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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화 46화 - 복수 [2]


평소의 성철 선배라면, 아니 정상적인 사고를 하는 사람이라면 이 상황에선 죽어야 맞을 것이다. 내가 4구에서 베팅했을 때 이미 손에 투페어가 있었고, 히든에 풀하우스가 완성되었기 때문에 마지막 베팅에서 큰돈을 튕겼다고 예상하는 것이 일반적인 상식이었다. “오케이, 좋아.” 그러나 성철은 그런 평범한 사람이 아니었다. “뭐야, 너 따라가려고?” “아니, 레이즈. 20만 받고 올인.” 성철 선배는 천 교수님의 지갑을 짚더니 망설임 없이 테이블 위로 던졌다. “안에 100만 원 정도 들었을 거야.” 지갑 안의 돈은 물론 성철의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지금 성철의 폭주를 막을 존재는 없었다. 동기엔 준열 선배조차도 못 말리겠단 표정으로 바라만 볼 뿐이었다. “야, 너희들 굳이 이렇게까지 해야겠니...” 내 앞엔 카드 7장과 40만 원이 놓여있다. 지금 털고 일어난다 해도 본전 이상은 한 셈이다. 앞에 쌓인 판돈이 유난히 커 보인다. “어쩔거야?” 성철 선배가 여유 있는 표정으로 내게 묻는다. 어쩌긴 뭘 어째. 이 순간만을 기다려왔는데... “남은 돈이 40만 원뿐인데... 사이드로 빼주세요. 괜찮죠?” “그래 인정. 콜부터 까봐.” 내 패가 궁금해 안달이 난 준열 선배가 나를 재촉한다. “높은 투페어면 형님 드세요.” 난 손안에 있던 패를 놓으며 성철의 눈을 바라보며 말했다. 10 두 장과 8 두 장이 테이블 위로 모습을 드러냈다. “10, 8 투피...? 이따위 패로 올인한거야?” 당혹감을 감추지 못한 준열 선배의 표정이 얼어붙었다. 성철의 얼굴은 붉고 푸른 물감을 쏟아놓은 것처럼 일그러져있었다. “넌? 넌 무슨 패야?” 성철이 들고 있던 카드는 ♥10과 ♥2였고, 히든엔 ♠2... “텐투피가 텐원피를 잡았네.” “대단하다 너희들...” 나는 처음부터 성철의 카드가 복선 없는 낮은 패였다는 것을 눈치채고 있었다. 성철은 실력은 높지만, 자존심이 강하고 뻥카에 능한 유형이었다. 언제나 게임을 주도하는 스타일의 성철이 블러핑하도록 흐름을 유도한 것이다. 성철 역시 내 패가 풀하우스가 아니란 것은 눈치챈 모양이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오판을 확신하고 있었고, 자신의 마지막 레이즈를 받은 내가 콜을 한 순간부터 넋이 나가 있었다. “현모 형, 계산 좀 해줘.” “응? 아, 그래.” 현모가 천 교수의 지갑에서 60만 원을 꺼내는 사이 나는 판돈을 정리해 가방에 담았다. 노름판의 승자는 개평인심이 넉넉해야 명대로 살 수 있지만, 나는 그럴 필요가 없다. 이미 성철의 자존심은 바닥까지 주저앉아버렸다. “선배님, 저희 먼저 일어나도 될까요?” 아직도 준열은 바닥패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다. 좀전의 상황을 복기하도 하려는 것일까. “어? 간다고? 지금 가면 내일 작업이...” 그러나 주변을 돌아보고는 내 말에 수긍하듯 고개를 끄덕인다. 우리가 이곳에 더 머물 수 있는 분위기가 아니었다. “다혜씨, 차 좀 얻어탈 수 있을까요?” 창고 문밖에는 3도어 해치백이 서 있었다. 조수석 의자를 젖혀 2열에 앉아보니 앞 시트에 무릎이 닿을 정도로 공간이 좁았다. “언니가 운전할래요? 전 지금 떨려서 운전대 못 잡겠어요.” “그래? 알겠어.” “키 큰 오빠가 조수석에 타세요. 뒷자리는 불편할 거예요.” “네... 감사합니다.” 선영의 옆에 앉게 되어 신이 난 현모가 올르자마자 차는 출발했다. 시골길을 덜컹거릴 때마다 비스듬히 앉은 다혜의 맨살이 느껴졌다. “저 얌전한 오빠는 이름이 뭐야?” 룸미러에 운전대를 잡은 선영의 얼굴이 스쳐 보였다. 그녀가 처음으로 내게 관심을 보이며 말을 걸었다. 이미 자정을 넘어 새벽이 가까워져 오는 시간. 시내로 내려오는 일산의 시골길은 가로등도 없이 어두웠다. “크크크 누님, 많이 놀라셨나 보다.” “패도 볼 줄 모르는 나도 심장이 쫄깃했잖아.” “넌 무슨 배짱으로 그리 세게 친 거야? 차라리 내게 맡겼으면 됐잖아. 마운틴였는데...” 그럴까? 현모가 들어왔더라도 성철이 그런 선택을 했을까. “저흰 일산 시내에 내려주세요. 택시 타고 갈게요.” “뭐하러 그래요. 어차피 가는 방향도 홍대 쪽인데.” 어떤 이유에서인지 선영의 말투엔 호감이 가득 묻어난다. “그럼 택시비라도 챙겨드릴게요.” “택시비는 됐고, 홍대서 술 한 잔 어때요?” “누님 지금 새벽인데 어디서...” 현모가 뒤쪽으로 슬쩍 신호를 주며 맞장구를 치고 있다. 아무래도 선영에게 마음이 있는 것 같았다. “호텔 바는 영업해요.” “대영아, 어쩔래?” 현모가 고개를 돌려 나를 쳐다본다. 짧은 순간 많은 정보가 오고갔고, 그의 눈빛은 간절히 뭔가를 바라는 것 같았다. 그러나 나는 긴장이 풀려서인지 머릿속이 텅빈 상태였기 때문에 눈을 감고 현모의 시선을 피했다. “누님, 죄송한데 다음에 기회를 주시겠어요?” “어머, 아쉽다...” “오늘은 대영이가 피곤한가 보네요...” “그럼 다음에 연락해줘요. 이웃끼리 맥주 한잔해요.” “네네, 연락드리겠습니다.” 흙먼지가 날리는 비포장도로를 벗어나자 다혜의 허벅지가 내 손등을 타고 올라왔다. 너무 갑작스러운 상황이라 손을 뺄 수 없었다. 창문을 살짝 열어 숨을 들이쉬는데 향긋한 다혜의 향수 향이 차 안 가득 풍긴다. 수연의 청순함과는 다른 성숙하고 농염한 여자의 냄새였다. 자신의 허벅지가 내 손 위에 놓였다는 걸 모를 리가 없을 텐데, 다혜는 개의치 않고 나에게 몸을 기댄다. 차는 더 흔들리지 않았고 말랑하고 폭신한 느낌의 속살이 손등을 가득 덮고 있었다. 목적지가 가까워져 오자 나는 손을 빼는 척 들어 올리면서 그녀의 허벅지 위에 손바닥을 스쳤다. 다혜의 몸은 그 형태뿐 아니라 피부의 톤과 쫀득한 느낌까지 완벽한 여신이었다. “그럼 다음에 뵙겠습니다.” 차에서 내리면서도 현모는 아쉬웠는지 꼭 연락하겠다는 인사를 잊지 않았다. 우리를 내려준 르망 해치백은 학교 정문에서 유턴하더니 합정역 방향으로 사라졌다. “아쉽다. 진짜 아쉬워.” “형, 오늘 나 재워줄 수 있지?” “너 말고 쟤네들을 재웠어야 했는데...” 아직 현모는 선영과 성철의 사이를 모르는 것 같다. 현모의 집에 도착하자마자 우리는 가방에 든 돈을 방바닥에 뿌리고 나눠 세기 시작했다. 2,858,000원. “이백팔십 오만 원!” 현모가 갖고 있던 돈까지 합치자 300만 원이 훌쩍 넘는 금액이 되었다. 1년 치 학비를 대고도 남을 금액이었다. “너 이거 받아.” 나는 수표 15장, 150만 원을 현모에게 건넸다. “내가 이걸 받아도 되는 거야?” “네 몫인데 뭘. 오늘 고마웠어.” “흐흐. 고맙다. 대영아.” “혹시 뒤탈이 생길 수도 있으니까, 일단은 쓰지 말고 기다려.” “뭔 탈?” “우리가 딴 돈, 그거 교수님 돈이잖아.” “성철 선배, 이 돈 채워 넣으려면 똥줄 타겠네.” 현모의 말대로 되어준다면 통쾌할 텐데... 아무래도 성철에겐 하찮은 금액일 것 같다는 느낌이 든다. “내일 학교 가자마자 우체국에 넣자. 집에 두지 말고.” “알겠어. 그럼 이제 약속한 거 지켜야지.” “약속?” “그래. 너랑 성철 선배 어떤 사이야? 왜 못 잡아먹어서 안달인데?” “별거 아냐. 듣고 나면 실망할 수도 있어.” “시작해봐. 궁금해서 미치겠다고.” 난 학기초에 있었던 성철과 혜영 누나의 그날밤의 일을 다시 떠올려야했다. 그것은 어쩌면 합의됐거나 연출된 강간 현장이었지만, 짝사랑했던 여선배의 그런 모습을 목격한 것은 충격이었다. “그래서?” 한참동안 내 말을 듣던 현모의 반응은 의외였다. “그래서라니... 짐승도 아니고 여자친구에게 그런짓한 인간이 정상이냐.” “너도 참...” 사실 오랜 시간 마음에 품고 있던 상처였지만 현모에게 털어놓고 나니 별것 아닌 것처럼 느껴지는 것도 사실이다. 더구나 지금은 사랑스러운 수연을 여자친구로 두고있지 않은가. “남녀관계는 모르는거야. 나도 가끔 선미가 무서울때가 있으니까.” “됐어, 임마.” “암튼, 혼자 좋은 거 봤놓고 승질은... 담에 혜영 누나한테 고맙다고 해.” 천 교수님 작업실에서 있었던 일은 조용히 마무리되었고, 성철에게 품고 있던 나의 감정도 모호해진 상처처럼 점점 잊을수 있게되었다. 그리고 기말시험을 치르기 직전, 4학년 졸업전시를 오픈했는데 나는 그곳에서 오랜만에 성철과 혜영누나의 모습을 발견했다. 다른 졸업생들과 함께 있는 그녀에게 축하 인사를 전하고 싶었지만, 성철선배의 눈치가 보였고, 나 역시 수연을 포함한 1학년 일행과 함께였기 때문에 상황이 여의치 않았다. 혜영 누나에게 감정을 느낀다거나 미련이 남은 것은 아니었지만, 제대로 인사도 못하고 연락 끊은 일이 계속 마음에 걸렸다. “오늘 밤 뒤풀이 갈 거야?.” 수연이 잠깐 거리를 둔 틈을 노려 현모가 다가와 말을 건넨다. “뒤풀이?” “졸전 뒤풀이한다잖아.” “됐어. 거길 내가 왜 가.” “너 아직도 그러냐?” “.......” “혜영 누나가 마음에 걸려?” “그건 아냐.” “가을에 결혼한다던데.” “결혼?!” “아직 소식 못 들었구나?” 선생님이 되지 못하면 시집가야 한다던 혜영 누나의 한탄이 떠올랐다. 이제 나와는 상관없는 타인의 일이었지만. “너 꼭 데리고 오라더라.” “누가?” “성철 선배가.” “말도 안 돼!” “그러니까. 김성철은 정말 난 놈이야.” “......” 믿을수 없다. 말도 안되는 소리. “작업실서 그 난리를 피운 후배를 이렇게까지 챙길 줄 몰랐다.” “.......” 퇴역 장성 출신인 성철의 부친이 학교 이사진과 막역한 사이라는 소문이 퍼져있었다. 다음 학기부터 성철 선배가 학부 강의를 시작한다는 말도 있었다. 성철보다 나이 많은 조교 형이 그에게 유독 존대했던 이유도 이와 무관치 않을 것이다. “갈꺼냐고!” “몰라, 생각해볼게.” “생각은 무슨. 너도 이제 정리해. 깔끔하게 잊어.” 인정하기 싫었지만, 성철 선배는 매력이 넘치는 남자였고, 예술가적 기질과 리더쉽까지 겸비한 인재였다. 내가 이 바닥에서 살아가는 한 계속 부대껴야 하는 얼굴이었다. * * * 아르바이트를 끝내고 밤늦은 시간, 현모와 산울림 소극장 앞에서 만났다. 1차 뒤풀이를 마친 사람들은 성철 선배의 작업실에 모여 밤샘 파티를 즐기기로 되어있었다. 현모와 나는 주소가 적힌 작은 종잇조각을 잡고 골목길을 헤매다가, 대문 틈으로 붉은 조명이 새어 나오는 한옥을 발견했다. 대문을 넘어서는 순간, 집을 가득 채운 사람의 숫자에 놀랐고, 아기자기하게 꾸며진 정원에 감탄했다. 키 큰 감나무가 반쯤 담장에 걸쳐 있었고, 앵두 같은 키 작은 과실수가 담벼락을 따라 정돈되어 있었다. 키치 느낌의 오브제와 선명한 색상의 페인트가 칠해진 이곳이 성철의 작업실이었다. 재앙과도 같던 그와의 두 번째 인연이 그렇게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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