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2화 스물한 번째 이야기 - 연연불망(戀戀不忘) (68)
482.
" 어머니께서 말씀 하셨는데.... 가야죠. 근데 아가씨.... 무슨 일이신데요? "
" 아니.... 그게 이상하잖아. 거기... 난임으로 우리나라에서 손을 꼽는 데인데 거기서도 아무런 말을 못 들은 거야? 어디가 이상이 없다는 그런 것도 없었어? "
" 그냥... 몸이 허약해서 그런 것 같다고 철분제하고 영양제 처방 받은 게 전부였어여..... 석진씨랑 한 번 더 오란 말 밖에 없었는데.... "
" 어머... 올케... 그게 무슨 소리야! 우리 석진이가 원인이다 이런 소리야? "
약간 높아진 재연씨의 목소리가 거슬렸지만....
최대한 목소리를 가다듬으며 대답했다.
" 아니.... 그런 의미는 아니에요. 그때 의사가 했던 말을 그대로 옮긴 거에요. 그런데 왜 산부인과 간 것을 물으시는 건데요? "
" 이상해서 그렇지. 아무런 이상도 없는데 왜 임신이 안 된데....? 산부인과도 유명한데는 다 소개했는데도 원인을 못 찾는다는 게 이상하잖아. 석진이가 울 집안 장남이자 외아들인거.... 올케도 알고 있지? 정말 노력하고 있는 거 맞아? "
" ..... "
" 혹시 올케 마음에 짚이는 것은 없어? "
순간.....
마음 속 깊게 잠가 두었던 시간 속 기억이....
쨍그랑 소리를 내며 깨져 나와서는....
뇌리에서 산산이 흩어졌다.
" 흐음... 올케 다녔던 학교가.... 한성 대학교라고 하지 않았어? "
" 아니... 아는 사람이 그 대학에 다녔는데... 묘한 얘기를 들어서..... "
그 옛날 들었던 대화.....
그리고 그것은....
비수처럼 내 혀를 통해 세상 밖으로 흘러나왔다.
" 무슨 의미세요? 큰 아가씨.... 그게 무슨 말씀이신데요? "
난 허리를 펴고 그녀를 똑바로 보고 있었다.
몸이 화르르 불타오르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큰 아가씨 또한 눈을 가늘게 뜨더니....
나를 마주 보며 입술을 달싹거렸다.
" 아니 올케..... 뭘 그리 정색하면서 말하고 그래? 나는 둘이 걱정 되서 하는 말인데..... "
순간 화사한 한복을 입은 여자가 지나가다가 화들짝 놀라는 기색을 보이며 큰 소리를 냈다.
" 어머! 언니 거기서 머해? 에? 올케도 있었네? 아니 대체 둘이서 이런 곳에서 뭐하고 있는 거야? 엄마가 어디 있냐고 난리신데!!! "
나도...
큰 아가씨도 화들짝 놀라며....
더 이상 대화를 이어자기 못하고....
바로 주희씨....
작은 아가씨가 있는 쪽으로 서둘러 발길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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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궤도를 벗어난 열차처럼. (2)
후회(後悔).
아무리 빨라도.....
언제나 늦을 수 밖에 없다는 그 말은....
정말 뼈가 저리도록 와 닿는....
명언이었다.
왜 그때....
난....
그 남자를 고소하지 못했을까.
아니.....
고소했으면.....
조금은 달라졌을까.
그런 일을 벌였으면....
내게 닥쳤을 미래의 잔상....
얼굴들....
엄마...
아빠....
언니들....
남동생의 얼굴.
나를 알고 있는....
수많은 얼굴들.
그리고....
우태 오빠의 얼굴.....
그들의 눈동자....
그 눈동자 속에 비쳐진 내 얼굴이 일그러지며....
형언할 수 없는 두려움을 불러왔다.
그래서.....
나는....
수많은 변명과 핑계거리를 대며....
결국 시간의 흐름 속에 맡겨 버렸다.
아무 것도 안 해도 되는....
태만(怠慢) 속에서....
사실상 그냥...
눈을 감고 손을 놓아 버렸다.
술에 취해서....
몸을 가누지 못한....
허점을 보여 버린 내 잘못이라고.....
고소하고 일이 커지면....
오히려 그것이....
나에게 더 안 좋은 일이라고.....
아니....
그런 일을 아시게 될 아버지나 어머니....
언니들....
동기 친구....
나를 아는 모든 사람들의 얼굴과 시선이....
다시 한 번 빠르게 스치고 지나가며....
덜컹....
심장이 떨어졌던 그 시간들.....
그리고 무엇보다도.....
만약 소식을 듣게 된다면 울 우태 오빠는.....
군대에서 그렇지 않아도 힘들 텐데....
혹시나 무슨....
나쁜 생각을 하지 않을까....
또 오빠의 아버지.....
혼자 집에 있는 것을 걱정하던 그에게....
나까지 무거운 짐을 올려놓으면 안 된다고.....
아랫입술을 깨물며....
내 안 깊숙이 숨겨 버렸다.
거기에다가....
오빠....
더할 나위 없이 친한 친구였기에.....
만약 알려진다면 무슨 일이 벌어질까 상상하며....
공포에 떨었다.
뉴스에서 보았던 탈영 사건처럼....
당장 총이라도 들고 뛰쳐나오는 그의 모습을....
꿈속에서라도 보는 밤이면.....
비명을 지르며 깨고 나서는....
해가 뜰 때까지 땀에 흠뻑 젖어 떠는 나날도.....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아졌다.
혹시나 꿈에서 깨지 못하면....
평소 우태 오빠의 모습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무서운 얼굴로.....
미쳐서 날뛰는 그는....
말려도 말려지지 않고.....
오히려 내 목소리가.....
마법에 걸린 인어공주처럼 전혀 소리를 내지 못하며....
어느 날 밤 꿈속에서는.....
우태 오빠가 끔찍하게 누군가의 총에 맞아 죽거나....
누군가의 피범벅이 된 모습으로 내게 손을 뻗는....
무서운 결말만 보여주었다.
그러나....
그나마 위안이 되는 건....
현실 속 시간 속에서는.....
강의실에서의 그 시간 이후....
확실히 그는 더 이상....
내 앞에 나타나지 않았다.
물론....
내가 피해 다니기도 했었지만....
그도 내 시선 앞에 보이지 않는 가운데.....
보지 않을 수 있었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가고....
조용히 묻혀버릴 것이라.....
애써 나를 달래며....
학교를 다니고 있었다.
**************
" 네.... 네. 다녀왔어여. 당신은.... 어때요? 많이.... 바쁘죠? "
" 하하.... 바쁘긴 뭐.... 그래봐야 하던 일인데...... 그나저나 나.... 없어서 많이 힘들었지? 혹시.... 무슨 일.... 있었던 건 아니지? "
역시나 전화 통화가 연결되자마자....
오늘 있었던 돌잔치에 대해 물어보는 석진씨였다.
순간....
고민에 빠졌다.
혹시라도 시댁에....
연락했었던 것은 아닌지.....
그의 누나와 통화한 것은 아닌지.....
하는 생각에 어떻게 답을 해야 할지....
망설여졌다.
그래도 아직까지....
나 몰래....
직접 통화하는 일은 보지 못했으니....
잠시 가졌던 침묵의 시간을 깨고 빠르게 대답했다.
두근거리는 심장 고동 소리를 들으며.
" 아니에요. 일은 무슨.... 일이 있겠어요? 참... 언제쯤..... 오실 거에요? 정말 일주일이나 밤늦게까지 꼬박 채워야 할 정도로 일이 많은 거에요? "
" 훗.... 그렇긴 한데.... 당신 보고 싶어서라도 빨리 하고 갈께요. 너무 걱정 말고요. 문단속 잘하고.... 오늘 피곤했을 텐데 어서 쉬어요. "
수화기 너머....
다른 사람들의 기척이 들리는 것 봐서는....
이 늦은 밤까지 일하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일하는 다른 직장 사람들한테 남편이 눈치 보일까 봐....
나는 더 이상 통화를 끌지 못하고 빠르게 인사를 고했다.
" 네. 석진씨도..... 어서 일 끝내고 쉬어요. "
" 오케이~~~~~! 그럼 잘 자요. 내 사랑. 하하.... "
뚝.
밝고 언제나 웃음을 담고 있는 석진씨의 목소리가 사라진 휴대폰은....
평상시처럼 시계로 돌아와 있었다.
적막한 집 안.
오늘따라...
더 넓게 보이는 거실.
너무도 조용한 공간 속에....
혼자 서있는 나에게 문득 들려오는....
목소리.
" 혹시 올케 마음에 짚이는 것은 없어? "
심장이 얼음으로 된.....
기다란 침에 찔리는 기분이었다.
그리고 눈앞에 아른 거리는 큰 아가씨의 표정....
아니, 좀 더 과장된 표정일지도 모르겠다.
무언가 알고 있다는 듯....
싸늘하고 냉소적인 시선과 적의를 품고 바라보는....
그녀의 얼굴엔....
분명 나를 향한 << 경멸 >>의 감정이 담겨져 있었다.
언젠가부터....
은연 중 보게 되었던....
특히나 동성....
여자들에게서....
볼 수 있었던 그 표정.
원래부터....
결혼하고도 시집에 가면....
이러쿵저러쿵....
말이 많았던 고난이.....
시어머니와 시누이들에게서 생길 것이라 들었기에....
될 수 있는 한 신경 쓰지 않으려고 애를 썼다.
또한....
석진씨가 안 보이는 곳에서도 얼마나 많이....
나를 감싸고 있는 줄 알았기에.....
어떤 말과 대우를 받아도 그 잠깐의 시간을 못 참을까....
생각했었다.
하지만 아이에 대한 문제는....
그렇게 지나갈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점차 시간이 지나고....
결혼한 기간이 길어지면서.....
특히나 대를 이을 아들에 대한 얘기가 서슴지 않고 나오면서부터....
계속 시댁과의 만남은 내게 떨어지는 형벌과 같았다.
" 아직 우리 젊잖아요.... 그리고 그렇게 우리 민희씨 좀.... 자꾸 스트레스 주지 마세요. 오히려 그것 때문에 더 갖기 힘들겠어요. "
" 에고. 자기 와이프한테 민희씨가 뭐니? 안사람... 아내.... 그냥 와이프라고 해도 되는 것을.... 쯧쯧쯔.... 부르는 호칭만 봐도 니 녀석 사는 꼴을 훤하다. "
" 아니 민희씨를 민희씨라고 부르는 게 뭐가 어때서요? 아이 낳아도 난 민희씨라고 부를 거에요. 이름 놔두고 누구누구 엄마 부르는 것도 싫고.... 와이프 뭐... 이러는 것도 별로잖아요. 멀쩡히 결혼했다고 있는 이름을 왜 못 불러요? 그리고 우리 둘만 있으면 자기라고 부른다고요. 하하하.... 닭살 돋을까봐 부모님 앞에서는 생각해서 바꿔 부르고 있는데.... 이러시면 안 되죠... 흐흐... "
" 하이고.... 내가 아주 미역국을 잘못 먹었구나. 이런 팔불출 아들을 낳고..... 똘똘한 놈을 낳은 줄 알았는데 아주 단단히 잘 못 봤네.... 잘못 봤어.... "
시어머니께서는 어처구니없다는 듯....
눈을 크게 뜨시곤 한숨을 푹푹 쉬었다.
석진씨는 그럴 때면 슬그머니 옆에 앉아서는....
덩치도 큰 사람이 어머니의 손을 잡으며 쿡쿡 웃었다.
그러면 2세의 얘기는....
거기까지만 나오곤 멈춰지곤 했었다.
하지만....
그날 우연찮게 들었던.....
큰 아가씨의 한마디.
" 아는 사람이 그 대학에 다녔는데... 묘한 얘기를 들어서..... "
세상은 넓은 듯 싶지만 참....
좁은 곳이다.
특히 말이라는 것은....
소문이라는 것은 죽지도 않고....
무슨 영겁을 사는 신화 속 동물처럼....
끈질기게 살아남아서 멀리 퍼져만 갔다.
대체....
무슨 말을 들었던 것일까.....?
제3자에게서 흘러 다니는 말은....
정확히 당사자에게만 흘러오지 않는다.
하지만 인터넷....
악플이라는 것을 보면....
듣지 않아도 그 정도를 짐작할 만 했다.
또....
말이라는 것이 특성상 사람을 거치고....
또한 거치는 과정 속에서....
더욱 크게 부풀려지고 더해져서....
어마어마한 것들로 변해가는 것을 보면....
나에 대한 소문 또한....
별반 다를 것 없었을 것이다.
하긴....
나 또한....
스쳐 지나가며 들었던 말들이.....
있지 않았던가.....
" 흐흐.... 졸라 팅기네.... 술만 먹으며 그렇게 달려드는 걸레 라면서..... "
" 요새 소문을 들었나 보지? 큭큭.... 그러니까 갑자기 빼는 것 아냐? "
" 크흐.... 씨발.... 진작 알았음 나도 일찌감치 대시.. 해보는 건데.... 아씨... 버스 지나가고 타려니까 졸... 힘들다. 제기랄..... "
-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