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3화 스물한 번째 이야기 - 연연불망(戀戀不忘) (69)
483.
내 이름이 흘러나오는 것에 흠칫 멈추었던....
그 자리에서 이어져 들렸던 말들.
그리고....
그 대화를 나누는 당사자들은....
바로 우리 학과 남자들이었다.
박성태....
그 사람과의 일이 있고 나서는....
술자리 같은 데에는 한동안 아예 가지를 않았다.
이런 핑계....
저런 핑계를 대면서....
술이 있는 곳은 절로 몸을 피하게 되었다.
스터디....
아니, 한동안은....
남자들과 함께 있는 강의실도....
나에겐 불편하고 힘든 곳이었다.
갑자기 남자와 복도에서 마주치기만 해도....
나도 모르게 깜짝 놀라 얼어붙기도 했다.
오히려....
그 상대방에게 민망할 정도로.....
새파랗게 질려서 우뚝 선 채....
아무 것도 하지 못하고 벽에 기대서서....
그가 어서 지나가기를....
사라지길....
기다릴 정도였다.
제발 어서....
길고 긴 겨울 방학이 오기만을 기다리며.....
나래와 소미 외에는 잘 어울리지도 못하고....
학교와 집을 왔다 갔다 할 뿐이었다.
아니...
나래와 소미하고도....
정말 피할 수 없는 시간이 아니면....
거의 혼자 있었다.
차라리...
통금 시간이 있는 것이 나았다.
우태 오빠가 군대에 간 것을 알게 된 뒤....
느슨해진 통금 시간은 흐지부지 없어지곤 했지만....
오히려 내가 알아서 집에 빨리 들어오곤 했다.
그런데.....
그 뒤.....
언젠가부터....
나를 향한 이상한 시선을....
느끼게 되었다.
나를 보면서 히쭉 거리는....
같은 학과 남학생들의 얼굴....
또한 여학생들의 얼굴에서도.....
묘한 감정을 느끼게 하는 표정을 보면서....
도대체 무슨 일인지....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나마...
유일하게....
나래 만이 변함없는 모습으로 대할 뿐....
소미 마저도 왠지 거리를 두는 듯....
변해갔다.
오늘도 또한 과 모임이 있었지만....
장소가 호프집인 것을 알고는 거절했던 참이었다.
그런데.....
나는 입술을 깨물고....
모임 공지를 알려주었던 과 선배를....
찾아갔다.
**************
왁자지껄.
소란 스러운 분위기.
얼굴에 홍조를 띄운 사람들이 술잔을 들며....
하하 호호 웃음을 터뜨리고 있었다.
그들 무리 중에....
나 또한 앉아있었다.
술잔을 들어 홀짝 거리고는 있었지만....
전혀 취할 수 없었다.
또한 기분 좋게 마시던...
예전의 시간과는 달리....
이미 이곳 호프집에 발길을 들어설 때부터....
날이 잔뜩 서있는 것처럼 신경이 곤두서서....
취기에 젖을 들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하지만....
알코올이 몸에 들어가면서....
볼이 뜨거워지는 것은 알 수 있었다.
이미 내 얼굴은....
붉게 물들었을 게 뻔했다.
한모금만 마셔도 빨개지는 내 얼굴을 보면서....
우태 오빠는 토마토 같다고....
볼을 콕콕....
손가락으로 찔러보곤 했었다.
박성태....
처음에 그 사람도 이 자리에 있긴 했었다.
나와 눈이 마주치고는...
화들짝 놀라는 눈빛을 보인 뒤....
구석 자리 어딘가에 있는 듯 하더니....
중간에 사라져 버렸다.
차라리....
잘 되었다.
여전히 그의 존재를 느끼는 것만으로도....
심장이 미친 듯 뛰었으니까.
하지만....
아랫입술을 깨물며....
버티고 참은 보람이 있었다.
결국....
그를 내보낼 수 있었으니까....
말이다.
나래와 소미도 있었지만....
나와는 조금 떨어진 자리에 각각 나눠져 있었다.
하긴...
둘이라고....
맨날 붙어 다니는 건 아니었으니까.
오늘은....
선배 언니들이랑....
어울리는 듯 싶었다.
술 대신에 얼음물을 홀짝이는데....
갑자기 비어 있던 옆자리에 인기척이 느껴졌다.
깜짝 놀라 움찔거리며...
고개를 돌리니....
낯익은 학과 선배 오빠가....
히쭉 웃으며 앉고 있었다.
이름이....
성현....
김성현이라고.....
이번에 복학한 선배였다.
우태 오빠한테도....
한 학년 위 선배.
" 민희 너... 오랜만이다? 술자리에 그간 안보이더니 훗.... "
그러고 보니....
이전 과 모임....
술자리에서 같이 동석하곤 했던 선배였다.
군대를 갔다 온 복학생들이 다 그러하듯....
어른스러움...
어떻게 보면 아저씨...스러움이 보이면서도....
다른 칙칙한 복학생 선배들과는 다른....
그런 분위기를 풍겼다.
조금은 더 젊다고 해야 할까???
그렇다고 우리 현역과 같은 느낌은 절대...
줄 수 없지만....
그래도 다른 복학생에 비하면....
많이 나은 편이었다.
난 최대한 미소 지으며 그를 맞이했다.
불편한 마음이 표 나지 않게.....
최대한 감추며......
**************
#23. 궤도를 벗어난 열차처럼. (3)
언제부터....
모든 일을 결정함에 있어서....
될 수 있는 한 타협을 했던 것 같다.
분란을 피하고...
모두가 만족하고 좋아할 길을...
선택하도록.....
착한 아이가 되기.
부모님 말씀 잘 듣기.
학교에서 착한 학생이 되기.
교회에서도 좋은 평판 듣기.
물론....
그런 것들의 결과가.....
나쁘다는 건 아니었다.
집에서 칭찬 받는....
착한 딸이 되었고....
학교에서도....
내가 속한...
어떤 곳에서도....
나쁜 말을 듣지 않는.....
그런 존재가 되었으니.....
결과적으로 보면 많은 도움이 되었다고...
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것을 위해....
무언가 알 수 없는 것들이....
조금씩 깨져 나가는 느낌도 있었다.
내 자신이...
점점 비워져 가는 듯한....
텅 비워지고 공허해져 가는....
느낌들.
그것을 채워준 것이....
바로 우태 오빠였다.
그리고....
그렇게 채워졌던 모든 것이....
와장창 깨지는 순간도 있었으니....
그건 어느 날 술집에서...
였다.
내가...
더 이상....
나로서....
있을 수 없게 된 날.
잊을 수 없는...
바로 그 시간.
**************
갑자기 생각도 못한 선배의 접근에 놀라긴 했다.
하지만....
모든 남자를....
불편해하면 안 되니까...
그렇게 되면....
내가 지는 거니까....
억지로 미소를 지었다.
" 훗.... 성현 선배님도.... 오셨어요? "
" 하하.. 나야 뭐... 원래 이런 자리 좋아하잖냐.... 하..하.... 한동안 같이... 술도 잘 마셔놓고, 흐.... 첨보는 것처럼 그러네... 섭섭한데? "
" 아... 그랬죠, 참.... 죄송해요. "
" 흐흐.. 죄송할 것도 많다! 자... 오랜만에 본 김에 우리 함께 술 한 잔이나 하자. 자~ 건배! "
" 네..네.... "
김이 빠져버린 맥주잔을 들어 선배의 잔과 부딪쳤다.
유리잔이 내는 소리.
그리고....
들이킨 맥주의 씁쓸한 맛.
받아두고 한참 지난 맥주가...
맛있을 리 없었다.
하지만....
내 학번보다 훨씬 위...
한참....
선배인 그의 말을 거부하긴 어려웠다.
비우자마자...
성현 선배가 바로 피처 잔을 들었다.
" 자! 내가 따라줄께... "
" 아니..... "
" 흐흐.... 오랜만에 봤잖아. 자... 받아. "
손을 살짝 적시는 맥주가 차갑게 느껴지는 가운데...
또 한잔....
가득 채워졌다.
그렇게 연거푸 마시니....
진정되어 가던 취기가 다시 올라오는 것 같았다.
성현 선배가 계속 말을 걸면서 술잔을 주고받는 사이...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순간...
또 다시 내 옆자리에....
누군가 앉는 것이 느껴졌다.
고개를 돌려보니 바로....
나래였다.
저 멀리 있던...
나래가 어느새 내 옆에 앉았다.
성현 선배는 그녀의 등장에....
잠시 고개를 돌려 옆자리에 다른 이와 얘기를 나누고.....
그때 나래가 내 쪽으로 고개를 숙이며...
작게 속삭였다.
" 괜찮겠어? 민희 너... 무리하는 거 아냐? "
걱정스러운 목소리.
난 억지로 미소 지으며 답했다.
" 아냐... 나.. 괜찮아.... "
취기가 오르긴 했어도 정줄을 놓을 정도는 아니었다.
우태 오빠 덕분에....
주량이 늘기도 했고...
여기에 오면서 제대로 취기를 취할 만큼....
마음을 놓지 않은 것도 있었으니까.
하지만 또 다른 문제...
생리적 문제가 있긴 했다.
성현 선배가 아직 대화를 나누는 사이....
빠져나가야 했다.
" 나.. 잠시 화장실.... "
" 어.... 그래.... "
그렇게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향하는데 뒤에서 성현 선배의 목소리가 들렸다.
" 민희야! 어디 가냐? "
그와 동시에...
나래의 목소리도 들려왔다.
" 민희 화장실에 간대요. 참! 성현 선배 저랑 한 잔 해요. 왜 제 잔은 비워두고 모른 척 하세요?! "
" 앗... 그랬나? 하하.. 미안.... "
그들의 목소리를 뒤로 하고....
그대로 가게 밖 계단에 있는 화장실로 향했다.
볼일을 보고는....
화장실에서 나왔지만...
바로 가게 안으로 들어가지 않고...
밖으로 나갔다.
조금은....
시원한 바람을 쐬고 싶어서 였다.
취기에 얼굴이 달아오르는 것을...
바깥 공기로 식히고 싶었다.
물론....
왁자지껄 거리는 술집 안으로...
그대로 들어가는 것이 조금은 힘겨워서....
였는 지도 모르겠다.
잠시라도...
가슴을 조이는 긴장감을....
벗어나려고....
도로 쪽으로 걸어가는데...
갑자기 훅 하고....
매캐한 냄새가 코로 들어왔다.
담배 냄새....
어려서부터...
질색했기 때문에....
멀리서도 금방 알아챌 수 있었다.
아마도...
주점이 있는 건물 옆...
골목 쪽 같았는데...
다시 발길을 돌려 반대편으로 향하려는 순간....
나도 모르게 발을 멈추고 말았다.
그건....
거기서 들리는 목소리....
때문이었다.
아니..
정확히는...
거기서....
내 이름이 들렸기....
때문이었다.
" 민희 걔 말이야..... "
차라리...
듣지 못했으면...
좋았을 내용....
아니, 내가 그 술자리에 오겠다고 마음먹었던...
그 이유를 알게 되어버린...
그 대화를 듣게 되었다.
아아...
하나님.
**************
어두운 골목.
사실....
보잘 것 없는....
작은 골목길이었다.
행인들도 몇몇 왔다 갔다 하는...
그런 평범한 길이랄까.
길가에 작은 간판들도 나와 있는...
그런 골목길이라...
제법 어두운 상태였다.
그래서 살짝 벽에 기대서 본다고 해서...
나를 유별나게 볼 사람도 없었다.
내가 있던 대로변 또한 행인들이 꽤 있었고...
화려한 조명과 계속 빠르게 지나가는 차들 때문에....
그냥 길가에 서있는 여자들과 특별나게....
두드러져 보일 것도 없었으니까.
그리고...
나를 멈춰 서게 한 목소리의 주인공 또한...
겉보기엔 그냥....
술에 취해서 담배 피며 잡담하고 있는...
많은 취객 중 하나처럼 보였다.
하지만...
그들의 입에서 내 이름이 나온 이상....
더 이상 평범할 수 없었다.
가만히...
귀를 기울이자....
그리 멀리 떨어져 있지 않아서 그런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똑똑히 들을 수 있었다.
그들은....
내 쪽은 아예 신경도 안 쓰고...
담배를 피어대며 열심히....
떠들어대는 중이었다.
-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