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화 20화 - 종강
[쿵! 쿵! 쿵!]
시끄러운 소리에 떠진 눈.
바닥에 늘어져 있던 욱신거리는 몸을 일으켜, 쓰레기가 가득한 거실로 갔다.
벽에 걸린 시계를 확인하니 아직 8시도 채 되지 않은 시간.
쓰러지듯이 소파에 누워 얼굴을 묻었다.
마음이 날카로운 칼에 찢어진 것처럼 아팠다.
새벽부터 종일 울었던 것 때문인지 메말라버린 듯한 눈물은 더 이상 흐르지 않았다.
[쿵! 쿵! 쿵!]
가뜩이나 어지러운 머릿속을 더 어지럽게 하는 노크 소리.
그것을 애써 무시하고 눈을 감아, 다시 잠을 청하려던 순간이었다.
“수연아~”
귀에 들어오는 익숙한 목소리.
이지아의 목소리였다.
“수연아~ 안에 있는 거 알아. 강제로 열고 들어가기 전에 빨리 열어줄래? 응?”
깊은 한숨을 몰아쉬고 억지로 몸을 일으켜 현관 쪽으로 향했다.
“수연아~ 빨리이~ 나 기다리는 거 안 좋아해~”
“응.. 열게 잠시만..”
차가운 쇳덩이의 감촉이 전해지는 문고리를 돌려, 문 앞에 서 있는 그녀를 맞이했다.
“수연이 안뇽~! 여기가 수연이네 집이구나? 들어갈게?”
“응.. 들어와..”
신발을 벗고 들어오는 이지아.
그녀는 더러운 거실 풍경을 보고 내게 잔소리를 했다.
“어휴, 이게 다 뭐니 수연아.. 좀 치우고 살지. 쓰레기장이 따로 없네.”
“.. 미안해..”
“됐어, 어차피 시후 친구들이 그랬을 게 뻔해.”
들고 있던 가방을 소파로 던진 그녀는 옷 소매를 걷어 올린 뒤, 바닥에 널브러진 유리병들부터 모으기 시작했다.
나는 그녀의 행동을 못 본 척하고 방으로 가 침대에 엎드리듯 누웠다.
“하아아..”
깊은 한숨.
우울한 기분이 좀처럼 나아지지 않는다.
어제 박시후와의 그 일이 있고 난 이후부터, 이 우울한 감정은 평소보다 배가 되어 날 괴롭히는 것 같았다.
몰려오는 피로감에, 침대 시트에 얼굴을 파묻고 눈을 감았다.
탈출구 따윈 없어진 인생.
어제 그의 앞에서 조금이라도 참았다면 어땠을까, 지금보다는 나아졌을까 라는 생각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는다.
[딸칵-!]
“수연아~”
팔 틈새로 파묻은 얼굴 사이로 들어오는 불빛.
그녀의 목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뭐하구 있어. 얼른 씻게 이리 와. 으이구 옷도 안 갈아입었네. 어제 입혀준 옷 그대로잖아?”
끝나지 않는 그녀의 잔소리.
나는 그녀의 말을 못 들은 척 고개를 다시 파묻었다.
그러자, 그녀는 침대에 놓여있던 내 팔을 잡아끌었다.
“아휴, 빨리 일어나! 시후 기다린단 말이야!”
그녀의 팔을 떨쳐내어 이불을 뒤집어쓰고, 거부 의사를 밝혔다.
“으응.. 나 그냥 좀 쉬고 싶어.. 안 갈래..”
“하아.. 왜 또 고집을 부릴까? 응? 수연아, 또 혼나고 싶어?”
낮아지는 그녀의 목소리 톤.
나를 향한 그녀의 경고에도 나는 이불을 더 세게 잡아당겨 내 모습을 숨겼다.
“.. 제발 날 좀 내버려 두면 안 될까..”
“수연아. 마지막이야. 일어나.”
“……."
“차수연.”
“하아..”
깊은 한숨을 내쉬고, 날 숨긴 이불을 걷어내 침대에서 내려온다.
샤워를 마치고 나오자, 그녀는 기다렸다는 듯 수건으로 내 몸 구석구석 닦아주었다.
“응? 수연아, 목은 또 왜 그래?”
“아.. 별거 아니야.. 괜찮아..”
“별거 아니긴, 어제 시후한테 혼났구나?”
손거울을 가져와 내 목을 보여주는 이지아.
거울에 비친 목은 박시후의 손자국이 심하게 남아 징그럽게 보일 정도였다.
걱정해주는 그녀의 손길을 쳐내고 침대에 걸터앉았다.
“드라이기 어디 있어?”
“.. 저기..”
“아!”
드라이기를 찾는 그녀에게 화장대 위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콘센트에 드라이기의 전선을 꽂은 그녀는 내 옆에 바짝 붙어 앉아, 젖은 머리를 말려주기 시작했다.
머리를 말려주는 내내 시끄럽게 떠들어대는 이지아.
시끄러운 드라이기 소리로 인해 못 들은 척 그녀의 말을 무시했다.
그렇게 머리를 말리고 난 뒤, 그녀는 정성스레 빗질을 해주었고, 이어서 그녀는 예열된 고데기로 본인 취향에 맞게 내 머리 스타일을 바꾸었다.
“가만히 있어 수연아. 움직이면 데인다?”
“응..”
고데기질이 끝나고 그녀는 가방에서 화장품을 꺼내, 내 얼굴에 자신과 비슷한 옅은 메이크업을 해주었다.
그 후 그녀는 거실에 있던 쇼핑백을 가져와 내게 건네주었다.
쇼핑백을 열어보니, 허벅지가 반이 넘게 보일 정도로 짧은 검은색 플리츠 스커트와 흰색과 검은색으로 이루어진 줄무늬 티셔츠가 들어있었다.
속옷을 입고, 쇼핑백에 있는 그것들을 꺼내 입은 뒤, 티셔츠의 밑단을 치마 속으로 집어넣었다.
그녀가 준 옷을 입자, 내게 알약과 물이 든 컵을 건네는 이지아.
“수연아, 이거 먹어.”
“…….”
어제 박시후가 주었던 것과 똑같은 알약.
그것을 먹은 뒤에 밖으로 나갔다.
시동이 걸린 차 앞에서 담배를 피우고 있는 박시후.
그의 시선을 피하고 이지아와 함께 차에 탔다.
“우리 수연이, 이거 먹어!”
“.. 응.. 잘 먹을게..”
예쁜 포장지로 포장된 샌드위치.
유명한 샌드위치 점의 샌드위치를 아침으로 먹으며 학교로 향했다.
어느새 도착한 학교.
잘 놀고 오라는 박시후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고 차에서 내렸다.
그녀와 함께 강의실에 들어서자, 여전히 경멸스러운 눈빛으로 날 보는 동기들의 시선.
그것들을 애써 무시하고 이지아와 함께 뒷자리 구석으로 가 앉았다.
“참! 수연아, 이거 배터리 충전해놨어.”
“아.. 응.. 고마워..”
그녀의 집에 두고 왔던 내 스마트폰.
나는 무덤덤하게 그것을 받아 가방에 넣었다.
어느덧 길었던 종강식이 끝나고, 과 대표가 12시까지 시내에 있는 유명한 고깃집으로 오라는 말을 한 뒤, 강의실에 있던 아이들을 해산시켰다.
나는 그녀와 시내를 대충 돌아다니며 시간을 보내고, 12시에 맞춰 과 대표가 말한 고깃집으로 갔다.
시끌시끌한 가게 분위기.
먼저 도착해 밥을 먹고 있는 과 아이들이 보였다.
나와 그녀도 비어있는 테이블에 앉아, 자리마다 한가득 놓여있는 고기를 구워 먹었다.
시간이 흘러 아이들이 모두 모이자, 과 대표는 자리에서 일어나 건배사를 했고 모두가 그의 말을 따라 외치며 건배를 했다.
그렇게 고깃집에서 식사를 하고 난 뒤, 2차는 고깃집 건물 4층에 있는 주점에서 한다는 과 대표의 말에 집으로 돌아가는 아이들과 2차까지 가는 아이들로 나뉘었다.
나도 그만 집에 가고 싶었지만, 이지아에게 붙들린 나는 선택권이 없었다.
게다가 2차부터는 2, 3학년 선배들도 온다는 말에 더욱 그곳에 가기 싫어졌다.
그렇게 대낮부터 억지로 주점으로 끌려가, 그녀와 가장 안쪽, 바깥 풍경이 보이는 창가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다들 1학기 수고했어!! 다들 건배!!”
“건배에!!”
과 대표가 고깃집에서 했던 건배사를 다시 하자, 어수선했던 분위기가 순식간에 시끌벅적해진다.
소리치는 동기들의 목소리뿐 아니라, 주점에서 튼 커다란 음악 소리가 머리를 울릴 정도로 시끄러웠다.
“안녕~? 수연이랑 지아 맞나?”
“응 맞아! 하이~!”
“우리 앉을게? 같이 마시자!”
“좋아!”
은근슬쩍 옆자리에 앉는 남자애들과 반갑게 인사하는 이지아.
그들은 노랫소리로 시끄러운 이곳에서, 노랫소리보다 큰 목소리로 별 시답잖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분위기가 무르익자, 술을 건네는 남자애들.
그녀는 그들이 주는 술을 주는 대로 받아먹었고, 나는 그들이 주는 술을 거부하고 대화도 일절 하지 않은 채 물만 마셨다.
남자애들의 얼굴에 아쉬워하는 표정이 보이는 것 같았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 2, 3학년 선배들이 하나둘 나타났고, 그들이 올 때마다 우리 1학년들은 자리에서 일어나 반듯하게 고개 숙여 인사를 했다.
다른 테이블에 가서까지 술을 마시며 떠들고 있는 이지아.
슬슬 돌아가고 싶어진 나는 홀로 남겨진 자리에서 가방을 챙겨 일어났다.
“오, 우리 쑤~ 연이~!”
“아, 안녕하세요..”
“잘 지냈어? 오빠 연락은 왜케 씹는 거야~ 응? 오빠 좀 서운하다?”
“아.. 죄송해요.. 요즘 정신이 없어서..”
여자라면 물불 안 가리고 일단 들이대고 보는 2학년 선배 최진혁.
껄렁대는 성격에 머리는 항상 이상한 색으로 물들이고, 각종 이상한 액세서리로 몸을 치장한 그는 외모만큼이나 소문도 그렇게 좋지 않은 남자였다.
그는 자신과 같은 학년인 여자 동기들은 물론이고, 3학년 여자 선배들이나 1학년 새내기들한테까지 집요하게 찝쩍거리며 모두에게 비호감을 산 남자였다.
그의 첫인상.
학기 초에 나에게 찾아와, 집요하게 내 전화번호를 요구했던 것이 기억이 났다.
그와의 만남으로 불편해진 나는 서둘러 그에게 인사를 하고, 앞을 막은 그를 피해 가려 했다.
“잠깐.”
“읏?!”
그는 내 팔을 잡아끌어 다시 자리에 앉힌 후, 나를 안쪽으로 밀어 넣었다.
“어디가? 종강인데 오빠랑 한잔해야지?”
“아.. 저기.. 선배님.. 저 이제 집에 갈 거라서..”
“딱 두 잔만, 아니 딱! 한 잔만! 응? 오빠랑 같이 한 잔만 마시자.”
“죄, 죄송해요.. 저.. 술을 잘 못 해서..”
그의 부탁을 거절하고 다시 자리에서 일어나려 했지만, 그는 비켜줄 생각이 조금도 없었다.
“이상한 짓 안 할게, 같이 한 잔만 마시자. 응?”
“이러지 마세요.. 저 정말 가봐야 해서..”
“흐음.. 그래?”
내가 계속 그의 부탁을 거절하자, 그는 반대편 테이블에서 술을 마시고 있는 과 대표를 불렀다.
“어이! 1학년 과대.”
“네, 넵?!”
“튀어 와.”
“아, 네!”
영문을 모르는 표정으로 다가온 과 대표.
[짜악-!]
시끄러운 음악 소리를 뚫고 들린 따귀 소리.
2학년 선배 최진혁은 다짜고짜 그의 뺨을 때렸다.
“..?!! 서, 선배님?!”
갑작스러운 소란에 가게에 있던 주변에 있던 사람들이 놀란 듯 이쪽을 쳐다봤다.
그 모습을 보자, 순간 식은땀이 흘렀다.
과 대표는 순간 당황한 표정을 짓더니 최진혁의 정색한 얼굴을 보자, 아무렇지 않은 척 표정 관리를 했다.
“야 1학년.”
“네.”
“언제부터 1학년 햇병아리들이 하늘 높은 선배한테 말대꾸하고 개겨도 되는 사회가 온 거야?”
“.. 죄송합니다. 시정하겠습니다.”
“내가 여자를 때릴 수는 없으니까, 네가 대신 맞아라. 이 악물어.”
“아.. 넵..!”
다시 그의 뺨을 날리려는 최진혁의 팔을 붙잡으며 고개를 저었다.
“어이쿠, 우리 수연이는 가만히 보고만 있어~ 관리 안 한 과대 잘못이지 안 그래?”
“마, 마실게요..!! 그러니.. 때리지 말아요..”
“오? 진짜? 오케이! 과대 넌 수연이가 살렸다. 이제 꺼져.”
“아, 네..”
과 대표에게 그만 가라고 손짓하는 최진혁과 날 째려보고 가는 과 대표.
원망 가득한 그의 눈동자를 보자, 너무 미안한 감정이 들었다.
두 손 가득 술병을 들고 흔드는 최진혁.
“수연이는 소주? 맥주? 아니면 소맥?”
“.. 매, 맥주로 마실게요..”
그의 물음에 답하자, 테이블 구석에 놓여있던 빈 맥주잔이 내 앞으로 왔다.
“아니지, 그냥 소맥 먹자. 오빠가 맛있게 말아줄게.”
“네?! 갑자기 왜..”
“괜찮아~ 소주 쫌만 넣을게~”
앞에 놓인 맥주잔에 소주가 따라진다.
말과는 다르게, 어느새 절반을 훨씬 넘어 맥주잔을 가득 채우는 소주.
그는 맥주의 병뚜껑은 따지도 않은 채, 소주로 가득 찬 맥주잔에 그것을 따르는 시늉만 했다.
“자, 짠할까? 원샷이다?”
“이.. 이걸 어떻게 한 번에 마셔요..”
“흠.. 지금 내 성의를 무시하는 건가? 과대가 아직 덜 맞은 거 같네. 어이~”
고개를 돌려, 과 대표를 부르려는 그를 말렸다.
“아으.. 아, 알았어요.. 마실 테니까, 제발 그만 해요..”
“오 정말? 자 짠!”
[쨍-!]
경쾌한 소리를 내는 서로 다른 크기의 소주잔과 맥주잔.
눈을 질끈 감고 잔에 든 술을 마셨다.
한 모금, 두 모금 넘어갈 때마다 올라오는 구역질.
나는 그것을 억지로 참아가며 맥주잔을 비웠다.
“으.. 읍..!!”
“오, 우리 수연이 잘 마시는데?”
거칠어진 숨에서 느껴지는 술 냄새.
금방이라도 토를 할 것 같았다.
은근슬쩍 어깨에 손을 올려 스킨십을 하는 최진혁.
그는 힘겹게 비운 맥주잔에 다시 소주를 따랐다.
“자, 한잔 더!”
“으.. 야.. 약속이 틀리잖아요..! 하아..”
“그건 수연이 네가 술을 못 마실 때 이야기고~ 한 잔만 더 해.”
“하아.. 하아.. 이제 갈게요..! 비켜주세요..!!”
어깨에 손을 올린 그의 손을 쳐내며 자리에서 일어나려 했다.
그 순간, 갑자기 몰려온 현기증에 그대로 다시 자리에 주저앉아 버렸다.
“아..!”
“오, 역시 오빠랑 한 잔 더 하고 싶은 거지?”
갑작스러운 현기증은 눈에 초점이 안 맞을 정도로 어지러웠다.
게다가 술 때문인 건지 멀쩡했던 체온도 높아져, 가뜩이나 좋지 않던 컨디션이 급격하게 떨어지는 것 같았다.
“하아.. 비, 비켜주세요..!”
“어쩔 수 없지. 과대야~”
“아으.. 그러지 마요.. 왜 자꾸..”
“안 마시면 우리 1학년 과대, 오늘 광대뼈 나간다.”
“하아.. 하아.. 알았어요.. 저.. 정말 마지막이에요..”
[쨍-!]
그렇게 최진혁과의 반강제성이 섞인 술자리는 이제 시작이었을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