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2화 92화
92.
나는 여기서 이 교통체증이 끝나길 바라는 것밖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꽤 오래 정체될 것 같네요.”
그녀가 걱정스럽게 말했다.
“예. 그럴 것 같네요. 그래도 워낙 일찍 출발했고, 오는 시간도 많이 단축해서 종주 출발 시각은 늦지 않을 것 같아요.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예.”
“지혜 씨. 차라리 뒷자리에서 편하게 누워서 좀 주무세요. 어제 잠도 부족한데, 아까 별로 오래 주무시지도 못했고, 만약 정체가 오래되면 그때는 정말로 운전을 바꿔 주셔야 할 수도 있어서요.”
“아. 정말 그럴 수도 있겠네요. 지섭씨가 너무 오래 운전하기도 했네요. 차라리 지금 좀 주무실래요?”
“아... 아닙니다. 이대로 상태를 제가 좀 지켜보는 것이 좋을 것 같아요.”
“그럼 그럴까요? 제가 먼저 잘 테니 나중에 꼭 교대해요.”
“예. 그리고 혹시나 제가 너무 피곤해지면 깨울게요.”
“예. 꼭 깨워주세요.”
그녀는 완전히 정차되었을 때를 맞춰 차에서 내려 뒷자리로 갔고,
의자를 완전히 뒤로 넘기고 누웠다.
역시 비싼 차는 뭐가 달라도 달랐다.
앞좌석을 최대한 밀어 버리니 뒷자리는 거의 발을 뻗고 누워도 될 정도였다.
오오... 여차하면 차에서 생활해도 될 정도라는 생각이 들 정도의 공간이었다.
“아!”
내가 놀라서 탄성을 지르자 그녀도 깜짝 놀라서 앞좌석으로 머리를 내밀었다.
“아~ 사고가 났네요.”
“아까 갓길로 경찰차와 엠블런스와 렉카가 지니가더니만...”
“아. 크게 났나 보네요.”
“예. 그런 거 같네요.”
고속도로가 약간 내리막 직진으로 되어 저 멀리 보이는 곳에서 사고가 꽤 크게 났음을 알 수 있었다.
이 시간에 차가 막히는 이유를 명확하게 알 수는 있었지만,
그것이 우리에게 전혀 도움은 주지 못했다.
그저 저 지점을 통과해야 하는 것일 뿐이었다.
생각보다 차는 매우 천천히 이동했고, 우리의 시각은 점점 흘러가고 있었다.
난 조금 긴장되기 시작했다.
산이라는 곳이 밤이 어두워지면 정말 어떻게 변할지 모르기에 걱정되었다.
게다가 첫날은 정상 쪽으로 오르는 것이라 도중에 내려올 길도 없어서,
일찍 출발하는 것에 매우 집중했는데... 이런 복병을 만난 것이었다.
뭐 어쩔 수 있나?
마음 편하게 가야 하는 것밖에는 할 일이 전혀 없었다.
지금 생사를 넘나드는 사람도 있는데,
그깟 산에 조금 늦게 올라간다는 것을 걱정하는 건 어쩌면 복에 겨운 소리일 지도 모른다.
그렇게 마음을 가다듬고 천천히 운전하며,
그곳을 빨리 벗어나기와 사고난 곳에서 크게 다친 사람이 없기를 기도하며 운전했다.
사고는 버스가 차량 2대를 받은 것으로 보였다.
차량 한 대는 무슨 차인지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일그러져 있었다.
“아... 저 차 탄 사람들은 어렵겠네요.”
그녀가 걱정스럽게 말했다.
나도 같은 마음이었다.
아무리 발버둥 쳐도 결국 생명의 시각은 하늘이 그들의 시간에 맞춰 끝내는 것이다.
우리가 어떻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저 그렇다고 생각할 수밖에는 없다.
조금 전 차량이 막히는 것에도 아무것도 하지 못 하는 무기력한 인간이, 생명에 대하여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그저 그 사람들이 살았기를 기원하는 수밖에는 없었다.
어쨌든 시각은 흐르고 모든 것은 시간의 뒤로 흘러가듯이,
우리는 시간이 지나자 그곳을 빠져나올 수 있었다.
그곳을 빠져나오자마자 언제 그랬냐는 듯이 길은 전혀 막히는 곳이 없었다.
난 제법 속도를 높여 목적지를 향했다.
이제는 느긋하게 즐기면서 이동할 시간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벌써 이미 늦었고, 얼마나 더 늦을지가 관건이었다.
내가 속도를 높이자, 그녀가 등받이를 바로 하고 차가 가는 방향을 집중해서 같이 보았다.
내가 집중해서 운전하는 모습을 보면서 그녀는 바꿔 준다는 말하지도 못 하는 것 같았다.
아무튼, 나는 아까 전의 사고를 내가 당할 수는 없기에 조심하면서도 꽤 빨리 차를 몰았다.
목적지에 도착했다.
벌써 문제점이 두 가지가 있었다.
하나는 시간이 벌써 1시간 이상이나 늦게 출발해야 한다는 것이었고,
두 번째는 주차장에서 산 입구까지도 제법 거리가 있다는 것이었다.
난 주차장에서 산 입구까지 거리는 생각도 못 했다.
결국 시각은 꽤 많이 지체됨이 분명했다.
“음... 어떻게 할까요? 지금 제 예상보다 2시간 이상 늦어질 수 있는데, 이러면 꽤 어려워질 수 있거든요.”
“1일차 목적지가 꽤 멀죠?”
“그렇죠. 오늘 여기서 돌아가고, 내일 다시 오는 방법도 있고...”
“아니에요. 그냥 가요. 어차피 고생할 생각으로 왔으니까요.”
“알았어요. 랜턴도 가져 왔으니 어떻게든 되겠죠...”
우리는 오늘 강행할 것을 결정하고 바로 산행을 시작했다.
스케줄이 늦어진 것과 대비하여 컨디션은 그리 망가지지 않고 꽤 괜찮았다.
가는 길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큰 폭은 아니었으나, 길은 제법 잘 나 있었고, 걷기도 그리 힘들지 않았다.
우리는 묵묵히 걷기만 했다.
“이 정도 속도면 괜찮겠어요?”
“예. 괜찮아요. 조금 더 빨라도 괜찮구요.”
“처음에 무리하면 종주 못할 수도 있어요. 오히려 평소 산행보다는 힘을 80퍼센트 정도만 쓴다고 생각하고 걸을 예정인데, 지금 속도가 그 정도인가요?”
“예. 괜찮으니 걱정 말고 가세요.”
하긴, 누가 누굴 걱정하는가?
나보다 더 체력이 좋을 수도 있는 여자였다.
술과 담배에 찌든 내 몸이 그녀를 이길 수 없을지도 모르는 판국에 누가 누굴...
난 내가 지치지 말아야지 하는 생각으로 걷기 시작했고,
우리는 그 길로 걷기만 했다.
난 걷기 시작하면 일단 처음에는 여러 가지 생각한다.
기본적으로 목적지나 방향, 주변 환경들을 충분히 살펴본 뒤로 별다른 것이 없으면,
그때부터 딴 생각한다. 그래야 고통을 줄일 수 있다.
난 바로 이 생각하는 시간을 가지기 위해서 여길 온 것이다.
끊임없이 생각하고 또 생각해 볼 것이다.
일단 걸어가는데 문제는 없었다.
그녀도 몸이 불편한 곳은 없어 보였고, 더없이 활기차 보였다.
걷는 것은 기본적으로 1시간 정도 걷고 10여분 정도 쉴 예정이었다.
그렇게 하면 아슬아슬하게 대피소까지 갈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렇게 우리는 걷기 시작했다.
침묵하면서...
과연 그녀는 지금 어떻게 살고 있을까?
날 떠나고 그 남자와 잘 살고 있을까?
지금도 내 꿈에 나오듯이 그 남자의 밑에 깔려서 쾌락의 소리를 내고 있을까?
‘휴... 이 생각부터 하면 안 되는데...’
일단 생각을 잠시 접기로 했다.
이 생각은 처음부터 하기에는 너무 급하고 무리다.
내 감정이 감당해 내질 못할 것이다.
천천히 생각의 예열하면서 중심으로 들어가도 된다.
시각은 넉넉하다.
급하지 않다.
시계가 40분이 다 되었다는 알람을 울려 줬고,
우리는 바위 터에 앉아서 잠시 쉬었다.
“여기 오기 정말 잘한 거 같아요.”
그녀가 땀을 뻘뻘 흘리면서도 그렇게 말했다.
“그래요?”
“예! 일단 살 거 같아요. 가슴이 뻥 뚫리는 거 같구요. 그리고 생각을 정말 많이 할 수 있네요. 좋아요. 정말.”
“그렇죠. 저도 생각을 많이 하고 싶어서 여길 온 것이거든요.”
“예... 지섭씨는 안힘드세요?”
“엄청 힘듭니다. 죽을 거 같아요. 그냥 아무 생각 없이 걷고 있어요.”
“풉~ 전혀 힘든 표정이 아닌데요?”
“아.. 티가 안나는 거 뿐이에요. 죽을 거 같습니다.”
“풉~ 알았어요. 알았어.”
“처음이라 40분 만에 쉬었어요. 다음에는 바로 1시간 동안 걸을게요.”
“예... 제 걱정은 마시고, 계획대로 하세요.”
그녀의 허락을 득하고 나서 다시 걷기 시작했다.
당연히 이제는 계속 걷는 일만이 남았다.
산의 느낌이라든지, 내려다보이는 풍경 따위는 느껴지거나 보이지 않는다.
이런 것들을 보고 있을 기분이 아니었다.
내 생각도 정리할 게 많았고, 거기다 우리는 예상보다 많이 늦은 상태였기 때문이었다.
우리는 정말 오랫동안 걸었다.
오후 2시가 넘었는데, 점심도 먹지 않고, 지금까지 걷기만 했다.
제수씨가 이렇게 잘 따라오는 것이 정말 대단하다는 생각밖에는 안 들었다.
체력적으로 정말 대단한 여자인 것 같다.
“여기서 뭐 좀 먹고 가죠. 이렇게 가다간 대피소 가기 전에 죽을 수도 있을 것 같아요.”
“하아하아~ 예. 알겠어요. 저도 이제 많이 힘드네요.”
우리는 바위 위에 걸터앉아 가볍게 먹을 수 있는 것을 꺼냈다.
에너지바와 단백질 음료 등을 먹기 시작했다.
“으음~ 이거 집에서는 줘도 안 먹는 건데 왜 이리 맛있죠?”
“큭.. 저두요. 아마 우리 체력도 많이 빠지고 그리고 배도 고팠던 거 같아요. 마음이 조급해서 그걸 못 느꼈던 거 같아요.”
“아직 많이 멀었죠.”
“예.”
“그런데요. 만약 제가 안 따라왔으면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하셨을 거예요?”
“음... 글쎄요. 대피소까지 억지로 가지는 않았을 것 같기는 한데...”
“그럼 그렇게 해요.”
“예?”
“우리 주객이 전도 되는 거 같아요. 아까부터 지섭씨는 계속 시계만 보면서 걷기만 하잖아요. 생각할 틈도 없이... 그건 절 어떻게든 대피소에서 쉬게 하려는 거잖아요.”
“아.....”
“그냥 편하게 걸어요. 그러다 정말 못 가면... 그냥 노숙해요.”
“큭... 노숙...”
“이제부터 시간 상관하지 말고, 그냥 걸어요. 속도도 생각할 수 있는 속도로만요.”
아... 그렇다. 난 그녀를 어떻게든 대피소로 데려가는데만 집중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그래요. 그럼. 정말 제가 그랬던 거 같네요. 제수씨 말대로 주객이 전도 되었네요.”
“그러니까요. 이제는 천천히 원래 계획했던 대로 그렇게 가요. 그러다가 정말 대피소까지 못 가면 그냥 그 자리에서 쉬구요.”
“예. 그런데... 제수씨랑 오길 잘한 거 같네요. 이렇게 깨우쳐 주는 사람도 있고...”
“저 때문에 판단이 흐려지신 거죠. 미안 하게요.”
제수씨의 말을 듣고 나서부터는 마음이 한결 가벼웠다.
정말 그랬다.
주객이 전도 되었다.
정말로...
제수씨의 정리를 끝으로 난 더 이상 목적지에 가는 것에는 신경을 쓰지 않기로 했다.
그러다 보니 이제는 속도도 아주 쾌적할 정도로 걸을 수 있었고,
목적지에 제시간에 도착하지 못 하는 스트레스도 없었다.
오롯이 내 생각만 하면서 걸을 수 있었다.
그렇다고 물론 지체할 생각은 없었다.
일부러 더 쉰다든지 하면서 말이다.
마음의 여유는 가지되, 걷는 것은 기존의 계획대로 하겠다는 생각이었다.
제일 먼저 드는 생각은 아내에 대한 내 분노의 깊이였다.
과연 장모, 더 나아가 처가에게 복수할 정도로 깊은 건지 말이다.
이 부분을 솔직히 건드리지 않았다.
다만, 처음에는 화가 나서 장모에게 우격다짐식으로 덤벼들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밑집 여자의 개입으로 판은 엄청 커졌다.
그렇다는 건 내가 정말 그런 짓을 하고 싶은지에 대한 깊은 고찰이 필요하였다.
그냥 단순히 한순간의 분노로 그런 거라면 이번에 충분히 풀고 끝내면 된다.
아직 30번이나 장모를 공식적으로 만날 기회가 있으며,
그때마다 원 없이 섹스하면 된다.
그리고 바이바이~ 하고 헤어지면 된다.
장모의 마음이 약간 다치는 것 말고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그 분노가 정말 깊은 것이라면 그래서는 안 된다.
그것만으로 만족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여기서 제일 중요한 의문이 있다.
과연 아내가 떠난 것이 처가의 책임일까?
그리고 아내가 지금 숨어 있는 곳을 모를까?
그 전에, 아내가 떠날 것을 처가는 몰랐을까?
이 세 가지 의문에 대한 내 결론이 필요했다.
그래야 내 분노의 초점이 어디로 향할지 또는 어디까지 포함할지가 정해지기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