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7화 미쳐버린 딸쟁이와 도망(4)
“네? 컨디션이 뭐가 어떻다는건가요..?”
나의 혼잣말에 반응한 여성이 내위에 올라타 물었다. 이대로 섹스할 생각인건가?
“잠깐 덜어져줘 일어설수가 없잖아”
“앗..”
가만히 내버려 둔다면 정말 섹스를 할듯 들러붙어 오는 여성을 간신히 떼어낸 뒤 몸을 일으키려 하자 모든 체력이 방전되어 버린 듯 온몸이 나른해지며 다리에 힘이 제대로 들어가지 않았다.
“여, 역시 다치신 곳이 아프신건가요?!”
수백 마리의 좀비와 싸웠을 때조차 이 정도까지 힘들고 지치진 않았었다. 신들린 듯 좀비들을 농락했던 몸이 순식간에 둔감해져 버린 듯한 좆같은 감각... 하지만 정신만큼은 어느 때보다 또렷한 느낌이 상반되어 미묘하게 기분이 나빴다.
“(...잠깐 혹시 내 정신상태에 따라서 몸 상태까지 바뀌는 건가?)”
나는 자리에 누운채 천천히 지금까지 있었던 일을 떠올리며 생각을 정리했다.
처음, 그러니까 감염된 이후 처음으로 정신적으로 크게 몰렸을 땐 꼬맹이와함께 아파트 옥상에 버려졌을 때였다. 작은 마체테와 권총 한 자루를 들고 배신감과 꼬맹이가 물렸다는 절망감에 몸을 맡겨 ‘감염이 될만한 상처 하나 없이’ 몰려드는 좀비들과 변종을 쓸어버렸었다.
두 번째로 정신적으로 많이 몰렸을 땐 살아있었다고 믿었던 꼬맹이가 이미 좀비로 변해있는 걸 목격했을 때였다. 그때는 너무 커다란 충격을 받아 기억이 흐릿하긴 하지만 단순한 주먹질만으로 콘크리트 벽에 금이 가게 만들 만큼 몸이 강화되었던 것 같았다.
생각의 정리를 마친 나의 머릿속에 한가지 생각이 스쳐지나갔다.
<내가 정신적으로 패닉에 빠져야 바이러스가 활성화된다.>
“(그래, 이번엔 반대로 꼬맹이랑 겹쳐 보이는 여성에게 위로받은 탓에 한계까지 몰렸었던 정신이 약간이지만 회복했고 그 탓에 몸이 무지막지하게 약해진 거지)”
빈번하게 나타나던 환영도 환청도 도서관에서 만난 여성과의 커뮤니케이션과 섹스 이후 사라져버렸으니... 내가 채감하고 있지는 못하지만 그만큼 나는 여성에게 크게 위로받았다는 거겠지.
생각의 정리가 끝나가던 도중 자연스럽게 나를 걱정스럽게 내려다보는 여성과 눈이 마주쳤다.
“하, 하루만 더 여기서 쉬는 게 어떨까요? 좀비들도 전부 흩어져버렸고 하루 정도 더 있어도 괘, 괜찮을 것 같은데?”
어쩐지 안개가 낀듯 흐릿하게만 보이던 여성의 인상착의가 선명하게 보이고 있었다. 160cm 정도 되어 보이는 키, 이상한 뿔테안경 너머로 보이는 갈색의 맑고 깨끗한 눈빛, 무척이나 새하얀 피부. 허리까지 내려오는 장발 솔직히 말해서 안경만 없었다면 충분한 미인이라고 보기 충분한 생김새...
“그렇게 크게 걱정할 필요 없어 단순한 근육통일 뿐이니까”
순간적으로 어젯밤 내 자지에 박혀 앙앙거리며 신음을 토해내던 여성의 아름다운 뒤태가 떠올라 시선을 돌린 채 억지로 몸을 일으켜 세웠다.
“아 그, 그런가요?”
“어 그리고 생각해주는건 정말 고맙지만 근처에 변종도있고 나를 기다리는 사람도있어 여기서 시간을 더 낭비해봤자 남는건 아무것도 없을거야”
“죄... 죄송합니다 피곤해 보이셔서 새,생각이 짧았어요”
나의 설명에 바로 떠나야 한다고 해서 실망한 것인지 여성은 우물쭈물 시선을 내리깔았다.
“괜찮으니까 맡겨뒀던 키 돌려줘 빨리 출발해야 하니까”
내가 좀비들에게 잡혀 물리기라도 했다면 바로 창문 밖으로 몸을 날리려던 그 무서운 기백은 도대체 어디로 사라진 걸까 싶어 피식 웃음을 터트리며 여성 옆에 있던 꼬맹이를 끌어안고 오토바이에 올라탔다. 상념과 대화는 여기까지 더 이상 낭비할 시간은 많이 남지 않았기에 한시라도 빨리 출발해야 했다.
“여, 여기요... 저, 정말 괜찮으시겠어요?”
“됐어 됐어 거점에 도착해서 자고 일어나면 괜찮아질 거야 이런일이 한두번 있는것도 아니고”
차가운 꼬맹이의 체온이 성욕으로 달아오른 머리를 차갑게 식혀주었다. 나는 꼬맹이만 있으면 된다. 끝까지 나를 믿어준 사람이니까, 나를 그 방 밖으로 꺼내준 사람이었으니까, 여성에 대한 호의는 단순한 은혜 갚기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정말 그럴까?]
멀리서 들려온 환청 소리에 꼬맹이를 끌어안은 손에 힘이들어갔지만 애써 밝은 얼굴을 유지하고 여성을 바라보았다.
“빨리 뒤에 타는게 어때? 약속대로 거점까지 데리고 가줄 테니까”
“히익...”
오토바이에 시동을 걸자 커다란 배기음과 함께 여성이 겁을 집어먹고 몸을 떨었다.
“뭐야 혹시 무서운 거야?”
“아,아니요 사실 오토바이를 타는 게 처음이라 그냥 긴장한거 뿐이에요...”
“참나 이게 무슨 동물도 아니고 그냥 자전거 타듯 뒤에 타서 나를 꼭 붙잡고 있기만 해 알아서 데리고 가줄게”
자신의 행동에 어이없어하는 내 얼굴을 본 여성은 얼굴을 붉게 물들이며 크게 심호흡하더니 덜덜 떨리는 발걸음으로 내 뒤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그럼 시, 시... 실례하겠습니다”
솔직히 말해서 앞쪽에는 살아있는 시체가 된 차갑고 뻣뻣한 꼬맹이의 감촉이, 뒤쪽에서는 자신이 아직 살아있다고 주장하듯 따뜻하고 부드러운 여성의 감촉이 느껴져 형용할 수 없는 감각을 느꼇다. 차갑고 뜨겁고... 이걸 뭐라고 표현해야 좋은 걸까?
“크흠 챙길 건 다 챙긴 거지? 다시는 못 돌아올 수도 있어”
“네, 남은 식량이랑 양초 같은 필요해 보이는 건 싹 다 챙겨서 가방에 가지고 왔어요... 그리고 죽은 동료들에게 작별 인사도 했고요 미련은 어,없습니다”
“그러냐 그럼 출발한다?”
자신의 행동에 뿌듯한 듯 말하는 여성의 말을 출발신호로 오토바이의 엑셀을 돌리자 부응하는 요란한 소리와 함께 출발하는 오토바이, 여성은 아직도 무서운지 나를 꽉 끌어안으며 큰 가슴을 내 등 뒤에 문질렀다. 유혹하는 건지 무서워서 그러는 건지... 아직까지는 잘 모르겠네
“꼬맹아 시원하지?”
나는 의도적으로 여성의 감촉을 무시하며 꼬맹이에게 질문을 날렸다. 어제까지 필사적으로 발버둥 치던 것이 거짓말인 듯 얌전하게 내 품에 안겨 멀뚱멀뚱 나를 올려다보는 꼬맹이는 어쩐지 무척이나 슬픈 듯 보였다.
“(...배신한 게 아니니까 그렇게 슬픈표정 하지마 꼬맹아 난 오직 너 하나만 있으면 족해)”
◆
오토바이 뒷좌석에 앉아 계속 두려움에 떠는 여성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속도를 줄여 예상보다 늦은 시간에 빠져나왔던 방벽 앞에 도착하자, 오토바이 소리를 들었는지 삼삼오오 모여든 노예들이 환호성을 지르며 자기들끼리 시끄럽게 떠들고 있었다.
“야야 보라니까 작은형님이 돌아오셨어?! 여자도 있는데?”
“썩을 돌아오지 않는다에 담배 걸었는데 다잃게 생겼네 아아...”
“와 뭐야 새로운 변기인겁니까? 저번 습격 때 여자들 대부분이 죽어서 굶주려있었는데 잘됐네요 히히”
“야 혓바닥이랑 눈깔을 깡그리 뽑아서 병신 만들어주기 전에 싹다 닥치고 옆으로 비켜라?”
내 한마디에 순식간에 조용해진 노예들이 순식간에 길을 텄고 나는 무언가 뭇고싶은 듯 보이는 여성을 데리고 방벽 안으로 들어갔다. 뒤에서 보내오는 시선들에는 무지막지한 실기와 성욕이 가득차 있었지만 전부 무시해 버렸다.
“웬만하면 내 옆에서 떨어지지 않는 게 좋을 거야 방금 봤다시피 여기는 정상적인 새끼들이 별로 없거든. 강간이나 잘못하면 죽을수도있어 기억해”
어느 정도 노예들과 거리가 멀어졌기에 오토바이를 멈춰 새우고 여성을 내려주자 여성은 내 옷소매를 잡고 부들부들 떨었다.
“...”
“겁도 참 많네 내옆에 있으면 안전해...쯧 그래도 돌아가고 싶으면 언제든지 이야기해 보내줄 테니까”
여성의 얼굴이 무척이나 불안한 듯 새하얗게 질려있었기에 나는 잠시 머리를 긁적거리다 머리 위에 손을 얹어 쓰다듬어주었다. 마치 꼬맹이와 지키지 못했던 약속을 대신하려는 듯이...
“여기 있고 싶다고 한다면 어떻게든 보호해줄게 은혜가있잖아”
“그,그게아니라 토, 토할 그것 같아요 그래요 긴장한 채로 계속 버티고 있었더니 우욱”
“기껏 분위기를 잡았는데 그거냐?! 잠깐만 기다려 지금 봉투 가지고 올 테니까!“
“무, 무리 우에엑...”
내가 봉투를 가지고 오기도 전에 순식간에 바닥에 토사물을 뿜어내기 시작한 여성, 나는 한숨을 내쉬며 여성의 등을 두드려주었다.
“야야 괜찮냐? 오토바이가 그렇게 무서웠어?”
“우에엑.”
“(그래도 노예들을보고 긴장한 모습도 전혀 없었고 배짱이 두둑한 건지 아니면 내가 당연히 지켜줄 거라고 생각하는 건지 알 수가 없네)”
그것도 아니라면 단순히 구토감 때문에 공포심을 잊을 걸지도...?
“야야 다 왔으니까 방안에서 뻗어 바로 앞이 내 집이야 아오...”
“죄,죄송해요 다리에 힘이 풀려서”
나는 작게 욕설을 내뱉으며 꼬맹이를 어깨 위에 걸쳐 메고 여성을 부축해 집 안으로 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