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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7화 season2. 37. 인맥 사냥(1)


season 2 37. 인맥 사냥(1) * * * 기찬은 최대한 여자를 품에 감추고 엘리베이터를 탔다. 어차피 야심한 밤. 마주치는 사람도 없었고, 취해 잠든 것처럼 부축하듯 안고 이동하니 이상할 정도는 아니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그냥 차로 오는 건데.” 급히 온다고 오토바이를 빌려 타고 온 탓에 여자를 태우고 갈 차가 아쉬웠다. 그렇다고 119를 부를 수는 없었다. 어쨌든 당장은 공식적으로 드러나면 안 될 폭행 사건이기 때문이다. 기찬은 잠깐의 고민 끝에 정문으로 가 택시를 잡았다. “세브란스 병원이요.” “아이고, 여자분이 술을 많이 드셨나 보네.” 룸미러로 두 사람을 본 기사가 인사 대신 건넨 말이었다. 그녀의 긴 머리카락으로 얼굴을 죄다 가려놔 밤탱이가 된 눈이나 다 터져 엉망인 입술은 보이지 않아 다행이었다. 이때만 해도 택시 기사들의 오지랖이 아주 당연할 때였다. 그리고 네비가 없던 시절 운전자의 경험과 연륜은 목적지까지 도착 속도에 결정적 영향을 미쳤다. 그래서 기찬은 못마땅해하는 대신 오히려 그 오지랖을 이용하기로 했다. “네. 술 마시다가 갑자기 기절했어요. 최대한 빨리 가주시죠.” “그래요? 알겠어요. 내가 제일 빠른 길을 알지.” 택시 기사의 말대로 정말 빠르게 병원에 도착할 수 있었다. 기찬은 그녀를 응급실로 들여보내고 수속을 밟았다. 그 과정에서 누가 봐도 외상이 심했기 때문에 간호사는 부상 이유를 물었다. “음주 후 보행 중 균형을 잃고 계단에서 굴러 추락했습니다. 얼굴과 체간부에 다수의 찰과상 및 타박상이 확인되고, 의식은 일시적으로 소실됐습니다.” 기록란을 채우던 간호사가 기찬의 설명에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를 올려다봤다. 아직 학생으로 보이는 청년이 마치 의사처럼 어휘 구사를 했기 때문이다. 기찬은 아랑곳하지 않고 마저 설명을 이었다. 마침 근처에 있던 여자 레지던트가 흥미롭다는 듯 다가와 함께 경청했다. “현재 자발 호흡 양호하고, 동공 반응은 양쪽 대칭이며 정상입니다. 활력 징후 확인 후, 추가 영상 검사 및 신경학적 평가 필요해 보입니다.” 설명이 끝나자 간호사가 아닌 레지던트가 조심스레 물었다. “의대생이세요?” 의사라고 하기에는 너무 어려 보여 그리 물었다. 기찬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예과 2학년입니다.” “아, 그렇구나. 어쩐지.” 짧게 주고받은 두 사람의 말에 간호사가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그래도 그렇지, 이제 고작 2학년인데….” 그 말에 레지던트가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맞는 말이라는 수긍이었다. 그러면서 신기한 눈으로 기찬을 바라봤다. “어느 학교?” 갑자기 말이 짧아졌지만, 기찬은 신경 쓰지 않았다. 어차피 학년을 밝혔으니 저보다 어리니까 하는 말일 텐데. 게다가 그녀의 표정이나 말투에 같은 직군의 후배를 보는 따뜻함이 있어 굳이 문제 삼지 않았다. “서울대요.” 그녀의 입술이 ‘오’ 하는 모양으로 동그랗게 오므려졌다. 기찬은 기찬대로 그녀의 모습에서 묘한 예쁨을 느꼈다. 아무렇게나 질끈 묶은 머리, 며칠 잠을 못 잤는지 푸석푸석한 얼굴, 그리고 건조한 입술까지. 이성으로 느끼기에는 너무 초췌해 보이는 모습이었지만, 그게 오히려 어떤 청초한 느낌을 주었다. 기찬은 슬쩍 그녀의 가운을 살폈다. ‘민효진.’ 연세대학교 의대, 민효진. 기찬은 곧바로 ‘백 년의 서(書)’를 떠올렸다. 볼 수 있는 건 공식 문서나 자료 등의 정보들이기 때문에 그녀가 의사로서 논문이나 학술지 기고문 등이 있을 거로 생각했다. 그러자 역시나, 생각하듯 떠올리는 것으로 그녀에 대한 미래 정보가 머릿속에 펼쳐졌다. - 연세대학교 의과대학 교육연구원장 역임. - NEJM(New England Journal of Medicine) 최다 논문 개재. - 대한의사협회 의료정책연구원장. - ……. 그녀에 대한 설명이 끝없이 이어졌다. 순박해 보이는 외모와 달리, 꽤 활동적인 의사가 되는 것 같았다. ‘NEJM은 세계 최고 권위의 의학지인데, 거기서 인정받는구나.’ 이론 실력은 확실하다고 보면 될 것 같았다. 그리고 기찬이 유심히 본 건 대한의협에서 의료정책 연구원장을 지내게 된다는 대목이었다. ‘정치적인 행보도 할 줄 안다.’ 기찬이 미래에 의료계를 자신의 뿌리로 만들려고 계획한 이상, 꽤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는 인적 자원이 될 것 같았다. 아주 우연하고 스치듯 지나가는 짧은 만남이었지만, 그녀에게 자신을 각인시킬 필요를 느꼈다. “누나. 이 환자, 잘 부탁드려요. 제가 급한 일이 있어서 같이 못 있거든요.” 거리낌 없이 누나라고 부르며 다정하게 웃어 보였다. 그리고 그의 오른손이 레지던트의 팔을 살짝 쥐었다 놓았다. 그때, 그녀의 신경이 그쪽으로 쏠린 사이 기찬은 반대편 주머니 안에 켜놓은 녹음기를 넣었다. ‘이 여자 자전적 에세이에 있는 그 사건 날짜가 오늘이야. 좀 신경 쓰이네.’ 그게 녹음기를 켜 그녀의 가운 주머니에 넣어둔 이유였다. 당연히 민효진은 눈치채지 못했고, 그저 기찬의 팔이 감쌌던 제 어깨만 신경 쓰였다. “어….” 그녀는 살짝 당황했다. 지금 같은 상황이 흔한 일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응급실에서 의사를 보면 보통은 ‘선생님’이라며 어려워한다. 그런데, 처음 보는 의사에게 다짜고짜 누나라고 부르는 경우라니. 아무리 의대생이라지만, 어지간히 사교성이 좋지 않고서야 어려운 태도였다. 무엇보다, 처음부터 그녀의 시선을 잡아끈 건 역시나 기찬의 잘생긴 얼굴이었다. 한참을 올려다봐야 하는 큰 키, 그리고 떡 벌어진 어깨가 특히 인상적이었다. 기찬은 그런 그녀의 반응을 모른 체 하며 간호사에게도 부탁을 남겼다. “정신이 들면, 거기 적은 연락처로 꼭 연락주세요. 바로 오겠습니다.” “네. 그럴게요.” 기찬이 돌아서서 사라질 때까지 두 여자는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다가 간호사가 또 혼잣말처럼 작게 말했다. “무슨 남자 피부가 저리 좋대요? 하얗고 뽀얗고, 입술은 또….” 그러다가 그만 입을 다물었다. 혼자 푼수 떠는 것 같단 생각이 들었는지 얼른 서류를 챙겨 들고 후다닥 제 볼일 보러 가버렸다. 민효진은 기찬이 사라진 문쪽을 여전히 바라보다가 뒤늦게 돌아섰다. 그리고 그가 데리고 온 환자에게 가며 기찬이 만졌던 팔을 봤다. ‘뭐지? 그 짜릿했던 느낌은?’ 아직 그의 온기가 남아있는 느낌이 들며 괜히 호흡이 들뜨는 기분이 들었다. 괜히 이유도 없이 젖꼭지가 찌릿- 했던 것이다. 그런데, 응급환자를 보는 순간 정신이 번쩍 들었다. “아….” 외투를 벗기자 여자는 알몸 상태였다. 붓고 찢어진 얼굴 상처는 둘째치고, 몸 곳곳에 난 멍이 심상치 않아 보였다. 민효진은 환자의 상처를 꼼꼼히 확인하다가 저도 모르게 그녀의 음부를 살폈다. 성행위로 보이는 흔적이 있었다. ‘강간은 아니겠지?’ 그랬으면 굳이 병원까지 직접 데려오지는 않았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인물값 하네. 이렇게 예쁜 여자랑 호텔에서 즐기다가….’ 그녀의 표정이 차갑게 굳었다. 이상하단 생각이 들었다. 호텔에서 술에 취해 계단에서 구를 일이 있던가? 라운지나 바를 이용했다면 또 모를까. 하지만 이 여자는 알몸이다. “분명 성관계 중에 이렇게 된 걸 텐데…?” 그녀가 심각한 표정으로 중얼거리자, 언제 나타났는지, 응급실 펠로우(전임의)가 얼굴을 들이밀었다. “왜 남의 여자 보지는 만지고 그래?” “아니, 그게….” 상스러운 그의 말에 민효진이 수치심을 느끼며 뒤로 물러섰다. 하지만 펠로우는 그녀가 멀어지지 못하게 팔을 잡아 끌었다. “말해 봐. 거긴 왜 뒤지고 있었냐고. 무슨 환잔데?” 그는 환자의 차트를 들여다보며 다른 한 손으로는 민효진의 허리를 감아 안았다. “선생님.” 그녀가 팔을 뿌리치며 벗어나려고 하자, 그는 더욱 팔에 힘을 주며 당겼다. 그리고 눈을 흘겼다. “가만히 있어. 내가 뭐 해?” 그녀는 입을 다물었다. 대신 주변을 둘러봤다. 하지만 도와줄 사람은 없었다. ‘이 새끼, 또 지랄이야.’ 대학 본과 실습생 때부터 그랬다. 자신에게만 그런 게 아니었다. 모든 여자 후배들에게 그는 상습 성추행범이었다. 그의 성추행은 학년이 올라갈수록, 전공의가 되고 전임의가 되면서 더욱 노골적이었다. 위계 앞에서 여자들은 피해자일 수밖에 없었다. 교수도 그런 새끼들이 있는데, 말해 봐야 행실이나 똑바로 하라는 소리만 돌아왔기 때문이다. “어디 보자. 어이구. 떡치다가 왔나 보네.” 환자의 음부를 들여다보던 펠로우가 뭐가 즐거운지 히히덕거리며 말했다. 그러더니 민효진을 돌아보며 음흉한 눈으로 가슴과 가랑이 사이를 훑었다. “뭐, 누구랑은 비교가 되는 몸매네. 응?” 그 말과 동시에 허리를 감고 있던 손이 슬쩍 내려와 엉덩이를 더듬었다. 그 순간 진심으로 갈등했다. ‘이 새끼 뺨을 한 대 후려갈기고 의사 때려 쳐?’ 하지만 현실은 마음과 같지 못했다. 그저 눈을 꼭 감고 아랫입술을 앙다무는 게 고작이었다. 그런데 그때, 퍽. “억!” 우당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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