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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화 여자친구 선임 세레나


1. D마트로 오기까지 나는 많은 생각을 했다. 사람들에게 시엘에 대해 어떻게 설명해야 하는가? 세레나의 경우 지금까지 설정을 만들어서 이름을 한국식으로 김레나라고 소개했으며, 사람들 앞에서는 내게 반말을 쓰라고 했다. 하지만 이제 와서 보니 굳이 그럴 필요가 있나 싶은 게 솔직한 심정이었다. "세레나. 이제부터는 사람들 앞에서도 굳이 반말할 필요 없어. 그냥 평소처럼 행동해. 나도 세레나라고 부를 테니까." "네에……!?" 세레나는 왜인지 충격받은 표정이었다. 그녀는 습기가 묻어나는 목소리로 말을 꺼냈다. "그, 그럼, 제가 여자친구 역할이었던 건… 이제 끝인가요오……?" "아." 그렇구나. 세레나는 지금 내가 여자친구 자격을 박탈시킨 것인 줄 알고 충격을 받은 거였다. "아냐, 아냐. 세레나는 앞으로도 계속 내 여자친구야. 단지 이제 사람들 앞에서 숨길 게 없어지는 것뿐이지." "저, 정말요!? 헤헤헤……." 싱글벙글 좋아하던 세레나는 아차 하는 표정으로 옆을 돌아봤다. 거기에는 시엘이 평소와 다름없는 표정으로 서 있었다. "아, 시엘…." 세레나는 다시 나를 돌아보더니 말했다. "주인님, 시엘도 여자친구를 시켜주시면 어떤가요…? 저 혼자만 하기에는 시엘이 외로울 것 같아요……." "응? 언니?" 그러나 시엘은 별로 흥미가 없어 보이는 눈치였다. 그녀는 태연한 목소리로 말했다. "저는 여자친구 자리에 관심 없어요, 언니. 신경 써주지 않으셔도 괜찮아요." "뭐, 뭐어—!? 진심이야, 시엘!?" "네." 시엘의 대답에는 흔들림이 없었다. 뭔가 저렇게 단호하게 말하니까 좀 서운한걸……. 그러나 시엘의 말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저는 노예면 충분해요." "……잠깐." 나는 당황해서 물어봤다. "네가 왜 노예야, 시엘?" "아… 노예는 안 되나요? 그럼 탈것이나 발닦개 같은 거라도……." "……." 시엘은 아직 리얼돌에서 사람이 된 지 24시간 정도밖에 지나지 않았다. 나는 그녀에 대해 알아가야 할 것들이 많이 남아있는 모양이었다. '왜 노예냐'고 물어봤더니 어째서 흥정하듯이 더 낮은 직책을 부른다는 말인가……? 나는 단호하게 선언했다. "너희 둘 다 내 여자친구야. 너희가 나를 주인님이라고 부르는 건 내 취향 때문인 거고, 앞으로 사람들한테는 그렇게 말할 테니까 알고 있도록." "네!" 세레나는 힘차게 대답했고. "저, 저도요…!? 감사합니다, 주인님……." 시엘은 좀 당황했지만 그래도 만족하는 눈치였다. 2. D마트 대피소 안으로 들어오자 나를 본 사람들이 격하게 환영해 주기 시작했다. "오, 도하 오빠! 며칠 동안 안 보이시더니 어디 가셨던 거예요? ……어!?" "도하 군, 오랜만이야! 그동안 어디 있었어? 이러다 얼굴 까먹겠…… 응!?" "대장님. 걱정했는데 무사하셔서 다행입니다. 지금까지 어디에…… 음?" 사람들의 반응은 한결같았다. 모두 내 뒤를 따라오는 시엘을 보고 나타난 반응이었다.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자기 몸집만큼이나 거대한 시엘의 순백색 날개를 보고 나온 반응이겠지. "예쁘다……. 코스프레?" "설마 진짜 날개인가요……?" "누, 누구예요, 이 분은……?" 마지막 질문에 나는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내 여자친구." 그러자 나를 보고 반가운 표정을 지었던 상덕 아저씨가 경악한 표정으로 물었다. "여자친구…? 그럼 레나 양은 어쩌고……?" 이번에도 나는 망설임이 없었다. "세레나도 제 여자친구죠. 한 번에 두 명 사귀려고요. 영웅호색이라잖아요." "세레나……?" "사실 레나는 애칭 같은 거고요, 세레나가 본명입니다." "……." 나는 얼굴에 철판을 깔기로 했다. 막상 하고 나니 그다지 어려울 게 없었다. 단지 사람들의 반응이 좀 떨떠름할 뿐이었다. 3. 그다음으로는 곧바로 D마트 생존자 대표 회의를 열었다. 오밤중이었으나 중요한 용건이 있었기에 미룰 수 없는 회의였다. 다행히 대표자들은 군말 없이 빠르게 모여주었다. 모인 사람들은 역시나 가장 먼저 내 옆에 서있는 시엘에게 시선을 빼앗겼다. "도, 도하 군. 옆에 계신 그 분은 누구신가……?" "제 여자친구입니다." 나는 똑같은 설명 과정을 다시 한번 반복한 후에야 겨우 회의를 시작할 수 있었다. 회의의 첫 안건은 내가 겪어보고 온 새로운 적들, 변종 좀비에 관한 것이었다. "변종 좀비……?" "네. 제가 정발산역 근처에서 실제로 만나고 싸워봤습니다. 일반인들도 무장만 하면 손쉽게 처치할 수 있었던 지금까지의 좀비들과는 차원이 다르게 강해요." 그때 D마트 대표자들 중 한 명으로서 회의에 같이 참여해있던 백선아가 입을 열었다. "도하 오빠에게 먼저 얘기를 전해 듣고 저도 커뮤니티에서 관련 정보를 찾아봤습니다. 그리고 변종 좀비를 발견했다는 신빙성 있는 게시물들을 여럿 발견했습니다." 오……. 역시 백선아. 유능하다. "목격한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증언한 변종 좀비의 특징으로는, 일반 좀비보다 강한 힘, 빠르고 유연한 움직임, 일반적인 공격은 거의 통하지 않는 검은색의 질긴 피부 등이 있었습니다." 백선아가 하는 말을 들으며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경험한 변종 좀비들의 특징과 똑같았다. 나는 거기에 한 마디만 첨언했다. "추가적으로, 놈들은 생각하고 행동할 줄 아는 지성체일 가능성이 아주 높아요. 정발산역에서 자기들이 잡은 인간을 일부러 놓아주고는 근거지를 찾아내서 새벽에 습격해왔거든요." 내가 한 발언에 사람들은 상당한 충격을 받았다. "지성체……!?" "세상이 어떻게 되려고……." "웬만한 대피소들은 감당하기 어렵겠는데……?" 나는 백선아에게 추가로 질문을 던졌다. 그녀의 꼼꼼한 성격이라면 이런 것도 조사하지 않았을까 싶어서였다. "혹시 커뮤니티의 정보들로 변종 좀비가 출현하는 장소에 일관성 같은 게 있었어? 특정 지역에서 주로 나타나는 것 같다던가……." 내 말을 들은 백선아는 잠시 뜸을 들이다가 말했다. "사실 이건 말씀드릴까 말까 고민했는데, 아무래도 변종 좀비들의 출현 장소가 인근에 군부대가 있는 곳들로 한정되고 있는 것 같아요. 물론 착각일 수도 있겠지만, 목격 정보들을 보면 소총으로 쏴봤지만 총알이 잘 먹히지 않았다는 증언들이 많았습니다." "……그렇구나." 나는 잠시 고민에 빠졌다. 변종 좀비들이 군부대 주변에서만 출몰한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출몰 장소에 일관성이 있다면 거기에 누군가의 의도가 개입해 있다는 뜻은 아닐까? 설마 세상의 멸망을 바라는 누군가가 의도적으로 이런 짓을 벌일 수도 있는 걸까? '의문점은 많지만 고민한다고 알아낼 수 있는 것이 없다…….' 고민을 그만두고 주변의 다른 사람들의 반응을 살펴봤다. 나는 변종 좀비들이 출현하는 위치에 주목했지만 회의에 참석한 다른 사람들은 다른 점에 더 충격을 받은 것 같았다. "총알이 안 먹힌다고? 좀비가……?" "맙소사, 그럼 능력이 없는 일반인이 저항하는 것은 아예 불가능하다는 말이잖아……!" 회의실은 한동안 사람들이 웅성거리는 소리로 어수선했다. 확실히 변종 좀비는 저런 반응이 나오는 것이 당연할 만큼 강력했다. 그러나 이런 면에서 우리 D마트 대피소는 상황이 아주 좋은 편이었다. "희망의 땅이 있어서 정말 다행이야……!" 희망의 땅에 세워진 방어막이 허락받지 못한 존재들의 침입을 막아주니까. 모두의 시선이 자신에게 집중되자 가만히 앉아있던 백지훈은 씨익 미소를 지었다. "걱정들 마세요. 제 능력은 건재하니까요." 대타의 역할에 충실한 모습이었다. 회의의 다음 안건은 식량에 관한 것이었다. D마트에 있는 비축 식량은 무한하지 않다. 이대로 소비만 계속한다면 몇 개월 안에 바닥날 것이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이 있었다. 그건 바로 또다시 희망의 땅. 희망의 땅에는 이러한 효과가 있었다. '가축 및 농작물을 등록하여 관리하고 생장을 빠르게 만들 수 있습니다.' 전에 백선아에게 '등록'과 '관리'가 무슨 말이냐고 물어봤는데, 말 그대로 시스템 창을 통해서 모니터링할 수 있다는 말이라고 했다. 즉, 과거에 유행했던 농사나 목장 타이쿤류 게임처럼 가축과 농작물을 기를 수 있다는 말이었다. 하지만 그러려면……. "슬슬 농사와 축산을 시작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무엇을 얼마나 기를 것인지에 대한 선택과 집중이 필요해요. 저번 회의 때 이에 대한 부분을 철민 아저씨께 부탁드렸었죠." 배철민 아저씨는 시골에서 농사를 짓다가 상경하신 분으로, 고향에서는 상당한 규모의 지주였다고 한다. 그래서 현재는 D마트의 농사 및 축산 담당으로 생존자 대표 회의에 참석하고 있었다. 물론 축산은 자세히 모르시는데 딱히 전문가가 없어서 겸하고 있는 것이다. 철민 아저씨가 내 말에 반응했다. "그랬지. 그 후로 희망의 땅 내부에서 농사와 축산용으로 사용할 수 있는 토지 면적을 구해보고, 최대 효율로 기를 수 있는 작물 비율을 만들어 봤어. 여기." "오, 감사합니다." 나는 철민 아저씨가 건넨 서류를 받아들었다. 아저씨가 자신의 전문 분야에서 지식을 발휘해 주셨으니 이제 이걸 구해오는 것은 나의 몫이었다. 원래는 어디까지 가서 구해야 할지 막막했었는데, 이제는 시엘을 타고 날아다닐 수 있으니 어렵지 않을 것 같았다. "그럼……. 또 다른 안건이 있으신 분 계시나요?" "……." "없으시다면 오늘 회의는 이것으로 마치겠습니다. 변종 좀비에 대한 부분은 제가 따로 경계 강화를 지시해 둘게요. 수고하셨습니다." 이제 D마트에 오자마자 처리해야 했던 용건들은 모두 해결했다. 나는 피곤한 몸을 이끌고 방으로 향했다. "흐아아아아……." 방에 들어오자마자 침대에 몸을 뉘었다. 낮 동안 그렇게 많은 일들이 있었는데 D마트에 오자마자 또 회의를 해야 한다니, 정말 피곤한 하루였다. '시엘한테 마력 충전해 줘야 하는데……. 계속 마력을 써서 비행한다고 피곤했을 텐데…….' 생각만으로는 이미 시엘과 세레나까지 모두 꼼꼼히 챙겨줬지만 몸은 따라가질 못했다. 나는 푹신한 이불의 감촉에 그만 스르륵 잠들어버렸다. "안녕히 주무세요, 주인님." "편히 주무세요……." 귓가에 들리는 세레나와 시엘의 인사를 마지막으로 내 의식은 암전했다. 4. 톡톡. 톡톡. "……." 시엘은 누군가 자신의 어깨를 조심스럽게 두드리는 감촉을 느꼈지만 잠결에 무시해버렸다. 톡톡. 톡톡. 그러나 시엘을 건드리는 움직임은 멈추질 않았다. "우음……." 시엘은 눈을 비비면서 일어났다. 그녀를 건드려서 깨운 사람은 바로 그녀의 언니, 세레나였다. "쉬이이잇……." 세레나는 시엘을 보면서 입술에 검지를 대고 열심히 "쉬이이잇" 거렸다. '귀여워…….' 보통 동생이 언니에게 품을 만한 감정은 아니었지만 시엘은 자신의 언니가 귀엽다고 느꼈다. '그런데 왜 깨우신 거지……? 주인님도 아직 주무시고 계신데…….' 지금 시각이 몇 시인지는 모르겠지만 아직 잠이 가시지 않는 것으로 보아 아침이 되기 전인 것 같았다. 그때, 세레나가 시엘에게 소곤소곤 말을 걸었다. "시엘, 내 말 들려?" 시엘도 소곤소곤 답했다. "네. 잘 들려요, 언니." "헤헤." 세레나는 한번 수줍게 웃고는 다시 말을 이어갔다. "오늘 잠을 깨운 이유는, 시엘이 새롭게 주인님의 여자친구가 되었으니까 꼭 알아야 하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서야……." "꼭 알아야 하는 것……?" "응. 주인님의 여자친구 자리는 중요한 직책인 만큼 중요한 역할도 갖고 있거든……." "그게 무엇인가요, 언니……?" 세레나는 아주 심각한 사실을 알려주는 것처럼 진중한 표정으로 속삭였다. "남자친구의 성욕을 잘 풀어주는 거야……!" "아……." 시엘은 조용히 납득했다. 확실히 그녀도 남녀 사이에는 성적인 관계가 아주 중요하게 작용한다는 사실을 상식으로 알고 있었다. 시엘이 고개를 끄덕이자 세레나는 드디어 본론을 꺼냈다. "그리고…… 뛰어난 여자친구들은 모두 아침에 펠라치오를 해서 남자친구를 깨워줘야만 해……." "펠라치오요……?" "생소한 단어지……? 그게 뭔지 내가 지금부터 자세하게 알려줄게……!" "고마워요, 언니……!" 시엘은 미지의 경험에 대한 호기심으로 가슴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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