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8화 주인님
1.
내가 조용히 비급을 보고만 있자 류세인은 어떻게 생각했는지 내 눈치를 살피며 말했다.
"오해는 하지 말아 주세요. 비급을 드려서 공헌도를 가로채겠다거나 세력을 늘리겠다거나 하는 속내는 전혀 없어요."
"네? 아. 그런 생각 안 했습니다."
"그렇다면 다행이에요. 비급은 제 능력의 요체에 해당하는 것이라 지금까지는 검도장의 식구들에게만 몰래 줬어요. 외부인에게 건네는 건 김도하 씨가 처음이에요."
"아하. 이렇게 귀한 걸 그냥 받아도 괜찮을까요?"
"물론이죠! 꼭 받아주세요! 물론 그런 게 없어도 랭킹 1위이시니 별로 필요하지 않을 수도 있겠지만……."
"그럴 리가요. 요긴하게 사용하겠습니다."
내가 진심을 담해 말하자 류세인은 부끄러운 듯 배시시 미소 지었다.
"도움이 될 수 있다면 정말 기뻐요. 제가 드릴 수 있는 것 중에 가장 귀한 게 그 비급이거든요."
애굣살을 만들며 부드럽게 휘는 눈꼬리.
그 안에 자리한 청량한 파란색의 눈동자를 보고 있으니 문득 궁금증이 생겼다.
환골탈태는 성공적으로 끝난 것 같은데, 눈동자가 파란색으로 변한 것 외에는 어떤 변화가 있는 것일까?
보통 능력자들에게 능력의 정보는 매우 중요한 것이기에 묻는 것이 실례가 되겠지만, 나는 지금 류세인의 은인이었다.
느낌상 그녀라면 지금 무엇을 질문하든 흔쾌히 대답해 줄 것 같았다.
"류세인 씨. 궁금한 게 있는데 혹시 질문해도 괜찮을까요?"
"제가 답할 수 있는 거라면 무엇이든지요."
"환골탈태의 효능은 정확히 어떤 건가요?
"음……. 저도 처음 겪는 거라서 아직까지 모두 알아냈다고 하기에는 애매해요. 다만 확실한 건 혈도가 엄청 넓어졌고 마력량이 늘어났어요. 마력량이 늘어난 건 환골탈태가 아니라 도하 씨가 주신 영약의 효과인 것 같기도 하네요."
"혈도가 넓어지면 좋은 건가요?"
"제가 원래 혈도가 좁아서 검기를 사용하는 데에도 검도장의 다른 분들보다 오래 걸렸거든요. 균열 안에서 보셨다시피 강기를 사용하려면 시간이 한세월은 걸리고요. 그런데 지금 느낌으로는 이제 강기를 불쑥불쑥 뽑아낼 수 있을 것 같아요. 사용하기 엄청 편해진 거죠."
강기를 불쑥불쑥 뽑아낸다라.
내가 봤던 류세인의 강기는 시간은 오래 걸릴지언정 위력은 아주 강력해서 인어 괴물을 거의 한방에 죽일 뻔했던 강력한 공격이었다.
그것을 이제 사전 작업 없이 사용할 수 있다니, 그건 정말 엄청난 위협이 될 것이 분명했다.
아마 지금 당장 인어 괴물과 리매치한다면 단칼에 죽일 수 있을 정도의 발전이겠지.
나는 진심을 담아 감탄했다.
"대단해요."
"에이, 뭘요. 도하 씨에 비하면 새 발의 피죠. 랭킹 3위라고 떠받들어지면서 콧대가 높아진 상태였는데, 오늘 정말로 하늘이 높다는 것을 배웠어요."
"아하하. 저 그 정도로 세지는 않은데. 그 인어 괴물도 검은색 각질을 뚫을 방법이 없어서 방심한 틈을 노린 거예요"
"세지 않다니요. 공헌도 종속 관계만 봐도 아직 드러내지 않은 힘이 많으신 것 같던데."
"……."
내 능력으로 리얼돌에서 사람이 된 세레나와 시엘.
류세인의 능력으로 세인검법을 사용할 수 있게 된 류진용 아저씨와 서인호 씨도 일부 종속 관계에 불과했으니, 다른 사람들은 우리들의 관계가 상당히 궁금할 것이었다.
세레나와 시엘은 내게 완전히 종속되어 있었으니까.
그러나 내가 대답하기 곤란하다는 듯 웃고만 있자 류세인은 눈치껏 대화 주제를 옮겨갔다.
"아, 그, 그러고 보니까 제게 영약을 먹여준 영물은 도하 씨가 기르시는 건가요? 어디에 있나요?"
"……영물이요?"
"네. 제 목구멍으로 들어왔던 크고, 따듯하고, 부드러우면서도 단단한 영물이요. 두근두근 맥박치는 것도 느껴졌거든요."
"……."
크고. 따듯하고. 부드러우면서도 단단하고.
두근두근 맥박치는, 류세인에게 영약을 먹여준 영물.
…….
대체 무슨 오해를 하고 있는지 대충 알 것 같았다.
지금 그녀가 말하는 영물은 바로 내 성기였다.
고추.
그때, 지금까지 우리 대화를 가만히 듣고만 있던 류진용 아저씨가 끼어들었다.
"뭐야, 영물이 세인이 네 목구멍으로 들어왔다고?"
"네. 그 영물이 양기가 강한 영약을 먹여줘서 주화입마도 치료하고 환골탈태도 할 수 있었던 거예요. 목구멍에 품고 있는 것만으로 마음이 편안해지고 기분이 좋아지는 영물이었어요. 틀림없이 엄청 선한 영물일 거예요."
"오오, 그런 귀한 영물까지 데리고 다닌다니. 역시 랭킹 1위, 우리들의 은인!"
아저씨가 나를 보며 엄지를 치켜세웠다.
"아……."
내 등허리로 식은땀이 맺히기 시작했다.
죄송하지만, 댁의 따님 목구멍에 드나든 것은 영물이 아니라 제 고추입니다…….
아니, 생각해 보니 내 고추는 세상에서 단 하나뿐인 변이를 일으켰으니 영물이라고 불러도 틀린 건 아닐지도…….
하지만 고추는 생물이 아니라 나의 일부인데…….
내가 동공 지진을 일으키고 있으니 류세인은 대답해 주기 곤란하다는 뜻으로 받아들인 모양이었다.
그녀는 손사래를 치면서 말했다.
"꼭 보여달라는 건 아니에요. 단지 그 영물에게도 너무 고마워서 감사 인사를 하고 싶어서……."
"아…, 그럼 감사 인사는 제가 대신 전해줄게요."
고추야, 세인 씨가 너한테 감사하대.
내 말에 류세인은 밝게 웃으며 말했다.
"감사해요. 역시, 그런 착한 영물이 따르는 걸 보면 도하 씨 심성이 아주 고우신 것 같아요. 영물은 함부로 아무나 따르지 않는다고 들었거든요."
"……그렇군요."
그 웃는 얼굴을 보고 있자니 양심이 많이 아팠다.
2.
결국 한울 원자력발전소에 나타난 최초의 B급 균열은 압도적인 난이도에도 불구하고 사망자 0명이라는 최고의 결과를 내고 봉쇄되었다.
원전에 모여들었던 100명이 넘는 D급 능력자들은 모두 균열 봉쇄를 기다리다가 우리들이 성공하자 다시 자기들이 살던 지역으로 뿔뿔이 흩어졌다.
함께 B급 균열을 봉쇄했던 랭커들은 저마다 돌아간 자도 있고 이곳에서 하룻밤 쉰 다음에 돌아가겠다는 자도 있었는데, 늑대인간 배성준은 말없이 가장 먼저 사라졌다.
그리고 선종윤 소장은 처음 도움을 요청했을 때처럼 커뮤니티에 글을 올렸다.
랭커들이 B급 균열 봉쇄하는 데에 성공했다는 소식을.
사람들의 반응은 당연히 뜨거웠다.
-성공이냐?
└씨발 성공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캬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전기 안 끊기는 거 마쟈? 나 자살 안 해도 되는 고야?
└ㄴㄴ 자살하셈.
└시러잉....
└아 씨발.
-쏴리질리어어어어어어~
-랭커님들 정말 감사합니다 ㅠㅠ
-김도하는 신이야!
└김도하 펀치! 김도하 펀치!
-혹시나 해서 소형 발전기 존나 비싸게 주고 샀는데 씨발.
└ㅋㅋㅋㅋㅋ 병신 ㅋㅋㅋㅋㅋㅋㅋ
└꺼져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앙 전기 맛있띠 ㅋ
-초 거근 능력자인 내가 빠져서 좀 걱정됐는데 무사히 성공했다니 다행이군.
└ㅋㅋㅋㅋ 귀여운 새끼네.
선종윤 소장의 게시글을 필두로 한울 원전에 모였던 능력자들의 썰들이 우후죽순으로 생겨나기 시작했다.
100명이 넘는 능력자들이 모였으니 그 사람들이 한 번씩만 썰을 풀어도 100번인데, 사칭하는 사람들까지 글을 올리면서 커뮤니티가 혼란스러웠다.
그러나 각자 교차 검증을 해나가며 현장에서 있었던 사건들이 얼추 정리되어갔다.
[그때 회의실에 모인 D급 이상 능력자만 100명이 넘었음.]
솔직히 나는 다른 능력자들 보고 개쫄렸는데 ㅈㄴ 근엄한 척 얼굴에 힘주고 있었음 ㅎㅎ
-너도?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나도 사실 회의실 분위기 살벌해서 원전 온 거 쫌 후회했었음 ㅋㅋ
└ 나도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근데 균열 봉쇄는 당연히 성공해야 하는 거긴 했지.]
김도하가 C급 균열 봉쇄 경험이 있는 랭커들로만 파티 짜서 갔잖아.
그래놓고 실패하면 무슨 대참사임? 그럴 거면 처음부터 다른 랭커들도 데려갔어야지.
-헐 이거 ㄹㅇ임?
└ㅇㅇ 나머지 90명 넘는 D급 이상 능력자들은 다 짤당함.
└미친 ㅋㅋ 김도하 깡 하나는 진짜 좆되네 ㅋㅋㅋㅋ 진짜로 실패하면 어쩌려고?
└ 몰라 ㅋㅋ 자신 있었나 보1지.
-김도하가 그 말 했을 때 웬 덩치 큰 새끼 하나가 깝치다가 김도하 여친한테 처맞고 곤죽 됐잖아 ㅋㅋㅋㅋ
└뭐야 김도하 여친도 같이 왔음?
└그렇더라. 금발 외국인인데 눈동자 색이 녹색임. 존나 예쁘더라. 진짜 씨발 말이 안 나올 정도로.
└근데 능력자인 거임?
└ㅇㅇ
└와.....
[B급 균열 봉쇄한 파티 랭커 목록.list]
랭킹 1위 김도하
특이사항 : 존예 금발 여친 있음.
랭킹 3위 세인 검도
특이사항 : 같은 검도장 도복 입은 아재 둘 데려옴. 사진 찍으려고 했는데 찍지 말라고 칼 들고 협박해서 못 찍음.
랭킹 9위 장사운
특이사항 : 아저씨.
랭킹 21위 안지우
특이사항 : 공부 잘할 것 같음.
랭킹 36위 현서희
특이사항 : 치유계 능력 있음.
랭킹 97위 배성준
특이사항 : 양아치 같음.
참고로 세인 검도 << 여자임.
이름 보고 그럴 수도 있겠다고 다들 추측은 했었는데 진짜 여자였고, 심지어 20대 초반 같음.
예쁨.
-세인 검도가 20대 초반 여자라고?
└ㅇㅇ 다들 놀라더라.
-생각보다 랭커들 얼마 안 모였네.
└4일 만에 원전 있는 곳까지 모여야 하니까.
└내 생각엔 대부분 김도하가 간다니까 안 간 거임 ㅋㅋ 균열은 어차피 봉쇄할 거 아냐.
└그것도 그렇네.
그러던 중, 갑자기 김도하의 여자친구인 세레나에 대한 글이 올라와 급속도로 사람들의 관심을 받기 시작했다.
그 제목은 바로…….
[나는 들었다. 김도하 금발 여친이 김도하한테 '주인님'이라고 부르더라....]
잘못 들은 줄 알았는데 아니더라....
한 번만 그런 것도 아니고, 김도하 부를 때마다 꼬박꼬박 주인님이라고 부르더라....
처음에는 메이드 카페도 아니고 웬 주인님? 존나 웃기네 ㅋㅋㅋㅋ 라고 생각했는데 보면 볼수록 그냥 부럽더라....
존나 웃긴 건 거울 속의 나였고....
-씨발 구라 치는 거지?
└안타깝지만 아니다....
└씨발씨발씨발씨발씨발 빨리 구라라고 말해 나 목매달기 전에.
└빨리!!!!!
└나도 들었음 ㅇㅇ 진짜 주인님이라고 부름.
└자살함 ㅅㄱ.
-미친 ㅋㅋㅋㅋㅋㅋ 씨발 ㅋㅋㅋㅋㅋㅋㅋㅋ
-김도하 그런 취향이었냐?
-역시 랭킹 1위는 뭐가 달라도 다르네.
-진짜 사나이... ㄹㅇ
-에혀... 누군 방구석에서 라면 끓여먹으면서 연명하는데 누군 금발 능력자 여친한테 주인님 소리 들으면서 사네.
└너도 랭킹 1위 찍든가 ㅋ
이 글을 기점으로 커뮤니티의 주제는 김도하의 여자친구와 그 호칭에 대한 것으로 전환되어버렸다.
[경고한다 김도하. 선을 넘지 말아라.]
아무리 이런 세상이라지만, 현실에 '주인님'이라고 부르는 금발 여신 여자친구가 존재한다는 것은 있어선 안 되는 일이다.
부탁이니까 여자친구에게 주인님이라고 부르도록 시키는 것은 그만둬라.
그렇지 않으면 끓어오르는 내 분노가 너를 응징할 것이다.
구체적으로, 앞으로 커뮤니티에 올라오는 모든 김도하 관련 게시물에 내 부계정 수십 개를 동원해서 비추 테러를 먹일 것이다.
-아 ㅋㅋㅋㅋㅋㅋㅋㅋㅋ
-미친 새끼 ㅋㅋㅋㅋㅋㅋㅋㅋ
-동의합니다.
└저도 동의합니다.
-너무너무 무섭다;;
-이거 보통 일 아니다 도하야 ㅇㅇ
[좆밥새끼들아. 앞으로 도하행님을 부를 때에는 '주인님'이라는 호칭을 사용할 것. 알겠냐?]
도하행님이 특별히 좋아하시는 호칭이다.
기억해둬라 ㅇㅇ
-ㅅㅂ ㅋㅋㅋㅋㅋㅋㅋ
-랭킹 1위 이미지 어쩌다 이렇게 됐냐 ㅋㅋㅋㅋ
-주인님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여윽시 도하행님, 하남자들이랑은 달리 화끈하셔 ㅋㅋㅋㅋㅋㅋㅋㅋ
이 난리를 김도하가 발견한 것은 나중의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