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9화 season2. 39. 인맥 사냥(3)
season 2
39. 인맥 사냥(3)
민효진은 교수실 앞에 서서 잠시 마음을 진정시켰다.
후우우.
노크해야 하는데, 주먹을 꼭 쥐고 있는 두 손이 움직일 줄을 몰랐다.
결심을 굳히고 왔지만, 문 앞에 서자 마음이 흔들린 것이다.
‘이게 과연 잘하는 짓일까?’
그의 말마따나, 생판 처음 본 사람 말을 믿고 자신의 미래가 걸린 진로를 결정해도 되는 건지….
무엇보다, 그걸 흘려듣지 못한 자신이 이해되지 않았다.
- 누나. 김정국 교수님께 배우세요. 하고 싶은 건 나중으로 미루고, 일단 그분 밑에 있어요. 일생일대의 기회가 될 거예요.
소란 중에 기찬이 다가와 속삭인 말이었다.
그러면서 가운 주머니에 손을 넣더니 뭔가를 꺼내 버튼을 눌렀다.
- 달칵.
- 지금 여기에서의 일도 걱정 말고요. 내가 알아서 해결할 테니까, 교수님께는 솔직히 다 말해요. 나 한 번 믿어봐요.
그의 웃는 얼굴 옆으로 작은 소형 녹음기가 보였다.
그녀는 어안이 벙벙해 눈만 끔뻑일 뿐이었다.
‘그래. 일단 들어가서 자초지종을 얘기하는 것부터.’
이유는 모르겠지만, 처음 보는 남도 저렇게 나서서 자신을 보호해 주는데, 최소한 스스로 지킬 수 있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똑똑.
“교수님. 민효진입니다.”
“들어와.”
문을 열고 들어가자 잘 정돈된 책상에 김정국 교수가 앉아있었다.
그는 여전히 차가운 표정으로 민효진을 바라보며 고개를 까딱했다.
와 앉으라는 소리였다.
“자네가 올해 몇이지?”
앉자마자 훅 들어온 질문이었다.
예상치 못한 질문에 민효진은 얼떨결에 대답했다.
“스물일곱, 아니, 여덟이요.”
그러자 교수는 잠깐 천장으로 눈알을 굴리더니 뭔가를 계산하다가 픽 웃었다.
“능력 좋네. 여섯 살이나 어린 남자 친구를 두고. 맨날 밤새 공부만 하는 줄 알았더니, 언제 그런 잘생긴 남자를….”
민효진은 그 질문을 듣자마자 소름이 돋았다.
기찬이 귀띔해 준 예상 질문이었던 것이다.
- … 이렇게 둘러대세요.
그래서 그대로 대답했다.
“본과 들어가기 전에 과외 했던 학생이었어요. 저 따라서 의대 지원한다더니, 공부를 더 잘했나 봐요.”
그녀가 멋쩍게 웃으며 한 대답에 교수는 별말 없이 고개만 주억거렸다.
흔히 있는 일은 아니지만, 충분히 있을 만한 일이었다.
“좀전에 만수하고 얘기했어.”
교수가 시선으로 전화기를 가리켰다.
자신이 이곳에 오는 동안에 둘이 통화한 모양이었다.
“자네에게 몹쓸 짓 한 걸 인정했고, 그 책임을 지고 잠깐 쉬겠다더군.”
“… 네?”
민효진은 진심으로 놀랐다.
하지만 이내 어떻게 된 건지 감이 왔다.
‘성기찬….’
녹음기에 녹음 된 게 어떤 내용이었을지, 그걸로 박만수에게 뭘 어떻게 했을지, 머릿속에 영화처럼 펼쳐졌다.
그러자 아직은 움츠러있던 마음에 자신감이 확 피어났다.
그녀의 얼굴이 빨갛게 상기됐다.
고양감을 비롯한 여러 감정이 얽히며 심장이 두근거리기 시작한 탓이었다.
그런 그녀의 표정 변화를 보며, 김정국 교수가 넌지시 말했다.
“여기 전담하던 만수가 휴직을 해버리면, 그 공석을 어떻게 할 방법이 없어. 그래서 말인데….”
그는 민효진에게 외과에서 중증응급의학으로 보직 변경 신청을 해 보는 건 어떻겠냐고 의견을 물었다.
그녀는 이번에는 크게 놀라지 않았다.
그 또한 기찬이 미리 언급했던 말 중 하나였기 때문이다.
‘걔는 이런 걸 어떻게 다….’
그가 미래 자신이 쓴 에세이를 보고 그런 전략이나 조언을 해줬을 거라고는 꿈에도 알 수 없으니, 놀랄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교수님.”
잠깐 생각을 정리한 후, 민효진이 진지한 표정으로 교수에게 부탁했다.
“제가 많이 부족하고, 머리도 나쁘지만, 성실한 건 자신있습니다. 저를 꼭 챙겨주신다고 하시면, 전공 바꿀게요. 열심히 하겠습니다.”
예상치 못한 뜻밖의 말이었는지, 그 냉정한 김정국 교수의 눈이 잠시 커다래졌다.
그러고는 이내 이전의 무심한 얼굴로 돌아왔다.
하지만, 입가의 옅은 미소는 숨길 수 없었다.
“음. 그래. 뭐, 나도 노력하지.”
어지간해서는 감정을 노출하지 않는 그였지만, 그래도 기쁨은 어쩔 수 없는 모양이었다.
“자네가 잘 생각한 건지, 잘한 결정인지는 솔직히 나도 잘 모르겠어. 하지만, 고마워.”
두 사람은 이후 진행해야 할 행정적 절차나 앞으로의 계획에 대해 조금 더 얘길 나눴다.
“그러면, 지도 교수님께 먼저 인사드리고 오겠습니다. 오는 길에 행정실에 들러서 서류 처리는 해놓을게요.”
“그래. 어서 가 봐.”
민효진이 교수에게 인사를 하고 방을 나서면서 잠깐 멈춰섰다.
그러더니 다시 돌아서서 꾸벅 인사했다.
“교수님. 잘 부탁드립니다!”
우렁찬 목소리를 남기고 그녀가 사라지고, 김정국은 그제야 미소를 숨기지 않았다.
“이거, 뜻밖의 선물을 받은 느낌인데.”
평소 눈여겨봤던 레지던트가 힘든 길을 선택했다.
자신의 권유만으로 그리 결정한 것은 아닐 테지만, 이유야 어찌됐건 고맙고 대견했다.
동시에 그녀가 도망가는 일이 없도록 진심으로 잘 해줘야겠다는 생각이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이 일과는 전혀 상관없을 것 같은 성기찬이라는 학생이 떠올랐다.
“성기찬이라….”
잠깐 뭔가를 생각하던 김정국이 전화기를 들었다.
“연대 김정국 교수입니다. 혹시 변용주 교수님 자리에 계신가요?”
- 안녕하세요. 교수님, 저는 조교 최창섭입니다. 변용주 교수님 잠시 자리 비우셨습니다. 용건 메모 남겨드릴까요?
“아, 네. 그렇군요. 메모는 됐고, 혹시 그 학교에 성기찬이라는 학생 있죠?”
- 네. 저희 작년 전체 수석입니다.
“아….”
김정국은 뭔가 실마리가 풀리는 듯한 청량감과 납득이 되는 것 같은 안도감을 느꼈다.
‘그래. 뭔가 범상치 않아 보이더라니. 뭐가 달라도 다르군.’
그는 대충 인사로 통화를 마무리하고 전화를 끊었다.
김정국의 머릿속에는 성기찬이라는 이름이 계속 맴돌았다.
* * *
기찬은 다시 호텔로 돌아가며 새어 나오는 웃음을 주체하지 못했다.
‘박혜수나 최창섭도 모자라 김정국 교수까지…!’
인생이 풀려도 너무 잘 풀리는 게 아닌지 걱정이 들 정도였다.
최소한 의료, 의학계 인맥 면에서는 그랬다.
‘이제 두 사람 남았다.’
기찬이 자신의 이번 생에서 반드시 인연이 닿기를 바라는, 그걸 계획한 사람은 총 다섯이었다.
그런데 벌써 그중 셋을 만나 좋은 첫인상을 심어주는 데 성공했다.
그리고 예정에는 없었지만, 민효진이라는 좋은 장기말도 알게 됐다.
앞으로도 이렇게 이쪽 바닥의 인맥을 확장해 네트워크를 구축하면, 더할 나위 없을 것 같았다.
하지만 이내 즐겁던 기분이 싹 걷혔다.
지금 가고 있는 곳의 일 때문이었다.
‘대체 감독님은 무슨 일을 저지른 걸까?’
정황상, 접대녀를 불러 섹스하다가 취중에 폭력을 휘두른 것 같았다.
이제 그 수습을 고민할 때였다.
- 삐삑.
호출기 신호음에 번화를 확인했다.
모르는 번호로 음성 메시지가 도착해있었다.
기찬은 호텔에 도착하자마자 카운터에서 메시지부터 확인했다.
- 풍영그룹 기획조정실 전광호 실장입니다. 회장님 지시로 일을 하나 처리했는데, 설명이 필요할 것 같아서 메시지 남겨요. 확인하는 대로 전화 주세요.
기찬은 수화기를 든 채로 잠깐 생각했다.
머리가 빠르게 돌아갔고, 이번 일과 관련이 있을 거라는 느낌이 들어 얼른 발신번호로 전화했다.
“안녕하세요. 전광호 실장님 계신가요?”
“기찬군?”
“네. 성기찬입니다.”
“그래요. 내가 전광호 실장입니다. 그 번호, 내 방 직통 번호니까 기억해 두고.”
목소리가 음이 높고 말 속도도 빨라 듣기에 꼭 간신 같다는 인상이 들었다.
하지만 뭔가 형용할 수 없는 위엄 같은 게 느껴졌다.
“직접 만나서 얘길 나눠야 하는 중요한 문제지만, 워낙 일이 급하다 보니, 부득이 전화로 말 전할게요.”
“네. 편하게 말씀하세요.”
전광호 실장의 설명은 간결했다.
길거나 사족이 붙지 않았고, 정말 본론만 딱 말했다.
그러나 그 내용은 설명만큼 간결하지가 않았다.
‘이거,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판이 크게 벌어진 것 같은데.’
실장의 설명은 김종태 회장이 기찬에게 도움을 주라고 지시했다는 내용이었지만, 그 행간의 의미를 기찬은 들여다볼 수 있었다.
그 진의는 김종태 회장이 김하익의 방에서 나가면서 기찬에게 넌지시 건넨 말을 떠올리게 했다.
- 오명환이한테 지금은 몸 사릴 때라고 전해.
그 순간, 처음부터 지금까지의 일들이 하나로 엮였다.
오명환을 잡기 위해 김종태가 수를 쓴 것 같았다.
이것도 일종의 미인계라고 해야 할지, 콜걸을 붙인 것이다.
감독은 초장부터 너무도 허무할 정도로 쉽게 저들의 덫에 걸려들었고, 자칫 기찬까지 난감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천운을 얻었다고 해야 할지, 김종태 회장이 기찬을 보고 이번 일은 철회하기로 한 모양이다.
하아.
기찬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모골이 송연했다.
‘와, 장난 없네.’
너무 쉽게 생각했다는 자책과 후회가 밀려들었다.
미래를 아는 전생자라고 맘 놓을 수 없음을 뼈저리게 느꼈다.
“일의 순서나 과정까진 내가 설명할 수 없을 것 같고, 혹시 경찰서나 병원에서 연락이 가면, 기찬군은 협조만 해 주면 돼요.”
“네. 알겠습니다. 고맙습니다.”
“그 인사는 회장님께 직접 드려요. 그럼 난 이만.”
목소리나 말투와 다르게 정말 쿨내가 진동하는 남자였다.
권력을 쥔 자의 여유와 당당함이랄까.
‘세상은 넓고, 강한 놈들 천지구나.’
김종태가 새삼 다시 보이기 시작했다.
그런데 뜻밖에도 두려움 대신 기쁜 마음이 들었다.
어찌 보면, 그 또한 자신의 인맥이 아닌가 싶었던 것이다.
‘어둠을 담당하는 송지연, 그 뒷배경으로 김종태. 조합이 좋잖아?’
기찬은 자신의 엉뚱한 생각에 피식 웃음을 흘리고는 곧장 객실로 올라갔다.
“감독님. 다녀왔습니다.”
기찬은 들어서다 말고 멈칫했다.
오명환이 허공에 떠 있었다.
“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