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화 17화 - 박수연과 김하림
연선 누나는 더는 알려줄 수 없다며 입을 닫았기 때문에, 나는 잊으려 묻어둔 어제의 일을 다시 떠올려야 했다.
의 술자리엔 연선누나와 명옥, 현모, 서영, 그리고 태평이 함께 있었다. 연선 누나와 명옥을 용의 선상서 지운다면 동갑인 서영과 태평이 남는다. 태평은 남자인 데다 토요일 아르바이트가 있다며 일찍 일어났고, 서영은 고등학교 때부터 사귄 남자친구가 있...
...아니다!
그러고 보니, 그 자리엔 여학생 한 명이 더 있었다.
얼굴을 기억해내려는 순간, 다른 비슷한 이미지와 겹쳐 정확한 얼굴을 떠올리기 힘든... 그런 아이가 한 명 있었다.
그녀는 말이 없었고, 내 시선이 닿을 때마다 서영의 몸 뒤로 얼굴을 숨기곤 했다. 조각난 이미지론 그녀의 얼굴을 떠올릴 수 없었다.
“너 기분 좋은가보다?”
“좋긴요. 누군지도 모르는데.”
“어제 함께 있던 아이라니깐.”
“전혀... 모르겠어요.”
“둘 다 대단하네.”
“뭐가요?”
“어리숙하고 맹한 게 똑 닮았어.
뭐가 좋다는 건지...”
“닮았어요?”
“응, 둘 다 키가 크고 이쁘장하게 생겼어.”
“흠... 얼굴 보면 생각나겠네요.”
나는 최대한 무심한 듯 행동하려 애를 썼는데, 그조차도 누나의 눈에 거슬렸나 보다.
“좋냐? 어젠 더듬거리며 좋아 죽!던! 놈이.”
“누나 왜 그래요? 기억 안 난다면서...”
“머리는 기억 못 하는데 가슴이 기억하더라.
주물럭주물럭... 내가 주물럭도 아니고...”
누나는 짓궂은 표정으로 가슴을 움켜쥐듯 양손을 움직인다.
“그만 해요~ 쪽팔리게...”
“괜찮은 애야. 잘해봐.”
“모르겠다고요.”
“이 답답아! 수연이라고. 박수연!”
아!
박수연!
...
박수연...?
* * *
설렌 마음으로 월요일까지 기다렸다.
그녀는 내가 말을 걸어보지 못한 동기 중 한 명이었는데, 그것은 아마도 그녀가 대중 속에 숨는 법을 마스터한 은둔자처럼 언제나 사람들의 이목을 끌지 않고 조용히 움직였기 때문이었다.
월요일부터, 나는 전혀 알지 못했던 미지의 인물, 박수연을 자세히 관찰하고 있었다.
수연은 수업 준비를 하며 심봉대와 흙 통을 옮기고 있었다. 170쯤 되는 키에 하얗고 긴 팔을 갖고 있었는데, 오전 해가 들이치며 그녀의 하얀 솜털이 역광에 빛이 났다. 몸매를 드러내지 않는 옷 때문에 전체적으로 마른 편으로 보였고, 얼굴조차 숙이거나 가리고 있었지만, 또렷한 이목구비로 균형 잡힌 얼굴이었다.
후하게 평가하자면, 서구형의 상당한 미인이었지만. 큰 키와 마른 체형, 화장기없는 얼굴 때문에 아픈 사람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런데 그녀의 모습을 보면 볼수록, 알고 지낸 사람처럼 익숙한 느낌이 점점 더 강하게 들었다.
“어엇!”
그녀가 옮기던 흙 통이 내 작업 테이블과 부딪혔다. 바퀴 달린 테이블이 돌림판을 건드렸고, 난 기우뚱하며 흔들리는 심봉대를 급하게 움켜잡았다. 사실 그녀를 쳐다보느라 피해 주지 못한 내 잘못도 있었다.
“미안...”
수연이 창백한 입술로 말한다. 도톰했지만 혈관이 보일 정도로 얇은 피부의 입술이었다.
“아냐, 수연아. 내 잘못이야.”
이름을 불렀다는 사실에 놀랐는지, 그녀는 잠시 내 얼굴을 빤히 쳐다본다.
내가 아무렇지 않다는 듯 돌림판을 이리저리 돌리며 매끄러운 베어링 소리를 확인시켜 주었다.
“멀쩡해. 괜찮아.”
그녀는 내 말이 끝나기도 전에 등을 돌려 사라진다.
‘뭐야? 몇 마디 더 해줄 수도 있잖아?’
나는 이후로도 몇 번인가 그녀 곁에 가까이 다가갔다.
시선을 마주치거나 가벼운 눈인사를 건네보려 했지만, 그녀는 차갑게 나를 외면했다. 애초에 나를 의식한 듯, 내가 있는 방향으론 고개조차 돌리지 않았다. 그렇게 이삼일이 지나자 나는 쫓기는 듯 초조해졌고, 연선누나의 정보가 잘못되었다고 확신했다.
애초에 말수 없는 수연이 그런 비밀을 연선누나에 털어놓을 리 만무하다.
아마 누나는 멀리서 비웃었을 것이다. 농락당한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늦봄의 금요일이 찾아왔다.
여학우들의 짧아지는 치마가 변화하는 계절을 실감케 했다.
“하아... 오늘도 예술대는 출석률이 안 좋네요.”
아침부터 교양영어 교수님은 언짢은 표정이다.
미대와 경영대가 함께 듣는 교양수업인데, 그중 조소과의 출석률이 가장 안 좋았다.
1교시가 끝나고, 지각한 현모가 슬그머니 옆자리에 앉는다.
“대영아, 출석 불렀어?”
“밥이나 사.”
“크크, 대출 고맙다.”
수업이 끝나고 교실을 빠져나가는 우리를 과대형이 급하게 불러세웠다.
“자, 시간 없으니, 다시 한번 간단히 공지할게요.
강촌으로 두 번째 엠티를 갑니다!
내일 10시까지 청량리 시계탑으로 모여주세요.”
첫 번째 엠티를 망쳤기 때문인지, 두 번째 엠티는 서둘러 일정이 잡혔다.
“아, 주말 알바 낀 사람은 늦게라도 오세요.
강촌의 오선민박입니다.”
마지막 전달사항은 웅성거리는 소리에 묻혀 제대로 듣지 못했다.
“형도 갈 거지?”
“가야지! 너는?”
“난 그날 학원 땜빵이라...”
“땜빵? 왜서?”
“원장님이 갑자기 자리를 비우셨어.”
가끔 원장님을 대신해 평일 수업을 맡은 적은 있지만, 이번 주처럼 내내 땜빵을 선적은 없었다. 원장님의 얼굴이 어두운 걸로 봐선 좋은 일로 자릴 비우는 것 같진 않았다. 아버님이 편찮으시단 얘기도 있었지만 정확한 정보는 아니었다.
“몇 시에 끝나는데?”
“10시 타임이니까, 늦어도 한 시 반?”
“그럼 나랑 함께 출발하자. 여대 앞이라고 했지?”
“뭐야 번거롭게, 그냥 청량리에서 만나.”
“아냐 인마, 내가 학원으로 갈게.”
오늘따라 이상하게 현모가 고집을 부렸다.
* * *
같은 날.
학원 수업이 끝난 금요일 밤.
간단히 물청소를 마치고, 바닥이 마르도록 창문을 열어뒀다.
창문 밖으로 몸을 내밀어 담배에 불을 붙이는데 뒤에서 누군가 말을 걸어왔다.
“여기서 담배 피우면 안 되는데~”
두고 간 물건을 챙기러 온 수강생인가 싶어 뒤를 돌아봤는데... 원장님이었다! 너무 놀라 몸을 빼면서 창틀에 뒤통수를 부딪쳤다.
“아코!
원장님, 여긴 어떻게!”
그리고 바닥에 담배를 비벼끄는 실수까지 했다.
수지로 만든 바닥 타일에 회복할 수 없는 검은 자국이 생긴 것이다.
“아... 원장님. 죄송합니다.”
“풉~”
그녀는 별일 아니라는 듯 손가방을 정물대 위에 올려놓는다.
긴 생머리를 풀어 코트 뒤로 내려트린 모습이 평소와는 다른 느낌이었다.
“어른이 그럴 수도 있지, 뭘 그렇게 놀래요?”
밝게 웃는 표정과 달리 그녀의 눈은 퉁퉁 부어있었고, 얼굴은 빨갛게 달아오른 상태였다. 아마 살짝 취해서 운 모양이다.
의 원장님은 올해 서른 살이다.
작고 아담한 체구의, 화를 내거나 소리 한번 지른 적 없는 귀엽고 아름다운 여자다. 그녀는 조그만 얼굴과 평균보다 살짝 작은 키 때문인지 이십 대 중반의 나이로 보였고, 도톰하고 붉은 입술, 혈색 좋은 피부를 가졌다.
나는 그녀의 웃는 모습을 좋아했다. 그녀는 입을 크게 벌려 웃을 때도 입 모양이 반듯했고, 가지런히 정돈된 치열과 건강한 잇몸을 가졌다. 그런 웃음이 그녀를 활달하면서도 지적이고 우아한 이미지로 보이게 했다.
“괜찮으신 거죠?”
“네! 괜찮아요!”
그녀는 다리를 곧게 펴고 허리를 살짝 구부려 감사하단 인사를 했다. 일직선으로 뻗은 다리 덕분에 작은 키에도 몸의 비율이 좋았다.
“걱정해줘서 고마워요.”
“안 좋은 일이라도...”
“됐어요, 그 얘기는 그만!”
“아, 죄송합니다.”
“지금 시간이면 윤쌤이 있을 것 같아서 들렀어요.”
“네, 방금 수업이 끝났습니다.”
“우리 맥주 한잔할래요?”
기숙사 통금이 걸친 애매한 시간이었다.
더구나 내일은 엠티였고 난 짐도 싸지 못했는데...
“나, 거절당하면 부끄러운데...”
애처로운 듯 안절부절못하는, 처음 보는 원장님의 얼굴이었다.
난처해하는 그녀의 표정에 난 당황하고 말았다.
“어디로 갈까요?”
우린 지하철역 근처의 치킨집으로 들어갔다.
칸막이마다 커튼이 설치된 특이한 구조였다.
“여기 치킨 맛있어요!”
그녀는 주문한 맥주가 나오자마자 시원하게 들이키지만, 몇 모금 마시지 못하고 잔을 내려놓는다. 이미 술을 많이 마셔 속이 거북해 보였다.
“목이 말랐는데, 술은 잘 안 받네요.”
“천천히 드세요.”
유리 테이블 아래로 치마 입은 그녀의 몸매가 보인다. 그녀는 평소 학원에서 맨살이 드러나는 옷은 거의 입지 않았기 때문에, 원장님의 몸매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은 없었다.
군살 없는 허리와 몸에 비해 큰 골반, 살구색 치마 사이로 얇은 허벅지와 종아리까지 내려오는 부드러운 선이 보였다.
“나 오늘 심각한 얘기 할 것 같은데...”
“심각한 얘기요?”
“응!”
격의 없는 사람을 대할 때 내는 콧소리였다.
학원을 그만두겠단 말이 아닐까 걱정하던 나는 조금 안심이 되었다.
“네, 말씀하세요.”
“윤쌤이 먼저 시작해봐요.”
“네?”
“내가 먼저 하면 쑥스러우니까 윤쌤이 먼저 하라고요.”
“제가 무슨...”
“고민이 있을 거 아녜요.
여자친구 문제나 군대 같은...
우리 오래 볼 사이니까,
부담 갖지 말고 털어놔 봐요.
나 궁금해.”
“아... 군대는 어쩌면... 겨울방학에 갈 수 있겠단 생각은 해봤습니다. 구체적인 건 아니고요. 그리고 여자친구는... 아직 없습니다.”
“없어? 여자친구?”
“네, 아직...”
“아~ 역시... 쑥맥이었구나. 우리 윤쌤.”
“네에...”
“어머! 미안해요. 내가 너무 쉽게 말했네.”
“아뇨, 숙맥 맞습니다.”
주문한 치킨과 과일 샐러드가 나왔고, 빈 맥주잔이 채워졌다.
그녀는 술을 권하거나, 건배하지 않았다.
“윤쌤은 제가 어떤 여자로 보여요?”
“네? 어떤이라니...”
질문의 뜻을 이해하지 못했다.
“아무 얘기나, 나에 대해 솔직하게 얘기해 봐요.”
보기보다 많이 취하셨나?
맥주 몇 잔에 이런 빈틈을 보일 분이 아니었다.
“윤쌤 눈에 비친 내 모습이 궁금하다고요.”
“흠... 교양있고 좋은 분이죠. 부족한 저에게 잘해주시고, 웬만한 실수는 말씀 안 하시잖아요.”
“아이참! 이거 안 되겠네~ 대영 씨!”
“네?”
“윤대영! 뭘 그렇게 어려워하냐고! 누난데!”
“아이고... 원장님...”
“푸흐흡~ 갑자기 말놔서 미안~
놀랐죠?”
“네, 조금.”
“난 친절, 교양 이런 거 말고
직설적인 얘길 듣고 싶다니깐.”
그녀가 조금 달리 보이기 시작했다.
당황스러웠지만 친근한 사이가 된 것 같은 느낌도 들었다.
“흠... 일단 몸매가 좋으세요.”
“좋아 좋아~ 이제 시작했어~”
“혈색도 좋고,
특히 입술이 붉고 도톰해서 웃을 때 이쁘세요.”
“어머~ 그동안 몰래 훔쳐봤구나?”
“하체가 틀어짐 없이 곧잖아요.
다리맵시가 모델 같아요.
지금 허벅지와 엉덩이도...”
나도 모르게 유리 테이블 아래, 그녀의 맨살을 움쳐보고 있었다.
살구색 치마가 엉덩이 근처까지 밀려 올라가 있었고, 편하게 벌려진 허벅지는 팬티가 보일 정도로 아슬아슬한 각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