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1화 33. 세 여자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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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참 수다와 대화를 나누다 보니 어느새 식당 예약 시간이 가까워졌다.
슬슬 자리에서 일어날 준비를 하는 사이 강호가 오하영을 힐끗하며 살폈다. 그녀가 자신에게 호감이 있다는 것을 듣기는 했지만, 여전히 긴가민가 할 수밖에 없다.
애초에 그녀를 본 것이 몇 번 되지도 않았고, 서로에게 어떤 호감을 느낄 만한 시간도 없었다.
첫 눈에 반한다는 것을 그리 믿지 않는 강호의 입장에서는 겨우 멧돼지에게서 구해준 일로 인해 한 순간에 사랑이나 호감의 감정이 싹틀 수도 있다는 것을 선뜻 받아들이기 힘들 수밖에 없었다.
강호가 생각한 사랑은 첫 눈에 반하는 감정이 아니라 오랜 시간 서로를 알아가며 노력하고 맞추어 가는 과정이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영화나 드라마를 보아도 첫눈에 반한다는 식의 이야기가 전개되면 금방 흥미가 식어버리고는 했기에, 오하영이 자신에게 반한 것 같다는 강시연의 말을 받아들이기가 더욱 어려웠다.
‘그것도 오하영같은 사람이 뭐가 아쉽다고?’
그런 생각을 하다 강시연을 바라보았다.
그런 식으로 따지면 애초에 강시연과 이런 관계가 된 것도 쉽게 납득할 수 없는 일이다.
시스템에 의해 그녀가 변태로서의 기질을 품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 후, 지금의 관계를 어느 정도 납득을 했다. 시스템이 아니었다면 아직도 강시연이 어떤 목적을 가지고 자신에게 접근했을 거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을 지도 모를 일이었다.
‘설마 오하영에게도 그런 변태적인 취향이 있는 건 아니겠지? 그래서?’
그런 생각을 하며 다시금 오하영을 바라보았지만, 순수해 보이는 그녀의 얼굴을 보고 있자니 그런 생각을 하는 것 자체가 죄악처럼 여겨진다.
그러자 호감이 있다는 강시연의 말이 어쩌면 정말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제가 하는 대로 잠자코 따라 오기나 해요. 그럼 자다가 떡이 떨어지다 못해 떡을 치게 될 지도 모르니까.]
일전에 강시연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어차피 강호의 입장에서는 손해 볼 것이 없다.
오하영과 같은 여자와 떡을 칠 수 있다면 더 바랄 것이 없겠지만, 그렇지 않다 하더라도 애초에 내 것이 아니었기에 아쉬워할 이유도 없는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하며 자리에서 일어나 홀을 향해 나서는데 마침 카페의 문이 열리며 여성이 들어서는 것이 보였다.
꽤 무거워 보이는 박스를 든 여성이었는데, 그녀의 얼굴을 확인하기 무섭게 강호가 급히 뛰어갔다.
“가연씨. 어쩐 일이세요?”
카운터에 있던 미진이 먼저 한가연을 발견하고는 박스를 받으려 하자, 강호가 냉큼 다가서서 대신 건네어 받았다.
“어머! 강호씨, 마침 계셨네요.”
카페에 도착하기 전까지도 강호가 있었으면 하고 바랐던 한가연이다. 그런데 정말로 그가 모습을 드러내자 본능적으로 얼굴에 피어나는 웃음을 억누를 수가 없었다.
남자든 여자든 마음에 있는 이성을 바라볼 때에는 눈빛부터가 다르다고 한다. 하지만 남자와 여자가 다른 점은, 행동에 있다.
남자들의 경우에는 쑥스러워하며 감정을 숨기려 드는 경향이 강한 반면에 여자들은 무의식적으로 그러한 감정을 고스란히 드러낸다는 점이다.
그리고 여자의 마음은 여자가 가장 잘 안다고 하던가.
마침 강호의 등 뒤에서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강시연과 오하영이 한가연의 표정과 눈빛에 담긴 감정의 정체를 이해하는 데에는 오랜 시간을 필요로 하지 않았다.
여자라면 본능적으로 알아차릴 수밖에 없는 눈빛이다.
특히, 자신이 마음을 주고 있는 남자에게 저런 눈빛을 하는 여자는 귀신같이 파악해 내는 식스센스를 지닌 동물이 바로 여자였고, 이는 오하영도 마찬가지였다.
강호를 향해 꿀이 떨어질 듯한 눈빛을 하고 있는 한가연을 향해 대번에 눈에서 불똥이 튀어 올랐다. 하지만 이어진 강호의 대답에 언제 그랬냐는 듯이 금방 얼굴이 펴진다.
“다혜 어머님. 어쩐 일이십니까? 그리고 이건...?”
다혜가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어머님이라고 하는 걸 보니 유부녀임에 틀림없다.
그렇다면 딱히 신경 쓸 필요는 없을 것 같았지만, 그것이 착각이었다는 것을 깨닫기 까지도 오랜 시간을 필요로 하지 않았다.
“안 그래도 강호씨를 보려고 왔는데 마침 잘 됐네요.”
“저를요?”
그렇게 대답하며 건네어 받은 박스를 카운터 옆의 테이블 위에 내려놓고 보니 안에 글러브를 비롯해서 이런 저런 야구 용품이 가득 들어 있는 것이 보였다.
“네. 지난 번 일로 고맙기도 하고 뭔가 보답이라도 하고 싶어서요. 근데 마침 다혜한테 강호씨가 이번에 야구 예능에 출연한다는 말이 떠올라서 회사에 있던 거 좀 들고 왔어요.”
“어? 다혜 어머님 회사가 야구 용품 회사였습니까?”
“원래는 여성 운동 용품 회사인데, 이번에 야구 쪽으로 사업을 확장하거든요. 이건 판매망을 뚫기 위해 만들어 둔 시제품이에요. 연습하시는 데 도움이 될까 해서요.”
그 말에 상자 안의 물건을 살펴보니 얼핏 보아도 꽤 고급스러워 보이는 장비들이었다.
“이거 비싼 것들 아닙니까?”
“아니에요. 어차피 시제품으로 만든 것들이라 어디 팔 곳도 없어요. 지난 번 일에 비하면 별 것 아니에요.”
“저야말로 별 일 아니었는데...”
두 사람의 대화에 옆에서 가만히 듣고 있던 미진이 고개를 갸웃했다.
지난 번 일이라면서 언급하는 것을 보니, 그 사이에 두 사람이 따로 만난 것이 아니라면 놀이공원 때의 일을 언급하는 것이 분명했다.
그런데 하루 종일 같이 붙어 다녔던 미진으로서는 딱히 두 사람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다는 것을 보지 못했었기에 궁금증이 생겨날 수밖에 없었다.
“왜? 놀이공원에서 무슨 일...”
그렇게 말하다 말고 미진이 아차 했다.
바로 뒤에 강시연이 있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미진이 슬쩍 강시연의 눈치를 살폈지만 다행이 그녀의 표정에서는 딱히 감정의 기복을 찾아볼 수 없다.
그런데 정작 감정의 기복을 보인 쪽은 오하영이었다.
‘놀이공원?’‘
다혜 어머님이라는 말에 유부녀라고 생각하며 살짝 안도의 한 숨을 내쉬었던 오하영이었다.
그런데 별안간 놀이공원이라니.
대체 저 여자와 강호가 놀이공원에 같이 놀러 갈 일이 무엇일까 하는 질문을 떠올리기도 전에, 본능적으로 한가연의 전신을 스캔하기 시작했다.
얼굴? 예쁘다.
아니, 예쁘다는 말로도 부족하다.
웬만한 연예인은 명함조차 내밀지 못할 정도였고, 화려하면서도 우아한 기품이 느껴지는 외모는 일반인에게서는 찾아보기 어려운 카리스마를 뽐내고 있었다.
무엇보다 강호를 향해 수줍은 듯 미소를 지어보이는 모습에서는 풋풋함 마저 느껴지고 있는 중이다.
게다가 몸매는 얼굴 못지않게 대단했다.
전형적인 여성 직장인들의 오피스룩 차림새였는데, 풍만한 가슴과 콜라병을 연상케 하는 늘씬한 몸매와 다리로 인해 복장이 상당히 선정적인 느낌이었다.
그런 여자가 강호를 보면서 살랑살랑 눈웃음을 치는 모습은 같은 여자가 보기에도 영락없이 여우 한 마리가 꼬리를 치며 유혹하는 모습으로 밖에는 보이지 않았다.
그것도 보통 여우가 아니라 꼬리 아홉개가 달린 구미호급의 여자라고 본능이 말하고 있었다.
평범한 유부녀가 저런 식으로 노골적으로 남자에게 눈웃음을 흘릴 수는 없을 테니, 어쩌면 남편 없이 아이를 키우는 싱글맘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 것도 그 순간이었다.
그런 생각은 한가연을 항한 오하영의 눈빛을 더욱 뜨겁고 사납게 만드는 요인이 되었다.
그것을 아는지 모르는 지 강호와 한가연은 박스를 들여다보면서 대화를 나누는 중이었다.
“이런 걸 제가 받아도 되는 겁니까?”
한가연이 들고 온 것은 박스 하나만이 아니었다.
차의 트렁크에는 또 다른 상자와 가방도 두 개나 있었는데, 상자에는 마찬가지로 글러브를 포함해서 이런저런 야구 용품이 가득했고, 가방에는 야구배트가 들어 있었다.
하나의 가방에는 카본 소재의 배트 6자루가 들어 있었고, 다른 가방에는 나무 배트 6개가 들어 있다.
그 중에서 나무 배트 하나를 꺼내어 들자 손에 착 감겨 드는 느낌이 좋다.
무게도 적당하고 밸런스도 잘 잡혀 있는 것이 꽤 신경 써서 만들어진 배트라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쓸만한 나무 배트가 보통 10만 내외로 시작한다는 것을 감안하면, 이 가방 하나만 해도 가격이 꽤 나갈 것이 분명했다.
“부담 갖지 말고 받으세요. 저도 사업을 준비하면서 알아 봤는데, 야구 하는 사람들이 의외로 배트부터 이런저런 장비들이 많이 필요하더라구요.”
“그래도 이건 많이 비쌀 것 같은데.”
“아까도 말했다시피 어차피 시제품으로 만든 것들이고, 팔지도 못하는 물건이에요. 아! 그렇다고 품질이 떨어진다는 것은 아니니까 오해하지 말고요.”
“오해라뇨. 오히려 하나같이 좋아서 그렇죠.”
강호의 말도 거짓이 아닌 것이, 비록 야구에서 손 놓은 지 오래 되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장비를 보는 눈이 완전히 죽은 것은 아니다.
배트는 물론이고 글러브의 품질들 모두 나무랄 데가 없다.
집안 형편상 선수로 뛰던 시절에도 이렇게 좋은 장비를 사용해 본 적은 드물었기에 강호가 느끼는 심정은 복잡미묘할 수밖에 없었다.
잠시 강호가 장비를 보면서 감회에 빠져 있는 사이 한가연은 한가연 대로 놀라고 있는 중이었다.
‘강시연?’
회사를 나서기 전까지도 어떻게 하면 강시연과 접촉할 수 있을 지에 대해 고민을 하던 차였다.
박찬성을 섭외할 수 있다면 더 할 나위없겠지만, 광고계에서 강시연의 선택을 받는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모를 수가 없기에 그녀의 섭외에 절치부심할 수밖에 없는 입장이었다.
그런데 전혀 생각지도 않은 자리에서 강시연을 마주하고 보니 사업가로서의 마인드가 발동하기 시작한다.
강호가 출연하는 예능에 그녀도 출연한다는 것을 알고는 있었지만, 이런 식으로 만나게 될 것이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이건 하늘이 주신 기회이자 천금과도 같은 기회다.
한 명의 사업가로서 이런 기회를 놓친다면 사업할 자격이 없다며 손가락질 받아도 할 말이 없다.
그럼에도 한가연은 선뜻 나설 수가 없었다.
바로 강호 때문이다.
지금의 만남이 의도한 것이 아니라 우연에 의해 벌어진 일이기는 하지만, 왠지 지금 사업가로서 강시연에게 접근하는 것이 강호와의 친분을 이용하는 것처럼 느껴진 것이다.
그런데 상황이 예상치 않게 흘러가기 시작한 것은 강시연 때문이었다.
“강호씨. 누구에요?”
“네? 아, 이쪽은 그러니까...”
한가연을 소개하려다 잠시 멈칫했다.
그녀를 뭐라고 소개해야 좋을 지 선뜻 정리가 되지 않는 것이다.
다혜 어머니라고 소개하려니 두 사람은 다혜에 대해서 모르고, 그렇다고 한가연씨라고 소개하려니 사실상 강호도 그녀를 다른 사람에게 소개할 정도로 친분이 깊은 사이라고 할 수도 없는 까닭이다.
그런데 그 모습이 오하영에게 오해의 여지를 주고 말았다.
다른 사람에게는 소개하기 어려운 ‘어떤’ 관계처럼 여겨진 것이다. 그러자 그녀의 눈빛에 질투의 감정이 어리기 시작한다.
그 눈빛의 변화를 강시연이 모를 수가 없다.
‘이것 봐라. 일이 또 재밌게 흘러가네.’
그런 생각에 식사 예약도 잊은 채로 강시연이 한가연에게 먼저 다가서서 인사를 청했다.
“안녕하세요. 강시연이라고 해요.”
“한가연이라고 합니다.”
인사를 받으며 한가연이 습관적으로 명함을 내밀었다.
강호를 보면서 그녀에게 접근하려는 의도를 포기해 버리기는 했지만, 명함 정도 건네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오히려 지금은 이렇게 명함을 건네어 작은 인연이라도 만들어 두는 것으로 만족하자는 생각을 했다.
그런데 명함을 받아 든 강시연이 의외라는 얼굴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