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화 19화 - 마음에 채워진 족쇄
영화가 끝나고 근처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던 중이었다.
“남자배우 진짜 잘 생겼더라. 완전 재밌었어!”
“그러게, 생각보다 볼만하네.”
어지럽다.
그들과 영화를 본 뒤부터 이상하게 컨디션이 안 좋았다.
“수연이는 어땠어? 재밌었지~?”
“아, 으응..”
에어컨의 시원한 찬바람을 맞으며 시원한 음료를 마셔도, 도저히 몸의 열기가 식질 않았다.
“아 참! 수연아, 내일 방학식 하기 전에 과 회식 있대.”
“아..”
“올거지? 응?”
잊고 있던 기말고사가 떠오른다.
시험 미응시로 인해, 분명 나는 학사경고를 받았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 저기.. 나 시험을 못 봐서.. 아마..”
“뭔 상관이야~ 가자~ 응? 수연아아~”
그녀의 말에 음료를 마시는 박시후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눈이 마주치자, 그는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말했다.
“왜, 갔다 와.”
“아.. 그.. 알았어..”
그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고, 고개를 푹 숙였다.
자퇴한다는 말에 도망치지 못하게 감금시켜 끔찍한 학대를 할 때는 언제고, 이제 와서 다시 학교에 가라는 그가 살짝 원망스러웠다.
그렇게 카페에서 음료를 마시고 이지아의 자취방으로 향했다.
“바래다줘서 고마워~! 수연이 내일 봐~!”
“응.. 잘 가..”
집으로 들어가는 그녀를 뒤로하고, 박시후의 말에 뒷좌석에서 조수석으로 이동했다.
그와 단둘이 남겨진 상황.
어색한 분위기 속에서 창밖만 바라봤다.
“야, 차수연.”
“으, 응..?”
어느새 도착한 집 앞.
집 앞 도로에 차를 세운 그는 비상등을 켜고 내게 물었다.
“누가 도망치래.”
“아으.. 그.. 그건..”
너 때문이라고 어떻게 뱉어낼 수 있을까.
그의 물음에 말문이 턱 막혔다.
“하아.. 일단 내려.”
차에서 내리자, 그는 집 근처에 주차를 마치고 나와 함께 집으로 들어갔다.
난장판인 거실 풍경.
그 모습을 보자, 아까부터 어지러웠던 머릿속이 더 어지러워지는 것 같았다.
“화 안 낼 테니까 말해. 왜 도망쳤냐고.”
“.. 무서워서.. 그랬어..”
“무서워서 그랬다고? 그러다 잡히면? 뒷 일은 생각 안 해? 고작 그딴 이유로 도망친 거냐?”
“그, 그딴 이유라니..!!”
고작 그딴 이유라는 그의 말에 순간 마음이 울컥했다.
“으휴 병신 같은 년.. 하여튼 찐따 년들은 생각도 짧아.”
“.. 너무해..”
“뭐가 너무한데 병신 같은 년아. 다 네 잘못인데.”
소파에 앉아 텔레비전을 켜는 박시후.
모든 게 내 탓이라는 그의 말에 감정이 북받쳐 오른다.
참기 힘든 감정.
텔레비전을 보고 있는 그에게 다가갔다.
“뭐야? 안 비켜? 티비 봐야 되니까 꺼져.”
“그게.. 그게 어떻게 내 잘못이야..!!”
“아이씨, 꺼지라 했지?”
“끄흡..! 네가.. 네가 날 사람 취급도 해주지 않았잖아..!!”
주체되지 않는 감정.
멈추어야 하는데, 감정에 휩쓸린 나는 울분을 토하며 그에게 대들었다.
“난 지금 너랑 있는 이 순간도 무서워 몸이 벌벌 떨리는데..!! 맨날 욕하고, 때리고..! 틈만 나면 성희롱하고..!! 억지로 술 담배까지 시키고!!! 게다가 몸에 이상한 문신까지..!!! 흐으윽!!! 대체 이게 다 뭐야!!”
“이게 얻다 대고 소리를 질러. 미쳤냐?”
“사람들이 지나치면서 나보고 뭐라는 줄 아니?!! 걸레라고.. 창녀라고 해!!!! 그런 심한 말을 나보고 들으라는 듯이 대놓고 흉보고 다니잖아!!”
그동안 겪었던 감정들을 소리치자, 굳게 참았던 눈물이 흘러내렸다.
“정말..! 정말 너무해!! 끄흣..!! 네가.. 네가 진짜 사람이야?!! 흐윽..!!! 어떻게.. 어떻게 그렇게 심한 짓들을 아무렇지 않게 하는 건데!!! 그런 심한 짓들을 하는 것도 모자라서..!! 이젠 목에 개 목줄까지 채워서 날 가뒀잖아!! 이게.. 이게 어떻게 다 내 탓인 건데!!!”
서 있기도 힘들 만큼, 감당할 수 없는 처음 느껴본 감정에 그대로 주저앉아 버렸다.
참기 힘든 분노만큼 눈에선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흐윽..!! 얼마나..! 대체 얼마나 더 날 비참하게 만들어야 속이 후련하겠어..!!! 너 때문에 난 하루하루가 지옥 같은데!!! 왜..!! 대체 왜!!! 왜 날 놔주지 않는 건데!!! 싫다고 했잖아!!! 왜 내 의사 따윈 존중해주지 않는 건데!!!!”
“후우..”
“너 때문에.. 너 때문에!! 이젠 밖에 나가는 것조차 무서워 알아?! 너한테 모든 걸 빼앗긴 그날부터 날 보는 사람들의 경멸에 찬 시선이 느껴진다고!!!! 크흡..!! 대체..! 대체 왜 이렇게까지 날 괴롭히는 건데에..!! 왜..! 왜..!!! 왜!!!!! 으흑..!! 흐아아아앙!!!”
그의 폭력으로 마음속 깊이 새겨진, 공포심에 묶여있던 참았던 감정이 터져버린 것 같았다.
“흐읍..! 흑.. 내가 맘에 든다며.. 좋아한다며..!! 근데 이 꼬락서니로 만드는 게 날 좋아하는 사람이 할 행동이야..? 너 진짜.. 나빴어.. 나빴다구!! 흐으으으앙!!!”
굳게 쥔 주먹으로 그의 다리를 때리며 말했다.
“사람 마음을 그렇게 짓밟아야 속이 후련해..? 내가 네 고백을 거절한 게 그렇게 잘못한 거야..? 흐끕..! 내 모든 걸 앗아가 놓고..!! 하나뿐인 친구도 그렇게 빼앗아 갔으면서!!! 너도 그렇고 이지아도 그렇고 이젠 둘 다 싫어! 싫다구!!! 크흐흑..!!!”
아무리 소리쳐도 터져버린 감정이 추스러지지 않는다.
감당하기 힘든 거센 감정에 상체가 바닥으로 기울었다.
“흑.. 흐으으윽..”
바닥이 눈물로 고일만큼 하염없이 흐르는 눈물.
눈앞에 있는 이 남자가 너무나 원망스러웠다.
“난 네가 제발 죽어버렸으면 좋겠어.. 그러니까 이제 그만해.. 제발.. 제발 나를 좀 가만히 내버려 둬.. 흐끅..! 흐으으..”
그렇게 바닥에 머리를 박고 한참을 울었던 것 같다.
“야, 고개 들어.”
“흐읍..! 흐으..”
숨을 고르고 고개를 들었다.
“이쪽으로 가까이 와.”
몸을 끌어 그에게 다가갔다.
처음 보는 자상한 표정으로 엉망이 된 내 얼굴을 닦아주는 그의 손길.
그의 따뜻한 손길에 기껏 진정됐던 울음이 다시 터져 나왔다.
깎여버린 마음은 죽을 만큼 싫어하는 남자의 손길에 위로를 받았다.
“흑, 흐으.. 흐끕..!”
“차수연.”
“.. 흑..! 으응..”
뺨을 타고 흐르는 그의 손길.
그 손길은 얼굴에 번져있던 눈물을 닦아주고 그대로 내 목으로 향했다.
“으흣?!!”
“말 다 했냐? 이 씨발아?”
차가워지는 눈빛.
자상해 보였던 그의 표정이 순식간에 바뀌어버린다.
“콜록..!! 흣, 왜.. 왜 또..!”
“내가 말했지, 또 대들면 그땐 각오하라고.”
그의 손에 의해 압박을 당하는 목.
숨이 막히는 것 같다.
“커흡?! 흣, 아으흐윽..!!!”
발이 땅에서 떨어질 정도로 세게 목을 조르는 박시후.
숨이 쉬어지지 않아 고통스러웠다.
목을 조르는 그의 팔을 붙잡고 몸부림을 치자, 그는 날 바닥에 내팽개치고 몸에 올라타 목을 졸랐다.
“씨발 뭐? 죽어버렸으면 좋겠어?”
“끄읍..!! 커허억..!!!”
“차수연 이 씨발년아..!! 어디 건방지게 다시 지껄여 봐..!! 어?!!”
정말 날 죽일 기세로 보이는 듯한 그의 표정과 행동들.
숨이 쉬어지지 않는 괴로움에 버둥거리던 다리와 팔은 몸에 힘이 빠지면서 조금씩, 그리고 천천히 움직임이 멈춰갔다.
“건방지게 다시 지껄여 보라고!! 차수연 이 씨발년아!!!!”
“끄읏..!! 끄으으으..!!”
점점 강해지는 고통은 내 움직임을 멈추게 했고, 몸속의 장기가 멈춰가는 게 느껴질 정도로 시야가 좁아지며 정신이 희미해진다.
이렇게 죽는건가 라는 생각이 들며 몸이 축 늘어졌다.
“크흡?! 콜록콜록!!!!”
숨이 멎기 직전.
날 죽일 기세로 목을 조르던 그의 손이 풀어진다.
막혀있던 목에 산소가 공급되어 거칠게 숨을 내쉬었다.
“아크흣..!! 콜록..! 허으윽.. 하아.. 하아..”
반쯤 풀려버린 시야엔 그의 광기 가득한 잔혹한 표정이 보였다.
“정신 차려야지, 이 씨발년아. 나 죽이고 싶은 거 아니었어? 근데 고작 이걸로 네가 뒤져가는 표정 지으면 어떻게 해? 응? 이 씨발아.”
“흐읏.. 하..”
박시후의 커다란 손이 다시 내 목을 감싸는 게 느껴졌다.
“어디 그 썩어빠진 정신머리부터 다시 고쳐줄 테니까 각오해라. 중간에 울고불고 빌기만 해 봐.”
그렇게 다시 시작된 목의 압박.
그는 체벌이라는 명목하에 내가 기절하기 직전까지만 목을 조르고 풀기를 반복했다.
몇 시간 동안이나 쉬지 않고 계속된 그의 잔인한 폭력과 고문.
피투성이가 되어버린 마음이 또 깎여나간다.
너덜너덜해진 마음이 그의 고문에 굴복해버렸고, 나는 모든 게 다 내 잘못이라며 그에게 한참을 빌고 나서야 괴로웠던 그의 고문이 끝이 났다.
그가 돌아가고 나서 나는 더러워진 거실 바닥에 축 늘어진 채 움직이지도 못하고 눈물만 흘렸다.
그가 돌아가며 내게 했던 말이 떠오른다.
“야, 내가 저번에 그랬지. 한 번 더 개기면 너 하나로 안 끝난다고. 네 친구 년은 너 때문에 인생 종 친 거다. 평생 업소에서 다리나 벌리며 살게 해줄게. 아, 그리고 이번에도 도망같은 허튼 짓거릴 하기만 해 봐. 네 하나뿐인 친구 년 장기 다 뽑아서 팔아버릴 테니까."
도망쳤다고 생각한 미진이는 아직 그에게 잡혀 있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나는 그에게 몸뿐만이 아닌 마음마저 묶여버리게 되었다.
날 구속하던 목줄이 목에 채워지지 않아도, 몸과 마음에 새로운 족쇄가 채워진 것 같았다.
이젠 더 이상 도망칠 곳도, 아니 그런 생각조차 할 수 없게 되어 버렸다.
나 때문에, 순간의 감정을 억누르지 못한 내 감정 때문에 그녀가 받을 고통을 상상하니 금방이라도 미쳐버릴 것 같았다.
흐르는 눈물 틈새로 허탈한 웃음이 지어진다.
무언가 홀린 듯 주방으로 가, 싱크대에 있는 부엌칼을 꺼냈다.
손잡이를 거꾸로 잡고, 칼끝의 뾰족한 부분을 배로 향하게 했다.
모든 것을 체념하고 팔을 당기려 했으나, 박시후라는 족쇄가 채워진 마음은 그러질 못했다.
내가 이대로 죽어버리면 그녀는 나보다 더 끔찍한 꼴을 당한다라는 생각에 손이 멈춘다.
[챙그랑..!]
바닥에 떨어지는 날붙이 소리.
손에 쥐었던 칼이 바닥으로 떨어짐과 동시에 그 자리에 주저앉아 버렸다.
뺨을 타고 흐르는 눈물.
더 이상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절망감에 한참을 또 엎드려 눈물을 쏟아 냈다.
끝이 보이질 않는 긴 밤이 내 마음을 뒤덮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