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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6화 출발


듣고 있던 나조차 뼈에 사무치는 한기를 느끼게 만드는 말들을 쉼 없이 내뱉던 사서는 꼬맹이와도 견줄 정도로 차갑고도 공허한 눈동자로 나를 노려보다 자신의 감정을 주체하지 못했는지 주먹을 움켜쥔 채 달려들었다. “어째서...어째서 당신은 나를 버린건가요?” [퍼억] “이봐! 사서 진정하라니까 정신차려 여기서 이렇게 해봤자 기분만 더 나빠질 뿐이야” “...주인한태 더이상 다가오지 마” “이거 놔!” 사서는 내 얼굴을 향해 힘껏 주먹을 내질렀지만, 그 주먹이 닫기 직전 옆에 있던 경찰관과 꼬맹이의 제지에 의해 아무것도 하지못한채 바닥에 엎어지고 말았다. “...주인 위험해” “걱정해줘서 고맙지만 괜찮아 꼬맹아 잠깐 조용히 있어줄래?” “...응” 차라리 그 주먹을 맞았다면 서로 속이 좀 풀리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잠깐 들긴 했지만, 나는 내색하지 않고 쇼파에서 일어나 사서가 제압되어 누워있는 바닥근처로 천천히 걸어가 쭈그려 앉아 시선을 맞췄다. “당신은 그 아이가 호전되자마자 저에게는 눈길조차 주지 않았죠... 심지어 단 한 마디 말조차 하지 않은 채 그대로 떠나버렸어요 저는 도대체 뭐였던 건가요?” “....” “제발...제발 부탁이니까 뭐라고 말 좀 해주세요 저는 당신한테 뭐였던 건가요? 그냥 사랑하는 이가 돌아오기 전까지 쓰던 장난감이었을 뿐인가요? 저를 탐했던 시간들은 도대체 뭐였던 건가요” 순간적으로 말문이 막혔지만, 잠시 각오를 다지고는 사서에게서 시선을 때지 않은 채 입을 열었다. “우린 똑같은 처지였어 서로 사랑하는 사람을 잃고 힘들어 하고 있었잖아 당신도 나도 제정신을 유지하기 위해 필사적이었다고 서로가 작은 버팀목이 필요했을 뿐이야” 서로가 비슷했기에 이용했다. 내 정신이 조금이나마 버틸 수 있도록 꼬맹이의 대체재가 필요했을 뿐이다. “...당신은 좋겠네요 사랑하는 사람이 돌아왔으니까” 내말을 가만히 듣고 있던 사서가 눈물을 흘리며 버둥거리는 걸 멈추었고 경찰관은 나와 사서의 얼굴을 번갈아가 보더니 한숨을 내쉬며 사서를 끌어안고는 밖으로 나가버렸다. “...주인” “니가 사라지고 나서 정신적으로 한계에 몰려있었거든 환청에 환각에 엄청나게 고생하고 있었을때 나를 도와준 게 저 여자야” “...도와준사람” “응 내가 버틸수 있도록 도와준 사람. 처음에는 정신이 온전치 못했던 내가 강간...” “형 강간이요..?” 강간이라는 말에 게이는 전혀 몰랐다는 듯이 눈을 부릅떴고 나는 어깨를 으쓱였다. “너도 처음 약탈에 끌려갔을 때 모르는 여자 강간했잖아 뭘 새삼스럽게 놀라고 그래 뭐 처음에만 그랬다고 처음에만 그 이후로는 서로서로를 요구했어 사서도 남자친구를 잃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았던 때였으니까 그틈을 내가 파고들어간 거겠지.” “그럼 지금이라도 사서양을 대리고....” “미안 지금은 내 근처에 머물러 주는 사람은 꼬맹이 한 사람이면 충분해 다른 사람이 끼어들 공간은 없어” “...매정하시네요” “처음에는 그저 꼬맹이랑 겹쳐 보이는 연약한 여자라 대리고 다닐 뿐이었는데...어느순간 나랑도 겹쳐 보이기 시작하더라 그래서 떨어뜨렸어 더 정이 들어버리기 전에 잘라버려야 했거든 만약 꼬맹이를 만나기 전이었다면 사서양에게 완전히 기댔을지도 모르겠지만...난 한사람이면 충분해 배신당할 때 너무나도 아파서 견딜수가 없어” “그 아픔을 사서양도....아니요 그만하죠” “...주인” 나의 얼굴이 좋지 않았는지 게이는 무언가 더 말하려던 것을 멈춰주었고 꼬맹이는 나를 꽉 끌어안아 주었다. “하아...아무튼, 게이 너도 봤지? 이래저래 내가 있으면 분위기가 어수선해지잖아 나한테 감사인사를 하던 여자들이나, 도끼 들고 다니는 그놈, 펑펑 우는 사서....너나 그 경관도 나한테 뭔가 쌓인 게 분명 있을 거야 그룹 전체가 나 때문에 더욱더 시끄러워질껄” “하하...그럴지도 모르지만 저는 단 1mm의 작은 악의도 없으니까 오해하지 말아주세요”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은 채 게이를 바라보자 게이 또한 방금 겪은 상황에 헛웃음을 띄우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그렇다고 하더라도 사서 양을 대리고 가는 건 한 번 더 고민해 보셨으면 좋겠어요 밥도 잘 안 드시고 형이 돌아오는 것만 기다렸거든요 언제든 갈 수 있게 짐도 가득 쌓아뒀고요” “무리야 지금이라도 서로가 서로에게 최대한 관여하지 않는 게 좋아 나도 꼬맹이 하나 챙기기 버겁거든” 설령 게이의 말처럼 지금이라도 사서를 데리고 가봤자 더는 지켜줄 수 없는 내가 무슨 쓸모가 있겠는가? 차라리 여기서 지내는 게 몇만 배는 안전할 텐데 이편이 서로에게 더 좋을 것이 분명했다. “더 잔소리 하지말고 빨리 정보나 넘겨줘 군인을 만나서 대화를 하든 싸움을 하든 우리가 알아서 할 테니까” “형이 원하신다면요” 다시금 담배를 입에 물며 게이를 재촉하자 게이는 못내 아쉬운 표정이긴 했지만 이내 고급진 책상 서랍에서 쪽지 한 장과 지도를 꺼내더니 손짓했다. “이 근처로 가면 아울라트라는 커다란 상가 건물이 하나 있는데 가끔 순찰을 돌고 있는 군인들과 마주칠 수 있을 거에요 이 근처에 캠프를 차린 것 같긴 한데, 저희는 아직 접촉하는 단계라 확실하지는 않아요 몇일만더 있으면...” “여기서 꽤 가깝네. 오토바이를 타고 가면 삼십 분도 안 걸리겠어” 몇일이라는 말에 게이의 말을 단호하게 잘라낸 나는 어깨를 풀고는 나를 올려다보던 꼬맹이를 들쳐업었다. “...형이 오늘 머무실 줄 알고 오토바이 수리해두라고 했는데 괜히 그런 것 같네요” “그래서 일부로 그쪽으로 새워두라 그랬던 거냐?” “뭐, 그렇죠! 하하 점수 좀 따보려고 했는데 실패했지만요” 내가 곧장 떠나려 한다는 걸 눈치챘는지 게이는 머리를 긁적거리더니 한숨을 내쉬었다. “일단 옆방에 선물도 바리바리 챙겨뒀으니 가져가실 것들을 좀 추리시죠!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 거에요” “선물?” “그래도 크게 기대는 하지 마세요 기르던 토마토 묘목이나 책 같은 게 대부분이니까요” “준다면야 고맙게 받겠지만...괜찮은거냐?” “저희한테 당장 필요없는 것만 추린 거니까요” 허겁지겁 옆방으로 안내하는 게이를 따라 장소를 이동하자 하루이틀 추린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할 만큼의 물자들이 쌓여있었다. 간단한 통조림 즉석식품 과자류부터 농사에 대한 책들이나 잡지, 쓸 일이 많아 보이는 공구통, 직접 만든 것처럼 보이는 강철로 된 창과 수제 무기들 심지어는 권총 몇 자루와 탄약까지 놓여있었다. “많기도하네...” “사서양이랑 경관님이 고생좀 많이하셨어요” 이많은 양을 단둘이서 옮겼다니 엄청 고생을 하긴했구나 생각하며 가방안에 물건들을 쑤셔박기 시작했다. “권총은 또 어디서 구했대” “아 그거요? 길가에 버려진 경찰차 몇 대랑 같이 구했어요 근처에 좀비들이랑 변종이 좀 모여있어서 힘들긴 했지만 한두 자루 정도는 가져가셔도 문제없어요” “많이 죽었겠네” “많이 죽었죠! 여성들이 많은 집단이니까요. 그래서 그놈을 포섭한 거에요” 게이의 말을 흘려들으며 권총을 들어 올린 나는 놀랄 수 밖에 없었다. 이 묵직한걸 한 손으로 들고 빵빵 싸 재꼈건 건가 나는... “왜요 형 뭔가 문제 있어요?” “아니 이거 전부 받아도 되는 건가 싶어서” “형이 해주신 게 얼만데요. 이걸 전부 가져가도 모자를 정도인 거 아시죠?” 씨익 웃으며 바닥에 주저앉아있던 나를향해 손을 내미는 게이의 얼굴을 잠시 바라보던 나는 마주 웃음을 띠며 손을 맞잡아 몸을 일으켰다. “...말뿐이라도 고맙다” 생각해보면 처음부터 지금까지 호의적이었던 녀석은 이 녀석밖에 없었네 만약 평범한 일상 속에서 마주쳤다면 평범하게 친구로 지낼 수 있었을까? “괜히 다가갔다가 저희처럼 위협사격을 당할 수 있으니 조심하시고요” “그래 고맙다” “마지막으로....아까보여드린 사진 속 변종을 만난다면 꼭 처리해주세요” “푸핫 마지막에 와서 그거냐...마주친다면야 한 번 해보긴 할탠데 어떻게 될지는 기대하지 마라? 요즘 몸이 예전 같지가 않거든” “하하 농담이시죠?” 게이는 내말이 무슨 재밌는 농담이라도 되는것처럼 낄낄거렸고 나는 내심 마음속으로 땀을 흘리며 게이의 어깨를 두드렸다. “그래 재미없는 농담이다 새끼야 난 간다. 경관이랑 사서한테 안부 좀 전해주고 못 가서 미안하다고 사람들한테 말도 좀 해주고” “돌아오는 걸 기다리고 있을게요 형!” “그래 괜히 따라오지말고 고생해라” ◆ “...주인 누가 다가오고있어” “이제 오셨네요” 교실 밖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을 줄 알았던 사서와 경찰관이 어디에도 보이지 않아 이상하다고 생각하면서도 어찌어찌 오토바이에 짐을 전부 실은 뒤 올라타 시동을 걸자 등 뒤에서 누군가 말을 걸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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