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1화 season2. 31. 이거, 물건일세(1)
season 2
31. 이거, 물건일세(1)
* * *
기찬은 한체대에서 나온 직후 김하익과 통화해 약속을 잡았다.
그는 마침 퇴근하는 중이었고, 사무실에서 보기로 했다.
“뭐, 과대 됐다더니, 많이 바쁘네?”
안부처럼 물어오는 그를 보며, 기찬은 잠깐 생각했다.
‘과대 소식은 누구에게 들은 걸까? 송지연이나 김선주 대표는 아닐 것 같고.’
미행하거나 뒷조사했다고 해도 이상할 게 없는 인간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막상 직접 느껴보니 아주 찜찜했다.
누군가가 나를 몰래 숨어서 지켜보고, 내 행적을 수소문하고 캐묻고 다닌다고 생각하면, 소름 돋는 일이다.
만약 그가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내 등에 칼을 꽂거나 뒤통수를 내리칠 수 있는 상태니까.
기찬이나 하니까 그 정도지, 평범한 사람들이라면 두려움이나 압박감을 느끼기 충분할 것 같았다.
어쩌면 지금 김하익은 일부러 기찬에게 그런 심리적인 압박감을 주려는 지도 몰랐다.
지금쯤이면 그도 기찬과 오명환의 관계를 알게 됐을 것이다.
어쩌면 기찬이 지금 한체대에서 오는 길이라는 걸 아는지도 모른다.
‘내가 누구 편인지 궁금하겠지.’
기찬은 이런 상황을 나름 고민했었다.
어떻게 처신해야 할 것인가.
그렇다고 오명환 감독과의 관계를 부정할 수는 없었다.
‘아직은 모르는 척하는 게 좋겠어.’
일단 그쪽보다는 신경을 다른 데로 돌릴 필요를 느꼈다.
“어쩌다가 떠맡게 됐어요. 과대.”
귀찮다는 듯 한숨을 푹 쉬며 말한 기찬이 그의 맞은편 소파에 앉으며 목소리를 낮췄다.
“저, 사실 드릴 말씀이 좀 있는데, 그, 송대리 말이에요.”
기찬의 은밀한 목소리와 표정에 김하익의 표정이 굳었다.
무슨 말이 나올지 긴장하는 게 느껴졌다.
‘넌 호텔에서의 일이나 송지연 집에서의 일이 듣고 싶겠지만….’
잠깐 뜸을 들이던 기찬이 살짝 웃음 지으며 말했다.
“사실 저, 송대리랑 사귑니다.”
그 말에 김하익의 눈이 금방이라도 튀어나올 것처럼 커다래졌다.
그러다가 조금씩 입 주위가 씰룩거리더니, 웃음을 참는 건지 얼굴이 시뻘게졌다.
결국 그는 아랫입술을 꾹 깨물고 시선을 피했다.
“솔직히 이런 거 말씀드리기가 좀 그래서, 그냥 비밀로 하려고 했는데, 어제 일이 좀 있었거든요.”
전날 밤의 일이 언급되자 김하익이 계속 말해보라는 듯 기찬을 바라봤다.
“밤에, 좀, 뭐랄까, 혼자 있기 싫고 자꾸 보고 싶고 해서 찾아갔더니, 어떤 남자가 있길래….”
기찬은 그날 그곳에서의 상황을 설명했다.
당연히 김하익이 이미 다 보고받았다는 걸 알지만, 순전히 기찬의 시선에서 보고 듣고 느낀 바를 말했다.
그리고 송지연에게 어떻게 자초지종을 설명 들었는지, 사전에 그녀와 입 맞춘 대로 자세히 이야기했다.
한참 듣고만 있던 김하익이 기찬의 눈을 똑바로 응시하며 물었다.
“그래서, 송 대리 말을 믿고 기절한 이 실장을 기찬군이 병원에 데려다준 거다?”
기찬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말했다.
“그래서 말인데요, 사장님.”
기찬이 이번에는 정색하며 눈빛을 빛냈다.
착 가라앉은 기찬의 진지한 표정에 김하익은 다시 한번 기대감을 보였다.
‘진실을 많이 섞을수록 거짓말이 잘 먹히는 법이지.’
그래서 제 진심을 한 움큼 넣어 말했다.
“이게 헷갈리더란 말이죠. 처음엔 사장님이 붙여주신 걸로 생각했는데, 어제 일을 겪으면서 보니, 사장님 뜻대로 움직이는 수족은 아닌 것 같았거든요.”
그는 말을 멈추고 자신을 빤히 보고 있는 김하익과 눈싸움이라도 하듯 뚫어져라 마주 봤다.
그러면서 다시 말을 이었다.
“일단 사장님을 의심한 건 정말 죄송하게 됐습니다. 그런데 정말 모르겠어서요.”
이제 발을 빼면 될 것 같았다.
“송지연, 정체가 뭡니까?”
그때까지도 김하익은 기찬의 눈빛과 기세에 지지 않고 시선을 맞부딪히고 있었다.
그 잠깐 사이에 뭔가를 생각하고 판단했는지, 그의 눈에서 힘이 빠졌다.
대신 입가에 비릿한 미소가 맺혔다.
훗.
그는 몸을 뒤로 빼며 소파에 등을 기댔다.
다리를 꼬고 담배에 불을 붙이며 말했다.
“우리, 벌써 꽤 됐지? 이제 편하게 이름을 부를게.”
담배 한 모금을 맛있게 빨고 내뱉더니, 경계심이 한결 누그러진 표정으로 말했다.
“기찬아. 네가 아무리 똑똑해도, 세상 무서운 줄 알아야 해.”
기찬은 그의 태도를 통해 적당히 기만에 성공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아마도 그는 기찬이 여러 가지를 제법 잘 눈치챘지만, 결정적으로 그 또한 송지연의 진짜 정체는 모른다고 확신하는 것 같았다.
그리고 그건 정확한 판단이었다.
김하익의 입장에서, 아버지를 포함한 형제들과의 후계 경쟁 같은 집안 내부의 일이다.
그런 사정을 알 리 없는 기찬이기에, 당연히 송지연의 정체를 모른다고 생각했다.
정작 당사자인 자신도 몰랐으니, 기찬이 알 리 만무했다.
그걸 지금 기찬의 말을 통해 확인하고 경계심이 조금 누그러진 것이다.
‘제깟 게 서울대생이라고 해도 아직 세상 물정 모르는 애송이지.’
그럼에도, 그 애송이가 자신의 의도를 간파했다는 건 역시 놀라운 일이었다.
그래서 그런 영민한 기찬을 제 사람으로 만들겠다는 판단이 옳았음을 다시 한번 확신했다.
‘내가 일부러 붙였다는 걸, 저쪽 계략으로 떠넘기면 되겠어.’
김하익이 머리를 굴리는 소리가 기찬에게는 다 들렸다.
그러라고 일부러 여기저기 떡밥을 섞어 여러 말을 늘어놨던 것이다.
‘송지연이 내게 모든 사실을 다 말했을 거라고는 꿈도 꾸지 못하겠지.’
그건 김종태 회장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왜?
기찬의 대물을 모르기 때문이다.
송지연 같은 전문적인 스파이가 스스로 모든 걸 이실직고 하게 만든 힘을 그들은 알 도리가 없는 것이다.
기찬은 생각을 정리하고 일단 김하익의 핸들링에 놀아나 주기로 했다.
물론 그렇다고 우습게 보여서는 안 되기에, 핵심은 짚어가며 끌려갈 생각이었다.
“네. 제가 좀 쉽게 생각했던 게 사실입니다. 역시 인생의 파도를 넘어 본 사람의 경험은 짐작으로 알 수 있는 게 아닌가 봐요.”
소탈하고 허심탄회한 자기반성 같으면서도 당당함과 자신감을 잃지 않은 대답이었다.
당연히 그런 기세를 김하익은 느꼈고, 그 모습이 바로 자신이 기찬을 높이 사는 이유라고 다시 한번 생각하는 중이었다.
그러면서 변명을 내놓기 좋은 때라고 여겼는지, 묻지도 않았는데 먼저 자초지종을 꺼내놓았다.
“그, 사실 말이야. 송지연을 너한테 붙인 건 내가 아니야.”
은밀한 비밀이라도 말하듯 웅얼거린 감히익이 다시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기찬도 덩달아 몸을 당겨 그와 가까이 마주했다.
“너, 우리 아버지 알지?”
“네. 당연히 알죠.”
“아니, 그런 거 말고. 우리 아버지가 어떤 사람인지 아냐고 묻는 거야.”
“그야….”
기찬이 말을 얼버무렸다.
마치 말을 아끼는 듯한 모습을 연출한 것이다.
알긴 아는데, 그걸 당신 앞에서 어떻게 내 입으로 말하냐는 태도였다.
김하익은 기찬이 자신의 의도대로 반응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생각해 둔 수를 두었다.
“네 말대로, 송지연은 내 말을 듣고 움직이는 여자가 아니야. 아버지 사람이라고.”
기찬은 이미 다 알고 있는 내용이었지만, 정말 놀랐다는 듯 표정을 지었다.
입을 벌리고 다물지를 못 하고 있으니, 김하익이 픽 웃으며 마저 말했다.
“그 노인네가 왜 너한테 송지연을 붙인 건지는 나도 몰라. 그러니까, 조심해.”
마치 걱정해 주는 것처럼 다독이고는 이제 제가 궁금한 걸 알아보려고 시도했다.
“그나저나, 어제 그 시간에 송지연네 집에는 왜 간 거야?”
호텔에서 마주쳤던 것부터 묻지 않는 걸 보니, 적당히 눈치를 보는 모양이었다.
그래서 기찬은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그게, 에이. 아시잖아요. 남자가 야심한 밤에 갑자기 여자친구네 집에 왜 가겠어요.”
기찬은 덤덤한 표정과 다르게 민망한 듯 말했다.
그러자 김하익이 킥킥 대기 시작했다.
“알지. 잘 알지. 크큭.”
그러더니 흥미롭다는 듯 궁금해하며 물었다.
“그래서, 어떻게, 좀 즐겼어?”
“즐기긴 뭘 즐겨요. 그 덩치큰, 이실장인가 뭔가 때문에 땀만 흘렸죠.”
기찬은 당시의 상황을 마무리 짓듯 설명했다.
기절한 건 덩치였지만, 부상 정도가 심한 건 송지연이라는 사실까지 언급했다.
“그래서 둘 다 병원에 데려다 눕히고 바로 집으로 간 거라고?”
“네. 어쩌겠어요. 갈비뼈가 부러졌다는데.”
거기까지는 사실이었다.
그리고 그가 묻기 전에 궁금증 일부를 풀어주기로 했다.
물론, 사실이 아닌 거짓으로 말이다.
“아, 집에 가기 전에 호텔에 들렀어요. 그, 어제 사장님이랑 마주쳤던 그 호텔이요.”
기찬의 말에 김하익의 눈빛이 달라졌다.
기다리던 말이었는지, 집중하기 시작했다.
어쩌면 제가 묻고 싶어 변죽만 울리고 있던 차에, 기찬이 알아서 입을 열어주니 반가운 모양이었다.
“아, 그래? 거긴 무슨 일로?”
기찬은 전혀 눈치채지 못한 것처럼 술술 이야기했다.
“어제 보셔서 아시겠지만, 제 은사님이 그 호텔에 묵으시거든요. 갑자기 호출이 왔더라고요. 급한 일이라면서.”
무슨 일인가 싶어 서둘러 객실로 올라갔더니, 방이 엉망이었으며, 짐가방을 다 뒤집어놨더라고 설명했다.
이유를 묻자 중요한 수첩이 없어졌다며, 그것 때문에 기찬을 그 시간에 급히 찾았다고까지 말했다.
“일단 호텔 프론트에 상황을 말하면서 혹시 객실에 누가 드나들었는지 확인할 수 있냐고 물었더니….”
그 대목에서는 기습이라도 당한 것처럼 김하익의 얼굴이 긴장이 깃들었다.
‘송지연, 이 미친년이 대체 무슨 짓을 저지르고 다닌 거야?!’
수첩 내용을 찍으라고 준 카메라도 가지고 있지 않다더니, 수첩에 손을 대? 그러면, 그 수첩은 어디로 빼돌린 거야?
김하익의 머리가 뒤죽박죽 뒤엉키기 시작했다.
그때 사장실 문이 열리고 이태석이 다급하게 들어왔다.
“뭐야, 노크도 없이!”
“사장님! 회장님 오셨습니다!”
“뭐?!”
김하익이 깜짝 놀라며 벌떡 일어섰다.
기찬도 눈이 동그래졌다.
‘회장님? 설마, 김종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