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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0화 33. 세 여자 (2)


**** 하늘을 찌를 듯 높이 솟은 마천루가 즐비한 서울 도심의 빌딩 숲 안에 여성 운동 용품 제작 및 판매 업체인 H&H의 본사 건물이 있다. H&H는 여성 운동 용품 시장의 선두 주자이자 트렌드를 이끄는 회사라는 타이틀과는 어울리지 않게 회사의 규모 자체는 작은 편에 속한다. 아직 생겨난 지 10여년 밖에 되지 않은, 비교적 역사가 짧은 기업이라는 점 때문이기도 하지만 시장의 한계와 규모 때문이기도 했다. 한국 스포츠 산업의 규모는 사실 그리 작은 편이 아니다. 전체적인 규모만 놓고 보자면 60조원이 넘는다. 하지만 이는 말 그대로 스포츠와 관련한 재화와 서비스를 통해 부가가치를 창출하는 모든 산업을 일컬어 의미한다. 실제로 스포츠 용품 시장으로 대상을 좁히면 대략 10조원 안팎의 규모로 확 줄어 든다. 그런데 여기서 또 여성 용품 시장으로 규모를 좁히면 3조원 정도로 대폭 하락하게 된다. 대부분의 스포츠 용품이 남성을 대상으로 하여 형성되어 있다는 의미다. 그런데 여기서 끝이 아니다. 여성 스포츠 용품 시장도 여러 분야가 있는데, H&H처럼 여성 다이어트와 관련한 운동 용품을 전문으로 하는 업체를 대상으로 시장의 규모를 좁히면 약 6천억 원대 까지 하락하게 된다. 6천억 원이 결코 작은 시장은 아니지만 60조원에 해당하는 전체 시장 규모를 생각하면 그야말로 푼돈에 불과할 따름이다. 그런데 이런 시장이 포화 상태로 치달아 무한경쟁을 펼치는 웃지 못 할 상황이 펼쳐지고 있는 중이다. 이는 여성 운동 용품 시장이 가지는 특수성에 기인하는데, 적은 자본으로 사업에 뛰어들기에 매우 좋은 조건 때문이다. 여성들이 집에서 다이어트를 위해 사용하는 용품이라고 해 봐야 요가 매트나, 짐볼과 같은 소소한 것들 위주다. 이런 용품들의 장점은 비교적 적은 돈으로 쉽게 제작할 수 있고, 아니면 중국이나 동남아에서 싼 가격에 들어와 판매하기에도 적당하다는 점이다. 매년 수백 개 이상의 크고 작은 업체들이 생겨났다가 사라지기를 반복하면서, 파이를 나누어 먹겠다고 치열한 경쟁이 벌어지고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H&H가 업계 1위라는 타이틀을 달고 있음에도 다른 업종에 비해 비교적 회사의 규모가 작은 것도 바로 시장의 규모 때문이라 할 수 있다. 그렇다고 해서 H&H가 구멍가게 수준의 작은 기업은 아니다. 70명도 안 되는 직원으로 매년 500억 이상의 매출을 올리고 있으며, 영업이익만 7, 80억에 달하는 곳이 바로 H&H다. 이 정도면 상당히 건실한 중소기업이었고 여성 용품 시장에서 만큼은 대기업 수준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H&H가 이런 성공을 거둘 수 있었던 배경에는 한가연의 능력을 바탕으로 우연과 필연이 절묘하게 맞아 떨어진 결과이기도 했다. 사람들을 절망에 빠뜨렸던 IMF를 불과 2, 3년 만에 극복한 후 다시 한 번 경제도약의 발판을 마련한 대한민국이다. 반도체 산업과 IT산업을 기반으로 하여 급격한 경제 성장을 이룩한 대한민국 국민들의 관심은 2000년대 중반 이후 단순히 잘 먹고 잘 사는 문제에서 나아가 이제는 어떻게 잘 먹고 잘 사느냐의 단계로 진화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관심은 당연하게도 다양한 여가 활동과 문화 활동을 즐기는 것으로 이어지기 시작했는데, 각종 취미와 운동 및 다이어트에 대한 관심이 폭발적으로 증가하기 시작한 것도 바로 이 무렵이라 할 수 있다. 한가연이 시대의 흐름을 파악하고 여성 운동 용품 시장에 뛰어 든 것도 바로 이러한 열풍이 한 창 불어 닥치기 시작하던 무렵이었다. 그리고 첫 광고로 홈쇼핑을 택한 것도 매우 시의적절 했다. IMF이후 2000년대 중후반까지 홈쇼핑 분야는 연평균 성장률이 90퍼센트에 이를 정도로 엄청난 성장세를 보이던 중이었는데, 이런 시기에 한가연이 직접 출연하며 출렁이는 슴가 짤을 만들어낸 광고가 초대박을 친 것이다. 시장의 흐름을 읽는 한가연의 뛰어난 사업적 수완과 능력에 행운을 동반한 우연이 겹치며 만들어 낸 결과가 지금의 H&H인 셈이다. 그런데 웃긴 것은 H&H의 성공이 여성 운동 용품 시장을 피 튀기는 전쟁터로 만들게 한 결정적인 계기로 작동했다는 점이다. 마침 IMF가 끝난 지 얼마 안 된 시점이다 보니 이십대에 불과한 젊은 사장의 성공이라는 타이틀은 대중의 비상한 관심을 끌기에도 충분했다. 저런 젊은 여자도 성공할 수 있는데 나라도 못 할 게 없다는 심리가 작용한데다, 적은 자본으로도 사업에 뛰어 들 수 있다 보니 너도 나도 시장에 뛰어들기 시작한 것이다. 여기에 꽤 덩치가 있는 회사들까지 난립해 들어오기 시작하면서 그야말로 여성 운동 용품 시장은 춘추전국 시대를 방불케 할 정도로 업체들의 피 튀기는 전쟁이 시작되었다. 이런 시장에서 H&H는 업계 부동의 1위라는 타이틀과 함께 젊은 기업, 건실한 기업이라는 이미지로 성장해 나가고 있는 중이었다. “박찬성 에이전시와는 계속 접촉중이긴 한데 반응이 영 시큰둥합니다.” 오달식 상무의 보고에 한가연이 특유의 무표정한 얼굴로 고개를 주억 거렸다. 그 표정만 보면 그녀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가 없다. 하지만 오달식 상무는 그런 모습이 익숙하다는 듯 개의치 않고 보고를 이어 나갔다. “아무래도 이름조차 들어보지 못한 신생 업체인데다 전신이 여성 용품을 전문으로 취급하는 회사다 보니 내켜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강시연 쪽은요?” “그쪽은 아예 접촉 자체가 쉽지 않습니다. 수차례 연락을 시도 했지만 반응이 없습니다.” 지난 번 회의에서 박찬성과 강시연을 섭외하는 쪽으로 큰 가닥을 잡은 후 곧바로 접촉을 시도했던 오달식 상무였다. 문제는 박찬성과 달리 강시연과 접촉할 방법이 메일 외에는 다른 창구가 없다는 점이었다. 보통 연예인이, 그것도 배우가 1인 기획사를 차리고 나오는 이유는 작품 선택의 자율성과 활동의 자유를 보장받기 위함이다. 이 경우 보통은 매니저를 두어 소통의 창구를 마련하는 법인데, 강시연 같은 경우에는 매니저를 두고 있기는 하지만 대외적인 활동은 대부분 혼자서 처리하다 보니 마땅히 연락할 방법이 없었다. “아예 답장도 없는 건가요?” “네, 첫 메일에 관심이 없다는 답장이 온 이후로는 일체 답장이 없습니다. 아예 읽지도 않는 것을 보면 정말로 관심이 없는 것 같습니다.” 조금은 곤란한 표정으로 하는 말에 한가연도 인상을 찌푸렸다. 강시연이 광고 선택에 까다롭다는 것은 익히 알고 있었지만, 일단 대면이라도 해야 이야기를 진행이라도 시킬 수 있다. 그렇다고 무턱대고 찾아가는 짓은 이 업계에서는 절대로 해서는 안 되는 불문율과도 같다. “직원들 분위기는 어때요?” “그게... 꽤 날카로운 상태입니다. 스트레스도 심한데다 부담감도 크다 보니...” 한가연이 남성 스포츠 용품 시장에, 그것도 야구 용품 시장에 진출하겠다는 포부를 밝혔을 때 직원들이 반대를 한 이유는 다름이 아니다. 여성 운동 용품 시장과 달리 남성 운동 용품 시장은 기본적으로 투입되는 자금의 규모가 달라 성공할 경우에는 지금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도약의 발판을 마련할 수가 있다는 것은 직원들 모두 공감하고 있는 사실이었다. 문제는 성공 보다는 실패의 확률이 더 크고 시장의 규모가 큰 만큼 실패에 따른 리스크도 엄청나다는 점이다. 게다가 여성 용품 시장과 달리 남성 용품 시장은 브랜드 제품이 지배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여자들은 제품을 구입할 때 실속을 따지는 경향이 강하지만, 남자들의 경우에는 실속보다는 품질과 브랜드를 따지는 비중이 매우 높았다. 장비빨을 선호하는 남자들 특유의 허세가 작용하는 셈이다. 이런 시장에 아무런 인지도가 없는 기업이 뛰어든다는 것은 사실상 자살 행위나 다름없다. 하지만 한가연은 현실에 안주하기 보다는 모험을 택했다. 그렇다고 해서 막무가내 식으로 야구 용품 사업에 뛰어든 것은 아니다. 대부분의 스포츠 용품 시장이 브랜드 기업이 장악하고 있는 것에 반해 야구나 축구를 비롯한 일부 종목은 상대적으로 브랜드의 점유율에서 자유로운 편에 속했다. 몸을 많이 쓰는 거친 운동은 장비를 수시로 바꾸어 주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했고, 이 경우 비싼 제품 보다는 가성비 좋은 제품을 찾는 것이 사람들의 심리다. 즉, 신생 기업이라도 다른 스포츠 용품 시장에 비해 뛰어들기에 적당한 조건을 가지고 있다는 의미다. H&H를 지금 보다 더욱 크게 키우자면 결국은 여성 운동 용품이나 헬스 용품과 같이 한정된 시장에서 탈피해야 한다. 그런 생각에 지난 3년간 철저하게 시장 조사를 거치고 사업에 타당성이 있다는 판단 아래 계획을 추진했다. 이번 사업에 회사의 사활이 걸려 있다 보니 회사 직원들의 절반이 사실상 이 일에 매달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고, 제품의 출시가 임박한 상황에서 광고 모델의 섭외가 아직도 결정되지 않았다는 것은 해당 직원들에게 큰 스크레스를 주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직원들 입장에서는 자신들이 밤을 새워 고민하고 만들어낸 의견과 기획안이 무언가 부족하다, 임팩트가 부족하다는 말과 함께 반려 될 때마다 머리가 한 움큼씩 빠져나가는 고통 속에서 피가 말라가는 심정이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박찬성 선수와 승부를 벌였던 그 아마추어에 대해서는 알아 보셨나요?” “일단 아는 사람에게 부탁을 해 두기는 했습니다. 근데, 문제는 박찬성 아니겠습니까. 박찬성을 섭외하지 못한 상태에서 그 사람을 섭외해 봐야 아무런 소용이 없으니까요.” “그래도 최대한 가능성은 열어 두어야 하니까 최대한 빨리 알아봐 주세요.” 박찬성과 승부를 벌였던 아마추어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 것은 며칠 전의 회의에서였다. 박찬성이 섭외된다는 것을 가정하고서 직원들 나름대로 광고에 대한 아이디어를 주고받던 와중에 언급된 것으로, 두 사람의 승부에 대한 임팩트를 광고로 이어가자는 의견이었다. 하지만 그 중심에는 박찬성이 섭외된다는 전제가 깔려 있다. 박찬성이 섭외 되지 않으면 아무리 좋은 아이디어어라고 해도 실현될 수 없는 환상에 불과할 뿐이다. “일단 박찬성과 강시연과는 계속 접촉해 주시고요. 액수는 최대한 원하는 대로 맞추어 주겠다고 하세요.” “알겠습니다.” “그리고 앞으로 제품이 출시될 때까지는 최대한 야근도 자제하라고 하세요. 이런 식으로 계속 가다가는 제품이 출시하기도 전에 직원들이 먼저 쓰러지겠어요.” “알겠습니다.” “그럼 나가서 일 보세요.” 오달식 상무가 집무실을 나서는 것을 보며 한가연이 소파에 등을 깊이 묻었다. 한가연도 사람이다 보니 제품의 출시가 임박하게 되면서 너무 성급하게 일을 벌였나 하는 후회가 없지는 않았다. 그럼에도 강하게 일을 추진시켰고, 쓸데없는 후회로 감정을 소모시키려 들지 않았다. 후회란 어차피 오게 마련이다. 해도 후회, 안 해도 후회라면 하고서 후회를 하는 것이 낫다는 게 한가연의 생각이었다. ‘그러고 보니 강호씨한테 그것도 줘야 하는데.’ 일전에 놀이 공원에 다녀온 후 강호에게 주기 위해 야구 용품을 챙겨 두었던 한가연이다. 그런데 정신없는 회사의 사정으로 인해 시간을 내기가 마땅치 않아 물건은 차 트렁크에 여전히 실린 채였다. 강호의 얼굴이 떠오르자 조금 전까지도 피곤한 기색이 가득하던 얼굴에 희미한 웃음이 피어오른다. 한가연 스스로는 의식하지 못하고 있었지만 놀이공원의 일 이후로 강호의 얼굴을 떠올리는 일이 잦아지기 시작했고, 그럴 때면 이런 식으로 얼굴에는 항상 미소가 자리 잡았다. 아니, 한가연도 자신의 이러한 변화를 일부 의식하고 있기는 했다. 일전에 놀이공원에서 마치 자신의 남자친구인 듯이 행동하면서 어깨를 잡아 끌던 강호의 손길이 떠올랐다. 그 손의 따스함과 함께 당시에 느꼈던 단단한 가슴의 감촉이 느껴지는 듯 하자 얼굴에 피어오른 미소가 저도 모르게 더욱 짙어졌다. ‘보고싶어.’ 그런 생각을 하다 화들짝 놀라고 말았다. 고등학교 이후로 남자의 얼굴을 떠올리며 보고 싶다는 감정이 치밀어 오른 것은 사실상 처음이다 보니 당혹스러뤘던 것이다. 그러면서도 그의 얼굴을 떠올리며 미소 짓는 것을 멈출 수가 없었다. 안 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더욱 탐하고 싶은 것이 인간의 본성이듯, 다시는 남자와 육체적인 사랑을 나눌 수 없는 몸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그를 향한 마음을 쉽게 접을 수가 없었다. ‘그러고 보니 전화번호를 모르는구나.’ 물건을 전해주겠다는 생각만 했지, 어떻게 전해줄 지에 대해서는 생각해 보지도 않았다. 다혜가 전화번호를 알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기는 했지만 선뜻 물어볼 용기가 없다. 안 그래도 놀이공원 이후로 요새 왜 자꾸 실실 웃고 다니냐며 핀잔을 듣던 중이었는데, 전화번호까지 물어 보았다가는 무슨 소리를 들을 지 뻔했다. ‘일단 카페로 가 보자. 혹시 강호씨가 있을 지도 모르잖아.’ 결국 한가연이 생각한 방법이라는 것이 카페로 무턱대고 찾아가 보는 것이었다. 만약 있으면 좋고, 없어도 물건을 전해주면 어떤 식으로는 인사를 해 올지 모른다. 그렇게 인연을 이어가면 된다. 그런 생각으로 집무실을 나선 한가연이 비서에게 일찍 퇴근한다는 말을 남기고는 카페를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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