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화 속마음
1.
지이이잉—
지이이잉—
지이이잉—
……일단 불난 휴대폰부터 어떻게든 처리해야겠다.
나는 노트패드에 글을 작성하고 복사한 후에 톡을 보낸 사람들 모두에게 붙여넣기해서 송신했다.
「김도하입니다. 지금은 바빠서 나중에 사정을 설명하겠습니다.」
그러자 드디어 진동이 멈췄다.
"……주인님. 무슨 일인가요?"
현재 상황이 이해가 되지 않는 듯 나만 바라보고 있는 세레나와 시엘.
그러나 나도 이해가 필요하긴 마찬가지였다.
"잠시만……."
나는 가만히 생각을 정리했다.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랭킹창에 있었던 문구.
'아시모네의 하수인들을 처치하는 것은 여신 헤스테아의 의지입니다.'
아시모네에 대한 것들은 권준용에게 들었기에 대충 알고 있었다.
지옥의 여신이라는 것과, 썅년이라는 것.
그렇다면 여신 헤스테아는 누구인가?
아마 랭킹창을 자기 좋을 대로 사용하는 것으로 유추해 볼 때, 이 시스템과 상태창을 지원해 주는 것이 헤스테아였다.
또한 헤스테아는 랭킹창의 문구를 통해 자신의 목적을 밝혔다.
'아시모네의 하수인들을 처치하는 것.'
즉, 헤스테아는 아시모네의 적이다.
적의 적은 아군이라는 말이 있으니, 아직까지 살아남아있는 생존자들의 아군이라고 볼 수도 있었다.
그렇다면 그녀는 갑자기 왜 랭킹창이라는 것을 만들어냈는가?
여기까지 생각하고 나니 결론이 뻔했다.
아시모네의 하수인들을 더 많이, 더 빠르게 처치하기 위해서.
강한 능력자들한테 높은 랭킹을 차지하고 싶지 않느냐고 유혹하는 것이다.
그녀는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더 열심히 적들을 처치하고 여신의 은총을 받아라.'
'랭킹창을 통해 사람들에게 너의 능력을 과시해라.'
경쟁을 붙여서 성과를 올리는 방식.
"……마음에 드는데."
헤스테아는 머리를 쓸 줄 아는 여신이었다.
적어도 불공정 계약으로 사람을 노예로 만드는 아시모네라는 썅년과는 달랐다.
"좋아."
머릿속이 정리되고 나니 결론은 간단해졌다.
갑자기 생긴 이 랭킹창이라는 시스템은 내게도 유리하게 작용했다.
나는 권준용의 이야기를 들었을 때부터 커뮤니티에 모든 정보들을 공개하고 전국의 능력자들에게 균열의 봉쇄를 요청할 생각이었다.
그런데 이런 랭킹창이 생겼으니 내 말의 설득력이 올라가는 것이다.
덤으로 이제부터 내가 쓸 균열 공략은 랭킹 1등의 가이드북이다.
하지만 당장 해야 할 것은…….
"일단, 닭부터 잡으러 갈까?"
세레나는 얼굴이 한껏 환해져서 소리쳤다.
"네네네!"
"……."
시엘은 그런 세레나를 보면서 흐뭇하게 웃었다.
2.
우리가 이곳 양주에 찾아온 것은 애초에 가축으로 기를 닭들을 잡기 위함이었다.
물론 소 뒷걸음질 치다 쥐 잡는 격으로 권준용을 잡긴 했지만…….
양계장으로 돌아온 우리는 D마트에서 가져온 커다란 그물망에 닭들을 잡히는 대로 집어넣었다.
꼬꼬오옥—
꼬끼오오옥—
꼬꼭!
얼추 수십 마리는 담은 것 같다.
"가자, 시엘."
"출발—!"
"무, 무거워요오옷—!"
무겁다고 우는소리를 내는 시엘. 그러나 어떻게든 뜨긴 떴다.
우리는 곧장 D마트로 돌아왔다.
저 멀리 D마트가 작게 보일 때부터 옥상에서 경계를 서고 있던 인원이 우리를 발견하고 손을 흔들었다.
그가 사람들에게 알렸는지, 우리가 도착했을 때에는 닭장 주변으로 사람들이 구름처럼 모여들어 있었다.
"와, 닭이다!"
"이게 다 몇 마리야?"
"이제 계란도 먹을 수 있겠네!"
"나는 치킨! 갓 튀긴 치킨이 먹고 싶어……!"
"세분 다 고생하셨어요!"
"도하 씨, 고마워요!"
몇 명의 감사 인사를 시작으로 사람들이 우리한테 박수갈채를 보냈다.
짝짝짝짝짝짝—
"하하하…. 그러지 않으셔도 돼요."
"야호—!"
"……."
세레나는 웃으면서 사람들에게 손을 흔들었고, 시엘은 내 뒤에 가만히 서있었다.
그때 농사용으로 다져놓은 땅 근처에 있던 이진아가 이쪽으로 달려왔다.
"대장님! 아까 그 시스템 메시지는 무슨 의미였나요?"
짧은 질문이었지만 궁금한 것이 많은 표정이었다.
"금방 알려줄게. 생존자 대표 회의 열자. 사람들 소집해."
"네!"
이진아는 재빨리 마트 안으로 사라졌다.
나는 천천히 걸어서 회의실로 향했다.
3.
갑작스러운 소집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다.
능력이 없는 일반인들은 상태창을 부를 수 없다. 그러니 랭킹창에 대한 알림도 능력자들에게만 갔을 것이다.
백선아와 눈을 마주치니 그녀가 작게 고개를 끄덕인다.
나는 본격적으로 말을 하기 시작했다.
"제가 갑자기 회의를 연 이유는, 오늘 새롭게 얻은 정보들을 말씀드리고 앞으로의 방향성에 대해 토의하기 위함입니다."
이후로는 오늘 있었던 일들에 대한 설명이 계속되었다.
양주의 한 양계장에서 좀비 남자와 마주친 일.
그 좀비 남자를 미행했더니 주택 안에 '아시모네의 균열'이 있었던 일.
좀비 남자, 권준용을 심문해서 얻은 정보들.
아시모네라는 지옥의 여신의 존재.
새롭게 등장한 변종 좀비들과 균열의 연관성.
균열 내부에 들어가서 본 것들.
균열 봉쇄에 성공했더니 갑자기 능력자들 전체에게 랭킹창이 생겨났다는 시스템 알림이 온 것까지.
"……."
모든 설명이 끝나고, 좌중은 침묵에 휩싸였다.
충격적인 내용이 워낙 많아 받아들이는 데에 시간이 필요할 듯싶었다.
그때 백지훈이 손을 들었다.
"어, 지훈아. 말해."
"말씀하신 정보들을 형님은 어디까지 공유하실 생각이신가요? 사람들에게 알린다면 균열이 해방되기 전에 막는 데에 도움이 될 것 같은데요."
"좋은 질문이야. 나는 이 모든 내용을 커뮤니티에 정리해서 올릴 생각이야. 내가 랭킹 1위인 김도하라는 것까지 밝히고, 균열 공략까지 포함해서."
내 대답에 백지훈이 미소와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형님이십니다. 그런데 혹시…… 균열 내부를 촬영한 영상은 없나요?"
앗. 그건 깜빡했다.
커뮤니티에 올린다고 인증 사진까지 찍고는 내부를 촬영할 생각을 못 하다니…….
"거기까진 생각을 못 했네. 나도 처음으로 들어가는 거다 보니까 긴장했나 봐."
"아닙니다, 형님. 최초로 균열을 봉쇄했다는 것 자체가 위대한 업적인데요."
백지훈은 신경 쓰지 말라는 듯 손사래를 쳤다.
다음으로 백선아가 손을 들었다.
"커뮤니티에 올릴 글은 제가 작성해 볼게요. 물론 균열 공략 쪽은 도하 오빠가 말씀하신 내용들을 토대로요. 읽기 편하게 작성하는 데에는 자신 있어요. 게다가 요즘 사람들은 세 줄 요약이 없으면 잘 안 읽거든요."
"좋아. 그건 너한테 맡길게, 선아야."
일이 척척 진행된다.
첫 공략글을 올리고 다음번에는 균열 내부 영상까지 찍어서 올려볼까 싶었다.
회의에 참여한 다른 사람들도 말을 꺼내기 시작했다.
"그럼 능력이 없는 일반인들이 따로 할 수 있는 일은 없나?"
"경계를 더 강화해야지. 균열에서 나온 변종 좀비들이 언제 대규모로 쳐들어올지 모르는데."
"지능도 있다고 했었잖아."
"희망의 땅의 보호막이 변종 좀비들을 상대로도 유효할까?"
"농사짓느라 부숴놓은 아스팔트랑 돌덩이들 많잖아. 그것들로 바리케이드를 만들어서……."
여기까지 듣고 내가 손을 들었다.
그러자 사람들의 시선이 내게로 집중되었다.
"그 균열들 말인데요, 사실 제 옆에 있는 시엘이 균열에서 나오는 기운을 대충 감지할 수 있습니다."
시선이 시엘에게로 옮겨간다.
시엘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오오……!"
"대단해!"
"그럼 변종 좀비들이 쏟아져 나오기 전에 선제타격할 수 있는 건가?"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죠. 그래서 저는 당분간 세레나와 시엘을 데리고 일대를 돌아다니며 균열들을 봉쇄하는 데에 전념하고자 합니다."
"와……."
내 말이 끝나자마자 백지훈이 탄성을 흘렸다.
"정말 존경합니다, 형님. 그야말로 구세주십니다."
……이 녀석은 다 좋은데 가끔씩 듣는 사람조차 민망해지는 낯부끄러운 소리를 서슴없이 할 때가 있었다.
그때, 급식대 대표로 회의에 참석하고 있는 상덕 아저씨가 고개를 끄덕이면서 말했다.
"동감이야. 아무리 정의감이 투철하다고 해도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닐 텐데. 언제나 고마워, 도하 군."
상덕 아저씨도 평소에 만날 때마다 입버릇처럼 고맙다고 말씀하시는 분이었다.
그 둘이 바람을 잡으니 갑자기 회의에 참여한 사람들이 다들 한마디씩 하기 시작했다.
"인터넷 보면 요즘 세상 말도 아닌데, 우리만큼 잘 사는 곳이 없어. 고맙네, 도하 군."
"진짜 그래. 애초에 우리는 도하 군 아니었으면 최철남 그 새끼 노예 신세였지. 진짜 고맙다는 말 밖에는 할 말이 없어."
"지금도 노예 생활하는 생존자들 엄청 많을걸요? 인권이란 건 더 이상 없는 개념이에요. 도하 씨가 있으니까 유지되는 거죠."
"어, 어……."
나는 당황했다.
버티기 어려운 오글거리는 기운이 회의장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제가 할 말은 모두 마쳤으니 오늘 회의는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나머지 말씀들 마저 나누시길."
나는 재빨리 회의장을 벗어났다.
"쑥스러워서 도망친다!"
"아직 말 다 안 끝났어!"
4.
회의장을 나선 나는 혼자 백선아의 방으로 향했다.
아까 그녀가 커뮤니티에 올릴 글을 작성해 준다고 했으니까, 여기서 기다렸다가 같이 쓸 생각이었다.
세레나와 시엘에게는 방에서 쉬고 있으라고 말해뒀다.
아무도 없는 방에서 침대에 누워 상념에 빠져들었다.
아까 다 같이 내 얼굴에 금칠을 해주던 사람들.
그건 진짜 순수한 고마움의 감정이었을까? 아니면 계산적인 칭찬이었을까?
이 D마트의 실질적인 권력은 사실상 능력자들에게 집중되어 있었다.
왜냐하면 능력자들에 의해 돌아가는 구조니까.
그건 비단 이곳뿐만이 아니라 이 좀비 아포칼립스 세상에서 살아남은 생존자 모임이라면 어딜 가도 똑같을 것이다.
모든 구성원들이 각자의 일을 해서 공동체에 공헌하던 과거의 사회와는 구조부터가 다르다.
좀비 아포칼립스에서는 능력자들이 일반인들과는 비교하기도 어려울 만큼 압도적으로 공동체에 많이 기여한다.
즉, 능력이 없는 평범한 사람들은 불안할 수밖에 없는 구조였다.
'우리들은 언제든지 능력자들에게 버려질 수 있다.'
'능력자들에게 잘 보여야만 한다.'
아마 이런 생각이 무의식중에 자리 잡고 있겠지.
한번 이런 생각을 하고 나니 사람들의 고맙다는 인사를 순수하게 받아들이기가 어렵게 되었다.
"후우……."
이런 쓸데없는 고민을 30분 정도 하고 있으니 방주인이 돌아왔다.
"으이구……."
백선아는 나를 보더니 쓴웃음을 지으며 들어왔다.
"다들 기회다 싶어서 고마운 마음을 표현하는데, 좀 받아주지 그랬어요?"
"……."
그 말을 듣고, 나는 잠시간 고민했다.
이걸 백선아한테 말할까 말까.
……그녀는 내 능력을 포함한 모든 비밀을 알고 있는 몇 안 되는 사람이었다.
내 능력으로 사람이 된 세레나와 시엘을 제외하면 유일하다.
백선아에게 말하지 못할 고민이란 건 없겠지.
나는 속마음을 솔직하게 털어놨다.
"……."
묵묵히 내 말을 들어준 백선아는 갑자기 사과를 해왔다.
"미안해요."
"……뭐가?"
"아까 들어오자마자 했던 말. 그게 오빠한테는 부담인 줄도 모르고……."
"큭큭. 괜찮아."
나는 웃으면서 백선아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도하 오빠. 내 앞에서는 태연한 척할 필요 없어요."
"지금은 진짜 괜찮아."
"그렇다면 다행이구요."
배시시 웃은 백선아는 진지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그런데 있잖아요, 저는 그분들이 한 감사 인사가 자신의 안위를 위한 가식적인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모두들 진심으로 고마워하고 있어요. 우리들 모두의 삶을 구원해 준 도하 오빠에게."
"……."
나는 말없이 백선아의 머리를 계속 쓰다듬었다.
그걸 어떻게 받아들였는지, 그녀는 내 눈을 마주 보면서 나를 껴안아왔다.
"사람들을 못 믿겠으면 저를 믿는 건 어때요? 저는 아무런 능력도 없는 쓸모없는 여자였잖아요. 오빠가 제 목숨을 구해줬어요. 제 가족들도 구해줬고. 저는 정말 온 마음을 다해서 오빠에게 감사해요. 혹시 제 진심도 의심해요?"
가만히 나를 들여다보는 백선아의 눈동자.
그곳에는 한점의 망설임도 없는 순수한 마음이 요동치고 있었다.
"……아니. 의심 안 해."
"후후후."
백선아는 만족스러운 듯 웃었다.
"그런데…… 오빠."
"응?"
"제가 인터넷에서 본 글이 있는데…… 혹시 지금 기분 안 좋아요?"
"아니, 좋은데."
"방금 전까지 심란한 기분이었잖아요. 빨리 안 좋다고 말해요."
나는 설마설마하면서도 대답했다.
"……어, 안 좋아."
그러자 백선아는 셔츠를 벗고 흰색 브래지어에 감싸인 가슴을 내밀면서 말했다.
"그럼…, 가슴 만질래요?"
"……."
진짜, 백선아 너는…….
이 요오망한 서큐버스가……!
침대 위에 앉아서 서로를 껴안고 있던 자세, 내 고간이 부풀기 시작하자 그녀는 곧바로 눈치챘다.
"……♡"
나를 보는 눈빛이 잔뜩 들떠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