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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화 season2. 63. 재난(1)


season 2 63. 재난(1) 송지연이 전해준 소식은 뜻밖의 것이었다. “그러니까, 이번 올림픽 대표 선발전에 후원 기업들이 붙는다고?” “소문이 그래.” 기찬은 전생의 정보와 다른 상황에 살짝 당황했다. 그게 아니더라도 너무 비상식적인 일이었다. 축구 같은 인기 종목이나 양궁, 탁구, 마라톤 같은 관심 종목 외의 비인기 종목에 기업 스폰서가 붙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심지어 올림픽 본선도 아니고 선발 대회라면 말할 것도 없다. 하지만 그럼에도 금방 수긍됐다. ‘이것도 나로 인해 달라진 거다.’ 전생에서는 기찬은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다. 하지만 지금은 멀쩡히 살아있고, 오명환과 협회장 등이 기찬을 이용해 일을 꾸며 시합을 준비 중이다. 즉, 기찬 자신이 달라진 인과의 원인이었다. 누가? 왜? 라는 의문으로 시작해 이런저런 생각을 하던 기찬은 만족스러운 마음에 저도 모르게 웃음을 지었다. ‘기업들의 후원이라. 재밌겠네.’ 국가대표가 되어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따면 받게 될 포상 규모가 어마어마할 것이다. 그뿐인가. 광고며 방송이며, 미래에 소환할 좋은 자료들을 많이 만들어둘 수 있다. 뭐가 됐든 나쁠 게 없는 상황이다. 문득 품에 안겨서 빤히 자신을 올려다보고 있는 송지연과 눈을 맞췄다. 그녀가 왜 이런 소문을 지금 말하는 건지 알 것 같았다. 김하익 때문에 신경 쓰인다고 했더니, 나름 반가운 소식으로 근심을 덜어주려는 것이다. ‘확실히 기분 전환은 됐네.’ 그래. 지금은 한 가지 목표에 집중할 때다. 날파리에 시선이 분산되는 건 아마추어나 하는 실수야. 각오를 새롭게 다졌다. 국가대표가 될 자신이 있었고, 금메달 딸 자신도 있었다. 그로 인해 얻게 될 이익이 기대했던 것보다 훨씬 더 커지고 있어 기꺼웠다. “누나. 혹시라도 국가대표가 되면, 근사한 선물 하나 해줄게.” “어머, 정말?” 기찬은 혀짧은 소리로 애교를 부리며 품으로 파고드는 송지연을 꼭 끌어안았다. 동시에 이미 예열이 된 대물을 가랑이 사이에 집어 넣었다. “어머? 이게 언제 또…….” 송지연은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뜨면서도 은근한 기대감이 보였다. “이리 와. 오늘도 아주 죽여줄게.” * * * 첫 시합 상대는 화순 군청 소속의 김성호였다. 그는 아시안 게임 은메달리스트다. 나이는 스물일곱 살로, 경험과 경력, 신체 능력까지 복싱선수로서 전성기에 있었다. “첫 시합은 쉬울 거라면서요.” 기찬이 오명환에게 투덜거리듯 말했다. 그러자 자신의 주먹에 스트랩을 감아주던 트레이너겸 코치인 경호가 픽 웃었다. “감독님 말을 믿었어? 기찬이, 의외로 순진하네.” 당사자인 오명환은 딴청을 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기찬의 시선을 느꼈는지 돌아보고는 헛기침했다. 흠, 흠. “지더라도 강한 상대와 시합을 해야 임팩트가 있는 거야. 성인무대 첫 시합 상대로 저만한 상대 어디 아무나 구할 수 있는 줄 알아?!” 맞는 말이라는 걸 기찬도 알고 있었기에, 더는 군말 할 수가 없었다. 솔직하게 인정하는 수밖에. “아니, 고마워서 그러죠. 고맙습니다. 감독님. 저야 뭐, 감독님이 하라는 대로 하면 되죠.” 빠른 태세 전환에 이번에도 경호가 웃음을 터뜨렸다. “에라이.” 그 반응에 기찬도 풋 하고 웃었다. 그러자 오명환이 밝은 표정으로 다가와 기찬의 어깨를 두드리며 차분히 말했다. “긴장 하나도 안 하고, 좋네. 링 올라가서도 이렇게 해. 어깨 힘 빼고, 편하게.” “네, 감독님.” 곧 순서가 됐고, 기찬은 링에 올랐다. ‘타고난 몸뚱이에 운동신경, 게다가 내가 가진 정보들….’ 기계에 빗대자면, 가장 이상적인 하드웨어에 지상 최고의 소프트웨어를 탑재해 놓은 병기가 바로 기찬이었다. 지려야 질 수가 없었다. 그래서 기찬의 고민은 다른 데 있었다. ‘어떻게 하면 사람들의 눈길을 사로잡을 수 있을까?’ 이슈가 되는 방법을 고민했다. 심판의 주의 사항 고지 중에도 생각은 멈추지 않았다. 볼거리를 제공하는 쇼맨십이 필요할지, 한 방에 KO시켜 화제성을 만들지, 적당히 실력을 숨기고 올라가서 정말 중요한 한 시합에서 진면목을 보여줄지. 많은 시나리오가 머릿속을 스쳐 지났다. 아직 결정이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에서 파이트 벨이 울렸다. 띵. 상대가 씩 웃으며 주먹을 내밀었다. 기찬이 주먹을 맞대며 살짝 고개를 숙여 예의를 갖췄다. 툭. 시합 시작. 상대 세컨에서 외치는 소리가 선명하게 들렸다. “탐색전 필요 없어.” “체력 아껴야지. 들어가.” “리치 길다. 방심은 하지 말고.” 상대 코치진에서도 기찬의 하드웨어는 신경 쓰이는 모양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아무리 고교 졸업 후 은퇴했던 애송이라고 해도, 고교 시절의 기찬은 결코 무시할 수 없는 한 방이 있었다. 그들도 그걸 모르지 않는 것이다. 그에 반해 기찬의 코치진은 조용했다. 가끔 경호가 ‘손 내밀어’라고 작게 주문할 뿐이었다. 그렇게 시합 개시 후 평이하게 서로의 주먹만 툭, 툭 치며 간 보던 때였다. 한순간 김서호의 신형이 흐릿해졌다. 팟. 그러더니 어느새 기찬의 왼쪽 옆구리 아래에서 주먹이 올라왔다. 훅! ‘겁나 빠르네!’ 물론 기찬은 다 보고 있었다. 아주 찰나의 동작까지도 훤히 보였다. 민첩성에서도 밀리지 않아 상대의 카운터를 어렵지 않게 피했다. 슥. 후웅. 발을 뒤로 빼며 훅을 피했더니 곧장 스트레이트가 꽂혔다. 파앙. 그 순간 기찬은 속으로 미소를 지었다. ‘이게 당신 주특기이자 습관 같은 거라는 걸 알고 있다.’ 노린 건 아니지만, 수없이 이미지트레이닝 했던 상황과 딱 맞아떨어졌다. 머뭇거릴 이유가 없었다. 핏. 살짝 몸을 기울이며 고개를 트는 것만으로 정타를 빗겨냈다. 상대의 놀란 눈을 보며, 기찬은 왼발을 축으로 피봇과 동시에 빈 옆구리에 묵직한 오른손 바디를 작렬시켰다. 뻐어억. 남다른 소리가 울리고 잠시 후, 기찬은 연타를 꽂아 넣는 대신 뒤로 스텝을 밟아 거리를 만들었다. 그리고 상대는 기찬이 있던 자리로 엎어졌다. 털썩. 심판이 달려들어 카운터를 시작했다. “텐, 나인, 예잇…….” 아시안게임 은메달리스트는 끝내 다시 일어서지 못했다. * * * 똑똑. “홍보실 김혁 차장입니다.” 노크 소리에 비서가 문을 열어주며 안으로 안내했다. “안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김 차장은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허리를 90도로 굽혀 인사했다. “친선경기를 제외한 국가대표 선발전에 참고가 되는 모든 시합을 데이터로 정리했습니다.” 늘 해왔던 일인 것처럼 그는 곧장 회장의 책상에 서류를 보기 좋게 펼쳐 놓았다. 김종태는 김 차장이 짚어주는 곳에 시선을 두며 설명에 귀 기울였다. “아직 유의미한 데이터는 아닙니다. 다만, 꼼꼼히 챙겨보라고 지시하신 성기찬 선수의 경우에는 여러 곳에서 관심을 보이고 있습니다.” “어째서?” 김혁은 손가락으로 기찬의 승패 기록 아래 적혀있는 특이사항을 짚으며 말했다. “4 게임 전부 1라운드 30초 이내에 KO승입니다. 그리고….” 말을 하다가 말고 마른침을 삼킨 그는 김종태 회장의 시선을 받으며 힘주어 말했다. “딱 한 방이었습니다.” “한 방?” “네. 바디 훅 세 번, 어퍼컷 한 번, 딱 네 번 주먹 휘두르고 4승 전승입니다.” “호오.” 김종태 회장의 눈이 반짝거렸다. 놀라워하는 노 회장의 입가에 의미 모를 미소가 번졌다. 그는 지난번 이태석을 무릎 꿇린 기찬의 바디샷을 떠올렸다. ‘내가 그 주먹에 반하기는 했지. 끌끌.’ 흐으음. 김 회장은 의자에 등을 기대며 잠깐 무언가를 생각하다가 김 차장에게 지시했다. “약속 잡아.” 밑도 끝도 없는 말이었지만, 김혁은 곧장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네, 알겠습니다.” 확실하지 않은 부분에 대해서는 질문도 잊지 않았다. “성기찬만 부르시는 겁니까?” 오명환에 대해 묻는 것이었다. 김 회장은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답을 대신했다. 그제야 김혁은 다시 한번 허리를 반으로 접어 인사하고는 군더더기 없이 회장실을 나갔다. 달칵. 문이 닫히고, 김종태는 다시 한번 미소를 머금었다. “물건이야. 그것도 아주 상품이야. 크흘.” * * * 기찬은 오전 강의만 챙겨 듣고 곧장 서초동의 백화점으로 향했다. 오랜만에 재영을 보기로 약속했고, 만나기 전 선물을 사기 위해서였다. “시합 네 번 했더니 벌써 6월도 다 갔네.” 기찬은 마네킨들이 입고 있는 한여름 옷들을 보며 혀를 찼다. 할 일은 태산인데 너무 빨리 흐르는 시간이 야속했다. 맨 꼭대기 층부터 대충 빠르게 훑고 내려왔지만, 딱히 재영에게 줄만 한 선물은 찾지 못했다. 재벌이나 다름없는 재영에게 비싼 선물보다는 의미가 담긴 선물을 하고 싶어 고민했지만, 선뜻 생각나는 게 없었다. 그래서 차라리 웃기기라도 해야겠다는 마음으로 재영이 좋아하는 과자며 도넛을 사기 위해 지하로 내려갔다. “이런,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네. 아무튼, 백화점은 시간 잡아먹는 곳이라니까.” 언젠가 들었던, 백화점에 창문을 만들지 않는 이유가 생각났다. 그리고 문득, 시계를 다시 들여다보게 됐다. “다섯 시 삼십 분.” 뭔가 불길한 느낌이 스멀거리고 올라오기 시작했다. 기찬은 얼른 자신의 ‘백년의 서’를 빠르게 뒤졌다. 그리고 불길함의 이유를 금방 찾을 수 있었다. 1995년 6월 29일 17시 57분. 삼풍백화점 붕괴. 걸음이 멈췄다. 어이가 없어서 입이 벌어졌다. “이런 젠장, 왜 이런 큰 사건을 미쳐 생각 못 했지?!” 전부 시합 때문이다. 시합에 정신을 쏟느라 그 외의 다른 건 일절 돌아보질 못했다. 그래도 그렇지…. 백화점이 무너지기 20분 전. 혼자라면 얼마든지 살 수 있지만, 앞으로 벌어질 일을 알고 있는 이상 참사는 막고 싶었다. 아직 시간은 있다. 기찬은 달리기 시작했다. “여기, 방송실 어딥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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