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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화 45화 - 복수 [1]


문 여는 소리와 함께 들이닥친 한기 때문에 잠에서 깼다. 그림자를 보니 오전 열 시쯤 된 것 같다. 밤 새 땐 갈탄 난로 때문에 목 끝이 따갑다. 고양이 세수를 하고 컵라면에 물을 붓는 동안 선배들은 석고 틀을 준비했다. 준열 선배는 성철 선배에게 간밤에 있었던 일과 새벽에 혜영 누나가 나간 일에 관해서 묻지 않았다. 으레 있었던 일처럼 말이다. 선배는 노련한 미장이처럼 실리콘 위에 석고를 입혀나갔다. 정오가 되기도 전에 겉 틀 4개가 만들어졌는데, 작업실 바닥은 물론 작업복에도 석고가 튄 흔적이 안보일 만큼 깔끔한 솜씨였다. 실리콘이 다치지 않도록 흙을 빼내는 작업이 오래 걸렸지만 해가 지기 전에 우린 완벽한 겉들을 얻을 수 있었다. 나는 성철 선배를 여전히 미워했지만, 작업 감각이 뛰어난 배울 점이 많은 남자란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준열아, 바로 폴리코트로 넘긴다.” “새벽이나 되어야 끝나겠네.” 준열 선배는 구시렁대면서도 성철 선배의 작업지시엔 토를 달지 않았다. FRP로 만든 복제품을 주물공장에 인계하는 것까지가 우리의 일이었다. 재료가 경화되는 시간을 맞추려면 새벽까지 쉴 수가 없었기 때문에 끼니도 거른 채 일에만 매달려야 했다. 몸을 구부린 자세로 하는 일인 데다, 재료가 무겁다 보니 허리가 끊어질 듯 아파졌다. “끝끝! 끝이다!” 밤 11시. 준열 선배가 방진 마스크를 벗어 던지며 바닥에 주저앉았다. 모두 지쳐 쓰러지기 직전이었다. “우워.... 이제 끝난 건가요.” “경화되는 거 지켜봐야지.” 성철 선배는 사무실로 들어가 어디론가 전화를 걸더니 한참 뒤에야 돌아왔다. “주물공장서 내일 오후에 실으러 온다네.” “오후 몇 시?” “4시쯤 얘기하더라.” “그럼 석고 뜯는 시간 빼고도 12시간은 남았네.” “그렇지.” “그럼, 한잔 마시자.” 현모와 함께 샤워를 마치고, 작업복을 세탁기에서 꺼내는데 밖이 소란스러워졌다. 작업실에 놀러 온 선영과 다혜를 현모가 발견한 것이었다. “우앗~ 모델 누님 오셨네요.” “월요일엔 딱히 할 일도 없어서 놀러 왔어요.” “잘 오셨습니다. 헤헤” * * * 긴장이 풀린 데다, 그녀들이 가져온 술과 음식으로 배를 채워 현모와 나는 소파 구석에서 노곤하게 기대있었다. 선배들과 선영, “포커 칠 줄 아니?” 준열 선배가 우리에게 물었다. 작업실에 온 지 이틀이 지났지만 준열 선배가 내게 먼저 말을 건 것은 처음이었다. “포커요?” “그래 7구. 세븐오디.” “재수할 때 조금 만져봤죠. 고향에서.” “대영인?” “족보만 겨우 알고 있습니다.” 손기술을 익힌 적은 없지만 매일 게임을 복기하던 아버지 옆에서 노름꾼들의 심리에 대해 지겹도록 듣곤 했다. 노름판에서 자란 내게 준열 선배가 먼저 카드게임을 제안한 것이다. 나는 뭔가 좋은 기회가 온 것 같아 알 수 없는 흥분을 느꼈다. “선영 씨도 하실 거죠?” “배워보고 싶긴 한데... 할 줄 몰라요.” “저도 구경만 할게요.” 선영이 준열 선배의 옆에 붙어 앉자, 다혜는 내 옆으로 의자를 옮겼다. “대영씨, 파이팅...” “뭐야, 저렇게 대놓고 대영이 편인 거야?” 성철 선배에게 아르바이트비로 받은 봉투엔 34만 원이 들어있었는데, 나는 그중 4만 원을 판돈으로 꺼내놨다. 패 돌리는 사람이 수십번 바뀌었고, 준열 선배나 현모 같은 초보자의 실력을 파악하기는 어렵지 않았다. 그들은 세븐오디를 패 떠먹기 게임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였고, 여자들이 옆에 있어서인지 의욕이 앞서있었다. 문제는 성철 선배였다. 나는 그와 마주 보는 자리에서 표정과 습관을 유심히 관찰했다. 그는 큰 고민 없이 시원스럽게 베팅하는 스타일이었지만 특별한 규칙이나 루틴을 발견하긴 어려웠다. 나는 긴 시간 동안 나만의 베팅 습관을 다른 사람들에게 알리기 위해 애를 썼다. 큰 베팅엔 따라가지 않았고 나쁜 패엔 반드시 죽었다. 지루했지만 성실하게 루틴을 지켰고 이제 다른 플레이어들은 모두 나를 수비형 초보자로 생각해 나의 베팅엔 신경 쓰지 않았다. 한참을 기다리다 머릿속에 그려뒀던 상황이 완성되어가는 느낌을 받았다. 6구째 메이드였다. 반면 성철 선배는 4구서부터 거침없는 베팅을 이어가고 있었다. 그의 액면은 ♠7, ♣7, ◆K ◆J... 아마도 봉 이상을 잡고 있다고 봐야 하는 상황이다. “1만 원으로.” 성철의 베팅이었다. 우리의 판돈 규모에 비하면 제법 큰 금액이었다. “난 죽어.” “저도 죽습니다.” 준열과 현모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바로 카드를 뒤집었다. “저는 콜이요.” 모두 살짝 놀란 표정으로 봤지만, 난 거의 오링에 가까운 상황이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따라가는 것처럼 연기했고 실제 상황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때 성철의 얼굴에서 잠깐이지만 희미한 미소를 봤다. ◆3, ◆4, ◆5, ◆Q 의 포플을 보고 성철 선배가 웃은 것이다. ‘알겠다.’ ◆7이 성철에게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는 봉이 아니라 포커를 메이드로 잡고 있었다. 풀하우스일 가능성도 있지만, 나의 예감은 그가 같은 패 4장을 들고 있다고 말하고 있었다. 히든패가 돌았고 베팅할때가 오자 성철선배가 내게 묻는다. “너 있는 것만큼만 베팅하면 되지?” 자신 있는 목소리와 표정이었다. 포카드를 들고 레이즈를 못해 아쉬웠던 마음이 여실히 드러났다. “네... 전 올인입니다.” 그는 나의 무표정에서 싸늘한 기운을 느꼈으리라. 혹시나 했을 것이다. 예상대로 성철의 패는 ◆7, ♥7, ♠7, ♣7 포카드였다. 나는 ◆2, ◆3, ◆4, ◆5, ◆6 스트레이트 플러쉬. 판돈이 모자란 것이 아쉬울 뿐이지만, 그에게 좌절감과 패배를 안겨주는 것만으로 충분했다. 내가 이긴 것은 행운이었지만 4구에 포카드를 완성한 성철은 게임 내내 이기고 있던 자만심과 태만으로 인해 스스로 무너져버렸다. 내 판돈은 갑자기 늘어났고, 성철 선배는 지갑에 있던 수표를 몽땅 털어서 테이블 위에 올려놨다. “패 돌려.” 웃으며 호탕하게 말하지만, 그의 눈 밑 피부는 단풍처럼 울긋불긋해졌다. 그가 흔들리고 있을 때 더 화나게 만들고 싶었다. 역시 6구째 기회가 왔다. “받고, 3만 원 더.” “응?” 모두 바닥에 깔린 내 패를 살핀다. 지금까지 수비적이던 막내가 갑자기 레이즈 했으니 당연한 반응이다. “플러시 뜬 거야?” “설마... 샤킹은 아니지?” “죽어야겠다.” 현모가 자신의 순서도 아닌데 패를 뒤집어버린다. 혼자 남은 성철은 높지 않은 패를 들고 확인하러 들어와야 했다. “그래, 콜.” 준열 선배가 마지막 패를 돌렸다. 그리고 나는 건성으로 패를 확인하는 척만 했다. “성철, 보스.” “일단 삥...” 성철이 동전을 던져놓고 뒤로 몸을 기대앉는다. “선배님... 하프면 7만 원 베팅 가능한가요?” “푸핫! 짜식 시위하는 거야?” 준열 선배는 재미있어 죽겠다는 듯 웃으며 테이블에 몸을 더 가까이 다가와 앉았다. 결국 성철은 콜을 못 하고 패를 접었다. 허탈한 표정이었다. 쉽다. 너무 쉽게 큰돈을 벌었다. “너 패가 뭔데?” 현모가 슬쩍 내 카드를 뒤집었다. 도박판에선 있을 수 없는 무례한 행동이지만, 내와 사전에 모의했던 행동이었다. “뭐야... 원 페어잖아?” “매너 없이 무슨 짓이야.” 순간 선배들의 호흡이 멈췄다. 내 에이스 원페어를 본 성철의 눈빛이 예사롭지 않게 변했다. “푸하하핫” “당했네, 당했어.” 성철 선배는 2층에서 가져온 장지갑을 무릎 옆에 두었다. “성철아 그거...” “시끄러 내가 알아서 할게.” 아마 공금으로 쓰는 지갑에 손을 대려는 것 같았다. “이참에 룰도 바꾸자. 맨 처음 딜러에게 4장을 받고 그중 한 장은 버리는 거로.” 서비스 카드를 끼워주면 확률적으로 큰 패가 뜬다. 당연히 베팅액도 올라갈 것이고 나에겐 나쁠 것이 없었다. 게임이 안 풀릴 땐 소극적으로 운영하는 것이 포커판의 상식이지만, 성철은 몸을 사리지 않았다. 4, 5구에 강한 베팅으로 판을 주도하려 했지만, 따라가는 사람이 없었다. 실속 없는 판은 성철에게 내줘 그를 허탈하게 만들었다. 어쩌면 성철을 제외한 모두가 내 편처럼 느껴졌을 정도였다. 그러나 성철의 판돈이 워낙 커서인지 지루한 공방은 새벽까지 이어졌다. 내가 이전의 성실하고 수비형 플레이어로 돌아오자 성철은 좀이 쑤시는 듯했다. “너무 지루하네.” 몇 시간 동안의 의미 없는 콜, 첵, 다이가 반복되고 있었다. 성철과 같은 스타일은 게임의 주도권을 가져갈 수 있고 전체적인 승률이 올라간다는 장점을 갖고 있지만, 이미 그 패턴을 내가 읽고 있었다. 오늘 성철은 모든 돈을 잃는다해도 큰 타격을 입을 사람이 아니었다. 그래서 나는 그에게 모욕적인 패배를 안기고 싶었고, 동이 틀 무렵 마지막 기회가 찾아왔다. 내 액면은 ♥6, ♠10 성철은 ♠Q, ♣10 이었다. 4구부터 시작된 성철의 레이즈에 다들 관성처럼 콜한다. 그러나 나는 이번 만큼은 끌려다니지 않기로 했다. “1만 더.” 내가 4구에서 레이즈하기는 처음이었다. 모두가 한참 동안 내 패를 뚫어지라 쳐다보더니 반신반의하는 표정이었다. 그리고 5구에 ♣2가 들어왔다. ♥6, ♠10, ♣2... 액면 상으론 완벽한 똥패다. 성철의 패는 ♠Q, ♣10, ♣4... 그 역시 판단하기 애매하다. “1만부터.” 성철은 내 패를 점검하려는 듯 평소보다 적은 금액으로 베팅을 시작했다. “콜.” “콜.” “콜.” 내가 콜만하자 다들 의외라는 표정. 그러자 안심하듯 성철은 다음 패를 돌렸다. 그리고 6구에 성철의 패에 ♣가 또 떨어졌다. ♠Q, ♣10, ♣4, ♣A 성철이 찰나의 순간이지만 고민하는 것처럼 보인다. 연기였을까. 그는 금액조차 틀리지않고 예상대로 움직여줬다. “5만.” 성철이 메이드일 가능성은 얼마나 될까. 주변에 빠진 숫자가 많아 스트레이트일 확률은 희박했고, 오히려 플러쉬로 보인다. 그러나 내가 4구 베팅을 했을 때, 미세하지만 그는 움찔거렸다. 성철의 스타일로 봐서 그의 손엔 클로버가 한 장도 없을 거라 나는 확신했다. “콜.” “콜.” 준열과 현모는 장고 끝에 성철의 콜을 받았다. “콜입니다.” 나역시 거절한 이유가 없다. 그리고 히든. 성철은 패를 보기도 전에 베팅부터 시작했다. “15만.” 모처럼 나온 큰 액수였다. 플레이어뿐 아니라 관람객들까지 성철의 얼굴과 바닥의 패를 번갈아 쳐다본다. 현재, 준열 선배는 높은 투페어일 확률이 높고, 현모는 스트레이트를 보고 따라오는 것 같았다. 성철의 블러핑을 알아차렸더라도 부담스러운 액수였다. “죽어...” “저도 죽습니다.” 준열선배와 현모가 판을 포기하자 홀가분하게 성철과 단둘이 남았다. “레이즈... 20만 더.” 나는 판돈을 세는 척하면서 40만 원 정도를 남기고 모든 금액을 베팅했다. 아까보다 더 큰 탄성이 터져 나온다. 모두의 머릿속에 내 패는 풀하우스로 보일 것이다. 판이 심상치 않게 흘러가고있다고 생각한 성철은 처음으로 손을 입가로 모으며 고민에 빠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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