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8화 season2. 38. 인맥 사냥(2)
season 2
38. 인맥 사냥(2)
민효진은 바로 귓가에서 울린 둔탁한 충격음과 비명에 깜짝 놀라 눈을 떴다.
펠로우가 바닥을 나뒹굴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의 앞에 산처럼 커다란 남자가 서 있었다.
“어? 아, 어떻게…?”
기찬은 그녀를 살짝 잡아끌어 자신의 뒤로 가렸다.
그와 눈이 마주치자, 민효진은 겨우 참고 있던 눈물이 왈칵 쏟아질 것만 같았다.
그의 눈빛이 어떤 의지가 되며, 괜찮으니 가만히 있으라는 말을 하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다, 당신 뭐야?!”
펠로우가 일어서며 맞은 얼굴을 부여잡고 기찬에게 거칠게 항의했다.
그러자 기찬이 그의 멱살을 움켜쥐고 낮게 말했다.
“네가 의사야?”
그 기세에 완전히 쫄아버린 펠로우가 대꾸도 못하고 입만 뻐끔거렸다.
기찬은 그를 집어던지듯 멱살을 놓으며 그만 들을 수 있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한 번만 더 내 여자친구 몸에 손대는 날엔 내 손에 죽어. 내가 장담해. 진짜 죽인다.”
펠로우는 숨을 쉬지 못했다.
기찬의 눈에 광기가 가득했기 때문이다.
‘이, 이 새끼, 진짜 죽일지도 모른다.’
공포에 사로잡힌 순간, 그의 손이 번쩍였다.
짝.
“컥!”
휘청.
털썩.
기찬의 싸대기에 휘청거리다 나자빠진 펠로우는 일어서지 못했다.
한바탕 소동에 응급실 안이 한순간에 조용해졌다.
기찬은 이때다 싶어 큰 목소리로 말했다.
“여긴 동료의식도 없나? 여자 레지던트가 펠로우한테 성희롱당하는데 그걸 모른 체 해? 연대 의대 수준이 이 정도야?!”
그의 목소리가 쩌렁 울렸다.
뼈 때리는 말에 의사들도, 간호사들도, 꿀먹은 벙어리처럼 아무도 나서질 못 했다.
다만 한 사람, 응급실을 총괄하는 어텐딩이 응급실로 들어서며 언성을 높였다.
“이게 다 무슨 일이야?!”
의사 가운의 소매를 걷어붙이고 들어오는 남자를 보는 순간, 기찬은 저도 모르게 입이 살짝 벌어졌다.
‘저 사람이 여기 출신이었어?!’
훗날, 국내에서는 최고 권위를 인정받게 되는 아주 유명한 중증외상 전문의, 김정국이었다.
1995년인 지금, 아직 젊은 나이인데 응급실의 최고 책임자인 어텐딩으로 있는 걸 보면, 확실히 떡잎부터 남달랐던 모양이다.
그런 기찬의 감상과 달리, 김정국은 특유의 차가운 표정과 날카로운 눈매로 주변을 살피며 다가왔다.
그리고 대뜸 펠로우에게 물었다.
“왜 응급실에서 이런 소란이 생긴 건지, 설명해.”
조금도 화를 내지 않았지만, 듣는 사람은 괜히 심장이 쫄깃해지는 무거운 압박감이 느껴졌다.
그래서 펠로우는 우물쭈물하지 않고 빠르게 대답했다.
“제가 이 사람한테 맞았습니다.”
그러면서 맞은쪽 뺨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그러자 김정국이 기찬을 획 돌아봤다.
“누군데 응급실에서 행팹니까.”
기찬은 짧게 한숨을 쉬었다.
답답하다는 감정을 드러내는 일종의 연기였다.
그러고 나서 대답 대신 정중히 인사를 했다.
“안녕하십니까. 교수님.”
차분하던 김정국의 표정에 살짝 의아함이 묻었다 사라졌다.
그런 표정 변화를 놓치지 않은 기찬이 제 소개와 함께 자초지종대신 그가 듣고자 하는 답만 간결히 설명했다.
“저는 서울대 의예과 2학년 성기찬입니다. 제가 소란의 주범인 건 맞습니다. 펠로우의 말도 사실입니다. 다만, 앞뒤 상황 다 자른 설명이었습니다.”
기찬의 당당하면서도 순차적인 대답에 김정국은 묘한 호감을 느꼈다.
일종의 만족감으로, 평소 논리정연한 말을 좋아하는 취향 탓이었다.
“소란을 피웠고, 그 소란이란 건 펠로우를 때린 것, 그것까지는 인정한단 말이군. 거기에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단 소리고.”
혼잣말처럼 나직이 중얼거린 김정국이 다시 펠로우를 돌아보며 물었다.
“저 친구가 말한 앞뒤 상황까지 말해봐.”
그러자 펠로우는 억울한 표정을 지으며 아픈 척 계속 얼굴을 문질렀다.
“앞뒤 상황이랄 것도 없습니다. 여기 응급환자 보고 있는데 갑자기 달려들더니 주먹으로 제 얼굴을….”
그의 말이 다 끝나기 전에 기찬이 훅 치고 들어왔다.
“여기 본 사람들 많아요. 비겁하게 입을 다물겠지만, 그건 그 사람들 몫인 거고.”
그러면서 주변을 슥 둘러봤다.
그러자 인턴이나 간호사들이 누구랄 것도없이 전부 고개를 슥, 숙였다.
김정국은 눈치가 백단인 사람이다.
당연히 뭔가 일이 있었음을, 기찬의 말이 헛소리가 아님을 인지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곧장 합리적인 결정을 내린 건 아니었다.
“무슨 일이 있었다고 해도, 폭력이 정당화되지는 않아. 경찰에 신고해. 억울한 일이 있으면 경찰서에서 잘잘못을 다투면 돼.”
기찬을 보며 한 말이었지만, 어쩐지 화살은 펠로우에게 가 꽂히는 것 같았다.
실제로 김정국의 말에 당황한 건 기찬이 아닌 펠로우였다.
“저, 교수님. 아직 어린 친구고, 또 이쪽 후배이기도 한데, 굳이 경찰에 신고까지는…. 제가 선배로서 너그럽게….”
그 말에 기찬이 또다시 물을 뿌렸다.
“저는 당신 같은 선배 둔 적 없습니다. 당신 같은 사람을 의사라고 인정하고 싶지도 않고요. 신고 하시죠. 아니, 제가 하겠습니다.”
그러면서 성큼 전화기가 있는 데스크로 옮겨 갔다.
그러자 이번에는 김정국도 살짝 당황했다.
“이봐. 서울대 의대생이 남의 병원에 와서 너무 무례한 거 아냐?”
기찬은 그의 말이 어떤 의미인지 이해하지 못했다.
신고하라고 해 놓고, 신고하려니까 무례하다니.
그렇다고 김정국 교수와 감정을 만들 필요는 없었다.
잘 보여도 모자랄 판에, 괜히 부스럼을 만들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첫인상이 강렬할수록 기억에는 오래 남는 게 사실이었다.
그래서 옳다고 믿는 일에서만큼은 싸가지가 없어도 좋을 것 같다는 판단이었다.
왜?
김정국, 그가 그런 사람이니까.
“교수님. 여러모로 연대 의대 실망입니다. 제게 이유까지는 물어주실 줄 알았습니다. 물론 여기가 응급실이기 때문인 건 이해합니다만, 응급의가 성추행을 당하는 것 또한 환자의 위급함 만큼 중요한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그 말을 뱉어놓고 정말로 전화 수화기를 들었다.
그리고 112를 눌러 통화를 시작했다.
모두 들으라고 큰 소리로.
“연세대학교 영동세브란스 병원 응급실에서 성추행 사건이 있었고, 그걸 목격한 피해자 남자친구가 추행범을 폭행했습니다. 목격자는 여기 의사들인데, 다 모른 체 하고 있습니다. 빨리 와 주시죠.”
그 짧은 신고 내용으로 다 설명이 됐다.
역시나, 기찬이 수화기를 내려놓고 보니 김정국이 펠로우를 노려 보고 있는 중이었다.
물론 펠로우는 세상 억울한 표정으로 손을 내젔기 바빴다.
“아, 아닙니다, 교수님! 절대 아닙니다!”
하지만, 학교와 병원에서 그의 평판은 이미 공공연했기에 김정국은 지금 상황의 심증을 굳혔다.
‘매번 덮고 넘어가니 결국 이렇게 일이 터지지.’
사실 그도 못마땅했다.
인성은 둘째치고, 실력도 바닥이었기 때문이다.
문제는, 응급실에 오려는 사람이 없었다.
응급실에서 일할 의사가 없는 탓에, 그마저 징계를 받게 되면 정말 답이 없는 상황이었다.
‘민효진, 이 친구가 여길 지원해 주면 좋으련만….’
실력이나 인성 등, 여러모로 민효진이 응급의학으로 들어와 주길 바라는 마음이었지만, 그녀는 의무 년수만 채우면 외과로 올라간다.
나머지는 인턴과 본과 실습생들.
김정국은 갑자기 생각이 많아졌다.
머리가 복잡한 만큼 마음도 답답했다.
그런데 문득, 저만치에서 민효진과 뭔가 대화를 나누고 있는 기찬이 눈에 들어왔다.
“민효진. 따라와.”
그는 펠로우를 한 차례 더 노려본 후 돌아서서 응급실을 나가버렸다.
민효진이 어찌할 바를 모르고 당황해하는 중에, 기찬이 그녀의 어깨를 살짝 감싸며 속삭였다.
“아까 말한 대로 해요. 오늘 처음 보는 사람 말을 믿기 힘들겠지만, 속는 셈 치고 믿어 봐요. 솔직히, 아니어도 상관없잖아요?”
민효진이 황당한 눈으로 그런 기찬을 올려다봤다.
그러다가 뭔가 결심이 섰는지, 입을 꾹 다물며 고개를 끄덕이고는 김정국을 뒤따라갔다.
두 사람이 사라지자마자 응급실은 다시 이전의 상태로 돌아갔다.
웅성거리고, 시끄럽고 분주해졌다.
다만 두 사람.
펠로우와 기찬만이 서로를 마주 보고 서서 눈싸움을 벌이고 있었다.
“넌 앞으로 의사 할 생각 마라. 사람 잘못 건드렸어.”
펠로우가 으르렁거리며 한 말이었다.
당연히 기찬은 눈 하나 깜빡하지 않았다.
오히려 우습다는 듯 콧방귀를 뀌며 손에 쥐고 있던 녹음기를 틀었다.
달칵.
- 왜 남의 여자 보지는 만지고 그래?
- 가만히 있어. 내가 뭐 해?
- 어디 보자. 어이구. 떡치다가 왔나 보네.
- 뭐, 누구랑은 비교가 되는 몸매네. 응?
펠로우가 민효진에게 한 말들이 고스란히 녹음되어 있었다.
누가 들어도 그 상황이 머릿속에 자연스럽게 그려질 만큼 맥락이 확실했다.
딸깍.
기찬이 녹음기를 껐다.
말없이 침묵했다.
아무런 감정이 읽히지 않는 무심한 눈으로 펠로우를 가만히 바라보기만 할 뿐이었다.
꿀꺽.
펠로우의 목울대가 크게 움직이더니, 고개를 푹 숙이며 기찬의 옆을 그냥 지나쳤다.
그러면서 근처에 있던 인턴 하나에게 말했다.
“경찰 오면 나 호출해라. 여기 아무 일 없었다고 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