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3화 30. 백구 퀘스트 (2)
연고를 다 바르고 옷을 챙겨 입고는 소파에서 거피 한잔의 여유를 즐기기 시작했다.
마당의 정원과 마주한 소파에 앉아 커피를 마시는 것은 개인적으로 강시연이 가장 좋아하는 시간 중의 하나다.
‘그 쑥차가 좋았는데.’
커피를 마시다 문득 강호의 누나가 운영하고 있는 산마루 카페에서 마셨던 쑥차가 생각났다.
한 모금 마시기 무섭게 머리가 맑아지는 듯한 느낌의 차라는 것은 처음 경험해 보는 것이었기에 쉽게 잊힐 수가 없었다.
‘그러고 보니 그날 몸 상태가 갑자기 그랬던 것도 장어 때문이었을지 몰라. 쑥차도 그렇고 뭔가 이상해.’
그런 생각을 하다 말고 고개를 저었다.
스스로 생각해도 말이 되지 않는다.
쑥차와 장어가 떠오르자 생각은 자연스럽게 강호에게로 이어진다.
자리에서 일어나 핸드폰을 챙겨 와서 전화를 걸어 보지만, 지난번처럼 연결이 되지 않아 소리샘에 연결한다는 메시지가 들려온다.
몇 번이나 다시 반복해서 전화를 해 보아도 마찬가지다.
“대체 이 사람은 어딜 가기에 전화가 안 되는 거야.”
지금껏 상대했던 남자의 사생활에 대해 딱히 관심을 가져 본 적이 없었다.
침대에서 관계를 가지고 헤어지고 나면 철저하게 머릿속에서 지워버렸고, 상대방이 밖에서 무얼 하고 다니던 개의치 않았다.
그런데 강호에 대해서는 유달리 신경이 쓰인다.
생애 처음으로 완벽하게 만족시켜 준 남자이기에 그런 것일까 하고 생각해 보아도 자신의 마음을 쉽게 정의 내릴 수가 없다.
“괜히 신경 쓰이네. 진짜 어디 이상한데 가서 이상한 일 하고 다니는 건 아니겠지?”
서울이나 인근 지역에 통화 연결이 불가능한 지역이 어디에 있을까 하고 떠올려 보았지만, 짐작조차 되지 않는다.
다시 몇 번의 전화를 더 걸어보지만 돌아오는 메시지는 똑같았다.
“하아!”
결국 소파 위로 핸드폰을 던져버린 강시연이 길게 한 숨을 내쉬었다.
남자가 전화를 받지 않는다는 이유만으로 이렇게 속이 상하고 끙끙대는 날이 올 것이라고는 단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기에 새어 나오는 한숨은 더욱 길어질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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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시연이 강호에 대한 짜증과 호기심 그리고 걱정이 뒤섞인 심경으로 투덜거리고 있던 그 시각.
강호는 진작에 게란트로 넘어와 라그놀의 무리가 살고 있는 동굴 근처의 야산에 도착한 참이었다.
단망경으로 라그놀의 동굴 주변을 살피는 표정이 그 어느 때보다 진지했다.
이번에는 백구 퀘스트를 완료하기 위해 넘어 온 참이다.
백구 퀘스트의 완료 조건은 간단했다.
부모의 원수인 라그놀 무리를 전멸 시키는 것.
그 말은 지난번에 보았던 십 수 마리의 라그놀 무리의 생명을 모조리 빼앗아야 한다는 이야기다.
‘다섯! 나머지는 외부 활동 중이거나 동굴 안에 있을 테고.’
현재 외부에 보이는 놈들은 다섯 이다.
라그놀이 외부 활동을 하러 나갈 때 움직이는 개체수가 5, 6마리였다.
만약 한 무리가 나갔다고 가정하면 동굴 안에는 예닐곱 마리가 있을 것이고, 두 무리가 나갔다면 동굴 안에는 한두 마리만 남아 있을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동굴을 오가는 숫자가 매우 적다.
이 말은 외부 활동을 위해 두 무리가 나갔다는 의미다.
그런 생각을 증명이라도 하듯, 해가 질 무렵이 되자 동굴을 향해 접근하는 두 개의 라그놀 무리가 보였다.
한 무리는 사슴처럼 보이는 동물 한 마리를 사냥해서 복귀한 상태였고, 다른 무리는 토끼 정도의 작은 동물 몇 마리를 잡아 복귀한 상태다.
놈들이 복귀하자 동굴 안에서 암컷 한 마리가 나와 바닥에 놓인 사냥감들을 검사 하듯 둘러보는 것이 보인다.
주변의 수컷과 암컷들이 눈치를 보며 뒤로 물러나 있는 것을 보아하니 놈이 이 무리의 우두머리인 듯한데, 배가 유달리 볼록한 것을 보니 새끼를 밴 것이 분명하다.
일종의 모계 사회인 것일까 하는 생각을 하는 사이, 임신한 암컷 라그놀이 바닥에 놓인 동물들 중에서 고라니처럼 보이던 동물의 큰 다리 하나를 잡아 뜯고는 동굴 안으로 사라졌다.
우두머리 암컷이 동굴 안으로 모습을 완전히 감추자 남은 놈들이 사냥해 온 동물과 뒤엉켜 마구잡이로 뜯어 먹기 시작한다.
‘설마 저번에 지네는 벌써 다 먹어 치운 건가?’
당시 지네의 길이만 20미터 정도 되어 보이던 놈이었다.
여기에 몸통의 굵기도 웬만한 성인의 두세 명을 합친 것 같은 굵기였다.
그런 놈에게서 나온 고기이니 만큼 그 양이 결코 적을 리가 없다. 하지만 돌이켜 생각해 보면 그날로부터 한 달이 훌쩍 지난 시점이다. 지네가 크기는 했지만 놈들의 숫자나 하는 짓거리를 보면 벌써 다 먹어 치웠어도 이상하지 않을 듯 싶었다.
난장도 이런 난장이 없다.
우두머리가 나올 때까지만 해도 나름대로의 체계가 있는 듯싶더니, 우두머리가 사라지기 무섭게 질서고 뭐고 서로 먼저 고기를 집어 삼키는 놈이 임자라는 듯 앞 다투어 뜯어 먹기 바쁘다.
그렇게 한 차례 식사를 거하게 치른 놈들이 이번에는 또 다른 의식을 치르기 시작하는데 그게 강호의 눈살을 찌푸리게 만들었다.
남아 있는 무리의 숫자들 중에서 암컷의 숫자는 동굴에 들어간 놈을 제외하면 다섯이다.
바로 사냥을 나가지 않았던 다섯 마리의 라그놀이 암컷이었던 모양이다.
그에 비해 수컷의 숫자는 열 하나인데, 식사를 마치기 무섭게 놈들이 암컷을 덮쳐 들어 번식 행위를 시작한 것이다.
식사를 마친 한 놈의 하물이 벌떡 선다 싶더니 뼈를 들고 뜯어 먹고 있던 암컷 라그놀의 뒤로 다가서서는 그대로 박아 넣고서 방아질을 시작한다.
그것을 시작으로 다른 수컷들 역시 남은 암컷들의 몸 위에 올라타서 허리를 흔들어 대었다.
암 컷 위에 올라타서 한 참이나 허리를 흔들어 대던 수컷이 일을 마치고 물러나면, 다른 수컷이 달려들어 같은 행위를 반복한다.
그런 식으로 계속해서 돌아가며 암컷을 범하는 행위가 쉬지도 않고 이어졌다.
번식 행위가 끝난 것은 모든 수컷이 다섯의 암컷에게 자신의 정자를 골고루 뿌리고 난 후였다.
일전에 지네와의 싸움으로 인해 줄어든 숫자를 채우기 위한 본능적인 행위임이 분명하다는 생각을 하며 강호가 슬금슬금 뒤로 물러났다.
한 참을 뒤로 물러난 강호가 지난 번 야영을 했던 장소로 돌아와 텐트를 폈다.
‘한 무리씩 유인해서 각개로 해치울까? 아니면 본진을 먼저 털어?’
잠시 두 개의 선택권 사이에서 고민을 하다, 본진을 먼저 터는 것이 아무래도 유리할 것 같다는 판단을 내렸다.
외부로 나간 놈들의 뒤를 친다는 것은 은밀하게 뒤를 쫓아가면서 기회를 봐야 한다는 이야기인데, 이는 강호에게 전적으로 불리할 수밖에 없다.
군에서 수색 정찰에 대한 기본적인 훈련을 받기는 했지만, 전문적으로 게릴라전 훈련을 받은 것은 아니다.
게다가 이곳은 놈들의 안방이다.
이제 겨우 게란트에서 생활한 지 반년이 조금 더 지난 강호가 평생을 숲에서 살아온 놈들의 뒤를 밝고 전투를 벌여 이길 확률은 낮을 수밖에 없었다.
‘일단 내일 하루 더 관찰하고 최종 계획을 세워보자.’
그런 생각에 일찌감치 침낭을 파고든 강호가 긴장감을 억누르며 잠을 청했다.
해가 뜨기도 전에 일어난 강호는 식사를 마친 후 곧바로 라그놀의 동굴로 향했다.
마침 놈들이 또 사냥을 나가는 것이 보인다.
‘라그놀이 동굴을 벗어난 시각이 오전 9시 경. 어제 복귀했던 것이 오후 4시 경이었으니 7시간 밖에 여유가 없다.’
7시간이면 그리 많은 시간이 아니다.
‘전투 장소를 한정시키자.’
그러자면 놈들에게 유리한 지형이 아니라 내게 유리한 지형을 선정해서 전투의 이점을 가져와야 한다.
‘여기가 그나마 고지가 높으니 원거리에서 저격하기에도 적당하고, 퇴로도 이미 봐둔 상황이니 지금으로서는 최적의 장소야.’
그런 판단 아래 강호는 동굴의 동쪽 일대의 지형을 다시 한 번 점검하기 시작했다.
내일이면 반드시 죽여야만 하는 전투가 벌어지게 된다고 생각하니 긴장감으로 인해 온 몸의 아드레날린이 분출되는 느낌이다.
오래전에도 이런 흥분을 느껴본 적이 있었다.
고등학교 2학년 가을, 전국대회에 진출하여 4강전을 치르기 전 날의 느낌이 딱 이랬다.
처음으로 맞이하는 전국 대회 4강이다 보니 흥분으로 인해 잔뜩 들뜨기도 했고 긴장이 되어 제대로 잠도 자지 못했다.
그리고 그날 경기에서 강호는 대타로 출전하여 2타수 무안타를 기록했고, 실책도 두 개나 기록했다.
지나친 흥분으로 인해 정작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하면서 컨디션을 모조리 망쳐버리고 만 것이다.
머릿속은 텅비어버린 채로 아무런 생각을 할 수 없었고, 자신이 대체 여기서 뭘 하고 있는 지조차 모를 정도로 엉망이었었다.
현재의 상태가 딱 시합 전날에 느꼈던 그런 기분이고 보니 강호는 최대한 흥분과 긴장을 가라앉히며 집중하려고 노력했다.
일전에 몇 번 둘러보면서 미리 지형을 살펴본 곳이기에 함정을 설치할 만 한 포인트를 찾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놈들을 유인할 길목에 몇 개의 함정을 설치했고, 퇴로에도 마찬가지로 함정을 설치했다.
‘일단 중턱 위에서 저격으로 최소 3마리는 처리해야 돼.’
야산의 중턱에서 동굴까지의 거리가 약 이백여 미터 정도 된다.
이 정도의 거리라면 국가대표 양궁선수라도 저격을 한다는 것이 쉽지 않겠지만, 어차피 이 거리에서 단 한 발로 라그놀을 저격하여 죽일 수 있을 것이라고는 생각지 않았다.
그저 놈들이 가까이 접근을 하기 전에 3마리 정도는 죽이거나 혹은 전투 불능 상태로 만들어야 다음 전투가 쉬워질 것이라는 생각이었다.
뒤로 물러나 야영지로 돌아와 잠을 청하려고 했지만, 쉽게 잠이 오지 않는다.
예전에 4강전 때도 딱 이런 식으로 잠을 자지 못해서 망쳐버렸다는 것을 잘 알기에 어떻게든 잠을 청하려 해 보았지만, 흥분과 기대 그리고 불안과 두려움에 의한 복합적인 감정으로 인해 쉬이 잠들지 못했다.
‘억지로라도 자야 돼.’
괜히 잠이 오지 않는다고 딴 짓을 하다가는 정말로 컨디션을 망쳐 버리고 내일의 전투조차 망쳐 버릴 지도 모른다.
그런 생각으로 눈을 감고서 계속해서 머리를 비우자 어느새 잠이 들기 시작했다.
그렇게 뒤척이다 자정이 가까워서야 겨우 잠이 들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