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3화 season1. 113. 첫 비즈니스(1)
season 1
113. 첫 비즈니스(1)
* * *
기찬은 택시를 잡기 위해 큰길로 나갔다.
‘이윤지PD를 내 사람으로 만든다. 그리고 그녀에게 재영이를 맡긴다.’
그것이 기찬의 계획이었다.
그녀가 미래에 스타 PD가 되는 데에는 ‘스타 제조기’라는 명성도 한몫한다.
사람의 매력을 잘 캐치하고 그걸 멋지게 포장해 내놓을 줄 아는 프로듀서라는 뜻이다.
그런 그녀에게 재영을 맡겨놓으면 기찬 자신의 계획이 조금 더 빠르고 완벽하게 완성될 거라는 계산이었다.
기찬은 그렇게 큰길까지 걸으며 재영의 성장 타임라인을 점검했다.
‘이렇게 해 두면, 결국 넌 내게 큰돈을 안겨 줄 거니까.’
가만히 있어도 수익이 마구 늘어나는 미래를 생각하니 절로 웃음이 났다.
“그건 그렇고….”
당분간 재영을 안을 수 없게 되니, 괜히 더 생각이 났다.
너무 마른 편이라 벗겨 놓으면 그다지 볼품은 없지만, 보지만큼은 정말 환상이었다.
비틀리듯 빨려 들어가는 그 조임은 누구와도 느껴보지 못한 것이었다.
문득 조금 전 이윤지와의 상황이 떠올랐다.
‘그 상황에서 자는 척하다니, 무슨 타조도 아니고.’
실소가 났다.
하지만 자신이 속아준 건 잘한 것 같았다.
아직 그녀와는 적당한 관계로 거리를 유지하는 게 비즈니스를 위해서는 더 좋았기 때문이다.
다만, 당장 솟구치는 성욕이 문제였다.
그런데 그때, 마침 삐삐가 울렸다.
“응?”
- 송지연.
생각지도 못했던 이름에 기찬은 잠시 걸음을 멈췄다.
* * *
“정말 실장님은 시간을 분 단위로 쪼개 쓰는 것 같아요.”
송지연이 기찬의 근황을 듣고 감탄하듯 내뱉은 말이었다.
하지만 기찬은 그런 그녀의 반응에 별다른 감흥이 없었다.
두 사람은 조용한 바에서 술잔을 기울이는 중이었다.
송지연이 꼭 할 얘기가 있다며 급하게 음성 메시지를 남겨 늦은 시간임에도 거절하지 않고 만난 것이다.
하지만 급한 용무가 있는 사람치고는 너무 여유로웠다.
아니, 오히려 기분이 좋아 보이기까지 했다.
“그래서, 급하게 할 얘기라는 건….”
결국 기찬이 그녀의 일상 수다를 자르고 본론을 요구했다.
그러자 송지연은 가만히 기찬을 바라보다가 픽 웃었다.
“너무하세요. 그날, 그렇게 헤어지고 한 번 연락도 없고. 치이.”
입술을 비죽 내밀며 귀여운 표정을 지어 보였다.
하지만 기찬의 무반응을 일찌감치 느낀 그녀는 금방 표정을 고치고 기찬의 물음에 답했다.
“녹음기, 실장님이 가지고 갔죠?”
기찬이 예상했던 여러 질문 중 하나였기에 당혹감 없이 자연스레 고개를 저었다.
“녹음기? 무슨 소리죠?”
그런 기찬의 천연덕스러움에 송지연은 다시 한번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웃었다.
피식.
“뭐, 됐어요. 피차 서로 속마음을 다 들여다보면서 수싸움이나 하려는 건 아니니까.”
그녀는 온더락 잔을 테이블 위에 내려놓고 제 핸드백에서 담배를 꺼내 물었다.
틱, 퐁.
칙.
고가의 라이터로 담배에 불을 붙인 그녀는 안락한 고급 소파에 등을 기대며 다리를 꼬았다.
그리고 맛깔나게 한 모금을 길게 빨았다.
스으으.
후우.
담배 연기를 내뿜는 그녀의 입술이 유난히 색하게 보였다.
짧게 올라간 치마 때문에 노골적으로 드러난 하얗고 매끄러운 그녀의 허벅지가 자꾸 기찬의 시선을 잡아끌었다.
“내가 먼저 솔직하게 말할게요. 내 얘길 들어 보고, 실장님은 솔직하든지 말든지.”
주로 듣기만 할 뿐, 좀처럼 말이 없던 기찬은 잠깐 생각했다.
‘뭐지? 무슨 꿍꿍이야?’
여자의 말과 행동이 무척 거슬렸다.
분명 어떤 의도가 강하게 느껴지는데, 그게 뭘지 좀처럼 짐작이 어려웠다.
워낙 뜻밖이었기 때문에 더 그랬다.
그래서 일단 하는 대로 두고 볼 작정이었다.
송지연은 눈치가 빨라 그런 기찬의 의중을 어느 정도 간파하고 기다림 없이 말을 꺼냈다.
“눈치챘죠? 내가 그냥 평범한 사원이 아니라는 거.”
기찬은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다.
그녀는 기찬의 침묵을 알아서 긍정으로 받아들였다.
“서로 같은 입장 같은데, 너무 그렇게 대놓고 무시하지는 말아주세요.”
그 말에 기찬은 처음으로 반응할 수밖에 없었다.
‘같은 입장? 뭔가 혼자서 오해하고 있는 것 같은데.’
물론 겉으로는 태연했다.
그리고 그 또한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다.
그녀의 오해가 득이 될지 실이 될지 아직 판단이 서지 않은 까닭이었다.
대신 어떤 종류의 오해인지는 알아볼 필요가 있었다.
“같은 입장이라. 무슨 소린지 모르겠는데.”
녹음기에 관한 질문과 같은 방식으로 대응했다.
이런 경우 일관성을 보이는 게 중요하다는 걸 전생의 경험으로 잘 알고 있었다.
“그럴 줄 알았어요. 상관없어요. 내가 먼저 솔직하게 말한다고 했으니까.”
그러고는 정말로 자신의 상황을 천천히 늘어놓기 시작했다.
기찬이 예상한 대로 그녀는 김하익이 특정한 목적으로 고용한 ‘접대용’ 직원이었다.
일종의 미인계라고 해야 할까.
잠자리를 유도해 정황에 맞게 약점을 만들어 찜쪄먹기도 하고 구워 먹기도 하는 비싼 덫이었다.
송지연의 말대로라면, 그녀는 강남 특급 텐프로의 에이스 출신이라고 했다.
김하익이 그녀에게 거금을 약속하게 고용한 데는 그녀의 능력 외에 정재계(政財界)의 깊은 인맥도 한몫한다는 말을 꽤 강조했다.
“실장님, 아니, 그냥 기찬씨라고 부를게요.”
자신에 대해 한참을 설명하던 그녀는 목이 탔는지 위스키로 목을 축였다.
그리고 이어 말했다.
“내가 너무 자만했어요. 기찬씨에 대해 정보가 너무 없었어.”
김하익에게 들은 정보가 전부였고, 그것 가지고 기찬을 요리하려다가 오히려 당했다는 게 그녀의 판단이었다.
‘뭘 당했다는 건지.’
처음엔 단순히 녹음기 때문에 그런 오해를 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녀의 말을 듣다 보니, 그녀가 노린 것이 섹스의 정황으로 그친 게 아니라는 걸 알게 됐다.
“자랑은 아니지만, 나와 관계하고 내 노예가 되지 않은 남자는 지금까지 단 한 명도 없었어요.”
그 말을 할 때는 기찬과 똑바로 마주치고 있던 그녀의 눈빛이 무척 요염하게 느껴지기까지 했다.
그녀는 담배와 위스키를 번갈아 마시고는 다시 제 생각을 이어갔다.
한마디로 자신의 보지 맛에 빠져 허우적대게 할 자신이 있었다는 것이다.
불가능한 얘기는 아니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여인의 치마폭에 싸여 이성을 상실하고 패가망신하는 사내들이 어디 하나둘이었던가.
그런데, 꼬셔야 할 상대가 자신과 같은 부류의 선수였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았다고 했다.
“처음에는 너무 당황했어요. 그래도 어째요? 수습은 해야지.”
그래서 그녀는 뒤늦게 기찬의 뒷조사를 했다.
처음에는 조사를 해도 김하익이 알려준 내용이 다였다.
체고 출신에 전국체전 복싱 금메달리스트.
그런데 돌연 서울대에 입학하고 작은 음반 회사의 직원이 되는 특이한 이력.
그래서 더 알아보다 보니 결국 단서를 찾았다.
“그 음반사 대표가 고용한 거죠? 자 보고 알았겠지. 기찬씨의 능력을.”
그제야 기찬은 송지연이 어떤 오해를 하고 있는지 알았다.
‘나를 호빠 출신 선수로 생각하고 있구나.’
하지만 의문이 뒤따랐다.
대체 어떤 대목에서 그렇게 단정지은 걸까?
그 궁금증은 금방 해소됐다.
“예진씨, 모른다고 하지는 않겠죠?”
“……!”
기찬은 하마터면 놀란 마음을 드러낼 뻔한 걸 겨우 눌러 삼켰다.
‘예진이를 어떻게?!’
뒷조사에 정말 공을 들였구나, 감탄스럽기까지 했다.
하지만 감탄은 금방 걱정이 됐다.
‘어디까지 알아낸 거야?’
예진과의 관계보다 친동생인 유나와의 섹스까지 알게 된 게 아닐까, 걱정된 것이다.
예진이야 섹스를 하든 말든 상관없지만, 근친은 분명 약점이 되기 때문이다.
“꽤 열심히 알아봤네. 하지만 그게 왜?”
기찬은 이번에는 대수롭지 않게 수긍하며 그녀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참 신선했어요. 공장에서 성폭행당한 어린 여자를 이용해서 작업반장 약점을 찾을 줄이야.”
그 말에 기찬은 마시던 물을 뿜을 뻔했다.
‘이 여자, 뭐지?’
치밀한 듯, 하지만 허접한 허당이었다.
대체 뭘 알아본 건지, 혼자 소설을 쓰고 있었다.
하지만 이내 어찌 된 영문인지 알 것도 같았다.
‘아, 예진이가 거짓 정보를 줬구나!’
눈치가 백단인 예진이가 자신에게 접근해 이것저것을 묻는 사람의 의도를 눈치채지 못했을 리가 없었다.
그래서 그녀는 기찬의 뒤를 밟는 사람이라는 걸 알고 사실을 왜곡해 판단에 혼선을 준 것이다.
‘왜 그랬는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빚을 지게 됐군.’
나름의 짐작이 이루어진 사이, 송지연이 가장 궁금했던 걸 물었다.
“어디 소속이었어요? 청담 라이온? 압구정 와일드오키드?”
그녀는 확신하고 있었다.
기찬이 고급 호빠의 에이스 출신이라고 말이다.
기찬의 대꾸가 없자 그녀는 자신의 추리력이 별거 아니라며 나름의 겸손을 보였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사실 알아보고 말고 할 것도 없었어요. 그쪽 그 물건 보자마자 느낌이 딱 오더라고.”
그녀는 색욕이 느껴지는 눈빛으로 기찬의 자지를 가리켰다.
담배를 천천히 빨면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