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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화 눈먼 왕


[19. 눈먼 왕] 마차가 극장 앞에 멈춰 섰다. 황금빛 불이 흐드러지게 퍼지는 웅장한 극장의 입구에는 이미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흥분에 찬 목소리, 우아한 웃음소리, 그리고 간간이 들려오는 말발굽 소리가 어우러져 밤의 공기를 가득 채웠다. 시종이 재빠르게 마차에서 내려 문을 열었다. 로웬이 먼저 내린 뒤, 애프릴이 조심스레 손을 내밀었다. 그녀의 작은 손이 로웬의 손바닥에 닿는 순간, 그의 심장이 순간적으로 움찔했다. “이쪽으로 모시겠습니다.” 시종의 안내를 따라 계단을 내려갔다. 묵직한 대리석 계단을 밟을 때마다 낮은 울림이 발끝에서 전해졌다. 서늘한 공기가 두 사람을 감쌌다. 로웬은 그 차가운 기운이 자신의 뜨거운 마음을 식혀주기를 바랐다. 극장 내부는 어둑했다. 높은 천장에서 늘어진 샹들리에가 은은한 황금빛을 뿌리고 있었다. 그 빛 아래에서 애프릴의 백금발이 찬란하게 반짝였다. “응…” 애프릴이 작은 신음을 흘리며 손을 만지작거렸다. 출발 전 하녀가 끼워준 하얀 레이스 장갑이 그녀를 불편하게 하는 듯했다. 가녀린 손가락이 장갑을 살짝 당길 때마다 얇은 레이스가 팽팽해졌다. “불편해?” 로웬이 낮게 물었다. 그의 시선은 애프릴의 손끝에 고정되어 있었다. 그녀의 손가락이 장갑을 만지작거리는 동작이 마치 어린아이가 새 옷을 입고 어색해하는 듯했지만, 이상하게도 그 움직임이 시선을 뗄 수 없을 정도로 유혹적이었다. “네… 손가락이 꽉 끼는 것 같아요.” 애프릴이 살짝 투정을 부렸다. 그녀의 손목이 드러났다 사라지는 순간마다, 로웬은 자신이 이상한 감각에 사로잡히고 있음을 깨달았다. “잠시만 봐볼까.” 그는 그녀의 손을 조심스레 잡았다. 커다란 손이 그녀의 여린 손을 감싸 쥐었다. 장갑 너머로 전해지는 온기가 그의 손끝을 서서히 달구었다. “아버지… 간지러워요.” 애프릴의 조그마한 웃음소리가 조용한 극장 안에 퍼졌다. 그녀의 손가락이 로웬의 손바닥 안에서 살짝 움직였다. 로웬은 순간 숨을 멈추었다. 얇은 레이스 너머로 전해지는 미세한 감각이, 마치 전류처럼 그의 전신을 관통했다. “조금만 참아보렴.” 로웬은 최대한 평정심을 유지하려 애썼다. 그는 장갑의 손목 부분을 살짝 늘려 보았지만, 여전히 답답해 보였다. 결국 그는 천천히, 한 손가락씩 장갑을 벗겨내기 시작했다. 레이스가 미끄러지듯 손끝을 지나갈 때, 감춰져 있던 그녀의 피부가 드러났다. 샹들리에의 불빛이 그 위를 스치며, 마치 새하얀 진주를 비추는 듯 반짝였다. "음! 시원해요!” 애프릴은 손을 활짝 펴 보이며 해맑게 웃었다. 마치 새장에서 풀려난 새처럼 기쁜 표정이었다. 그러나 그 순간, 그녀가 로웬의 손을 꼬옥 잡았다. “아버지 손은 왜 이렇게 차가워요?” 애프릴의 순수한 물음에 로웬은 대답하지 못했다. 긴장으로 굳어 있던 그의 손은 그녀의 체온에 의해 점점 더 차갑게 느껴졌다. 피부와 피부가 맞닿은 그 감각이, 그의 심장을 더욱 빠르게 뛰게 만들었다. 그때, 극장의 불이 서서히 어두워졌다. 무대의 막이 천천히 올라가고, 희미한 조명이 하나둘 켜지기 시작했다. 무대 위에서는 오이디푸스의 이야기가 시작되었다. 테베의 왕자로 태어났으나,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와 결혼하게 될 것이라는 끔찍한 예언을 피해 버려진 아이. 하지만 운명은 그를 다시 부모 곁으로 데려왔고, 그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비극을 향해 걸어가고 있었다. 애프릴은 입을 살짝 벌린 채 무대를 바라보고 있었다. 마치 동화를 보는 어린아이처럼 반짝이는 눈빛이었다. 로웬은 무대를 바라보고 있었지만, 그의 의식은 점점 애프릴에게로 향하고 있었다. 이윽고, 무대 위에서 오이디푸스가 자신의 친부를 살해하는 장면이 펼쳐졌다. 그의 비극적인 운명이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아…” 애프릴이 작은 탄성을 내뱉었다. 그녀의 눈동자가 커다랗게 떠졌다. 이어서 무대는 테베의 여왕 이오카스테와 오이디푸스의 결혼 장면으로 바뀌었다. 자신이 어머니와 결혼하고 있다는 사실을 모른 채, 오이디푸스는 사랑을 나누고 있었다. 로웬은 무의식적으로 애프릴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순수한 눈빛, 살짝 벌어진 분홍빛 입술, 하얀 목선… ‘이런 생각을 하면 안 돼…’ 그는 급하게 시선을 돌렸다. 하지만 무대 위에서 펼쳐지는 장면은 마치 그의 내면을 들여다보는 듯했다. 금기된 욕망, 운명 같은 굴레, 피할 수 없는 결말. “아버지…” 애프릴이 낮은 목소리로 그를 불렀다. 여전히 그의 손을 꼭 쥔 채였다. “이 이야기… 너무 슬퍼요.” 로웬의 가슴이 무너져 내렸다. 무대 위에서는 자신의 죄를 깨달은 오이디푸스가 절망 속에서 외치고 있었다. 그의 고통이, 로웬의 내면 깊숙이 메아리치는 것 같았다. 마지막 막이 내리고, 극장 안이 밝아졌다. 로웬은 무거운 마음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방금 전까지 본 오이디푸스의 비극이, 그의 내면의 욕망과 겹쳐져 그를 더욱 괴롭게 했다. "이제 집으로 돌아가자." 그의 목소리는 평소보다 더 낮고 무거웠다. 하지만 애프릴은 그의 심정을 전혀 알지 못한 채, 투정을 부리기 시작했다. "아버지... 아직 들어가기 싫어요." 애프릴이 그의 소매를 살짝 잡아당기며 말했다. "밖에서 점심 먹고 가요. 네? 아버지?" 그녀의 눈빛이 반짝였다. 평소라면 그 순수한 눈빛에 쉽게 넘어갔을 로웬이었지만, 오늘만큼은 달랐다. "안 된다. 집으로 가야 해." 로웬의 목소리에는 평소에 없던 단호함이 담겨있었다. 애프릴은 실망한 표정을 지었지만, 더 이상 고집을 부리지 않았다. 마차에 오르자, 애프릴은 금세 밝은 목소리를 되찾았다. 그녀는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방금 본 연극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아버지, 오이디푸스는 정말 불쌍했어요. 자기가 저지른 일을 모르고 있었잖아요..." 그녀의 맑은 목소리가 마차 안을 가득 채웠다. 로웬은 말없이 그녀의 이야기를 들었다. "그리고 여왕님도... 자기 아들인 줄 모르고 결혼했다니... 너무 슬픈 이야기예요." 애프릴의 순수한 감상평이 로웬의 마음을 더욱 무겁게 만들었다. 그녀는 전혀 알지 못했다. 그녀의 아버지가 지금 얼마나 복잡한 감정에 시달리고 있는지를. 마차가 덜컹거리며 달렸다. 창 밖으로는 도시의 풍경이 스쳐 지나갔다. 애프릴은 계속해서 연극에 대해 이야기했지만, 로웬의 귀에는 그 말들이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 그의 머릿속에는 오이디푸스의 비극과 자신의 금지된 욕망이 뒤엉켜 있었다. 마치 운명의 장난처럼, 오늘 본 연극은 그의 내면의 고뇌를 더욱 깊게 만들었다. 마차 안에서 애프릴의 작은 목소리가 울렸다. "아버지, 저도 연극을 해보고 싶어요..." 그녀의 순수한 바람에 로웬의 마음이 잠시 따뜻해졌다. 복잡했던 감정이 잠시 멈추고, 순수한 부성애가 그의 가슴을 채웠다. 그의 입가에 부드러운 미소가 번졌다. "그래? 우리 애피가 연극에 관심이 생겼구나." 로웬이 다정하게 대답했다. 그의 눈빛에는 딸을 바라보는 따뜻한 사랑이 담겨있었다. 하지만 그 순간도 잠시. "아버지, 우리 같이 연극해요!" 애프릴의 제안에 로웬은 미소를 띤 채 물었다. "어떤 연극을 하고 싶은데?" 그 순간, 애프릴의 대답이 로웬의 심장을 멈추게 했다. "방금 본 연극이요! 제가 여왕님 역할을 할 테니, 아버지가 오이디푸스를 해주세요!" 로웬의 얼굴에서 핏기가 싹 가셨다. 방금 전까지 느꼈던 순수한 부성애가 순식간에 무너져내렸다. 애프릴은 자신의 말이 얼마나 위험한 의미를 담고 있는지 전혀 모른 채, 순진한 눈빛으로 로웬을 바라보고 있었다. 마차 안의 공기가 무거워졌다. 창문으로 스며들던 햇살마저 차갑게 식어가는 듯했다. "그건... 안 돼." 로웬의 목소리는 미묘하게 떨렸다. 손끝이 무심코 주먹을 쥐었다가 다시 풀렸다. 그는 차마 애프릴의 시선을 마주할 수 없었다. "어째서요? 아버지가 오이디푸스처럼 용감하시니까 잘 어울릴 것 같은데..." 애프릴의 말투는 그저 해맑았고, 아무런 악의도 없었다. 하지만 그 무고한 찬사가 로웬의 가슴을 무겁게 짓눌렀다. 그녀는 전혀 모르고 있었다. 자신의 말이 그의 가장 은밀한 금기와 맞닿아 있다는 것을. 마차는 여전히 흔들리며 달려갔다. 그러나 로웬의 마음속에서는 더욱 거센 폭풍이 몰아쳤다. 오이디푸스의 비극이 이제는 단순한 이야기가 아니라 그의 현실이 되어 그를 위협하고 있었다. 마침내 마차가 라쿠비스 백작가의 정문 앞에 도착했다. 하지만 애프릴의 간청은 멈추지 않았다. "아버지, 네? 제발요... 조금만 해보면 안 될까요?" 그녀의 목소리는 마치 어린아이가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애쓰는 듯 간절하고도 천진난만했다. 로웬은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의 이성은 단호한 거절을 외치고 있었지만, 현실에서 그는 이미 애프릴에게 휘둘리고 있었다. 저택으로 들어서면서, 결국 로웬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다..." 그 한마디가 떨어지자 애프릴의 얼굴은 환희로 빛났다. 그녀는 마치 소중한 선물을 받은 아이처럼 기뻐하며 로웬의 팔을 잡고 흔들었다. "정말요? 아버지 최고예요!" 작은 손이 그의 팔을 감쌌다. 그 가벼운 접촉이 오히려 로웬을 옭아맸다. 심장이 불규칙하게 뛰었다. 그는 조용히 애프릴의 손을 떼어내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하지만 먼저 옷을 갈아입어야 해." 로웬의 부름에 기다리고 있던 하녀가 재빠르게 나타났다. "부르셨습니까, 주인님?" "애프릴의 옷을 갈아입히도록 해." 하녀 클라라는 공손히 고개를 숙였다. 곧 애프릴에게 다가가 부드럽게 안내했다. "아가씨, 이쪽으로 오시죠." 애프릴은 살짝 아쉬운 표정을 지었지만, 별다른 반항 없이 클라라를 따라갔다. 그녀의 벨벳 드레스 자락이 복도를 따라 흔들리며 사라졌다. 로웬은 그 모습을 바라보며 길고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의 손끝이 서늘했다. 그는 자신이 방금 무슨 약속을 했는지 뼈저리게 후회하고 있었다. 저 멀리서 애프릴의 밝은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그러나 그 순수한 웃음소리는, 아이러니하게도 로웬의 가슴을 더욱 무겁게 짓눌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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