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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화 40. 모녀의 하루 (4)


틀림없이 촉이 오고는 있다. 만약 과거였다면 육감을 믿고 사업을 밀어 붙였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회사의 사정이 그때와는 다르다. 회사가 막 설립되고 직원도 몇 없던 초창기에는 한가연을 중심으로 한 주먹구구식 운영이 통했을지도 모르지만, 회사의 규모가 커지고 안정기로 접어들게 되면 독단에 의한 회사의 운영은 절대적으로 지양해야 하는 일 중의 하나였다. 지금도 내부에서는 왜 무리하게 사업을 확장하느냐는 말이 오가고 있는 중이었고, 그것도 왜 하필이면 여성 용품 전문 브랜드와는 전혀 상관없는 야구 용품이냐는 것에 가장 큰 불만이 표출되고 있는 상황이었다. 그런 불만이 내부적으로 쌓여서 좋을 게 없다는 것을 잘 알기에 강호를 모델로 선택하는 방안에 대해서만큼은 직원들의 의견을 최대한 수렴하여 검토할 생각이었는데, 이렇게나 의견이 팽팽하게 대립될 것이라고는 미처 예상치 못 한 일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표면적인 이유일 뿐, 강호를 모델로 기용하는 방안에 대해 한가연조차도 선뜻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망설이는 데에는 사실 이유가 따로 있었다. 불현듯 찾아온 강호라는 남자에 대한 감정. 그녀가 아무리 인간관계에 대해, 특히 남자와의 관계에 대해 오랜 시간 벽을 두고 살아왔다고는 하지만 이성에 대한 호감이 어떤 것인지 모를 정도로 무지하거나 무감각한 여자는 아니었다. 한 명의 여성으로서 강호라는 남자를 향한 이성으로서의 호감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한가연은 분명하게 인지하고 있는 중이었다. 비록 그 호감의 씨앗이 싹을 틔우고 열매를 맺을 가능성은 매우 낮았지만, 다친 상처에 새 살이 돋아나듯 잃어 버렸던 풋풋한 감정들이 되살아난 것만으로도 한가연은 만족했다. 그래서 이 감정이 더없이 소중했고, 오랫동안 이러한 마음을 간직하고 싶은 마음이었다. 비록 그것이 혼자만의 짝사랑이라 할지라도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문제는 그러한 사적인 감정이 혹시나 회사를 위한 결정이라고 믿고 있는 자신의 생각이나 판단에 영향을 미치고 있지는 않은가 하는 의심이다. [강호씨를 모델로 선택하려는 것이 개인적인 감정에 영향을 받은 것은 아닐까?] 그런 의구심이 생겨난 상황이다 보니 심이 직원들의 의견 대립을 핑계로 결정을 미루게 되었고, 어느새 마녀들의 첫 방이 방영해 버리고 말았다. 앞으로 상황이 어떻게 돌아갈 지 알 수 없지만, 지금 확실한 것은 이제는 정말로 결정을 내려야 할 때라는 점이었다. “엄마! 엄마!” “으... 으응? 왜?” “무슨 생각을 하길래 옆에서 부르는 데도 몰라?” “별 거 아니야. 그래서 뭐라고?” “아저씨 말이야.” 또 아저씨 이야기다. “아저씨같은 남자들은 선물로 보통 뭐 좋아해?” “서... 선물?” 선물이라는 말에 한가연의 표정이 살짝 굳었다. “강호... 씨 선물 말이니?” “응! 근데 아무리 생각해봐도 딱히 떠오르는 게 없어서. 내가 언제 남자한테 선물 같은 걸 해 봤어야 알지.” “그... 그건 엄마도 마찬가지라서 잘...” 한가연도 고등학교 이후로 남자에게 개인적인 선물 같은 것을 해 본 적이 없다 보니 갑자기 생각이 날 리가 없다. “그런데 갑자기 선물은 왜?” “그냥. 저번에 도움 받은 일도 있고, 백구 때문에 고맙기도 하고 뭐...” 슬쩍 말꼬리를 흐리며 시선을 회피하는 모습에 한가연은 설마하는 심정으로 조심스럽게 물었다. “너... 강호... 아저씨 좋아 하니?” “응? 아저씨?” “그래.” “음!” 좋아하냐는 물음에 다혜가 한참을 생각하는 얼굴을 하더니 입을 열었다. “으으음! 몰라. 근데, 아저씨랑 있으면 편하긴 해. 뭔가 냄새도 좋고.” “냄새?” 냄새라고 하자 일전에 강호와 같이 갔던 놀이공원에서 느꼈던 남자의 냄새가 떠올랐다. 한순간 방심을 흔들리게 만들었던 가슴의 단단한 근육과 함께 훅하고 풍겨오던 수컷의 냄새는 지금도 한가연의 기억에 선명하리만치 각인되어 있다. ‘설마... 이 애가?“ 저도 모르게 그런 생각을 떠올리는데 이어진 다혜의 말에 한가연은 눈만 껌뻑일 수밖에 없었다. “응! 뭔가 아빠 냄새 같은 게 나거든.” 아빠 냄새라니. 대체 그게 무슨 의미인지 알 수가 없어 고개를 갸우뚱 하는데 다혜의 말이 이어진다. “초등학교 때 말이야. 그때 친했던 다영이 알지? 학교 마칠 때 다영이 아빠가 자주 다영이 데리러 오곤 했었잖아. 그때 다영이 아빠한테서 나던 냄새랑 비슷하다고나 할까.” 그러면서 무슨 화장품 냄새 같았는데 하면서 중얼거리는 모습을 보며 한가연은 피식하고 웃고 말았다. 하지만 덧붙이는 다혜의 말에 웃음기가 한 순간에 사라지고 말았다. “그때 그런 생각을 했었거든. 이런 게 아빠 냄새구나 하고 말이야. 근데 아저씨를 처음 봤을 때 딱 그런 냄새가 나더라고.” 어릴 때 아빠에 대한 진실을 말해 준 이후로는 아빠에 대한 이야기를 딱히 꺼낸 적이 없던 다혜다. 다른 이야기도 아니고 아빠가 자신들을 버렸다는 이야기였다. 어린 나이에 그런 이야기를 듣고도 아무렇지도 않다면 사실 그게 더 이상한 일이다. 다혜 역시 한동안 혼란에 빠져 지내기는 했지만, 애초에 아빠에 대한 정이 없어서인지 금방 마음을 추스르고는 평소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그 이후로 아빠에 대한 이야기는 일체 꺼내지 않았고, 그런 다혜를 볼 때마다 항상 고맙고 뿌듯해 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안쓰럽고 애틋한 마음을 숨길 수 없었다. 그런데 막상 아빠 냄새라고 말하는 다혜의 모습을 보니 마음 한 구석에는 아빠에 대한 그리움이 여전히 남아 있었던 모양이다. 그러한 그리움이 친구 아빠에게서 나던 냄새라는 형태로 각인되어 있다가 강호를 통해 표출된 것이 분명했다. 그러자 딸에 대한 미안함과 애틋함이 더욱 커진다. ‘하아!’ 정말로 강호에게서 아빠의 빈자리를 느끼고 있는 것인지로 모른다는 생각과 함께, 지난번에 강호와 함께 놀이공원에 가고 싶다면서 밤새 그렇게나 보채던 것이 다시 한 번 이해가 되는 심정이었다. 문제는 이게 좋은 현상인지 아닌지를 지금으로서는 쉽게 가늠할 수가 없었다. 한가연이 혹시나 하는 생각에 화제를 돌렸다. “근데 넌 정말 사귀는 남자친구는 없니?” “없어.” “좋아하는 남자라거나 관심이 가는 남자도 없고?” “없는데? 왜?” 시큰둥하게 말하는 다혜의 모습에 한가연이 조금은 복잡한 마음이 되었다. “넌 엄마가 이렇게 예쁘게 나아주고 길러 줬는데 남자친구 하나 없다는 게 말이 되니?” “왜? 다른 엄마들은 엉뚱한 데 한 눈 팔지 말고 공부에나 열중하라고 하는데, 엄마 진짜 우리 엄마 맞아?” “아니 그렇잖아. 고등학교 졸업도 이제 얼마 남지 않았는데, 학창 시절의 추억 하나 정도는 있는 것도 좋잖아. 다른 애들은 다들 남자 친구도 사귀고 한다면서?” “난 별로.” 단호하게 대답하는 모습에 한가연의 표정이 살짝 경직되었다. “왜?” “그냥. 다들 애들 같아서 싫어.” “이것 보세요. 그러는 당신도 아직 애거든요?” “그래도 싫어. 하나같이 생각이 뻔히 보인단 말이야.” “뭐가?” “만나면 내 가슴이랑 다리만 힐끔 힐끔 훔쳐보고, 다들 어떻게든 해보려고... 하여간 겉멋만 잔뜩 들어서는 허세나 부리고 하는 말들이나 행동들이 전부 마음에 안 들어.” 빙빙 돌려 말했지만 말 속에 숨은 뜻을 한가연은 대번에 파악할 수 있었다. 그동안 내색을 하지 않고 있어서 그런가 보다 했었는데, 어릴 때 아빠라는 사람이 임신한 엄마와 뱃속에 있는 아이까지 버렸다는 사실이 여전히 마음 한 구석에 낙인처럼 박혀 있었던 모양이다. 그 때 아빠의 나이가 딱 지금의 다혜와 비슷한 나이다 보니, 어쩌면 주변 또래의 남자들을 보면서 더욱 그런 기억을 떠올린 것인지도 모른다. 하기야 그런 일이 그렇게 쉽게 잊힐 리가 없다. 문득 지금까지 딸의 겉모습만을 보고는 큰 상처 없이 잘 자라주었다고만 생각했던 자신이 한심하고 미련하게만 느껴졌다. 상처를 감추기 위해서, 엄마를 걱정시키지 않기 위해서 일부러 더 밝고 씩씩하게 지내려 한 것이라는 생각은 왜 하지 못했던 것일까. 자신이 지난 십 수 년 동안 과거의 상처를 억지로 마음 속 깊은 곳에 묻어 버리고는 아무렇지도 않은 척하며 지내왔듯이 말이다. 하지만 딸이 아무렇지도 않은 모습을 보이는데 엄마가 되어서 혼자서 청승맞은 모습을 보일 수는 없는 법이다. “그래서 우리 딸은 어떤 남자가 좋은데? 이상형은 있을 거 아니야.” “그런 거 딱히 생각해 본 적 없는데.” “정말 없어?” 한가연이 집요하게 묻자 살짝 눈을 흘긴 다혜가 잠시 생각하는 얼굴을 하더니 마지못한 듯이 말했다. “음! 굳이 말하자면 아저씨처럼 듬직하고 강한 남자라고나 할까? 날 끝까지 지켜 줄 것 같은 남자 말이야.” 강호를 언급하는 말에 한가연이 다시금 흠칫했다. 하지만 이내 고개를 저었다. 아저씨 같은 남자라고 해서 그게 강호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도 왠지 불안한 마음은 어쩔 수가 없다. 그런 한가연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다혜가 일전에 있었던 이야기를 주절주절 늘어놓기 시작했다. “저번에 한 번은 안나랑 함께 카페로 가는데, 횡단보도를 건너던 중에 말이야...” 그러면서 어떤 깡패 같이 생긴 남자와 시비가 생긴 일을 언급하는데, 그때 강호가 나타나서 단숨에 깡패를 힘으로 제압해 버린 일을 신나게 떠드는 다혜의 모습에서 한가연은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하지만 한가연은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려고 했다. 강호의 이야기를 하는 다혜의 눈빛은 좋아하는 남자에 대한 이야기라기보다는 마치 어린 아이가 동경하는 오빠나 아빠에 대한 이야기를 하듯이 순수한 즐거움으로 가득했던 것이다. ‘앞서 나가지 마. 아빠의 빈자리를 강호씨한테서 찾고 있는 것뿐이야.’ 그런 말로 자신을 위로해 보지만 마음 한쪽에 자리 잡은 불안함은 쉽게 떨쳐낼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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