여러 번 봉쇄해 본 랭커들답게 당황하는 사람은 없었다.
곧이어 드러나는 균열 내부의 풍경.
현재 우리가 서있는 곳은 한울3호기 원전 건물의 내부였다.
그리고…… 사방이 붉은색으로 물든 시설물들 속에서 우리는 수백 마리의 좀비들 사이에 둘러싸여 있었다.
나는 곧바로 소리쳤다.
"시엘!"
"천상의 축복!"
시엘에게서 뻗어 나온 하얀색 빛이 우리들의 몸에 스며드는 것과 함께, 전투는 시작되었다.
우어어어어어—
우어어어어어어—
우어어어어—
5.
나는 세레나에게 미리 언질을 해두었다.
싸우긴 싸우되, 되도록이면 능력을 사용하지 말고, 아군이 위험한 상황이 아니라면 개입하지 말라고.
지금까지 다른 랭커들의 싸움은 본 적이 없으니 일단 어느 정도나 되는지 살펴보자는 생각이었다.
'어디…….'
사방에서 좀비들이 덮쳐오는 일촉즉발의 상황, 안지우가 땅바닥을 향해 손을 뻗으며 소리쳤다.
"노움!"
그러자 바닥에서 돌덩이 골렘이 올라오더니 우리가 서있는 지반 전체가 위로 솟구쳤다.
우어어어어어어—
좀비들이 갑자기 멀어진 우리를 향해 손을 휘두르고, 지반이 흔들리니 위에 선 우리들도 놀랐다.
"어어어!"
"당황하지 마세요! 제 능력이니까!"
랭킹 21위, 안지우. 그는 자신의 능력을 4원소를 다루는 정령사라고 소개했었다.
'정령사라는 게 이런 능력이었구나.'
4원소를 다룬다는 건 저 노움뿐만 아니라 다른 3가지 원소의 정령들도 존재한다는 의미였다.
대지 마법만 사용할 줄 아는 이진아가 본다면 상당히 억울할 것 같은 사기 능력이었다.
21위는 딱지치기로 딴 게 아니라는 거겠지.
그리고 이럴수록 다른 사람들의 능력도 점점 기대치가 올라갔다.
'어디…… 한번 구경해 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