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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화 43화 - 다혜와 선영 [1]


당시 건축법개정으로 천교수님의 조각물은 최고의 인기를 구가하던 시점이었고 여러 건축물 앞에 세워질 모뉴멘트를 동시에 만들던 도중에 주물공장의 실수로 납기 일정에 차질이 생긴 것이다. 어쨌든 현모와 나는 그 덕분에 일당인 센 고급 아르바이트를 하게 된 셈이다. 우리가 각자 사흘 동안 받게 될 보수는 30만 원이었다. 100만 원을 받는 월급쟁이가 자신을 중산층이라고 생각하던 시절이었으니, 단기 아르바이트로는 엄청나게 좋은 조건이었다. “그런데 사흘 동안 일하는 보수치곤 너무 많은 거 아닌가요?” 입이 귀에까지 걸린 현모였다. “어차피 몇억짜리 계약이라 교수님에겐 푼돈이야.” “그나마 주물공장에서 배상해줄 테고...” “교수님은 닷새 예상하고 산정한 경비인데, 준열과 나는 사흘 만에 끝낼 생각이야. 그래서 너희가 잘해줘야 해.” “네! 열심히 하겠습니다!” “우리도 똑같은 일당 받고 일하는 거니까 꾀부리지 말고.” 이쁘게 말할 수 있을 텐데 준열 선배란 사람은 삐딱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나는 선배들과 현모의 대화가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2층 탈의실로 올라간 다혜 씨 때문이다. “자! 돈 얘기는 이만하면 충분히 한 것 같고...이제 일 이야기할까? 오늘 일정부터.” 그녀들이 옷을 갈아입고 내려오는데 시간이 지체되는 이유가 나 때문인 것 같아 마음이 편치 않았다. “밤 9시까지 모델링 마무리하고 바로 실리콘 뜰 거야. 새벽까지 실리콘 2차까지 끝내야 잘 수 있어. 일정이 빠듯하긴 한데 그래야 내일 여유가 생긴다. 오케이?” 성철 선배는 화이트보드 위에 작업 일정과 각자 준비해야 할 일들을 빼곡히 적어나갔다. 약품의 배합비율은 물론 경화시간까지 모두 기록해두었다. 투박하고 거친 줄로만 알았던 성철 선배의 또 다른 모습이었다. <끼익> 2층 컨테이너의 문 열리는 소리였다. 모두의 시선이 그곳으로 향하는가도 그런데 그리 두텁지 않은 재질의 가운을 입은 속살의 실루엣이 비칠 듯 말 듯 아슬아슬한 그녀들이 계단으로 내려왔다. 가운의 절개선 사이로 보이는 하얀 속살이 묘한 느낌이 들게 했다. “대영아, 비닐 열어.” 나는 쪼갬볼이 군데군데 꼽힌 대형 모뉴멘트의 덮개를 열었다. 한눈에 봐도 나신을 한 여성의 추상 조각물이었다. 굳이 실제 인체모델이 필요할까 싶을 정도로 단순화된 추상작품이었지만 예술의 세계는 오묘하고 그 속을 더 알 수 없는 게 작가의 의도였다. “아직 좀 쌀쌀하네요.” 까무잡잡한 피부의 여자가 가운의 매듭을 풀며 옷 벗기를 망설였다. 코뼈가 높고 좌우로 솟은 광대 때문에 성격이 강해 보이는 여자였다. “갈탄 난로까지 때고 있으니까 금방 훈훈해 질 겁니다.” “바로 벗을까요?” “지금은 부분 포즈만 필요하니까 전기난로 옆에서 포즈 취해주세요.” “벗어요?” “아, 네, 그렇게 해주세요.” 모델은 양손으로 가운을 내리며 몸을 드러냈다. 가운에 가려졌던 허리선과 정확한 모양을 갖춘 가슴과 골반이 모습을 드러냈다. 예상 밖의 글래머였고 탄력이 느껴지는 섹시한 몸이었다. “다른 분은 저쪽에서 포즈를 취해주시면 됩니다.” 성철 선배는 준열 선배 쪽으로 다혜 씨를 안내했는데 아무래도 나를 의식해서인지 옷을 벗는 데 주저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아직 추우신 것 같은데 뜨거운 차 한 잔 드릴까요?” “감사합니다. 선생님.” 그녀를 모르는 척. 최대한 무심하게 말을 걸었는데 다혜는 잠시나마 놀란 모양인지 학원에서 부르던 대로 나를 선생님이라고 불렀다. 우리 사이를 의심할만한 실수는 아니었지만 나 역시 당황했다. “네, 그렇게 해주세요. 걔가 아직 초보라 부끄럼을 타네요.” 검은 피부 여자의 말에 다혜의 얼굴이 더욱 붉어졌다. 내가 차를 내오는 사이 다혜의 나신을 가리던 가운 그녀가 앉아있던 의자에 얌전히 포개어져 있었다. 난 자꾸만 속살로 향하는 눈길을 다그치며 그녀의 가운 옆에 찻잔을 놓았다. 친절하지만 최대한 사무적인 표정과 행동처럼 보이도록 노력했고, 그것이 그녀를 돕는 길이라 생각했다. 현역모델이고 배우 지망생이라고 하더니 확실히 이목구비가 뚜렷하고 몸의 비율이 틀렸다. 골격은 가늘고 피부도 잡티 없이 깔끔했다. 하림 미술학원에서 만났던 다혜 씨를 이런 장소에서 마주치리라곤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평소 알던 여자의 나체를 본다는 것이 이처럼 난처한 일이 될 줄 몰랐다. “다혜야, 우리 잠깐 쉬자.” “네, 언니.” 30분 정도가 지났을까 다혜가 언니라고 부른 검은 피부의 여자가 처음으로 다혜에게 말을 걸었다. 그녀는 누드모델 일을 하면서도 다혜라는 이름을 그대로 쓰는 것 같다. 아니 어쩌면 다혜라는 이름이 본명이 아닐 수도 있겠다. “화장실 다녀올게요.” “아, 네 화장실은 나가서 오른쪽에 있습니다.” 다혜가 의자 위에 놓여있던 가운을 걸치는 사이 훔쳐보는 것처럼 처음으로 그녀의 몸매를 눈여겨볼 수 있었다. 큰 키에 가슴이나 골반까지 떨어지는 비율도 좋았고 맑고 잡티 없는 피부까지 흠잡을 곳이 없는 완벽한 몸매였다. “와... 시발 저런 여자랑 뒤치기하면 어떤 기분일까?” 현모는 밖으로 향하는 그녀들을 보면서도 잠시도 쉬지 않고 떠들어댔다. “하얀 여자애 죽이지?” 다혜를 쳐다보는 현모의 그런 눈길이 싫었다. “실리콘 꺼내왔어?” “실리콘?” “모델링 끝나면 바로 배합인데 뚜껑이라도 따놔야 할 거 아니냐?” “새끼... 갑자기 까칠하네.” “현모야... 한눈팔면 실수한다. 정신 차려.” 쪼갬볼을 꽂고 있던 성철 선배에게까지 잔소리를 들은 현모는 입을 삐죽이며 창고로 들어갔다. 성철 선배는 상황판단이 빠른 사람이었다. 실질적으로 우리가 하는 일은 노가다와 다를 바 없었는데, 성철 선배는 작업반장처럼 일을 배분해주면 팀을 일사불란하게 만들었고, 또래의 준열 선배까지 수족처럼 부렸다. 성철 선배가 나와 준열 선배 사이를 오가며 쪼갬볼의 위치를 그리는 사이 그녀들이 돌아왔다. 현모가 커피잔이 놓인 쟁반을 갖고 모델들에게 다가갔다. “그런데 누님들, 소속사가 어디예요?” “소속사요?” 검은 피부의 여자는 믹스커피를 건네는 현모를 싫지 않은 표정으로 바라본다. “다른 모델하곤 다른 것 같아서요. 몸매랑 피부가 월등하시잖아요. 그래서 특별히 관리받은 것 같아서요.” “아뇨, 딱히 소속사도 관리받는 곳도 없는데, 호호호.” 뻔한 칭찬에 여자는 헤픈 웃음을 지었다. “힘든 자세가 있으면 말씀해주세요. 돌아가면서 다른데 하면 되니까.” 넉살 좋게 여자에게 추근대는 현모의 모습을 선배들은 기가 막힌다는 듯 쳐다보고 있었다. 다른 사람들이 담배와 커피를 홀짝거리는 사이, 나는 다혜 씨에게 슬쩍 말을 걸었다. “왜 커피 안 드세요?” “커피 마시면 화장실 가고 싶잖아요.” “아... 그럼 따뜻한 물이라도 드릴까요?” “네, 고맙습니다.” 그런데 주방으로 가는 나를 다혜가 뒤따라오는 것이 아닌가. “고마워요. 모른 척해줘서.” “고맙긴요, 갑자기 나타난 제가 죄송하죠.” “일 시작한 진 얼마 안 됐어요. 아무래도 보수가 좋다 보니까...” “다혜 씨 같은 모델 덕분에 저희도 작업하는 거잖아요. 이상하게 생각하실 필요 없어요.” “고마워요. 그렇게 말해줘서.” “학원에서처럼 편하게 대해주세요.” “아, 그러고 보니 학원 관두셨다고 하던데...” “네 맞습니다. 사정이 생겨서... 물 뜨겁습니다. 조심하세요.” 더 길게 대화하다간 하림이 얘기가 나올 것 같았기 때문에, 난 서둘러 대화를 끝냈다. 어쨌든 나와 다혜의 불편했던 분위기는 많이 누그러졌다. 그녀의 벗은 몸을 아무렇지 않게 똑바로 바라볼 여유가 생긴 것이다. 다혜는 전체적인 몸의 분위기나 유연성, 탄력, 크기, 하다못해 털의 양과 방향성까지 내가 본 가장 아름다운 몸매를 가진 여자였다. “모델링 마감까지 두 시간 남았다. 부지런히 하자.” 성철 선배가 대형 심봉대 사이를 돌며 작업을 독려했다. “준열아, 헤라 쓰지 말고 손으로 하라고.” “응, 그래.” “저 새끼 또 지랄이네, 어련히 안 할까 봐.” 성철 선배가 등을 보이자 눈앞에선 고분고분하던 준열 선배가 속삭이듯 짜증 섞인 말을 내뱉었다. 성철 선배에게 불만이 많아 보였는데 이상하게 성철 선배만이 그 사실을 모르는 것처럼 보였다. 다혜가 ‘선영 언니’라고 부르던 모델은 처음의 어색하고 투덜거리던 태도는 사라졌다. 처음의 강한 인상과는 달리 본래 웃음이 많고 서글서글한 성격 같았다. 다혜 역시 부끄러움을 잊고 일에 집중했다. 모델들이 씩씩하게 잘 참아준 덕분에 두 시간 정도를 거의 쉬는 시간 없이 마무리 작업에만 매달릴 수 있었다. 오후 8시가 되어서 중국집 용달차로 저녁 식사가 배달되었다. 현모와 나는 등받이가 없는 플라스틱 의자 몇 개를 바닥에 깔았고 준열 선배가 능숙한 솜씨로 합판 두 장을 겹쳐 깔았다. 합판 테이블은 제법 그럴듯한 대형 식탁이 되었다. “빼갈은 누가 시켰어?” 잔돈을 받아들던 성철 선배가 준열 선배를 노려본다. “가볍게 입가심만 할 거야.” “밤새는 날인데 술을 시켰다고?” “그래서 세 병만 시킨 거잖아. 애들 보는데 적당히 갈궈라.” 선배 둘과 선영, 다혜, 그리고 현모와 나. 여섯 명이 합판 테이블에 붙어 앉았다. 선영은 알몸에 가운만 걸쳤고, 다혜 씨는 2층에 올라가 셔츠를 입고 내려왔다. 그러나 속옷을 제대로 챙겨 입지 않은 탓에 몸의 라인이 그대로 드러났고, 특히 고개를 숙이거나 몸을 움직일 때마다 남자들의 시선이 따라다녔다. 어정쩡한 길이의 가운은 그녀의 다리 안쪽의 허벅지 맨살을 그대로 드러나게 했다. 속옷 자국 때문에 작업실에 도착하기 전부터 팬티를 입고 있지 않은 것 같았고, 어쩌면 지금도 노팬티로 있을 그녀가 계속 신경이 쓰였다. 난 탈의실에 걸려있던 나와 현모의 재킷을 가져와 선영과 다혜의 무릎을 덮어주었다. “고맙습니다.” “어머, 저분 매너 있으시다.” 한동안 현모의 따가운 눈총을 계속 받아야 했다. 운전해야 하는 다혜 씨를 제외한 나머지 다섯 명이 빼갈 두 병을 고루 나눠 마셨고, 모두가 적당히 기분 좋을 만큼 취했다. “식사 끝내고 모델료 정산해 드릴까요?” “어이쿠 깜짝이야. 모텔비라 그러는 줄 알았다.” “호호, 모델비건 모텔비건 일 끝나고 주세요. 지금은 알몸이라 보관할 데도 없잖아요.” 준열 선배의 민망스러운 농담을 선영이 가볍게 웃어넘겼다. 그리곤 마치 일부러 그러는 것처럼 앞섶 사이가 벌어지면서 젖꼭지 근처까지 가슴을 드러내 보였다. “크크. 벗었을 땐 몰랐는데, 가운을 입으니까...” 갑자기 준열 선배이 시선이 선영의 가슴골 사이에 박혔다. 너무나 노골적인 눈빛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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