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화 42.미묘한 관계
술이 깨고 정신이 들자 밀려오는 민망함과 자괴감에 몇 번이나 이불을 걷어 찼다.
세진이의 얼굴을 어떻게 봐야하나 싶은 생각에 밥을 먹다가도, 양치를 하다가도, 설거지를 하다가도, 학교 가기 전까지 드문드문 자괴감에 섞인 비명을 내질렀다.
세진이는 술이 깨고 어떤 생각이 들었을까?
그 날은 술에 취해 괜찮아 보였지만 정신을 차리고 보면 다를 수 있었다.
혹시나 나처럼 술기운에 그런 행동을 한 것을 후회할까?
그런 꼴을 보인 날 어떻게 생각할까?
오후 수업, 나는 떨리는 마음을 계속 진정시키며 수업에 들어갔다.
그런데 세진이의 반응은 내 예상과는 전혀 달랐다.
"야, 지우야, 여기!"
강의실에 들어서자 세진이는 기다렸단 듯 얼른 손을 들고 자신의 옆자리에 올려둔 가방을 치우며 해맑게 손짓을 했다.
그 탓에 주변의 시선이 모이는 바람에 무시하고 딴 자리에 앉을 수도 없다.
그 순간 난 민망함과 동시에 안도감을 느꼈다.
"하이, 아슬아슬 했네. 좀만 늦었으면 대출 해줄까 문자하려 했다."
천연덕스러운 반응, 혹시 술에 필름이 끊겼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럴리가... 진서의 말대로라면 세진이는 날 집에 업어다 줬다고 했다.
공원에서 맥주 몇 잔에 다시 해까닥 한 내가 이상한 거지...
"언니, 안녕하세요."
세진이의 앞에는 과대가 앉아있었다.
지수연이랬던가?
"어, 안녕 수연아."
"어제 잘 들어갔어요? 세진이오빠가 뭔 이상한 짓 안 했죠?"
싱글싱글 웃으며 이야기하는 수연이의 말에 괜히 스스로 찔려 옆에 세진이를 쳐다봤다.
"어제 사실 어떻게 들어갔는지 기억도 안나. 술자리 이 후로는 필름이 끊겨서..."
나는 세진이의 눈치를 보며 과대에게 대답했다.
내가 선택한 방법은 기억 안 나는 척 하기.
술에 취했던 사람이 쓸 수 있는 가장 강력한 필살기였다.
"아, 진짜요? 어제 엄청 취하셨긴 하던데, 술 너무 약하신거 아니에요?"
"그러게... 간만에 마셔서 그런지 나도 그 정도일줄 몰랐어. 뭐 이상한 짓 안 했지?"
"네, 언니 공주님 아니랄까봐 그냥 술버릇도 잠자는 거던데."
잠자는 숲속의 공주를 말하는 걸까?
공주라니...
술자리에서도 몇 번 들었지만 손발이 오그라든다.
여자끼리 흔히 하는 서로 자존감을 올려주는 품앗이 칭찬인 걸 알고 있지만 도저히 익숙해지지 않는다.
공주가 칭찬으로 들리지도 않는데다, 그걸 들은 나도 뭔가 칭찬을 한마디를 해줘야 하는데 입이 잘 떨어지지 않았다.
"그래? 그럼 다행이네..."
"너 술 좀 적당히 마시기는 해야겠더라."
세진이는 무심코 던진 한마디였지만 가운데에 뼈가 느껴졌다.
"오~ 오빠 여친 단속하는 거에요?"
"여,여친 아니라니깐..."
"아, 언니 미안해요, 내가 가운데에 '사'자를 뺐네? 헤헤."
수연이의 농담에 내가 너무 발끈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때, 교수님이 들어와 출석을 불렀다.
한 시간 뒤, 쉬는 시간이 주어지자 수연이는 일어서서 내 손을 붙잡았다.
"언니, 화장실 가요."
"어? 아, 응..."
갑작스러운 그녀의 말에 나도 모르게 대답을 하고 말았다.
대답을 하고 보니 나를 미묘하게 쳐다보는 세진이의 시선이 신경쓰였다.
내가 남자였단 걸 아는 세진이의 입장에서는 이상하게 보일 수 있단 걸 느낀 나는 되려 세진이에게 한마디를 던졌다.
"뭐? 너도 같이 갈래?"
"그럴까?"
내 농담에 세진이는 의자를 빼고 일어났고, 난 황급히 일어나려는 세진이의 어깨를 눌렀다.
"시끄러, 그냥 앉아있어."
세진이는 내 힘에 못이기는 척 의자에 털썩 주저앉고는 가볍게 칭얼거리는 말투로 말을 했다.
"진짜 나도 오줌 마려운데..."
"그냥 참아."
의자에 의기소침한 척 앉아있는 세진이를 뒤로 하고 수연이랑 화장실로 들어갔다.
수연이는 화장실 칸에 들어가지 않고 거울 앞에 섰다.
"오줌 안 싸?"
"네, 언니 마려워요?"
마려우니깐 화장실에 왔지.
"응."
난 그녀를 뒤로 한 체 화장실 칸에 들어갔다.
막상 오줌을 싸니 들리는 물 소리에 밖에 수연이가 있는게 신경쓰인다.
"언니, 혹시 세진이 오빠랑 어색했던 이유 싸워서 그런 거 아니죠?"
"응?"
싸운 게 아니긴 하다. 강간 당한 걸 싸웠다고 표현하는 건 좀 이상 했으니깐.
내가 술자리에서 뭔 말 실수를 했나?
난 그녀가 혹시 뭘 알고 있나 싶어 긴장을 했지만 뒤이어 나온 그녀의 말에 긴장을 풀 수 있었다.
"고백 받은 거 아니에요?"
아, 그렇게 보였나?
그녀의 눈에는 그렇게 보일 수 도 있겠다 싶었다.
"아닌데..."
"진짜 아니에요? 그 오빠는 언니한테 관심 있는 거 같던데."
"그렇게 보여?"
"네, 진짜 백프로요. 언니는 세진이 오빠 싫어요?"
"싫은 건 아닌데..."
뭐라고 말해야 할까?
살짝 고민 후 가장 좋은 답을 도출해냈다.
"이성으로는 안보이지."
"진짜요? 그 오빠 잘생겼잖아요, 더군다나 몸도 좋고..."
뒷정리를 하고 문을 열고 나오자 화장을 고치고 있는 수연이가 보인다.
"그렇긴 하지."
"혹시 언니 따로 남친 있어요?"
진서가 남자친구라기에는 좀 그렇지 않나?
말하자면 섹파에 가까운 사이긴 한데...
"아니..."
"그런데 왜요?"
이것도 조금 고민을 하게하는 질문이다.
손을 씻으며 어떻게 답을 해야 할지 살짝 뜸을 들였다.
"너무 오래봐서 서로 과거를 너무 잘 알거든."
머릿속에 떠오른 가장 좋아보이는 답을 했다.
거짓말이 아니면서 그럴 듯한 답.
"아... 중학교 때는 그 오빠 지금처럼 안 그랬어요?"
"음... 그렇지, 좀 찌질했지."
툭하면 괴롭힘 당해서 울곤 했으니깐.
"헐, 안 어울린다. 그 오빠 오티 때부터 동기 애들에게 인기 되게 좋거든요."
뭐 술자리에서 봤을 때도 그랬으니...
군대 갔다 온 이후로 더 몸도 커져서 멋있어지긴 했다.
여자애들에게 인기가 좋을 수 밖에...
"진짜 언니는 그 오빠랑 안 사귈 거에요?"
그 말에 세진이와 화장실에서 있었던 일이 생각이 난다.
확실히 세진이는 내게 이성적인 호감이 있는 것 같긴 했다.
하지만 그 감정이 사귀고 싶다는 감정일까?
더군다나 세진이와 사귄다고 하기에는 나는 진서가 있었다.
진서와 몸을 섞으면서 세진이와 사귀는 건 애초에 말이 안되는 일이었다.
"응."
그 말에 수연이는 약간 기쁜 듯 보였다.
"수업 시작하겠다. 언니 들어가요."
*******
"언니, 공강 때 뭐해요? 애들이 카페 가자는데 같이 가요."
수업이 끝나고 수연이는 내게 권유를 해왔다.
그 옆에 술자리에 보였던 다른 여자애들 3명이 있었다.
아마도 수연이와 같이 어울리는 그룹이었던 것 같다.
"그, 그럴까?"
이렇게 감사하게 먼저 다가와주는데 거절을 할 수 없었다.
여자애들 사이에서 어울리는 게 조금 어색했지만 이런 것에 점점 적응을 해나가야지...
언제까지 남자애들과 어울리기만 할 수는 없었다.
"야, 나 버리냐?"
세진이의 툴툴거리는 말에 '응'이라고 답변하기도 전에 한 여자아이가 말을 했다.
"오빠도 같이 갈레요?"
아, 그런거구나.
여자아이들의 시선이 세진이에게 모이는 것을 봐서 어떤 상황인지 파악 할 수 있었다.
"같이 가."
"그럴까?"
세진이의 말에 여자애들은 세진이에게 달라 붙었다.
"선배님, 글레이xx 라떼 드셔보셨어요?"
"요번에 나온 시즌 메뉴인데 그게 엄청 맛있데요."
그녀들은 남자의 취향과는 전혀 맞지 않은 주제들로 세진이에게 말을 걸었지만 세진이는 미소를 띄며 그녀들의 말에 호응했다.
"아 그래? 맛있겠다. 카페는 내가 쏠게."
"오, 선배님 대박."
"안 그래도 되는데, 잘 먹을 게요."
얘가 뭔 돈이 있다고 그러지?
돈도 없는 복학생 주제에 꼴에 선배라고 한턱 낸다고 하다니...
아니면 꽃밭에 둘러 쌓이니 정신을 못 차리는 건가?
하긴 어린 여자애들이 저렇게 선배선배 거리며 달라붙는데 정신을 차릴 남자가 어디 있겠는가?
몸만 여자인 나한테도 그렇게 스윗하게 굴었으니...
제대로 된 여자들을 상대로는 이런 반응이 나오는게 당연하겠지.
나도 모르게 피식 웃음이 나왔다.
카페에 도착하니 여자애들은 케익을 비롯한 시즌 메뉴나 달달한 음료들을 골랐다.
"지우야, 넌 뭐 먹을레?"
"어? 난 아아. 작은 거"
"아 그럼, 그것하고 아이스아메리카노 톨 2잔도 주세요."
그나마 아메리카노가 제일 쌌다.
물론 그것도 꽤 비쌌지만 말이다.
자리에 앉아서 잠깐의 수다를 떨자 진동벨이 울린다.
"내가 가져올게."
나는 일어나며 먼저 일어난 세진이와 뒤 따라 일어나는 여자애들을 자리에 앉혓다.
얻어먹으면서 이런 것은 해주는게 당연하다.
"같이가요 언니."
수연이는 가는 내 뒤로 따라와 팔짱을 낀다.
"어? 혼자가도 되는데."
"혼자가면 외롭잖아요."
대학교 때는 사람들과 가까이 친해지기 쉽지 않다.
특히 여자애들의 경우 겉으로는 가깝게 보여도 실제로 그들끼리 느끼는 친밀감은 낮은 경우가 많다.
수연이의 그룹 여자애들도 생각보다 친한 사이는 아닌 것 같았다.
진동벨이 울렸을 때 서로 눈치를 살피는 것을 보아하니 말이다.
일어나서 가지고 오는게 힘들어서가 아니다.
서로의 눈치가 보이는 것이다.
내가 가지고 간다면 혹시나 여기서 서열이 낮아 보이지 않을까?
아니면 세진이에게 잘 보일려고 꼬리를 치는 행동으로 보이진 않을까?
남자였을 때는 신경도 안쓰는 것들이 여자가 되고나니 자꾸 눈에 들어오고 신경이 쓰인다.
수연이는 어떨까? 나랑 진짜 친해지고 싶어서 이러는 걸까?
혹시나 세진이에게 가까워지려고 나를 이용하는 걸까?
아니면 이런 생각이 드는 내가 이상한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