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6화 106 - 기사의 왕 레이드 上
키런 왕국이 전쟁을 시작했다!
이건 아드레이 왕국이 드러커스의 미로를 끌어올릴 때와 달랐다.
엄연히 국가 대 국가 간의 전쟁이었다. 드러커스의 미로 때는 레이드라는 이름으로 한 데 뭉쳤다. 그런데 이건 사람 대 사람의 싸움이었다. 어느 한쪽이 적이라고 할 수 없었다. 심지어 갑작스럽다고 해도 서로에게 명분은 충분했다.
“이거 키런 왕국의 선전포고 아니야?”
“아냐. 게시판 얘기 들어보니까 실질적인 원인은 판테스 쪽에 있다던데?”
“야! 키런이 전쟁 여는 이유 유X브 올라왔어!”
“암만 봐도 그냥 판테스 잡아먹으려고 지랄 하는 거 같아.”
“이런 게 고증에 맞아? 갑자기 전쟁을 건다고?”
“근데 생각해보면 판테스도 나라 하나 잡아먹지 않았음? 업보 스택 터진 듯?”
키런 왕국이 선전포고를 하는 이유는 두 가지였다. 하나는 영토 무단침입, 다른 하나는 외교 문제였다. 루하다가 키런 왕국을 돌파한 사건은 암암리에 전해지고 있었다. 키런 왕국이 정보를 막은 것도 있었거니와 단독으로 누즐라 요새를 뚫는 건 불가능한 영역이었다. 그래서 대부분 거짓으로 치부하던 상황이었다.
그런데 이번 일로 진실이 되었다. 그로 인해 판테스 왕국에게 품고 있던 힘을 숨기고 있단 가정. 각 정보 조직의 이 의심은 점점 더 커져갔다. 그런 와중에 샬론 백작과 블랙 남작이 외교 다툼이 있었다고 말했다.
반면 판테스 왕국에서는 외교 문제는 없었으며 키런 왕국이 암습을 가했다고 발표했다. 다른 나라에서도 이 발표에 힘을 실어주었다. 특히 로이첸 왕국에서는 키런 왕국의 행태를 꾸짖으며 판테스 왕국에 원조를 약속했다.
그 덕분에 플레이어들은 골머리를 싸맸다. 베톰 왕국을 제외하면 손꼽히는 힘을 가진 나라가 키런 왕국이었다. 그곳이 뭐가 아쉬워서 거짓말을 하고 이제 와서 판테스 왕국을 치겠는가.
그렇다고 판테스 왕국이 계책을 부릴 리도 없었다. 그만한 힘도 없거니와 로이첸 왕국을 두고 굳이 키런 왕국에 공작을 할 필요가 없었다.
어디를 선택해도 명분은 있었다.
문제는 보상의 문제였다.
“이건 대가리 깨져도 키런이지.”
“맞지. 기사의 나라잖아. 칼 쓰는 사람만 취급해준다고 해도 보상을 짜게 준 적은 없지.”
“악몽의 기사 레이드 잊었어? 이모탈 최초로 귀족에 발을 걸치게 했잖아.”
“게다가 이기는 쪽에 붙어야지. 지는 쪽에 붙어서 뭐 얻어먹을 게 있어?”
키런 왕국에 붙은 쪽은 많았다. 그런데 의외로 판테스 왕국 쪽에도 의견이 몰렸다.
“근데 의외로 이런 거 약한 나라가 이긴다는 그런 거 있지 않나?”
“맞아. 단독으로 키런 돌파한 사람도 거기 있다며.”
“게다가 여기도 보상 꽤 세게 줄 거 같지 않음?”
“떼먹을 거 없나.”
“솔직히 판테스 향우회는 모여야지.”
“여긴 스타팅의 천국이잖아. 양심 있으면 여기로 붙어! 유입 막을 거야?”
그 외에도 다른 의견은 많았다.
“이건 레이드가 아니라 전쟁이지. 일방적으로 한쪽으로 붙을 게 아니야. 애초에 그것들이 플레이어를 얼마나 싫어하는데 전쟁에 그냥 껴주겠어?”
“애초에 플레이어가 껴들 자리가 없지. 명분도 없고. 오히려 여기서 껴버리면 이미지만 박살나는 거라고.”
“랭커들은 신경도 안 쓰잖아. 게다가 잘못 하면 상대 국가에 지명수배를 당하면 어떡해?”
“중립 기어 박아라, 그냥.”
이번 전쟁에 의문을 품은 이들은 선뜻 나서지 않았다. 애초에 두 국가의 사이가 나빴다면 모를까, 너무 뜬금없었기 때문이었다. 무엇보다 전쟁 컨텐츠는 아직 해금이 되지 않았다는 게 플레이어들 사이의 정설이었다. 신중한 이들은 아직 이른 베타테스트일 뿐이며 패널티까지 짊어질 필요 없다고 생각했다. 다른 이들은 지금부터 시작일 수도 있다며 모험 정신을 발휘했다.
하지만 이번 전쟁이 평범한 전쟁이 아니란 건 현실 시간으로 5시간 정도 지나 알려지게 되었다.
*
루켄트 요새. 이곳은 그림자늑대 기사들의 급습으로 소란스러워졌다. 그들의 힘은 강했다. 병사들은 순식간에 도륙났고 기사들조차 섣불리 상대할 수 없었다. 그나마 왕실 기사단과 윙라이온 기사단이 힘을 합쳐서 인명 피해가 더 늘지 않았던 건지 아니었으면 몰살됐을 것이다.
그들의 검은 날렵하고 날카로웠다. 게다가 피하는 솜씨도 예사롭지 않았다. 이들 중 몇 명은 그들의 움직임에서 다른 존재를 떠올렸다.
‘늑대.’
라피에 초원. 판테스 왕국에서 섣불리 쳐내지 못했던 위협스러운 늑대들. 이 늑대들의 움직임은 날렵하고 강인했다. 검과 같이 날카로운 송곳니와 발톱으로 병사, 기사 가리지 않고 공격했다. 검격은 물론 화살조차 가볍게 피해냈다.
‘그림자 늑대.’
기사들은 그들의 움직임에 놀랐지만 당황하지 않았다. 오히려 차분하게 진형을 짜고 합격술을 구사했다.
차캉!
츠르릇-
하지만 그들은 정말 예상 외의 존재였다. 검을 맞댄 그 순간 그림자늑대의 검이 구부러졌다. 그러더니 검을 쥐고 있는 팔뚝을 베어 들어왔다.
차캉!
기이하게 구부러진 검을 본 기사는 경악하며 한 발 물러났다. 그는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팔뚝을 내려다보았다.
검에 맞은 부분이 음푹 패여있었다. 실로 엄청난 힘이었다.
“큿……!”
갑옷이 없었더라면 팔이 그대로 잘렸을 것이다. 최근 판테스 왕국이 병력의 질을 높이기 위해 무구를 보급한 게 신의 한 수였다. 그게 아니었더라면 지금 그는 외팔이가 됐을 것이다.
안도할 틈이 없다. 기사는 곧장 자세를 고쳐잡고 그림자늑대들과 맞섰다.
*
기사들이 애를 먹고 있는 동안 릴본 자작도 꽤나 분전하고 있었다.
샤캉!
그야말로 기습! 왕실기사들도 몇 명 합류하긴 했지만 거의 자작 혼자서 페멜로 백작과 델폰 남작을 지켜야 했다.
그림자늑대들은 집요했다. 어떻게든 달아나려고 하는 걸 끝까지 따라 붙었다.
자작은 동시에 그림자늑대 셋의 검을 쳐냈다. 구부러지고 휘어지는 이상한 검이지만 단 한 번의 검격으로 공격을 걷어냈다.
‘10합, 그 이상은 못 버텨.’
그림자늑대들은 자작의 방어태세에 검을 겨누고 경계했다. 그는 이미 한 차례 그림자늑대의 등장을 인지한 경력이 있었다. 그의 존재는 그림자늑대 사이에서도 요주의 인물이었다.
사살해야 한다.
릴본 자작은 바틸카스가 눈여겨 본 인재이기도 했다. 실제로 그의 재능은 차고 넘쳤다. 기습을 위한 지금이 아니면 기회가 없을지도 몰랐다. 릴본 자작이 여기 있을 거라는 생각은 하지도 못했다. 그저 요새를 점령하고 길을 열 생각이었다. 그런 와중에 기회가 온 것이다.
그들은 치밀했다. 릴본 자작이 두 사람, 특히 페멜로 백작을 중점적으로 지킨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래서 최대한 방심을 유도한 뒤 그를 공격할 생각이었다. 만일 자신을 노린다는 걸 알아차린다면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혼자 도망칠 게 분명했다.
차컁!
그림자늑대들은 생각을 공유했다. 왕실기사들과 릴본 자작의 방어를 뚫기 위해 유기적으로 움직였다.
그러던 중 기회가 한 번 찾아왔다.
“큿……!”
페멜로 백작 역시 응전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직접적인 전투보다는 지휘가 적성에 맞았다. 정예 중의 정예인 왕실기사조차 애먹는 판국에 그가 그림자늑대의 공격을 받아낼 리 만무했다.
스각-
“크핫!”
백작은 어깨를 크게 다치며 물러났다. 왕실기사 한 명이 그걸 보고 몸을 날려 그를 다시 호위했다.
“제대로 움직여라! 우리들의 임무가 무엇이냐!”
릴본 자작은 기사들을 다그쳤다. 그러면서도 확실히 검을 걷어냈다. 스스로가 한계라고 생각한 횟수는 진즉 넘어섰다. 자작은 20여 번의 공격을 막아내면서도 숨 한 번 흩트러지지 않았다. 실로 대단한 의지였다.
차캉-
카각-
자작의 분전 덕분에 그들은 천천히 물러날 수 있었다. 자작은 곳곳에서 들리는 병사들의 비명을 들으며 이를 꽉 물었다. 그들을 구하려다 백작을 잃으면 큰 손해였다. 백작이 어설픈 귀족이라면 가차없이 버렸겠지만 그는 훌륭한 지휘관이었다. 지금 그를 잃을 수 없었다.
탓-
자작은 요새 정문까지 길을 열었다. 문 근처에 도달했을 때는 자작의 몸 곳곳에 상처가 가득했다.
“훅…… 후우……”
그림자늑대들은 생각 외로 수확을 거두지 못했다. 이건 릴본 자작이 생각 외로 전투 능력이 뛰어난 것도 있었지만 그들의 계략 때문이기도 했다.
우선 최대한 활로로 몰아붙이며 천천히 체력을 갉아먹는다. 그 후 한 순간을 노리고 단숨에 치고 들어간다!
차캉!
그들은 자작을 향해 검을 뻗었다. 그러다 몇 명이 양옆으로 빠지며 페멜로 백작과 델폰 남작을 노렸다.
본래 목적인 요새 점령과 지휘관 처단. 이것만이라도 이루려고 했다.
그러나 이것 역시 자작이 전부 간파한 뒤였다. 적들이 생각보다 힘을 못 쓴다는 건 뭔가 노림수가 있다는 것! 그 중 가장 확실한 건 백작이었다. 그래서 자작 역시 신경을 분산시키면서 그들의 계획을 노렸다.
차캉!!
자작은 뒤로 물러나면서 백작을 노리려는 그림자늑대들을 쳐냈다. 그들 중 힘이 빠지지 않은 하나가 백작에게 파고들었다.
다행히 페멜로 백작은 부상을 입었어도 힘이 빠진 검격을 쳐낼 힘은 있었다. 그래서 달아날 기회가 생겼지만…… 변수가 생겼다.
“어-”
델폰 남작. 그를 향한 검이 있었다. 그림자늑대 중 하나가 릴본 자작의 반응에 차선책을 택한 것이다.
그도 엄연히 귀족. 지휘관은 하나라도 쳐내면 이득이었다. 그래서 그를 노렸다.
릴본 자작은 그 모습을 보며 당황했다. 그가 휘두른 검의 경로는 백작을 지키기 위해 휘두른 것이다. 조금 떨어져있는 델폰 남작까지 지키기 위해 경로를 비틀 수 없었다. 그 전에 그가 죽을 테고 자작 역시 빈틈을 보여 위험했다.
버려야 한다.
릴본 자작은 시선을 돌렸다. 남작을 향해 뻗어가는 검. 휘청이며 쓰러지기 직전이었던 델폰 남작의 모습. 도망치는 내내 검 하나 제대로 못잡던 그가 반격을 하거나 피하리라는 기대는 하지 않았다.
끝이다.
릴본 자작은 그에게 시선을 주지 않았다. 델폰 남작 역시 고개를 돌린 자작을 보며 최후를 예감했다.
스각-
“-어?”
정말 찰나의 순간이었다. 델폰 남작은 비산하는 핏방울을 보았다.
그리고 그 피는 남작의 것이 아니었다.
차캉!
“릴본 자작!”
페멜로 백작이 소리쳤다. 릴본 자작은 몸으로 그림자늑대의 검을 막아냈다. 다급히 몸을 던진터라 갑옷으로 검을 튕겨낼 허릿심이 없었다. 그래서 갑옷의 일부와 함께 상체가 깊게 베였다.
자작은 입술을 씹으며 대답했다.
“괜찮습-”
그러다 다른 그림자늑대의 공세에 입을 다물었다.
스캉- 차캉!
“자작님!!”
“피해라! 어서!”
자작은 피를 흘리면서도 힘겹게 공격을 막아섰다. 델폰 남작은 창백해져서 백작과 함께 자리를 피했다.
분명 그는 버리는 게 맞았다. 그건 델폰 남작도 알고 있었다. 원망을 했을 테지만 납득이 가는 선택이었다.
그런데 자작은 남작도 살리는 선택을 했다. 그림자늑대에게 틈을 허락하고 점점 위기로 몰리는 어리석은 선택을 했다.
남작은 약할지언정 바보는 아니었다.
그는 희생한 것이다.
‘어찌 이리 무력한가……!’
기사에게 휘둘리며 살던 그가 이제는 기사에게 쫓기게 되었다. 그야말로 나약하기 그지없었다.
“정신 차려라, 델폰 남작!”
페멜로 백작은 큰 소리로 퇴로를 향해 달렸다. 만일의 사태를 대비해 문 근방에 묶어둔 말만 탄다면 그의 희생은 헛되지 않을 것이다.
“알겠습니다……!”
델폰 남작은 식은땀을 흘리며 뒤를 돌아보았다. 그런 그의 눈에 보이는 건 그림자늑대에게 합공을 받고 한쪽 무릎을 꿇은 릴본 자작의 모습이었다.
“아.”
델폰 남작은 창백해진 얼굴로 읊조렸다.
“어째서.”
들릴 리 없었다.
그런데 릴본 자작은 최후에 쓰러지기 직전 뒤를 돌아보았다. 자신이 남아서 두 사람이 살아남은 것에 안심한 걸까. 그게 아니면 달관한 자의 표정이었을까.
그는 코웃음을 치고 있었다. 약한 그를 구하는 게 훨씬 강한 쪽의 책무인것마냥, 당연하단 듯한 미소였다.
스각-
이윽고 자작의 머리는 허공으로 비산했다. 그림자늑대들은 릴본 자작을 쳐내고 곧장 백작과 남작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훅…… 흐훅…… 백작 각하.”
델폰 남작은 격앙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페멜로 백작은 인상을 찌푸렸다.
“달려라.”
“남겠습니다.”
“무-”
백작이 주춤거리는 사이 델폰 남작은 검을 쥐고 반대로 달렸다.
“델폰!!”
힘의 차이를 모를 수 없었다. 아마 델폰 남작 자신의 힘으로는 몇 합도 버티지 못할 것이다. 아니, 시간조차 끌 수 없을 것이다.
그런데도 몸이 제멋대로 움직였다.
‘기사는 아니다.’
남작은 검을 굳게 쥐었다.
‘힘도 없다.’
그림자늑대들은 순식간에 남작의 눈앞까지 다가왔다.
‘그렇다고 은혜를 저버리는 병신은 아니다.’
델폰 남작은 온 힘을 다해 검을 휘둘렀다. 그가 전력을 다해 검을 휘두른 순간 그림자늑대들이 크게 물러났다. 그 바람에 델폰 남작은 휘청이다 앞으로 고꾸라졌다.
“어, 어?”
델폰 남작은 그림자늑대들이 주춤거리며 거리를 벌리는 걸 보았다. 그는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며 검을 쥐고 일어났다.
혹시 무슨 힘이라도 생긴 건가? 그렇게 생각한 남작이 소리쳤다.
“백작 각하! 지금입니다! 제가 시간을 벌 테니 달아나십시오!!”
“그럴 필요 없네.”
굵직한 목소리. 그건 백작의 것이 아니었다.
“어?”
델폰 남작이 뒤를 돌아보았다.
부스스한 적갈색 머리카락. 땀방울이 맺힌 단단한 이마. 굵은 선이 인상적인 넓직한 어깨의 사내.
“다, 당신은……”
“이제 물러나게.”
그는 손을 내밀었다. 델폰 남작은 곧장 검을 건넸다.
“살아 있었나?”
이제까지 한 마디도 하지 않던 그림자늑대가 입을 열었다.
검을 건네받은 사내는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웃었다.
“뭐, 어차피 다시 죽은 사람이 될 예정이네만.”
그는 가볍게 검을 휘둘렀다. 잔잔한 바람이 불었다. 그러나 그 바람에는 엄청난 살기가 끼어있었다. 델폰 남작은 새파랗게 질려 주저앉아 버렸다.
“전 백작위였던 휴트라고 하네. 성은 가이람이었지.”
휴트는 서늘하게 뜬 눈으로 그림자늑대들을 보았다.
“소드 마스터로서 기사 왕국의 검을 견식하고자 찾아왔다네.”
“쳐라!!”
그림자늑대들은 기합을 내지르며 달려들었다.
휴트는 간결한 동작으로 그들을 하나씩 베어나갔다. 그들의 날카롭고 가벼운 검술도, 이리저리 휘어지는 검도, 날렵한 움직임과 표횰한 회피 능력도 전부 소용없었다.
스각-
서걱-
그림자늑대들은 간단하게 토막났다. 한 번에 한 번. 많아 봐야 세 번. 휴트의 검은 그 이상 휘둘러지지 않았다.
탓-
몇 분도 안 되는 시간에 그림자늑대들은 전멸했다. 심지어 다른 기사들과 전투 중인 늑대들도 합류했지만 결과가 달라지진 않았다.
휴트는 검을 바닥에 꽂아두고 한숨을 뱉었다.
“어찌 아내의 분신만도 못하군.”
델폰 남작은 상황이 끝나자마자 허겁지겁 달려가 릴본 자작의 시신을 수습했다. 휴트는 그걸 보더니 페멜로 백작을 향해 돌아섰다.
“빨리 후퇴하게. 아마 그들은 곧장 총공세를 펼칠 거야.”
“……첸스터 산맥이 동산은 아닙니다. 산악 행군을 하고 다시 이동을 하면 적들도 피로해서 제 실력을 발휘하지 못할 겁니다.”
“방금 그것들을 보고도 그런 말이 나오나?”
“그 말씀은…… 병사들도 그렇게 변했다는 말씀이십니까?”
“길게 말은 않겠네. 죽은 자가 더 간섭할 수도 없으니 말이야.”
“감사합니다.”
“감사는 무슨.”
휴트는 뒤를 돌아보았다. 델폰 남작이 오열하는 뒷모습이 보였다.
“욕을 먹어도 모자라지.”
“이 일은 키런 측에 반드시 책임을 묻겠습니다.”
“그래주게.”
휴트는 가볍게 손짓하며 떠나갔다. 백작은 요새에 남은 기사들과 함께 최대한 빨리 퇴각하기로 했다.
*
황금늑대 기사들은 무사히 판테스 왕국의 국경에 도착했다. 전력으로 달아난 덕분에 키런 왕국군이 도달하기 전에 올 수 있었다. 다만 그들을 인솔하던 이들은 거의 초주검 상태가 되었다. 아무래도 황금늑대들의 체력을 따라가기 어려웠기 때문이었다.
“뭔가 휑하구료.”
기사들 중 일부는 루켄트 요새에 도달했다. 그런데 어째선지 경고성 화살도 날아오지 않고 문이 열리지도 않았다.
“허흑…… 허흑…… 일단 좀 쉬다가……”
블랙잭은 거의 토하는 소리를 내며 말했다. 황금늑대들은 그를 부축하면서도 차분히 요새를 향해 움직였다.
“분명 누가 있어야 할-”
황금늑대 기사들은 요새로 들어서자마자 곳곳에 널부러진 시체들과 검상을 보았다.
“기습……?”
“검격이 깔끔합니다. 아무래도 그림자 늑대들의 소행인 듯 합니다.”
황금늑대 기사들은 심각한 얼굴로 얘기를 하다 말고 인기척에 검을 뻗었다.
“누구냐!”
“꽤나 늦었구만. 도망이라도 친줄 알았네.”
모습을 보인 건 쿠쿠였다. 아이템 강탈자라는 별명으로 블랙잭과 함께 버트를 PK하려 했던 인물 중 하나였다. 물론 그도 황금늑대들을 이끄는 인솔자였다.
“허흐…… 허으흐…… 딴…… 딴 사람…… 들은……?”
“기다리고 있어. 당신들이 제일 늦었어.”
황금늑대 기사들은 경계심을 거두고 쿠쿠의 안내를 따라 움직였다. 요새 한 구석에서 휴트와 골드로츠가 대화를 나누는 모습이 보였다. 골드로츠의 표정은 좋지 않았고 다른 황금늑대 기사들도 마찬가지였다.
휴트는 마지막 인원이 모인 걸 확인하고 손짓했다.
“서둘러 움직여야 하네. 조금이라도 늦으면 키런 왕국군이 들이닥칠게야.”
“저, 저…… 좀만 쉬면……!”
“안 되는 말이네. 자, 어서 움직이게.”
“아흐학……!”
골드로츠는 심각한 표정으로 고민하더니 휴트를 향해 말했다.
“몇 분만 기다려주세요.”
“왜 그러나?”
“여기서 벌어진 참상…… 그리고 키런 왕국이 무슨 짓을 벌이는지 알려야 합니다.”
“그건…… 음, 이모탈끼리 통하는 방식을 쓰는 겐가?”
휴트는 눈치가 빨랐다. 골드로츠는 그의 질문에 고개를 끄덕였다.
“서두르게.”
“감사합니다.”
*
키런 왕국이 전쟁을 선포한지 현실 시간으로 한 나절 정도 지났다.
유X브와 판타지아 공식 홈페이지 게시판에 충격적인 글들이 올라왔다. 그 중 가장 핫한 건 유X브에 올라온 동영상이었다.
[ 샬론 백작입니다. ]
골드로츠. 키런 왕국의 귀족이어야 할 그가 어떤 이유에서인지 초췌한 몰골로 화면에 보이고 있었다.
이번 전쟁이 터지자마자 최우선 연락 대상이 바로 그였다. 지금까지 아무런 연락도 없었고 소재도 밝혀지지 않았다. 그런 골드로츠가 난데없이 영상과 글로 나타난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그 내용이었다.
[ 키런의 왕 바틸카스는 현재 제정신이 아닙니다. 황금늑대 기사들을 핍박하고 다른 나라를 정벌하기 위한 움직임을 꾀했습니다. 지금 이 참상을 보십시오. ]
화면에 비춰진 건 시체들이 늘어진 요새의 모습이었다.
[ 이곳은 판테스와 키런의 국경에 있는 루켄트 요새입니다. 키런 왕국은 선전포고를 하기도 전에 요새를 기습하였습니다. 기사답지 않은 행동도 문제지만 더 큰 문제는 그가 저지른 짓입니다. ]
골드로츠는 격앙된 얼굴로 화면을 노려보았다.
[ 그는 무슨 수를 쓴 건지 모르겠으나 몇 년 전 악몽의 기사 레이드를 이끌었던 라이돈…… 그와 같은 상태의 기사를 부활시켰습니다. 그리고 그는 황금늑대 기사단을 이끌던 알카이드 나이트 넨피스 후작 각하였습니다. 그 외에도 다른 황금늑대 기사들도 미지의 힘에 잠식당해 괴물이 되었습니다. ]
골드로츠는 심호흡을 하며 말을 이어나갔다.
[ 이건 전쟁이 아닙니다. 바틸카스는 이상하게 변모했습니다. 그는 기사도를 변질시키고 자신들의 수하를 변이시켰습니다. 그는 더 이상 키런의 왕이 아닙니다. 그저 기사라는 이름에 취해버린…… 그…… 후우…… ]
골드로츠는 가슴을 부여잡고 숨을 골랐다.
[ 죄송합니다. 최대한 진정하고 말하려 했으나 더는 제대로 말을 못할 거 같습니다. 그저 이 말이 꾸미려는 게 아니며 이건 전쟁이 아니란 것만 말씀 드리고 싶었습니다. 이건…… 레이드입니다. 키런 왕국에 숨어든 괴한이 벌이는 시련입니다. ]
영상은 끝났다. 이걸 시작으로 오프라인은 크게 불타올랐다. 골드로츠의 영상에는 황금늑대 기사들의 모습이 찍혀 있었다.
이 정보가 진짜냐, 가짜냐를 떠나 상당히 신빙성이 있는 얘기였다. 애초에 그는 키런 왕국의 기사이자 귀족이었다. 그것도 백작이라는 고위직이었다. 그 어떤 돈과 아이템으로도 매수당할 처지가 아니었다. 덕분에 골드로츠가 하는 말의 무게는 엄청났다.
그러나 신중에 신중을 기하는 이들은 온라인에서 그 정보를 확인하려 했다. 전쟁통이기에 정보의 값은 비쌌고 속도도 빠르지 않았다. 그래서 곧장 확인할 수 없…… 어야 했다.
마치 기다렸단 듯이 곳곳에서 황금늑대 기사들이 핍박받은 이야기가 들려왔다. 그림자를 쫓는 별에서 적극적으로 정보를 풀어두었기 때문이었다. 원래 키런 왕국의 여론을 안좋게 만들고 그들의 사기를 꺾기 위한 계획이었다. 그런데 이게 우연치 않게 골드로츠의 폭로와 맞물려 엄청난 시너지를 발휘했다.
“와 이 씨발, 전쟁 컨텐츠인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고?”
“레이드는 가면을 벗고 정체를 밝혀주세요!”
“ㄴㅇㄱ”
“당장 템 싸서 움직여! 여론이 뒤집혔다!”
“이거 봐, 내가 중립 기어 박으랬지!!”
“지금 키런 왕국의 병력 전부 판테스에 집중되어 있대! 지금 빈집털이 할 기회야!”
본래 레이드는 대놓고 광고를 하지 않았다. 전부 플레이어가 알아내야 했다.
그래서 지금 같은 상황에도 큰 의심을 하지 않았다. 그저 새로운 레이드란 거에 환호했다. 이벤트는 종종 벌였지만 지금과 같은 대형 레이드는 손에 꼽았다. 칼라 해변의 레이드조차 레이드라고 부르기 애매했다.
하지만 이건 차원이 달랐다.
“어쩌면 라이돈 그 이상일지도 몰라.”
“악몽의 기사 패턴 알고 있는 사람?”
“야, 보스 헌터도 합류할 거 같던데.”
“뭐? 거기 만트라 대협곡 공략 중 아니었어?”
“와이씨, 이거 만만치 않겠는데. 걔는 일개 기사였는데 이번엔 왕이잖아. 좆된 거야.”
“그럼 이거 레이드 이름은 뭐지?”
“정신 공격을 안할 테니 악몽은 아니고……”
“기사의 왕.”
“기사왕 레이드?”
“그걸로 가나?”
“그거로 하자!”
플레이어들의 행동력은 굉장했다. 키런 왕국 내부에 있던 이들은 유리한 위치라며 즐거워했다. 판테스 왕국에 있던 이들은 안타까워하면서도 키런 왕국군이 넘어온다는 소식을 접하고 전쟁 준비를 했다. 물론 판테스 왕국에 신고를 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 외의 플레이어들은 다급하게 텔레포트 게이트를 이용하는 바람에 순간이동에 체증이 일어났다.
키런 왕국군이 첸스터 산맥을 넘어가는 그 시각, 플레이어들은 하나둘 키런 왕국의 국경에 집결했다. 그들은 지체없이 키런 왕국의 수도를 향해 진격했다. 그러나 그들이 수도에 곧장 도달하는 일은 없었다.
*
“나는 나이트 마스터 데이론. 검은늑대 기사단의 단장이다.”
데이론, 그의 체격은 상당했다. 언뜻 보기에도 2미터는 가뿐히 넘는 덩치에 괴랄하기 짝이 없는 갑주로 뒤덮고 있었다. 그런 거대한 데이론이 커다란 말까지 타고 있으니 거인과 같은 인상을 주었다.
그의 곁에는 검은 불꽃을 흩뿌리는 검은늑대 기사들이 지키고 있었다. 다 합쳐서 서른도 되지 않는 수였다. 그런데도 플레이어들은 그를 넘어갈 수 없었다.
정말 압도적인 힘! 심지어 항마력도 대단했다. 단독으로 상대할 수 없을 정도로 강인했다.
하지만 플레이어들은 그를 지나치지 않았다. 도망치지도 않았다.
이건 전쟁이 아니라 레이드다. 눈앞의 데이론이 무슨 보상을 줄지 몰랐다. 어쩌면 싸우는 도중에 새로운 스킬을 각성할지도 몰랐다. 그 기회를 걷어찰 이유가 없었다.
그래서 데이론과 검은늑대 기사단은 자신의 몇 배나 되는 수의 적을 가로막을 수 있었다.
“폐하를 알현하려거든 예의를 갖춰라, 버러지들!”
데이론은 포효했다. 그를 처음 마주한 건 키런 왕국에 있던 플레이어들이었다.
“오우, 미쳤네 이거.”
“근데 나이트 마스터라고 하지 않았어? 그거 베톰 왕국에 있는 거 아녔어?”
“마스터가 둘이 될 수도 있었나.”
“그보다 이쪽이 보스인 거 아니야? 아니 너무 감당이 안 되는데.”
“일단 패턴부터 따! 라이돈이랑 비교해서 뭐가 달라졌는지를 봐!”
플레이어들은 덤벼들었다. 데이론은 채찍과도 같은 검을 휘두르며 기합을 내질렀다.
“기사도를 각성하라, 어리석은 녀석들!!”
그 포효를 시작으로 플레이어들은 레이드의 시작을 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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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괜찮아?”
윤희정 팀장. 그녀는 얼음팩으로 이마를 식히는 고경태의 옆에 섰다.
“……좆같아.”
“하흐흐흐, 근데 그거 진짜야? 백신이 일 벌였다면서.”
“맞아…….”
“이번 레이드도?”
“그래…….”
“뭔가 상황이 이상하게 흘러간단 말이지. 다른 백신들은 괜찮아?”
경태는 희정을 힐끔 보더니 얼음팩으로 눈까지 가렸다.
“아마도.”
경태는 이사가 백신의 제어권을 얻었다는 걸 말하지 않았다. 애초에 그가 이번 일을 벌였다는 확증은 없었다. 그가 준 목록에 백신 6호도 있었지만 백신이 단독으로 일을 벌인 것일지도 몰랐다. 아무렴 균형을 담당하는 백신이 아무 이유 없이 일을 벌일리 없었다.
문제는 그 백신이 다른 백신들보다 많이 과묵하다는 점이었다. 연락도 거의 받지 않는데 어찌저찌 통신이 된다고 해도 의사소통이 어려웠다. 그걸 위해 다른 백신을 호출하여 통역했다가는 무슨 일이 터질지 몰랐다.
당장 드래곤 하나가 금제를 푼 일을 수습하려고 백신들의 여유가 없었다.
“혹시 어려운 일 있으면 얘기해. 도와줄게.”
“아냐. 이건 관리팀이 아니라 운영 부서가 해야지. 그쪽도 불법 패치 때문에 골머리 썩고 있잖아.”
“유능하지만 고지식하다니까.”
“칭찬 고맙다.”
“그래서 이번 사태는 어떻게 하려고?”
“어차피 이번 전쟁은 키런의 패배야.”
“무엇 때문에 그렇게 확신해?”
경태는 얼음팩을 슬쩍 들었다.
“백신이 끼어있다지만 직접적으로 나서지 않아. 무엇보다 유튜X에 올라온 거 못봤어? 지금 이건 키런과 판테스의 전쟁이 아니라 키런 왕국 레이드로 굳혀졌어.”
“하지만 키런은 병력의 7할을 판테스 왕국에 집중시켰잖아. 수도까지 진격하는 걸 못 막을 텐데?”
“그건 그거대로 나쁘지 않아. 수도가 반파된 판테스와 국력의 반 이상을 손실한 키런. 나쁘지 않은 시나리오야.”
경태는 인상을 구겼다.
“하지만 그렇게 안 될 거야.”
로디아 마을.
그곳은 너무 변수가 많았다. 넬하트와 그레노의 존재만으로도 키런 왕국군에게는 큰 위험이었다.
하지만 그 마을에는 그것만 있는 게 아니었다.
“일단 외부에서 별다른 개입이 없었다면 이건 관리팀이 아니라 운영부의 일이야. 그러니 걱정하지 않아도 돼.”
“그래, 알았어. 그래도 힘든 일 있으면 얘기해.”
희정은 자양강장제 한 병을 두고 나갔다. 경태는 그걸 한 입에 털어넣고 머리의 열기를 식혔다.
어차피 이미 벌어진 일. 어떻게든 깔끔하게 수습해야 했다.
그래야만 하는데…… 묘한 불안감이 그를 괴롭혔다.
‘설마 여기에 다른 변수가 생기진 않겠지. 그래, 있어선 안 될 일이 벌어질 리 없지.’
최악을 가정한 고경태 부장. 그는 사표까지 쓰게 될 뻔한 온갖 변수를 맞이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