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2화 33. 세 여자 (4)
“H&H라면 여성 운동 용품 회사 아니에요? H&H 폴딩 트렘폴린 만든 그 회사 맞죠?”
“네 맞아요. 아세요?”
“저도 그거 가지고 있거든요. 지금도 잘 사용하고 있고요. 아! 그러고 보니 낯이 익다고 생각 했었는데, 예전에 그 홈쇼핑에 나왔던 그 사장님 맞죠?”
강시연의 말에 한가연이 살짝 놀라는 얼굴을 했다.
홈쇼핑 광고에 출연했던 것은 10년도 더 전의 일이었다.
과거에는 홈쇼핑 광고를 보고 알아보는 사람들이 있기는 했었지만 이제는 너무 오래전의 일이고 보니 그때의 광고를 기억하는 사람은 매우 드물었기 때문이다.
“오래전 일인데 기억하고 계시네요?”
“유명하잖아요. 지금도 인터넷에 그때 방송이 짤로 돌아다니고 있기도 하고요.”
두 사람의 대화에 시종일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상황을 지켜보던 오하영이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물었다.
“홈쇼핑요?”
“응! 한 10년 전이었나. 그때 다이어트 트램폴린이 한창 유행하기 시작할 때, 홈쇼핑 광고에 젊은 여사장이 직접 나와서 제품 시연을 했었는데, 그게 초대박이 터졌거든.”
그 순간 옆에서 이야기를 듣고 있던 강호의 입에서 아! 하는 탄성이 터져 나왔다.
‘어디서 본 듯 하더라니.’
그러면서 한가연의 얼굴을 바라보자 비로소 오래전의 기억이 선명하게 살아나기 시작했다.
그게 아마 고등학교 2학년 여름방학 즈음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인터넷을 서핑하다 모 사이트에서 ‘출렁이는 슴가’라는 제목의 글이 있어 호기심에 클릭해 들어갔다.
게시글에는 홈쇼핑에서 젊은 여사장이 직접 제품을 시연하는 영상이 첨부되어 있었는데, 트램폴린 위에서 뛸 때마다 탱탱볼처럼 탄력 있게 출렁이는 엄청난 가슴과 엉덩이가 클로즈업 되면서 젊디젊은 강호의 가슴에 한순간 불을 지피고 말았었다.
게다가 그녀의 생김새가 한 때 좋아했던 첫사랑의 선생님과도 너무나 닮아 있다 보니 그 영상에 더욱 빠져들기도 했고, 급기야 그 영상을 보면서 자위마저 하기도 했었다.
누가 보면 겨우 홈쇼핑 광고 따위를 보면서 자위를 하나며 비웃을 일이었지만, 혈기왕성하던 십대의 강호에게는 그 어떤 포르노보다도 더 자극적인 장면이었다.
‘잠깐만. 그러니까 그때 그 여자가 다혜 어머니라고?’
당시 출렁이던 가슴과 엉덩이가 선명하게 머리에 떠오르자 저도 모르게 한가연의 가슴을 향해 시선이 돌아가고 말았다.
그때나 지금이나 저 가슴은 여전하구나 하는 생각이 들기 무섭게 침을 꼴깍 삼키다 말고는 고개를 흔들었다.
아무리 한때의 추억을 선사한 여자라고는 해도 다혜의 엄마다. 이런 상상을 하는 것 자체가 부도덕하게 느껴지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일단 잠시 앉아서 얘기 하시죠. 아! 식당 예약 시간이 언제라고 했죠?”
“이제 곧...”
“좀 늦어도 괜찮아요. 원래 예약이라는 게 돈을 주고 자리를 사는 거라서 그 정도는 다들 이해해요.”
지금의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은 오하영이 예약 시간을 핑계로 자리를 피하려고 했지만, 강시연이 중간에 끼어 들어 냉큼 그렇게 말해버리자 할 말이 없어져 버리고 말았다.
그러자 지금의 상황을 만든 한가연을 향한 감정이 더욱 좋을 수가 없었고, 이는 오하영의 눈빛과 표정에서 고스란히 드러났다.
한가연은 사업가다.
그리고 여자로서 사업을 하면서 성공하기 위한 필수 조건은 남자들 보다 훨씬 더 많이 생각하고 움직여야 한다는 것이었다. 여기에는 사람의 눈빛과 표정을 통해 생각과 감정을 읽는 것도 포함된다.
사업가로서 성공한 사람 중에 이러한 능력을 갖추지 않은 이들은 사실상 드물다.
특히, 영업과 관련된 사업에 종사하는 이들일 수록 사람을 파악하는 능력이 더욱 절실하게 요구되기 마련인데, 그런 사업가의 눈으로 바라본 오하영의 태도는 사실 선뜻 이해하기 어려운 구석이 있었다.
그녀와는 이전에 어떤 접점도 없었고 이런 눈빛을 받을 정도로 무언가 잘못을 한 적도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여자의 눈으로 바라보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한가연도 사업가이기 전에 여자였고, 오래전이기는 하지만 진심을 다해 남자를 사랑해 본 경험이 있는 사람이었다. 당연히 오하영의 눈빛이 어떤 의미인지를 모를 수가 없다.
자신을 죽일 것처럼 쏘아보는 눈빛에는 질투라는 감정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고. 그 대상이 누구인지는 굳이 생각해 볼 필요조차 없는 일이었다.
‘오하영이 강호씨를?’
선뜻 믿기 힘든 일이었지만, 그렇다고 믿지 않을 수도 없다.
게다가 그 눈빛이 얼마나 사나운지 웬만한 사람이라면 절로 어깨가 움츠려 들 정도였지만, 상대가 하필이면 한가연이었다.
어린 나이에 임신을 하고 아이를 낳아 기르면서 세상의 따갑고 차가운 시선과 손가락질은 물론이요, 평생에 들을 욕이란 욕과 비난은 다 듣고도 당당하게 버티어 낸 사람이 바로 한가연이었다.
한 마디로 지옥을 헤쳐나온 사람에게 오하영의 눈빛은 애교 수준에도 미치지 못했다.
한가연이 자신의 눈빛을 대수롭지 않은 표정으로 무시해버리자 뭐가 그리 못마땅한지 오하영의 입이 한 사발이나 툭 튀어 나오고 말았다.
그때, 테이블 정리를 한 강호가 다시 돌아오자 언제 그랬냐는 듯 오하영의 표정이 평소처럼 돌아온다.
그 모습에 한가연이 저도 모르게 풋 하고 웃음을 지었다.
마치 귀여운 막내 여동생을 보는 것 같은 느낌이 든 것이다.
“다혜 어머니. 커피라도 한잔 드릴까요?”
“아, 전 딱히 생각... 아니, 밀크 쉐이크 주세요.”
딱히 생각이 없다고 말하려다 그 날, 놀이공원에서 마신 밀크 쉐이크가 생각나서 주문을 했다.
“시연씨랑 하영씨는요?”
“우린 괜찮아요. 있다가 밥 먹어야죠.”
강호가 카운터에 가서 미진에게 주문을 하는 사이 강시연이 테이블 위에 놓인 박스 안의 물건들을 살펴보다 그제야 기억이 났다는 얼굴을 하며 입을 열었다.
“아! 그러고 보니 얼마 전에 광고제의 메일을 몇 통 받았었는데, 그 중에 H&H가 포함되어 있었던 거 같은데 맞죠?”
별안간 강시연이 광고 이야기를 꺼내자 한가연이 흠칫했다.
동시에 머릿속이 혼란스러워졌다.
어차피 오늘은 강시연과 안면을 튼 것으로 만족하려고 했다. 그런데 강시연이 광고제의 메일에 대해 언급하자 이 기회를 붙잡아야 하나 고민에 빠져 들었다.
“무슨 광고요?”
그때, 마침 카운터에 주문을 마치고 돌아 온 강호가 광고 이야기를 듣고는 자리에 앉으며 물었다.
“최근에 예능에 출연하기로 하면서부터 광고 제의가 쏟아져 들어오기 시작했거든요. 근데 제가 요즘 다른 일에 정신이 팔려서 광고를 찍을 생각이 없어서 다 거절을 하고 있잖아요. 그런데 그 광고 제의들 중에서 여기 한가연 씨의 H&H도 포함되어 있었던 게 기억나서요.”
“다혜 어머니 회사요?”
“사실 자세히 읽어 보지는 않고 그냥 대충 답변했는데, 가만 생각해 보니 여성 용품 광고가 아니라 야구 용품 광고 제의였던 모양이네요. 맞죠?”
광고제의 메일을 제대로 읽어 보지도 않고 대충 답변했다는 말에 한가연이 씁쓸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녀에게는 별 것 아닌 메일 한 통이 H&H 입장에서는 사활이 걸려 있는 메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강시연을 비난할 수는 없는 일이다.
내게 중요한 일이라고 해서 그게 다른 사람에게도 중요한 일이 될 수는 없고, 강요할 수도 없다.
“근데 여성 용품 시장에서는 H&H 입지가 탄탄한 걸로 알고 있는데 아닌가요?”
“그렇긴 하지만, 이쪽 시장이 너무 작거든요. 대부분의 스포츠 용품이 남성들을 대상으로 하다 보니 사실 기업을 키우고 싶어도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어서요.”
“흐음! 그래도 여성 운동 용품이랑 남성 운동 용품은 아예 종목이 다르잖아요.”
“그래서 고민을 많이 했고, 선택한 것이 야구 용품 시장이었어요. 회사가 크기 위해서는 스포츠 시장으로 진출하는 건 필수였고, 그나마 야구 쪽이 다른 시장에 비해 신생 기업이 끼어 들 여지가 있다는 판단을 내렸거든요. 그리고 야구는 발판이죠. 야구 시장을 시작으로 브랜드를 알리고 스포츠 시장에 본격적으로 진입하는 게 최종 목표에요.”
한가연의 말을 들으며 강시연이 박스 안에서 글러브 하나를 꺼내어 살펴보았다.
꿈은 누구라도 꿀 수가 있다. 하지만 꿈을 꾸고 성공을 하기 위해서는 의욕만으로는 불가능 한 법이다.
특히, 제품을 만들어 파는 기업의 입장에서는 제품의 품질이 선결되어야 꿈이라도 꾸어 볼 여지가 있는 법이다.
“괜찮네요. 새 글러브인데도 딱딱하지도 않고 길들이기에도 괜찮을 것 같아요. 가죽 질도 좋네요.”
“그건 입문자용의 가성비 제품으로 만든 거예요. 스티어 하이드 가죽을 써서 길들이기도 좋고, 일단 14만원을 정가로 맞추었는데, 그 가격대에서는 최고의 품질이라 생각해요.”
자신감 있는 대답에 강호와 강시연이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 모두 과거 야구와 소프트볼을 해 본 경험이 있는 사람들이다 보니 아무래도 글러브를 살피는 안목이 조금은 남다를 수밖에 없다.
두 사람이 살펴보고 있는 제품은 아주 뛰어나다고까지 할 수는 없었지만, 10만 원 대의 제품이라는 측면에서 보자면 국내 브랜드가 맞나 싶을 정도로 품질이 뛰어난 건 사실이었다.
한가연의 대답을 들으며 박스를 살피던 강호의 눈에 흰색과 검은색이 조화롭게 섞여 있는 글러브가 시선을 사로잡았다.
묵직한 느낌에 마감이나 로고의 박음질 등이 앞서의 글러브와는 척 보기에도 다른 물건이다.
“그건 향후 야구 시장에 브랜드가 어느 정도 자리를 잡을 때를 대비해서 고급화 전략을 위해 만들어 본 프로토타입이에요. 이번에 판매망을 꿇을 때도 상당히 좋은 평을 받았던 제품인데 강호씨가 보기에는 어때요?”
이번에도 자부심이 묻어나오는 목소리에 글러브를 살펴보던 강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좋은 글러브와 나쁜 글러브의 차이는 가죽이다. 가죽을 어떤 것을 쓰고 어떻게 다루느냐에 따라 질 적 차이가 확연하게 갈린다.
그 다름으로 중요한 것이 바로 포켓이나 웹, 라이당과 같이 각부의 가죽을 어떤 식으로 선별하고 이용하느냐에 따라 글러브의 질이 확연하게 달라지는데 이 때 필요한 것이 바로 제작자의 경험이다.
무조건 좋은 가죽을 쓴다고 좋은 글러브가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각부에 따라 원하는 강도와 두께가 다르게 때문에 그것을 잘 배합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프로 선수들의 글러브가 스폐셜 오더라고 해서, 말 그대로 특별 주문을 통해서 만들어지고, 이런 글러브는 수백 혹은 수천만 만 원을 호가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글러브를 이리저리 살펴보다 강호가 손에 착용해 보았다.
겉보기에는 두툼하고 묵직한 느낌인데 막상 착용해 보니 생각보다 가볍다.
안쪽에서 손이 착 감겨드는 느낌도 좋고, 여성 용품 전문 회사에서 만든 물건답게 묵직한 느낌 속에 여성 지향적인 디자인도 물씬 풍기고 있다.
뭐랄까 멋지면서도 예쁜 느낌인데, 그래서 더 유니크 해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