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화 42화 - 다시 만난 성철
<띠링, 띠링>
<띠링, 띠링>
꿈인 줄 알았다. 어디에 뒀는지도 잊고 있던... 오랜만에 듣는 전화벨 소리였다.
<띠링, 띠링>
“대영아...”
“아, 미안.”
난 이층침대에서 서둘러 내려와 전화기를 열었다. 준모 형의 침대는 비어있었다. 주말인데 도서관에 갔나 보다.
<대영아, 미안. 또 주말에 전화했네.>
역시나 조교실 남희 누나였다.
“괜찮습니다. 방금 일어났어요.”
<중요한 일인데... 지금 나올 수 있겠어?>
“나갈 수는 있는데 무슨 일로...”
<갑자기 천교수님이... 자세한 건 만나서 얘기하자.>
하림과 헤어진 후로도 남희 누나는 여전히 내게 호의적인 사람이었다.
“알겠습니다. 한 시간 내로 갈게요.”
<조금 더 서둘러 줘.>
“네, 그럼 30분.”
* * *
“혼자 계시네요.”
예상대로 조교실엔 남희 누나 혼자였다. 누나 역시 급하게 나온 듯 젖은 머리를 하고 있었다.
“어서 와, 놀랐지?”
“아녜요. 안 좋은 일이라도 생긴 건가요?”
“아마 주물공장에서 사고가 났나 봐. 갑자기 도와줄 애들을 찾는데 네가 제일 먼저 생각나더라.”
천영건 교수는 일흔이 가까운 백발의 명예교수였다. 교내에서 실질적인 권한은 없지만, 미술계에서 가장 파워가 센 인물 중 한 명이었다.
“너도 알지? 천교수님 연구조교로 들어가는 거 쉬운 일 아니라는 거 말야.”
“네 그 얘긴 들었습니다.”
천 교수님은 가장 실력 있는 학생들을 뽑아 교수님 작업을 돕도록 했는데, 대부분 복학생 형들의 몫이었고 일이 힘들고 고되다고 들었다. 그러나 교수님 밑에서 4~5년 일을 배운 선배들은 모두 수도권에서 시간강사 한자리 씩 맡은 걸로 보아 교수님이 뒤를 봐준다는 소문이 있었다.
말하자면 우리 학교 내에서도 엘리트 코스였고, 교수님 밑에서 작업을 돕는 형들을 우린 자연스럽게 ‘연구조교’라고 불렀다.
“군대 다녀오기 전에 좋은 경험이 될 거야.”
“네, 누나, 신경 써주셔서 감사합니다.”
남희 누나가 윙크 비슷한 눈웃음을 보냈다.
“그런데 며칠 동안 교수님 작업실에서 숙식해야 해.”
“오늘부터요? 그럼 당장 월요일 출석은...”
“전공 수업은 출석 체크 해줄 수 있어.”
“네, 감사합니다.”
“그리고 너희 학년에 중에 한 명 더 데리고 갈 사람 있을까?”
난 현모의 얼굴을 젤 먼저 떠올렸다.
“아마 현모 형이라면 시간이 될 것 같습니다.”
“그럼 현모에게 연락해봐.”
남희 누나는 테이블 위에 있던 전화기를 내 앞으로 밀어준다.
“아뇨. 공중전화 쓸게요. 금방 돌아오겠습니다.”
죄를 지은 사람처럼 남희 누나 옆에 있는 것이 불편했다. 하림과의 일을 알고 있을 텐데, 묻지 않는다. 그러고 보면 천교수님의 일을 추천해준 것도 하림과의 인연이 아니었다면 내 순서까지 올 일은 아니었다. 하림에게 새삼 고맙고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늦잠 자던 현모를 데리고 조교실로 들어서자 소름끼치는... 익숙한 얼굴이 그곳에 있었다.
“여... 대영 오랜만이다.”
나는 식은땀이 났다. 우리를 천교수님의 작업실로 데려간다는 대학원생이 혜연 누나의 연인 성철 선배였기 때문이다. 성철 선배가 천 교수님의 연구조교 중 한 명이란 사실을 미처 몰랐다.
“네, 선배님 안녕하셨어요.”
가볍게 목례만 하려고 했지만, 불쑥 손이 나와 악수를 청했다. 커다란 성철 선배의 손에 잡힌 손이 떨리고 있다. 몇 달의 시간이 지났지만, 아직 상처가 남은 것이다.
“조교님, 설마 우리가 데려갈 얘들이 1학년인가요?”
남희 누나를 대하는 성철 선배의 말투에서 마뜩잖음이 느껴졌다.
“얘네 일 잘해요. 얼굴을 보세요. 잘하게 생겼잖아요.”
“교수님은 3학년이라고 말씀하시던데...”
“충분해요. 제가 책임질게요.”
남희 누나가 대화를 끊고 다른 서류에 눈길을 돌리자 성철 선배는 할 수 없다는 듯 우리를 바라본다. 나는 그를 향한 분노와 투쟁심을 감추려 애를 썼다.
“가자! 일산까지 가려면 길이 멀다.”
주차장에 주차되어있던 승합차엔 또 다른 연구조교 준열 선배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준열 선배는 좋지 않은 인상처럼 행동도 예의 없고 성급했다.
“선배님, 안녕하... 어이쿠!”
우리가 차에 타고 자리를 잡기도 전에 승합차는 급하게 출발했다. 우리는 고양시로 가는 국도 주변의 공장의 굴뚝 어우러진 농촌의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성철 선배에 대한 내 감정만큼이나 묘하고 이질적인 풍경이었다.
“선배님, 저희가 어떤 일을 하게 될까요?”
현모가 앞자리에 탄 선배 중 한 명에게 물었다.
“일? 너희가 무슨 일을 해?”
준열 선배의 인상만큼이나 차가운 말투에 넉살 좋은 현모가 무안을 느낀다. 룸미러로 보이는 그의 표정에서 음침함이 느껴졌다.
“경화제 잘 찾아놓고, 배합 실수만 안 하면 돼. 마음이 바쁜데 이것저것 물어보니까 준열이가 성가셔하지.”
우리 쪽으로 몸을 돌린 성철 선배가 대신 대답을 했다. 학교에서 가장 악명높은 선배가 우리와 한 공간에 있었다. 그것도 며칠씩이나 붙어있어야 한다니... 만만치 않은 일정이 예감되었다.
“교수님이 설명해주실지는 모르겠는데, 주물공장에서 사고가 났어.
그래서 다 원래 다섯이던 연구조교가 우리 둘만 남은 거고...”
“됐어. 애들한테 뭐 그런 얘기까지 하냐.”
모든 선배가 착하고 친절한 것은 아니었다.
“최근에 종각 앞에 천종건 교수님 조각물 들어선 거 알고 있나?”
성철 선배는 서울말과 사투리를 섞어가며 사용했다.
“아, 네네 선배님.”
“그거랑 비슷한 거 만드는 거야.
시간이 촉박해서 너흴 부른 거니까,
정신 바짝 차리고 도와도.”
“네 열심히 하겠습니다. 선배님.”
성철 선배가 말하는 사이 준열 선배는 창밖으로 고개를 돌리며 쓴웃음을 지었다. 둘의 사이도 보기만큼 좋아 보이진 않았다.
“며칠 동안 전빵은 구경도 못 하니까, 필요한 거 있으면 지금 말해.”
우린 국도의 마지막 휴게소에 들러 점심을 먹고 다시 출발했다.
구불구불하고 덜컹거리는 시골길을 한참 동안 들어가자 고추밭으로 둘러싸인 작은 분지에 비행기 격납고만 한 창고 한 채가 보였다.
“천교수님 작업실은 처음이지?”
차고 문을 열고 짐을 내리는데 작업실의 규모에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다. 작업실의 높은 천정엔 대형작업을 위한 윈치가 매달려 있었고, 작업실 내에 숙소와 창고로 보이는 컨테이너 4개가 이단 높이로 쌓여있었다.
잠시 후 2층 컨테이너에서 교수님이 내려왔다.
“교수님, 안녕하십니까?”
“그래 고생했다. 점심은?”
“휴게소에서 먹고 왔습니다.”
천 교수님은 키가 작고 마른 체형의 혈색 좋은 얼굴의 노인이었다. 미술잡지엔 매달 관련된 기사가 실렸고, 뉴스에도 간간이 얼굴을 내비치는 당대 최고의 유명작가 중 한 명이었다.
“너희가 지원 나온 애들?”
천 교수는 그제야 우리를 쳐다봤다.
“네, 조교실에서 추천해줬습니다. 일 잘한다고 하네요.”
“그래. 남희가 그렇다면 믿을 만 한 거겠지.”
교수님은 더 자세히 묻지 않았다. 학교 강의를 쉰 지 몇 년 되었기 때문에 우리가 몇 학년인지 모르는 것 같았다.
“주물공장 스케줄이 바뀌어서 부랴부랴 너희까지 불렀다.”
“네 교수님.”
“필요한 거 있으면 성철에게 얘기해라.”
“넵!”
“식당이 머니까 음식은 배고프기 전에 시켜놓고, 면은 불으니까 밥이나 요리시켜라.”
“넵! 감사합니다. 교수님.”
“성철아, 이건 일단 급한데 쓰고....”
교수님은 지갑에서 수표 몇 장을 꺼내 성철 선배에게 건넨다.
그리고 뭔가 생각난 듯 다시 안주머니의 장지갑에서 좀 전과는 색상이나 질감이 다른 재질의 수표 몇 장을 더 꺼낸다.
“이건 잔돈으로 바꿔 놔. 은행 갈 시간 없으면 요리시킬 때 부탁하던지.”
“네, 선생님.”
거의 천만 원에 가까운 돈이 눈앞에서 오가는 모습에 놀라고 있을 때 밖에서 낮고 웅장한 엔진음이 들렸다.
우린 모두 소리가 나는 문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난 급한 볼일이 생겨서 지금 시내 좀 다녀올 게.”
클랙슨 소리로보아 교수님을 태우러 온 차량 같았다.
“네, 다녀오십시오. 교수님!”
선배들의 깍듯한 인사 속에 교수님은 서두르는 걸음으로 작업실 밖으로 나갔다.
운전석에 앉아있던 여자가 팔걸이와 대시보드를 짚더니 조수석으로 옮겨 타는 모습이 보였다. 허벅지까지 올리오는 짧은 원피스의 젊은 여자였다.
“요즘 천 교수님 경기가 좋다고 하더니 사실인가 보네.”
교수님과 원피스녀를 태운 스포츠카는 우렁찬 배기음과 함께 사라졌다.
“상황이 심각한데 자리를 비우시면 어쩌냐.”
“뭐 어째, 저 일이 더 급한 거겠지...”
“크크크.”
벌어졌던 입을 다물지 못하던 현모가 내 곁으로 조용히 다가왔다.
“원래 성공한 남자들은 저런 가시나 하나씩은 다 갖고 있나 보다.”
현모와 내가 교수님의 씀씀이에 놀라는 사이 두 명의 선배를 작업준비를 시작했다. 잠깐 주변을 정리하고 작업복으로 갈아입는데 아까와는 다른 배기음의 승용차가 작업실밖에 멈춰 섰다. 모델 두 명이 도착한 것이다.
성철 선배가 모두를 불러 모았다.
“일단 모델분들하고 인사부터 하고 시작하자.”
‘모델이면 설마 누드모델?’
현모가 귀엣말로 속삭인다. 학교에서 보던 모델들은 평범한 얼굴에 소박한 차림이었는데 지금 도착한 모델들은 몸매가 드러나는 옷차림에 문을 열자마자 강한 향수 향이 풍겼다.
“안녕하세요?”
“네, 갑자기 오시게 해서 죄송합니다.”
“그러게요. 길이 머네요.”
“그래도 모델이 빨리 섭외가 돼서 다행입니다.”
그런데 뒤에 서 있던 또 한 명의 얼굴을 보는 순간 나도 모르게 표정이 굳어졌다. 하림 미술학원에서 만났던 ‘다혜씨’였다. 화장법이 틀려서 조금 달라 보이긴 했지만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그녀도 내 얼굴을 알아본 듯 잠시 행동이 어색해졌다.
“탈의실은 2층이고, 화장실은 밖에 있습니다.
옷 갈아입는 동안 저흰 작업 준비해놓겠습니다.”
“천장이 높아 추우니까 난로도 부탁드려요.”
여자들은 망설임 없이 2층으로 올라갔다. 그들이 2층 컨테이너로 사라지는 동안 우린 뒷모습을 한참 동안 바라보고 있었던 것 같다.
“간단하게 설명부터 해주고 작업 시작할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