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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화 35화 - 수연의 집 [1]


“누나, 다 왔어요.” 파출소는 생각보다 가까운 곳에 있었다. 피가 흐르는 다리에 화장이 지워져 엉망인 얼굴로... 더구나 남학생의 부축을 받고 들어온 하림을 보고 경찰들이 놀랐다. 사건접수를 하겠냐고 물어봤지만, 하림은 ‘배꽃 미술학원’의 원장 조희를 먼저 불렀다. 순경은 대영에게 세 양아치의 인상착의를 묻지만, 그는 어두운 골목이었고 처음 본 얼굴이라 대답했다. 하림에게 같은 질문이 주어졌을 때 그녀 역시 대영과 같은 대답을 했다. 동행한 여경과 하림이 화장실에서 나왔을 때 대영은 사라지고 없었다. 남학생이 남긴 연락처나 메모도 없었다. * * * “하마터면 파출소에서 조희 원장님을 만날 뻔했네.” “그러게요. 그랬음 몇 년 동안 기다리지 않았어도 됐는데...” 우린 편의점에서 맥주 한 팩과 과자 몇 봉지를 샀다. 하림은 아직 발그레한 표정이었다. “그날 밤 파출소에서 왜 그렇게 급히 나간 거예요?” “경찰이랑 엮여서 좋았던 기억이 없어.” 난 유치장과 파출소 지구대를 들락거렸던 아버지를 떠올렸다. “암튼 그날 밤 조희에게 그 남학생 얘길 해줬죠. 그랬더니 자기가 더 흥분해서...” “아이고....” “아직도 경남대나 창원대 학생으로 알고 있을 거예요. 내가 고등학생이라곤 말 안 했거든요.” 당시 김조희 원장은 학원 건물에서 숙식하던 구성(디자인과목) 강사와 그렇고 그런 사이였다. 학원생들에겐 숨기고 싶었겠지만 대부분 둘의 관계를 알고 있었다. 하림은 모르는 것 같아 굳이 말하지 않았다. “피식피식 터져 나오는 웃음을 들키지 않으려고 이불을 머리까지 말고 잤어요.” “고등학생을 좋아한 거네.” “처음부터 고1인 줄 알았다면... 상황이 변했을지도. 후훗.” 가로등 앞을 지나면서 하림은 다시 겨드랑이를 파고들며 팔짱을 꼈다. 담장을 타고 내려온 장미 넝쿨만큼이나 그녀의 볼이 붉다. “남자에게 그렇게 설레본 건 처음였어요.” “쑥스럽다. 그만해.” “그렇게 그 남학생을 생각하며 몇 년을 애달파하다가, 우연히 다시 만난 거예요. 대영씨 고3 때.” “맞아, 소묘 채점하러 학원에 왔었지?” “난 그때 심장이 멎는 줄 알았는데, 대영씨는 전혀 몰랐어요?” “전혀. 특강 강사님이 여자라서 놀랐지, 몸매 좋고 세련된...” “이그... 머릿속에 온통...” “너무 앳된 애송이라 실망하진 않았고?” “아뇨. 대영씬 그때나 지금 설레는 유일한 남자라니까요.” “그럼, 서울 학원 알바 자리도 하림씨가 만든 거야?” “아니, 대영씨가 실력이 되니깐 내가 제안한 거죠.” “정말. 엄청난 인연이다.” 하림은 집에 돌아와 맥주 몇 모금을 홀짝거리더니, 금방 졸린다며 침대로 향했다. “잠옷 입지마.” “싫어요.” 그러나 결국 내 고집을 꺾을 순 없었다. “아이... 참...” 3초만에 옷을 모두 벗겼고, 하림은 이불속으로 도망쳤다. 속옷은 물론 잠옷까지 갖춰 입어야 잠이 온다던 그녀는, 엉덩이 사이에서 꿈틀대는 녀석을 나 몰라라 한 채 ‘쿨쿨’ 잠이 들었다. “잘 자요...” “네...” 하림은 잠결에 대답하곤, 홀가분한 표정으로 나를 안았다. 그리고 곧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갑자기 그녀를 대하기가 조심스러워진다. 큰 죄를 지은 것처럼 마음이 불편했다. 하림의 남자라면 평생 돈 걱정 없이 작가의 꿈을 키울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성공도 어느 정도 보장돼 보인다. 그러나 해바라기처럼 한결같은 하림보다, 사랑해주지 않으면 찌를 것처럼 날카로운 수연의 가시에 마음이 기우는 게 사실이다. 난 여전히 계산적인 사람은 못되었다. * * * “입맛 없는데... 조금 더 자면 안 돼?” 갓 지은 밥과 튀김옷을 입힌 흰살생선의 냄새를 맡으며 난 하림에게 투정을 부린다. “안돼요. 기숙사 들르려면 서둘러야죠.” 기지개를 켜며 주방에 나오자 하림에게 미안한 생각부터 들었다. 어디서 구했는지 아침부터 제육과 조기가 상에 올라와 있다. “어젠 없던 재료들이잖아?” “새벽에 시장 다녀왔어요.” “자기도 피곤했을 텐데... 밥이야 학교가서 먹음 되는데...” 난 미지근한 물 한잔을 시작으로 아침 식사를 시작했다. “조기 너무 맛있다. 제육도...” “정말요? 후훗.” 하림은 언제나 나긋하고 조용했기 때문에 말투로 기분이나 감정을 파악하기 어려웠지만, 지금은 꽤 흡족한 표정이었다. “오늘 스케줄 어떻게 돼요?” “수업은 3시에 끝나는데 모르겠네. 3일 만에 가는 학교라 과제가 좀 밀렸을 거야.” “그럼 오늘은 시간이 안 되겠네요?” 하림은 명함 한 장을 건넨다. “운전학원?” “전에 얘기했는데 대영씨가 말이 없길래... 등록은 오늘 해 놓을게요.” “연신내면 먼 거 아냐?” “그나마 제일 가깝더라고요.” “알겠어. 수업 끝나면 가볼게.” “그리고 이것도 가방에 넣어요.” 코팅된 식권 다발인데, 처음 보는 문양이었다. “우리 학교가 아닌데?” “15층 교수식당 식권이에요” “교수식당? 우리 학교에 그런 게 있었어?” “학생 출입 가능한 식당이니까 부담 갖지 말고요.” 틀림없이 남희 누나가 사다 줬을 테지. “밥 잘 챙겨 먹어요.” “알았어.” 엄마 같다. 난 엄마가 없으니 모르지만, 엄마가 있었다면 꼭 하림 같았을 것이다. * * * 8시 30분. 아직 실기실은 비어있었다. “야! 윤대영!” 갑자기 연선누나가 득달같이 달려온다. “너 어딜 다녀온 거야?!” “아... 저기...” “며칠 동안 기숙사에 없었다며!” 쏘아붙이듯 빠른 말로 공세가 시작했다. “장례식에... 조교 누나가 말 안 해요?” “아니. 우리가 삐삐 여러 번 남겼는데.” “아... 삐삐는 해지했어요. 미안해요. 누나.” 멀리서 눈이 마주친 수연이 다가왔다. “어쨌든 볼일은 잘 본 거야?” “어... 수연, 오랜만이야.” 연선은 아직 말이 끝나지 않았는 듯 내 팔을 잡아끌었다. 난 수연에게 향했던 시선을 거둬야했다. “어딜 가면 간다고 말을 해줘야지.” “정말 미안해요. 누나. 저 때문에 리포트 늦어졌죠?” “네가 딱히 필요했던 건 아닌데, 암튼 넌 이틀이나 빠졌으니까 오늘부터라도 열심히 도와.” “네, 부지런히 할게요.” 연선은 그제야 뒤쪽의 수연을 돌아봤다. “수연아, 워드작업 컴퓨터실에서 할 거니? 자리 맡아줄까?” “아뇨, 아직. 대영이랑 얘기해 볼게요.” “그래, 수연이가 고생 좀 해줘. 대영이 말 안 들으면 일러.” 연선누나가 자리로 돌아가자 수연이 나를 보고 빙긋 웃었다. “너 내일 시간 괜찮아?” “응 괜찮아. 자린 내가 맡아놓을게.” “내일 석가탄신일이야.” “아, 그렇구나. 그럼 어디서?” “우리 집.” “집? 너희 집?” * * * 목요일. 하림과 함께 늦은 아침을 먹고, 그녀가 학교까지 태워다 줬다. 난 정문 앞이 아닌 리치몬드 제과점 앞에서 내렸다. “오후에 다시 태우러 올까요?” “아니, 언제 끝날지 몰라.” “뭐 먹고 싶은 거 없어요?” “오늘 삼우제 준비로 바쁘다며.” “만들어 놓으면 되죠. 내일부터 또 며칠 못 볼 텐데...” 버스가 클랙슨을 울렸다. “어서 출발해.” 난 하림의 차가 시야에서 사라지는 것을 확인하곤 화방에 들러 플로피디스크 두 장을 샀다. 그리고 학교가 아닌 지하철역으로 들어갔다. 언제까지 들키지 않고 이런 생활을 유지할 수 있을까. 수연이 알려준 대로 10량짜리 기차의 맨 마지막 칸에 탄 채 동호대교를 건너고 있었다. 하림의 얼굴을 볼 때마다 죄책감과 불안함에 시달렸지만 내가 가장 기분이 좋아지는 순간은 수연을 떠올릴 때였다. 만약 내가 어른이 되어 하림을 만났다면 선택이 달라졌을 거란 생각을 해본다. 마음이 가는 대로 너무 먼 곳까지 와버린 느낌이다. “윤대영!” 지상에서 올라오는 계단에서 수연의 목소리를 들었다. 내가 아는 박수연이 맞는지 의심들 정도로 커다란 목청이었다. “잘 찾아왔네.” “응...” 수연은 몸매의 윤곽이 그대로 드러나는 짧은 치마를 입고 있었는데, 당시 유행하던 스포츠 원피스란 사실은 나중에 알게 되었다. 옷깃부터 소매까지 파란색의 두툼한 면으로 만들어진 그 원피스는 가슴을 쿵쾅거리게 할 정도로 매력적인 옷이었다. “왜? 뭘 자꾸 힐끔거려?” 비스듬히 앞서 걷던 수연이 나를 노려보며 묻는다. 그녀가 움직일 때마다 흔들리는 가슴과 팬티라인을 쓸고 지나가는 옷감의 물결 때문에 난 정신이 없었다. “뭐, 뭘 봤다고 그래.” “풉, 치마 너무 짧지?” 내가 세상에서 본 어떤 의상보다 자극적인 옷이었다. “그래도 이쁘다.” “오... 너 그런 말도 할 줄 알아?” 공휴일 오전 시간인데 터미널엔 사람들이 많았다. 치마 아래 드러난 수연의 맨살 때문에 남자들의 시선이 신경 쓰였다. 그녀의 손을 잡아도 될지 몇 번인가 고민했고, 잠깐씩 손이 스치기도 했다. 우린 터미널을 빠져나와 몇 개의 지하도를 건넜다. “조금만 더 가면 돼.” 아파트가 빽빽하게 늘어선 도시의 오솔길을 그녀와 말없이 걸었다. “너 왜 그렇게 얼어있어?” 수연이 뒷짐을 짚더니 내 얼굴을 빤히 들여다본다. 나는 사실 약간의 긴장과 흥분 상태였다. 손만 뻗으면 닿을 것 같은 수연의 손과 찰랑거리는 치마, 무게의 중심이 좌우로 이동하면서 팽팽한 선처럼 긴장하는 허리의 근육이 느껴졌다. 명옥의 자취방에서 보낸 밤, 수연의 어설픈 키스가 떠올랐다. “아냐, 난 괜찮아.” 난 그날 밤 부끄럽게 숨어버리던 수연의 작은 혀와 얇은 입술을 보며 대답했다. 수연은 다시 말이 없어졌고 우린 조용히 걷는다. 그녀도 나와 비슷한 상상을 하고 있을까. 커다란 미끄럼틀이 있는 모래 놀이터를 지나자 2층짜리 단독주택이 늘어선 골목이 나타났다. 차 두 대가 지나다닐만한 도로를 사이에 두고 경쟁하듯 담 밖으로 풍성한 정원수의 가지를 뽐내고 있었다. 난 수연의 집이 가까워졌음을 직감했다. “동네가 이쁘네...” “모두 오래된 집들이야.” “너희 집은 어딘데?” “저기 오렌지색 대문.” “아 맞다. 여긴 근처에 슈퍼 없니?” “괜찮아.” “아니야, 처음인데 어떻게 빈손으로 가.” “괜찮다니깐. 슈퍼 가려면 다시 터미널 근처까지 가야 해. 그리고 오늘 우리 집 비어있어.” “부모님이 안 계신다고?” 은근히 기대하고 있었지만, 그것은 상상 속에서나 벌어질 만한 일이었다. 정말 그녀가 빈집으로 나를 데려오리라곤 예상하지 못했다. 가슴이 떨리고 손바닥에 땀이 나기 시작했다. <띵똥> 수연은 분명 빈집이라 말한 것 같은데, 벨을 누르고 있다. “이모~ 나 왔어~” <찌잉~ 철컹> 페인트가 두텁게 칠해진 넓은 철문을 수연은 거침없이 밀고 들어간다. 그곳엔 이제 막 초록빛을 내기 시작한 잔디밭이 있었다. 군데군데 바닥석이 깔려있었고, 구석의 작은 벤치 위로 과실수가 만든 그늘이 늘어져 있었다. “어서 와요. 수연이 친구분이라 했죠?” 관리가 잘된 2층 양옥집의 현관문이 열리더니 젊은 여자가 낮은 단화를 구겨 신고 우릴 반겼다. 그녀는 집에서 입는 편안한 바지와 티셔츠 복장이었는데, 어딘지 모르게 수연과 닮은 외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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