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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9화 축제


1. 2등과의 격차가 거의 3배에 달하는 나의 압도적인 공헌도 점수. 잘 모르는 사람이 본다면 내가 그만큼 센 건가 싶겠지만 사실 공헌도와 강함은 정비례 관계가 아니었다. 균열을 봉쇄할 수 있는 최소한의 힘만 있다면, 더 중요한 것은 빠르게 많은 균열들을 찾아내는 능력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아마 저 랭킹 2, 3, 4등은 개인이 아닌 단체일 가능성이 높았다. 많은 수의 사람들을 동원하여 균열을 탐색하고, 직접 봉쇄하는 일은 소수의 정예 파티에게 맡기는 것이다. 그리고 그 파티 내에서도 특출나게 강한 몇몇이 공헌도를 많이 먹어서 랭커가 되는 거겠지. 그런 점에서 나는 랭킹 1위가 될 수밖에 없는 조건을 가지고 있었다. 왜냐고? 1. 나는 균열을 아주 쉽게 찾을 수 있다. 시엘을 타고 날아다니면서 불길한 기운이 느껴진다는 곳만 수색하면 되니까. 2. 다른 능력자들이 파티를 짜서 공헌도를 나눠먹을 때, 나는 혼자서 100%를 다 먹는다. 즉, 재주는 세레나와 시엘이 부리고 공헌도는 내가 먹는 시스템이었다. 그리고 이 사실을 모르는 랭커들은 커뮤니티에 이런 글을 올리곤 했다. [여신 헤스테아 병신련아! 1위 점수 저거 버그 아니냐고!!] 그러면 어김없이 이런 댓글이 달린다. -열 등 감. -왜 버그라고 생각해? 네가 좆밥인 거라고는 생각 못 해? -아~ 추해요~ -김도하는 공략 영상에 정보글까지 써주면서 1위 찍는데 넌 뭐냐? ㅋ 그리고 이런 글도 올라온다. [김도하가 까이는 '진짜' 이유.jpg] (김도하 균열 공략 영상에 나온 한미인 손 캡처 짤) 김도하가 좀비도 잘 잡고 얼굴도 잘생겼고 능력도 멋있고 랭킹 1위고 손만 봐도 존나 예쁜 여자가 영상도 찍어주고 '잘나가니까' ——— "큭큭큭. 한미인이 예쁜 건 맞지만, 손만 봐도 예쁘다는 건 너무 억빠잖아……." 요즘은 커뮤니티를 보는 재미가 있다. 균열 공략을 최초로 영상으로 남겼으며 아직까지도 압도적인 점수 차로 랭킹 1위를 유지하고 있는 나는 커뮤니티에서 거의 유일신의 경지에 올랐다. 가끔씩 내가 그리 세 보이지는 않는다는 글이 올라왔지만(사실 센 건 세레나니까 맞는 말이다.) 어김없이 열등감으로 치부되며 조롱의 댓글이 달릴 뿐이었다. 나도 익명으로 댓글을 달았다. -ㄹㅇㅋㅋ 요 한 달간 랭킹창의 순위 변동을 보니 랭커들은 저마다 균열을 찾아다니며 경쟁을 벌이는 듯싶었다. 그 덕분인지 요즘은 커뮤니티에 변종 좀비에게 습격당했다는 소식이 많지 않다. 정말 다행인 일이었다. 2. 지난 한 달. D마트 대피소의 최대 과업이었던 농업과 축산은 아주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었다. 기르는 동식물의 생장 속도를 빠르게 만들어주는 희망의 땅의 효과 덕분에 닭들이 벌써 세대교체를 이루어 낸 것은 물론이요, 농작물들도 어제까지 한차례의 수확을 마쳤다. 아스팔트를 깨고, 땅에 박혀있는 돌들을 뽑아내고, 땅을 부드럽게 고르고, 종자를 심고 애지중지 기르기까지. D마트의 사람들은 요 한 달 동안 이번 농사를 성공시키는 데에 정말이지 총력을 기울였다. 무럭무럭 자라나는 농작물들을 보는 사람들의 심정은 그야말로 하루하루가 기쁨의 연속이었다. 희망의 땅의 덕인지 농사는 대풍작이었고, 수확하는 우리들의 기쁨은 배가 되었다. 매번 이 정도의 수확량이 나온다면 D마트의 식량 자급자족은 물론이고 다른 생존자들에게도 식량을 나눠줄 수 있을 수준이었다. 그리고 타이밍이 재미있게도, 우리가 수확을 끝낸 것이 바로 어제였으며 내일은 추석의 시작이었다. 우리는 첫 수확의 기쁨을 나누는 수확제와 더불어 대한민국의 전통 명절인 추석을 기념해서 축제를 열기로 했다. 좀비 바이러스의 창궐 이후로 각자 겪었던 고통스러운 과거를 뒤로하고 처음으로 열리는 뜻깊은 축제였다. 3. 추석 첫날, 축제의 저녁. D마트의 사람들은 오늘 하루 정말 진 빠지게 놀았다. 운동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밖으로 나가서 족구나 풋살을 즐기고, 한가위답게 줄다리기를 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D마트에도 몇 없는 꼬마들은 그 옆에서 연을 날리느라 신이 났고, 철없는 어른들은 드론을 날려서 하늘하늘 날아다니는 연 주위를 360도 공중제비 턴하며 유린했다. 바깥에서 노는 걸 싫어하는 사람들은 마트 안으로 옹기종기 모여들었다. 각자 취향에 맞춰서 홈시어터를 틀고 영화나 애니메이션을 즐기기도 하고, 온라인으로 접속할 필요 없이 LAN이나 사설 서버로 즐길 수 있는 게임을 하기도 했다. D마트배 제1회 스페이스 크래프트 대회에서는 왕년에 레더 좀 돌리셨다는 쟁쟁한 아저씨들이 많이 참여했지만, 결국 우승은 백지훈의 몫이었다. 백지훈 이 녀석은 AOS만 잘하는 게 아니었다. 그냥 게임이라면 다 잘했다. 그렇게 낮 시간이 흘러가고 지금은 석양이 지평선 너머로 저물어가는 저녁 시간이었다. D마트 1층 곳곳에는 연회장처럼 테이블들이 자리했고, 가운데에는 온갖 호화로운 요리들이 뷔페식으로 차려져 있었다. 파인 다이닝 레스토랑의 수석 셰프 출신이신 상덕 아저씨가 솜씨를 발휘한 요리들이었다. 메뉴는 하나같이 이번에 수확한 농작물인 감자, 고구마, 옥수수, 콩을 사용했고, 메인 디시는 무려 갓 잡은 닭을 사용한 치킨 스튜였다. 아쉽게도 아직까지는 1인 1닭이 가능할 정도로 닭이 많지 않았기에 치킨이나 삼계탕 같은 요리는 불가능했다. 그래도……. "이게 얼마 만의 생고기 요리냐……?" 나는 듬뿍 퍼담은 치킨 스튜를 들고 연회장 구석의 테이블 하나를 차지했다. 오른쪽에는 세레나, 왼쪽에는 시엘이 함께했다. "하움! ……주, 주인니임……!" 먼저 스튜를 한입 먹은 세레나는 호들갑 떨면서 내 어깨를 마구 흔들었다. "맛있어요! 닭이 제 입안에서 뛰어놀고 있어요……!" "표현력이 많이 늘었구나, 세레나."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니까요……!" 답답한 듯 얼굴을 찡그린 그녀는 자기 스튜를 한 스푼 떠서 내 입가에 내밀었다. "주인님, 아앙~" "아앙." 세레나가 내민 스튜를 받아먹었다. 냠. "……!" 맛있다……! 지금까지는 고기를 먹어도 냉동실에서 한 달 넘게 묵은 고기를 먹어왔다. 그런 고기들 특징이 해동시키는 순간 육즙이 쫙 빠져나가서 반건조 시킨 것처럼 육질이 퍼석퍼석해진다. 그런데 이 스튜에 들어간 닭고기는 탱글탱글했다. 이게 얼마 만에 먹어보는 탱글탱글 고기란 말인가……? "진짜 맛있다……." "그쵸!?" 맛있다고 하자 다시 내 어깨를 흔들면서 좋아하는 세레나. 그 모습을 왼쪽에 앉은 시엘은 지그시 보고 있더니, 이내 자기 그릇에 담긴 스튜를 한 스푼 떠서 내 입가에 가져다 댔다. "……주인님. 이것도 드셔주세요. 아앙~" 설마…… 시엘은 질투도 하나? 어찌 됐든 둘을 차별해서는 안 될 일이었다. 나는 공평하게 시엘이 내미는 스튜도 한입 먹었다. 냠. ……역시 맛있다. 내가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이자 시엘의 날개가 기쁨을 표현하듯 작게 퍼덕였다. 그녀는 내게 눈동자를 맞춰오며 같이 웃었다. "후후훗." "……." 요즘 균열을 찾아다니느라 시엘에게 연료 주입을 자주 해줬더니 눈웃음치는 것만 봐도 섹스가 마려워졌다. 즐거운 축제 식사 시간인데 지금은 안 되지……. 그때 뒤쪽에서 다가오는 발걸음 소리와 함께 목소리가 들려왔다. "도하 오빠! 왜 이렇게 구석에서 드시고 계세요? 한참 찾았잖아요." "아주 하렘을 차려 놓으셨네……." 백선아와 한미인이었다. 백선아는 손에 샴페인 병과 잔들을 들고 있었고, 한미인은 캠코더를 들고 촬영 중인 화면으로 우리들을 보고 있었다. "뭐야, 여긴 왜 찍어?" "왜요? 양옆에 여자 끼고 즐기는 거 찍으니까 찔려요? 걱정 마세요. 대장님 정도 되면 삼처사첩해도 누가 뭐라고 안 할 테니까." "……그 말이 아니잖아." 한미인은 킥킥거리고 웃으며 계속 이쪽을 촬영했다. 요즘은 완전히 촬영에 맛 들여서 틈만 나면 뭐든 녹화하려고 드는데, 뭔가 감시당하는 기분이라 좀 그랬다. 한미인 옆에 서있던 백선아는 캠코더 앵글 속으로 들어오면서 테이블에 샴페인을 놓고 렌즈를 향해 브이를 날렸다. "나도 하렘 합류~!" "……당당하구나, 선아야?" "언니도 부러우면 합류하든가." "글쎄. 자리가 남아 있기는 한가?" 한미인은 백선아와 대화하면서 나를 쳐다봤다. "무, 뭐? 무슨 자리……?" 테이블 자리? ……아니면 설마 하렘 자리? 내가 얼빠진 소리를 내자 한미인은 휙 돌아섰다. "흥. 됐거든요. 다른 사람들이나 더 찍으러 가야지." 그 말을 남기고 그녀는 중앙 쪽으로 떠나갔다. 백선아는 싱글벙글 웃으면서 테이블 빈자리에 앉았다. "부끄러워하기는. 그럼 우리끼리 마실까요? 축제인데 샴페인 한 잔씩은 해야죠!" "응, 그렇지. 근데 나 곧 있으면 경계 근무 교대해 줄 시간이라 올라가 봐야 돼." 내 대답에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응. 알고 있어요. 한잔하고 가요. 오빠 가면 세레나랑 시엘이랑 걸즈 토크 해야지." "걸즈 토크?" "……?" 나보다 세레나와 시엘이 먼저 반응했다. 세레나가 해맑은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걸즈 토크가 뭐예요, 언니?" "우리끼리 주인님 얘기하는 거지. 요즘 주인님은 섹스할 때 어떤 자세를 제일 좋아하시는가, 뭐 이런 거……." "아하!" "……." 나는 할 말을 잃었다. 언제 이렇게 타락해버린 거냐, 백선아……! 섹스할 때마다 과거 인터뷰 영상을 하나씩 찾아서 리마스터 해달라고 졸랐던 게 문제인가? 아니면 지훈이 경기 영상 틀어놓고 섹스하면서 지훈이랑 나랑 누가 더 좋냐고 집요하게 물어봤던 것 때문인가? 전혀 모르겠다……! 백선아는 샴페인을 한잔 따라서 내게 내밀었다. "받으세요, 주인님." 저 주인님이라는 호칭은 요즘 D마트 내에서 사람들이 나를 놀릴 때 자주 쓰는 것이었다. 세레나와 시엘이 나를 주인님이라고 부르는 것에 대해 나는 당당하게 내 취향이라고 말하고 다녔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도 취향에 맞춰주겠다고 '주인님' 하고 부르는 것이다. 결국 취향이라고 선포해버린 나의 업보였기에 어쩔 수 없이 감내하고 있었다. "……고맙다." "천만에요. 자, 세레나랑 시엘도." "고마워요!" "감사합니다." 샴페인 잔을 건네받는 세레나와 시엘. 생각해 보니 시엘에게는 처음 마셔보는 술이 될 터였다. "시엘. 먼저 한 입만 마셔보고 상태 봐가면서 천천히 마셔." "네, 주인님." 세레나가 처음 술을 마셨던 때가 생각났다. 완전히 인사불성이 되어서는 주변에 사람들이 다 듣는데 정액 마시겠다고 내 고간에 머리를 처박고 놓아주질 않았었지. 시엘은 주사가 좀 얌전했으면 좋겠는데……. 우리는 잔을 모아서 가볍게 부딪쳤다. ""짠!"" 나는 샴페인을 원샷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난 교대해 주러 가볼게. 선아랑 얌전히 놀고 있어. 세레나, 시엘." "네, 주인님! 착하게 있을게요!" "조심히 다녀오세요." 둘은 처음에는 경계도 같이 서겠다고 졸라댔었다. 하지만 그건 너무 비효율적인 일이라 진작에 혼자 서겠다고 엄포를 해놓은 상태였다. "잘 다녀와요, 오빠!" "그래. 시엘은 술이 처음이니까 잘 부탁해." 나는 손을 흔드는 세 사람을 뒤로하고 샴페인 한 병을 들고 옥상으로 향했다. 오늘같이 모두가 즐기는 축제 날에도 누군가는 경계 근무를 서야 하는 법이었다. 이런 때야말로 적들의 공격에 가장 취약해지는 순간이니까. 그래서 토벌대 인원들은 자진해서 교대로 경계 근무를 서기로 했다. 내 전번초, 지금 옥상에서 경계를 서고 있는 사람은 바로 이진아였다. 나는 오랜만에 그녀와 대화나 좀 할까 싶어서 샴페인과 잔까지 챙겨서 옥상으로 올라왔다. 축제를 즐겨야 할 텐데 시간을 빼앗으면 미안하니 15분 정도 일찍 온 거였다. "……." 옥상에 서있는 이진아는 흔들림 없는 자세로 D마트 주변을 살펴보고 있었다. 그야말로 경계 근무의 교과서다. "진아야!" 내가 부르자 이진아는 천천히 뒤돌아섰다. 평소와 다름없이 감정이 드러나지 않는 무표정한 얼굴. D마트의 사람들은 대부분 이진아가 사무적이고 딱딱한 줄로만 알지만 그녀에게는 내게만 보여주는 또 다른 얼굴이 있었다. "대장님. 아직 경계 교대까지는 15분 남았습니다." "알고 있지. 둘이서 가볍게 한잔할까?" 이진아의 눈이 나와 내 손의 샴페인을 향하더니, 부드럽게 휘면서 눈웃음을 만들어냈다. "좋죠. 대장님 잔은 제가 따라드려도 괜찮을까요?" "영광이지." 그녀는 환하게 미소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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