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9화 season2. 29. 한 배를 탔으니까(1)
season 2
29. 한 배를 탔으니까(1)
* * *
“휴, 출석에 아주 깐깐한 교수님인데, 다행이다.”
겨우 시간 맞춰 학교에 도착한 기찬은 뛰다 걷다 하며 헐레벌떡 강의실에 도착했다.
감독에게 가면서 그냥 해봤던 생각 하나가 결심이 되는 순간이었다.
‘이번 주에 오토바이 하나 사자.’
기찬은 급한 메시지는 없는지, 습관처럼 호출기를 확인한 후 강의실 문을 열고 들어갔다.
그런데 그 순간, 살갗이 시린 느낌이 온몸을 휘감았다.
‘뭐지…?’
강의실에 있던 모두가 이제 막 들어선 기찬을 바라보고 있었다.
평소에도 보통 다른 사람보다는 시선을 끄는 편이기는 했지만, 지금은 그런 것과는 달랐다.
확실히 분위기가 좋지 않았다.
감이 좋고 눈치가 빠른 기찬은 빈자리에 가 앉기 전에 복식호흡 하듯 큰 목소리로 말했다.
“왜? 누구든 할 말 있으면 해. 누가 입 틀어막은 것도 아닌데 왜 눈치만 봐.”
자칫 감정적으로 느껴질 수 있는 말이었지만, 듣는 이에게 불쾌함이 전달되지 않는, 그러면서도 자신감 넘치는 화법이었다.
그래서인지 다들 살짝 기찬의 기세에 눌린 느낌이었다.
그때 누군가 말했다.
“선배들이 개강 파티 장소 우리한테 넘긴다고 했는데, 네가 거절했다며?”
기찬은 바로 느낌이 왔다.
‘양세현, 이 새끼. 그새를 못 참고…. 어떻게든 날 헐뜯으려고 했겠지.’
그 자리에 있던 사람 중 아이들에게 곧바로 퍼뜨릴 사람은 그뿐이었다.
“어. 그랬어.”
기찬의 대수롭지 않은 대답에 조용하던 강의실에 약간이 웅성거림이 일었다.
그리고 처음 문제 제기했던 녀석이 다시 시비조로 말했다.
“야. 네가 아무리 과대라지만, 왜 그런 좋은 기회를 너 혼자 생각으로 결정하냐.”
그 소리에 몇몇이 합류하기 시작했다.
가만 보니, 작정하고 선동질이었다.
세현이 시킨 일이 분명했다.
그렇다면, 끼리끼리 모여서 사전 모의가 있었을 것이다.
‘열심히다. 새끼.’
기찬은 앉으려던 자리에 가방만 올려두고 아예 강의실 앞 단상으로 올라가 섰다.
그러고는 특유의 카리스마를 뿜어내며 잠깐의 침묵을 유지하는 것으로 시선을 집중시켰다.
“…….”
의도대로 다시 정적이 내려앉았다.
기찬은 그제야 시비조로 따진 녀석을 똑바로 바라보며 질문을 던졌다.
“전후 사정까지 다 들었어? 내용을 다 알고 말하는 거야?”
기찬의 말에 그는 입을 다물었다.
기세에 압도된 건 둘째치고, 정말 전후 사정을 모르는 것이다.
기찬이 못마땅하던 차에 그저 세현이가 씹으니까 덩달아 반 성기찬 연합에 가세했을 뿐이다.
기찬은 그 뻔히 보이는 속내가 우스웠다.
그리고 이참에 이 기회를 역 이용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안 그래도 설명하려고 했는데, 잘됐네.”
그는 선배들과 있었던 대화 내용을 간략하면서도 이해가 쉽도록 일목 요연하게 설명했다.
그리고 내용을 알고 난 후의 생각이 어떤지도 물었다.
“부탁은 나에게 한 거야. 왜? 나만 할 수 있는 일이었으니까. 아니야? 여기 나 말고 재영이 만나게 해줄 수 있는 사람 또 있어?”
당연히 나서는 사람이 있을 수 없었다.
기찬은 한 호흡 죽이며 동기들이 아닌 선배들의 실책을 곁들였다.
“물론 선배들 선택부터가 잘못되긴 했지. 나 개인에게 한 부탁인데 답례는 2학년에게 한다는 것 자체가 공사 구분이 안 된 거니까.”
잠깐 말을 끊고 다시 집중력을 만든 후 핵심 내용을 말했다.
“다 떠나서, 의대 전통을 깨 가면서 우리가 거기서 개강 파티해서 좋을 게 뭔데? 고작 그거 양보받고 선배들에게 빚지는 일인데?”
기찬의 말에 수긍하는 쪽으로 분위기가 기우는 게 느껴졌다.
그래서 여세를 몰기로 했다.
“난 우리 학번, 우리 학년이 최대한 독립적이었으면 좋겠어. 그래야 부당한 지시는 거부하고, 우리 요구는 당당하게 말할 수 있으니까.”
어느새 학우들의 눈빛이 반짝이기 시작했다.
어쩌다 보니 분위기가 마치 기찬의 정책 발표회처럼 되어버렸다.
“그러려면 선배들에게 기대는 것도 되도록 줄이는 게 맞겠지. 그래서 그랬어. 고작 개강 파티 장소 한 번 양보받고 졸업할 때까지 선배 덕 본 소리 듣기 싫어서.”
누구도 생각해 보지 못한 이유였다.
그래서 더 그의 말이 설득력이 있었고, 울림이 있었다.
무엇보다, 구구절절 옳은 소리였기에 다들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인지, 처음 강의실에 들어설 때와는 분위기가 천지 차이로 바뀌어 있었다.
기찬을 보는 눈빛 자체가 달라진 것이다.
‘과대 잘 뽑은 것 같아.’
‘느낌 있어. 좋아.’
‘새끼, 리더십도 쩌네.’
기찬은 그런 학우들의 심리적인 변화마저도 읽었다.
그래서 그 기회를 또 놓치지 않았다.
“혹시라도 내 말이나 태도가 불쾌했다면 미안하다. 동기끼리 무슨 훈계겠냐. 꼽게 생각하지 말고, 그냥 의견이라고 생각해 줘.”
채찍 한 번 가볍게 휘둘렀으니, 당근도 줘야했다.
“대신, 우리 개강 파티, 클럽으로 간다.”
누구도 예상치 못한 뜻밖의 말에 잠잠하던 강의실이 다시 동요했다.
그러자 계획이 틀어져 똥 씹은 표정이던 유세현이 이때다 싶었는지 직접 나섰다.
“야, 나 총무 시켜놓고, 무슨 그딴 말도 안 되는 개소리야. 우리가 돈이 어딨어.”
그의 반발이 신호가 된 듯, 다시 팀플레이가 시작됐다.
“총무가 돈이 없다는데, 그럼 과대가 또 밑도 끝도 없이 독단으로 결정한 거야? 상의 좀 해!”
처음부터 불만을 늘어놨던 고상민이었다.
기찬은 그들의 꼴값이 우스웠다.
‘손발이 아주 척척 잘 맞네. 하수 새끼들.’
오히려 속으로는 하수들의 반발이 반가웠다.
그 잡음이 자신이 내놓을 당근을 더욱 빛나게 해줄 거로 확신했기 때문이다.
“걱정마. 내 사비로 할 거니까. 과대 되고 밥 한 번 못 샀잖아, 그래서 쏜다.”
이번에도 유세현이 곧장 거품을 물었다.
“이 새끼, 누굴 바보로 아나. 클럽 대관료가 얼마나 하는지 알고 하는 소리야?”
핑퐁의 공방을 관전하듯, 모두 입을 다물고 대거리하는 기찬과 총무를 번갈아 봤다.
문득 기찬과 혜수의 눈이 마주쳤다.
무슨 생각을 했는지, 그녀가 살짝 웃어주었다.
기찬은 그녀의 미소에서 어떤 믿음 같은 걸 느꼈다.
그런 응원을 바란 건 아니었지만, 싫지는 않았다.
“그래? 얼만데?”
기찬의 태연한 반문에 세현이 즉답하지 못했다.
클럽 대관료가 얼마인지 모르는 게 당연하지만, 어쩐지 말문이 막힌 것으로 보일까 봐 조바심이 났다.
‘돈 자랑을 좀 해 볼까.’
기찬은 그런 그의 조급한 심리를 더 몰아세우기 위해 대답할 기회를 빼앗아 훅 치고 들어갔다.
“참고로, 지금 재영이 활동하는 곡, 내가 쓴 곡이라 저작권료 나한테 다 들어와. 알다시피 난 레코드사와 계약했고, 그 계약금만 1억이 넘어.”
이 당시 주택복권의 1등 당첨금이 1억 5천만 원이었다.
즉, 1억은 인생 역전이 가능할 만큼 큰 액수였다.
과 친구인 기찬이 그 정도의 돈을 벌었다고 하니, 여기저기서 헛숨 삼키는 소리가 들렸다.
“헉.”
“일, 일억? 억 맞아?”
기찬은 기세를 더 올려보기로 했다.
“신문 기사 봤지? 앨범 판매량만 벌써 100만 장이 넘었어. 그게 얼마나 될까? 상상이 되기는 해?”
기찬은 말끝에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참느라 혼이 났다.
모두의 표정이 똑같았기 때문이다.
눈이 커다래지고, 턱이 빠진 것처럼 입이 크게 벌어졌다.
특히 반 성기찬 연합 서너 명의 표정이 가관이었다.
놀라움, 당혹감, 실망, 불쾌함, 분노, 부러움….
기찬은 그들을 향해 마지막 한 방을 꽂았다.
“어때? 총무, 이 정도면 모자랄까?”
세현은 저도 모르게 이를 꽉 물었다.
그리고 끙 앓는 소리를 냈다.
기찬을 망신 주고 아이들의 마음에 반 성기찬 연대를 만들고자 했던 계획이 산산조각 났다.
오히려 기찬의 격을 한껏 올려놓고 말았다.
‘하, 씨발. 동훈이한테는 뭐라고 하냐.’
대신 그들 몇을 제외한 다른 아이들은 환호성을 질렀다.
우와아아!
“야, 개강 파티를 클럽에서 했다는 말은 듣도 보도 못했어!”
한 복학생 선배의 말에 여기저기서 웃음이 터졌다.
물론 기찬은 손해 보는 장사는 할 생각이 없었다.
이후에 과 운영비를 잘 굴려서 수익을 내고, 들인 사비만큼 청구할 계획을 이미 세워놨다.
‘나중에 집행하고 나서 말 나올 수 있으니, 지금 슬쩍 흘리는 게 좋겠어.’
지금의 좋은 분위기를 이용해 그 계획을 공식화하면 좋겠다는 판단이 들었다.
“그래서 말인데, 과 운영비는 앞으로 내가 직접 집행하고 관리할게. 돈 많은 내가 그깟 푼돈을 부정하게 유용하겠냐?”
이미 아이들은 기찬의 말이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걸 알고 계속 말을 이었다.
“그런 내용 포함해서, 새로 구성된 집행부 회의 후 내용 전달 할 게.”
그래도 그 말에 빈틈이 있는 걸 찾았는지, 총무가 다시 문제를 제기했다.
“과대가 독단으로 그렇게…”
당연히 기찬은 그에게 발언 기회를 줄 생각이 없었다.
“유세현, 내 옆에서 총무로서 지금처럼 열심히 좀 해줘.”
“…….”
그 한마디로 지적질할 문제가 사라져 버렸다.
유세현의 인상이 실시간으로 구겨지는 걸 보며, 기찬은 일이 잘 마무리됐음을 알 수 있었다.
‘네깟 것들이 어딜 감히. 쯧.’
* * *
학교에서의 일정을 모두 마치고, 기찬은 주차장으로 가 차에 올라탔다.
그리고 다시 한번 바이크 구매에 대해 생각할 때였다.
톡, 톡.
누군가 차창을 두드렸다.
‘아.’
그는 전날 호텔에서 김하익과 함께 있었던, 그리고 송지연의 집에서 정신을 잃고 쓰러졌던 체격 좋은 사내였다.
‘이태석이라고 했던가. 그런데 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