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8화 34. 터부 (5)
“그 친구도 이게 대박이라는 걸 눈치 챈 것인지, 기획안을 넘겨주면서 어찌나 호들갑을 피워 대던지. 그 친구가 조금 가벼워 보여도 일과 관련해서는 허튼 소리를 하지 않는 친구라는 건 사장님도 잘 아시지 않습니까.”
오달식 상무의 말에 한가연이 동의 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진 주인공입니다, 진 주인공. 여성 연예인들의 사회인 야구 도전이요? 그건 방송국에서 겉으로 내세운 표면적인 이야기고, 숨겨진 이야기의 주인공이 바로 그 남자다 이겁니다. 게임으로 치면 히든 캐릭터이자, 메인 스토리보다 더 비중 있는 히든 스토리의 주인공인거죠. 게다가 최종 목표를 보세요. 국제 연예인 야구 대회의 출전입니다. 지금 야구판에서 그 대회가 얼마나 뜨거운 이슈인지 사장님도 잘 아시죠?”
야구 용품 사업으로 확장을 꾀하고 있는 마당에 그와 관련한 국제적인 이벤트가 계획 되어 있는 것을 모를 수가 없다.
과거에도 국제 연예인 야구 대회가 열렸던 적이 있기는 하지만, 당시에는 큰 반향을 얻지 못했던 것과 달리 이번에는 대회 시작 전부터 쏟아지는 관심의 수준부터가 달랐다.
우선 미국이 대회의 참여와 함께 주관에도 관여하고 있는데다가, 메이저리그 출신의 방송인들과 헐리웃의 이름난 배우들이 참여할 지도 모른다는 소문 때문이었다.
개중에는 한국에서도 이름만 대면 알 정도로 유명한 이들이 몇 몇 있었는데, 보스턴 레드삭스의 팬으로도 유명한 벤 애플릭이 참여가 유력시 된다는 보도마저 있을 정도였다.
처음에는 일부 대형 커뮤니티들 사이에서 돌기 시작한 소문이었는데, 최근에 와서는 메이저리그와 관련한 소식을 전문으로 취급하는 미튜브와 공신력 있는 미디어에서도 언급되면서 거의 기정사실로 굳어지고 있는 중이었다.
만약 과거의 유명했던 메이저리거들을 포함해서 헐리웃의 이름난 배우들 중의 하나라도 시합에 출전하게 된다면 이건 그야말로 역대급 이벤트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다른 곳은 몰라도 야구의 종주국인 미국과 함께 최고 인기 스포츠로 자리 잡은 한국에서만큼은 이미 흥행을 보장받은 셈이나 마찬가지였다.
“박찬성에게서 홈런을 때려내고 명승부를 펼친 남자가 그 시합에 출전한다고 상상해 보세요. 기획안에서 보듯이 방송국 쪽에서는 이미 그를 대회에 출연한다는 것을 기정사실로 여기고 내용을 진행 중에 있습니다. 만약 기획안대로만 일이 진행된다면 그 파급력은 생각 이상으로 엄청날 겁니다. 최소한 야구인들 사이에서는 핵폭탄급의 위력일 겁니다.”
오달식 상무의 말에 다시 한 번 기획안을 읽어 내려가던 한가연이 고개를 끄덕였다.
기획안에서는 이야기의 진행 방향에 대한 자세한 언급을 회피하고 있었지만, 한가연은 이런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 지 잘 알고 있다.
방송국도 어차피 수익을 창출하기 위한 구조의 기업이다. 기업이 이윤을 창출하기 위한 과정은 결국 단순하다. 어떻게든 대중의 시선을 잡아 끌고 그들의 시선을 묶어 두는 것이다.
이를 위해 방송국이 박찬성과 그 남자를 어떤 식으로 이용할 지는 굳이 보지 않아도 뻔한 일이다. 여기에 국제 연예인 야구 대회까지 얽혀 있으니 오달식 상무가 이렇게 호들갑을 떠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대체 어떻게 알고 알아보라고 한 겁니까? 누가 언질이라도 준 겁니까?”
그 말에 한가연의 머릿속으로 강시연의 얼굴이 떠오른다.
그녀의 한 마디에 촉이 발동한 한가연이 오달식 상무에게 자세하게 알아보라고 지시를 내린 것인데, 설마 이런 내용일 줄이야.
그러다 문득 그녀가 대체 왜 이런 식으로 자신에게 호의를 베푼 것인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게... 저도 어쩌다 우연히 알게 된 거라서...”
“그런데 그게 끝이 아닙니다. 박찬성과 대결한 그 남자 말입니다. 다른 루트를 통해서도 이것저것 알아보았는데, 의외로 사회인 야구 쪽에서는 알게 모르게 소문이 꽤 퍼져 있더군요. 그런데 이게 진짜 대박입니다. 그야말로 완벽한 퍼즐의 마무리라고 할 만 합니다.”
그러면서 잠시 뜸을 들이고는 다시 입을 연다.
“그 친구. 알아보니까 대구상고 야구부 출신이라고 합니다. 고등학교 이후로 야구를 그만 두었다고 하는데, 이게 또 기가 막힙니다.”
그러면서 스마트폰으로 과거의 기사를 화면에 띄우고는 한가연에게 내밀었다.
읽어 보니 10년 전, 대구상고 야구부의 감독이 주축이 되어 터진 초대형 뇌물 수수 비리 스캔들 관련 기사였다.
“그 당시 뉴스에서도 크게 언급이 되었지만 실제로 야구인들 사이에서는 그 여파가 매우 컸던 모양입니다. 그 사건 때문에 당시 대구상고의 졸업생들 대부분이 야구의 꿈을 접고 포기했다고 하는데, 박찬성과 대결한 남자가 바로 그 중의 한 사람인 거죠. 그런데 알아보니까,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만 해도 크게 주목받는 수준의 선수가 아니었다고 합니다.”
그 말에 한가연의 눈이 반짝였다.
야구 사업으로의 진출을 결정하고 지난 3년 동안 야구에 대해 많은 공부를 한 한가연이지만, 세상의 이치라는 것은 어디에서나 비슷했다.
어떤 분야에서든 탁월한 실력이 부각되지 않는 이상은 살아남기 어려운 것은 마찬가지다. 특히 프로의 세계라는 것은 어중간한 실력으로 살아남을 수 있는 곳이 아니다.
야구 인프라가 미국이나 일본에 비해 현저하게 부족한 한국이다. 그런 곳에서도 주목을 받지 못했다는 말은 그저 그런 수준의 선수라는 이야기를 좋게 포장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 선수가 어느 날 갑자기 등장해서는, 코리안 몬스터라 불리며 악마의 재능을 타고난 박찬성과 희대의 명승부를 펼쳤다고 한다.
10년 전에는 별 볼 일 없던 선수가 10년이 지나 박찬성과 대등한 경기를 펼친다는 것은, 야구에 대한 전문가가 아닌 한가연이 보기에도 말이 안 되는 이야기다.
이건 이야기가 된다.
그리고 이런 배경 스토리를 지닌 인물을 방송국에서는 제대로 한 번 밀어볼 계획을 가지고 있다.
남자의 배경 스토리에 기획안까지 더해지자 박찬성이나 강시연마저도 서브로 밀어버릴 정도로 엄청난 스토리로 둔갑한다.
‘강시연이 이래서 그런 말을 했던 거구나.’
부족한 임팩트의 마지막 퍼즐이 채워지는 느낌이다.
마약 박찬성과 함께 더블 캐스팅을 해서 광고에 세울 수만 있다면, 생각 이상으로 어마어마한 광고 효과를 누릴 수 있을 지도 모른다.
문제는 그 남자가 과연 기획안이 의도한 대로 차곡차곡 성장해 나가며 대중의 인지도를 확실하게 획득하느냐 하는 점이다.
이제 결정을 내려야 할 때다.
도박과 모험을 택할 것인지, 아니면 비교적 무난한 길을 택할 것인지 선택의 기로에 서자 비로소 한가연의 촉이 맹렬하게 발동하기 시작한다.
“그래서 이 남자의 정체는 알아내었나요?”
한가연의 말에 오달식이 가슴을 쭈욱 펴더니 턱을 치켜세우며 말했다.
“제가 누굽니까? 사장님의 든든한 오른팔이자 믿고 맡길 수 있는 오달식 아닙니까.”
그의 말에 한가연이 미소를 지었다.
오달식 상무는 그녀가 처음 회사를 세울 당시, 이전의 회사에서 같이 일하던 선배 직원이었다.
평소 사람이 능글맞은 면이 있고 조금 가볍기는 하지만, 친화력이 대단하고 사람을 사귀는 데 있어서만큼은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그렇다고 업무 능력이 뒤떨어지는 사람도 아니어서 회사를 세울 당시 직접 그를 설득하여 데리고 나온 사람이기도 했다.
당시 한가연은 그의 영입에 매우 적극적이었는데, 이는 과거의 일로 인해 자신의 성격에 문제가 있다는 것을 스스로도 잘 알고 있는 까닭이었다.
자신을 대신해서 대외적인 업무를 도맡아 처리해 줄 사람의 필요성이 있었고, 오달식은 그런 기대에 정확하게 부합하는 이상적인 사람이라 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는 기대에 부응하며 수많은 대외 업무를 도맡아 처리해 오며 한가연의 신임을 한 몸에 받고 있는 사람이기도 했다.
“사실, 그의 정체를 알아내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았습니다. 이미 사야인들 사이에서는 꽤 알려져 있어서 이름이나 직업도 금방 튀어나오더라고요.”
그러면서 스마트폰의 화면을 다시 조작하며 설명을 이어간다.
“이름 서강호. 나이 29세. 직업은 현재 대역 배우 출신으로...”
“자... 잠깐만요. 서강호? 서강호씨라고요?”
이제 막 남자에 대한 소개를 시작하려는 찰나 한가연이 갑자기 말을 자르고 끼어 들자 오달식이 눈을 껌뻑였다. 그녀가 이런 식으로 다른 사람의 말을 자르고 들어오는 경우는 매우 드문 까닭이다.
“네? 네.”
“29세에 대역 배우를 하고 있다고요?”
이름과 나이 그리고 대역 배우라는 직업까지 더해지자 한가연의 머릿속으로 한 남자의 얼굴이 떠오른다.
“혹시 사진 있나요?”
“네? 아, 네. 그가 몸담고 있는 액션 스쿨에 프로필 사진이 마침 있더군요.”
그러면서 스마트폰을 내밀자 화면 안으로 한가연도 익히 알고 있는 남자의 얼굴이 보인다.
남자답게 생긴 호감형의 얼굴을 하고 있는 사람.
지난 번 놀이공원에의 일로 인해 듬직한 남자로 마음속에 각인 된 사람이었으며, 최근에는 그를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기분 좋은 콧노래를 흘러나오게 만든 사람이기도 한 얼굴.
어린 시절의 풋풋한 감정을 느끼게 만든 바로 그 남자의 얼굴이 그곳에 자리 잡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