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9화 42. 원초적 본능 (1)
손에 들린 폰을 멍하니 바라보던 오하영이 돌연 짧은 비명성을 내지르고는 대뜸 품에 안고 있던 베개에 얼굴을 파묻었다.
성공이다.
혹시나 거절을 하면 어쩌나 걱정을 했던 것이 무색하게도 너무나 쉽게 약속을 잡았다.
전화를 걸기까지 많은 생각과 고민을 했었다.
강시연에게 죄를 짓는 기분은 말할 것도 없었고, 이러한 감정과 행동이 잘 못이라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강호를 향한 마음을 억누르기는커녕, 시간이 갈수록 그를 애타게 원하는 마음은 더욱 커지며 간절해졌다.
안 된다고 하면서도 도무지 감정을 주체할 수가 없었고, 하루 종일 그에 대한 생각으로 일이 손에 잡히지 않을 지경이었다.
생각하지 않으려고 해도 마음처럼 쉽지 않았고, 매일 밤 꿈속에 나타난 강호는 귓가에 대고 아름다운 사랑의 밀어를 속삭이고는 했다. 그 꿈이 어찌나 생생한지 깨고 나서도 귓가를 간지럽히던 그의 달콤한 속삼임이 그대로 느껴지는 듯 했다.
무엇보다 꿈속에서 그의 품에 안길 때 느꼈던 행복한 감정이 깨고 나서도 고스란히 남아 있어 이것이 꿈인지 현실인지 구분이 되지 않을 정도였다.
이 모든 것이 그날부터였다.
이전에는 강호를 향한 설레는 마음이 가득했다면, 그날 이후 오하영의 감정을 지배한 것은 바로 강호를 향한 육체적인 갈망이었다.
그를 떠올리고 그의 몸에서 풍겨오던 수컷의 향기가 느껴질 때마다 심장이 거칠게 뛰었고 온 몸이 뜨겁게 달아오르다 못해 보지가 벌렁거리는 것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그럴 때면 강시연의 집에서 그랬던 것처럼 자위를 하고 나서야 간신히 진정이 되곤 했는데, 그럴수록 강호에 대한 갈망은 더욱더 커져만 갔다.
그래서 확인하고 싶어졌다.
강호를 향한 이 마음과 행동이 진실한 사랑의 발로인 것인지, 아니면 오랫동안 운명적인 사랑을 꿈꾸어온 자신의 환상이 만들어낸 집착에 불과한 것인지.
그 마음의 실체를 확인해야만 비로소 어떤 결정이든 명확하게 내릴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게다가 한가연에게 그를 빼앗길지도 모른다는 조급한 마음까지 더해지자 과거의 그녀였다면 절대로 하지 않았을 질문 하나를 스스로에게 던지고 말았다.
[강호씨 옆에 다른 여자가 있어도 정말로 괜찮은 걸까?]
그리고 공허 속에서 돌아 온 대답은 오하영의 마음을 여지없이 흔들어 놓기에 충분했다.
[난 나만의 방식으로 강호씨를 사랑하는 거야. 넌 너만의 방식으로 강호씨를 사랑하면 돼.]
강시연은 이미 모든 걸 알고 있었고 끊임없이 속삭이며 유혹해 왔다. 오하영 역시 그 사실을 진작 알고 있었음에도 모른 척 해 왔을 뿐이었다.
세상 그 어떤 정상적인 사람이 그러한 사랑의 방식에 동조할 수 있겠는가.
세상 그 어떤 여자가 한 남자를 다른 여자와 같이 나누고 공유할 수 있단 말인가.
그렇게 고민을 하고 또 고민을 하며 지난밤을 뜬 눈으로 지새운 오하영에게 한 통의 문자가 왔다.
[엄마 때문에 나 잠깐 미국에 나간다. 그동안 잘해봐.]
대체 뭘 잘해보라는 것일까?
그런데 신기하게도 문자를 확인하기 무섭게 머릿속을 혼란스럽게 만든 고민이 거짓이었던 것처럼 한 순간에 사라지며 맑아지는 느낌이었고, 비로소 자신이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원래부터 알고 있었던 것처럼 눈앞이 선명해졌다.
그렇게 강호에게 전화를 걸었고 약속을 잡았다.
약속까지 잡은 이상 이제는 쏘아진 화살이었다. 날아가는 화살을 중간에 되돌릴 수는 없는 일이다.
베개에 얼굴을 파묻고 있던 오하영이 후다닥 침대를 뛰쳐나가 드레스룸으로 향했다.
옷장에서 옷들을 하나하나 꺼내어 전신 거울에 비추어 보기를 반복하는 동안 바닥에 떨어지는 옷들이 하나둘 산처럼 쌓여가기 시작했다.
하나같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이 옷이 마음에 든다 싶으면 저 옷이 더 괜찮아 보이고, 저 옷이 괜찮다 싶으면 또 다른 옷이 눈길을 사로잡았다.
옷을 고르는 데에만 벌써 1시간이 훌쩍 지난 듯한데도 좀처럼 마음에 드는 옷을 선택할 수가 없다.
[남자를 유혹하고 싶을 때 옷차림은 딱 두 가지야. 가릴 건 다 가리면서도 은은하게 여성성을 뽐낼 수 있는 옷차림이 하나고, 아니면 아예 대놓고 노출이 심하거나 몸매가 노골적으로 드러나는 야한 옷을 입는 거야. 전자는 진도를 천천히 빼고 싶을 때 좋고, 후자는 그날 바로 침대로 끌어 들이고 싶을 때 직빵이야.]
언젠가 강시연이 했던 말이 떠오르자 오하영이 손이 무언가에 이끌리듯 옷장 안에 자리잡고 있던 붉은 색 미니 원피스를 향했다. 멧돼지 습격 사건이 있던 날, 강시연이 입었던 원피스를 연상케 하는 옷이다.
원피스로 갈아입고 거울 앞에 서자 오하영의 얼굴이 대번에 붉어졌다.
어깨와 라인과 가슴골아래까지 크게 패인 원피스는 마치 벌거벗은 것 마냥 몸에 착 달라붙어 몸의 라인이 노골적으로 드러나 있는 까닭이다.
게다가 미니 원피스답게 짧은 치마의 길이는 무릎 위로 허벅지를 그대로 노출시키고 있어 허리를 숙이면 팬티가 고스란히 드러나 보이지 않을까 싶을 정도였다.
거울에 비추인 자신의 모습을 붉어진 얼굴로 감상하던 오하영이 뒤태를 살피다 못마땅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레깅스 수준으로 몸에 달라붙는 원피스인 까닭에 팬티의 라인이 그대로 드러나 보이는 것이다.
보통 이런 옷을 입을 때에는 원피스 안에 각선미를 해치지 않는 타이트한 속바지를 입는다. 하지만 오하영이 수납장을 뒤적여 꺼내어 든 것은 속바지가 아니라 손바닥 만 한 작은 T팬티였다. 흔히, 끈 팬티라고 불리는 속옷이다.
입고 있던 팬티를 갈아입고 다시 거울 앞에 선 오하영의 얼굴이 이전보다 더 붉어졌다. 아슬아슬하게 비추이듯 살짝 도드라져 보이는 끈 팬티의 라인이 야한 느낌을 더욱 강하게 부추기고 있는 까닭이다.
잠시 자신의 모습을 감상하던 그녀가 이번에는 검은색 스타킹을 꺼내어 신고는 굽이 높은 붉은 색 하이힐까지 갖추어 신은 채로 다시 거울 앞에 섰다.
한 참을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며 고민하던 오하영이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이왕 내친걸음라고 마음먹은 것이 조금 전이다.
남자에 대해서라면 강시연이 가장 잘 안다. 괜히 어설프게 이도저도 아닌 것 보다는 차라리 강시연의 말대로 필승 복장을 하고 나가는 것이 나을 듯 싶었다.
그렇게 강호를 만나기 위한 오하영의 필승 아이템이 최종 결정되었다.
****
약속 시간을 10분 정도 남겨두고서 오하영이 말한 레스토랑에 도착한 강호가 안으로 들어섰다.
강남의 도곡동에 자리 잡고 있는 유명한 프랑스식 레스토랑이었는데, 안으로 들어서기 무섭게 유럽의 분위기를 물신 풍기는 실내 인테리어가 강호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일전에 강시연과 함께 했던 레스토랑도 꽤나 고급스러운 분위기였는데, 프랑스식 레스토랑의 화려하면서도 우아한 인테리어 역시 이런 곳에 와 보지 않은 사람이라면 절로 주눅을 들게 만들 정도의 분위기를 지니고 있었다.
과거였다면 이런 식당에 출입할 일이 과연 있을가 싶은 생각이 절로 드는 분위기에 저도 모르게 슬쩍 시선을 내려 입고 있는 옷을 살폈다.
평소 보다 좀 더 차려 입기는 했지만, 그래봐야 깔끔한 캐쥬얼 차림일 뿐이다. 결코 이런 분위기에는 어울릴 법한 복장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해서 이번에도 별다른 감흥은 없다.
오히려 과거였다면 절대로 겪어 볼 일이 없을 새로운 경험이 신선하게만 느껴졌다. 시스템을 얻고 강시연을 만난 이후로 인생이 참으로 다이나믹해지고 있다.
카운터로 향하자 정장을 차려 입은 여성 직원이 강호를 맞이했다.
“예약하셨습니까?”
“오하영씨 손님입니다.”
강호의 말에 직원이 조용히 고개를 숙이더니 좌측의 복도 쪽에 있는 프라이빗 룸들 중의 하나로 안내했다.
역시나 상당히 고급 인테리어로 꾸며진 내부가 보인다.
벽과 천장을 장식하고 있는 인테리어도 그렇고 룸의 가운데를 차지하고 있는 원목 테이블 역시 나 고급이요 하며 티를 팍팍 내고 있다.
그런 모습을 보면서 강호는 오히려 엉둥한 생각을 떠올리고 있는 중이었다.
‘하아! 그냥 배터지게 실컷 먹는 게 최곤데.’
아직 오하영은 도착하지 않았다.
룸 안으로 들어서서 테이블에 앉아 잠시 숨을 골랐다.
강시연과 처음 만났을 때에는 그저 모든 것이 얼떨떨했었고, 어! 어! 하다 보니 화장실에서 당하고 말았다.
애초에 강시연과는 이런 관계가 될 것이라고는 생각지도 못했었기에 지금도 그녀와 몸을 섞을 때면 이것이 현실이라는 것이 믿기지 않을 때가 간혹 있었다.
하지만 오하영은 다르다.
그녀를 자신의 여자로 만들겠다는 분명한 목적 하에 그녀에게 접근하고 있는 중이다.
말 그대로 목적을 가진 접근이다.
사랑이라는 감정 따위는 애초에 없다. 아니, 강호도 이것이 어떤 호감에 의한 행동인 것인지, 아니면 정말로 목적에 의한 접근인 것인지 쉽게 구별되지 않았다.
애초에 남자라면 오하영 같은 여자를 두고서 아무런 감정 자체가 없을 수가 없다.
그것이 이성으로서 끌리는 감정의 영역이든, 온전히 육체적으로 끌리는 욕망의 영역이든, 하나의 수컷으로서 아름다운 암컷에게 끌리는 것은 당연한 본능일 수밖에 없다.
그러한 감정들의 혼란이 강호에게는 역설적이게도 신선한 자극이 되어 또 다른 즐거움을 선사하고 있는 중이다.
[오하영을 내 여자로 만든다.]
그 어떤 남자가 이런 기회를 마다할 수 있겠는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 사이 눈에 룸의 문이 열리며 붉은 원피스를 입은 오하영이 안으로 들어서는 것이 보였다.
그녀를 맞이하기 위해 반사적으로 자리에서 일어나려던 강호가 그녀의 모습을 눈에 담기 무섭게 석상처럼 굳어 버리고 말았다.
어깨와 가슴골을 훤히 드러낸 타이트한 원피스 차림의 그녀는 지금까지 보아온 그 어떤 모습보다 도발적이고 선정적인 모습이었다.
피처럼 붉은 원피스는 이전에는 보지 못했던 오하영의 성숙한 여성미를 부각시키기에 충분했고, 육감적인 몸의 굴곡을 고스란히 드러내며 퇴폐미마저 불어 넣고 있었다.
무엇보다 길고 늘씬한 다리를 더욱 돋보이게 만드는 검은색 스타킹과 하이힐은 남자의 방심을 여지없이 흔들어 놓기에 충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