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화 짓밟힌 붉은 국화
철을 두들기는 소리가 울린다.
리네는 붉게 달아오른 강철을 망치로 내리치며 모양을 잡았다. 땀이 온몸에 이슬처럼 맺혔지만, 신경도 쓰지 않았다. 대장간의 열기에 몸을 맡기면 이런 건 금방 익숙해지기 마련이었다.
물론 옷을 껴입고 버티기는 힘들므로 대부분의 대장장이들은 작업용 가죽 앞치마에 바지 정도만 입고 작업을 한다. 리네는 굳이 바지까지도 입을 필요 없다고 생각해서 앞치마만 걸치고 살았다.
매일 이 가죽 앞치마만 입다 보니 너무 익숙해져 버렸다. 기분 전환으로 다른 옷을 입어보려고 해도 살결에 닿는 옷감의 느낌이 어색하기만 했다.
“후우…….”
검의 형태가 잡히자 리네는 망치를 내려놓고 이마의 땀을 훔쳤다. 그리고 화로에 다시 한번 강철을 집어넣어 달군 다음, 물에 넣어 담금질했다.
보통 담금질을 할 때는 물이 아니라 기름에 넣어 식힌다. 물로 담금질하면 기름으로 담금질했을 때보다 더 단단해지지만, 실패할 경우 금이 가고 부러지기 때문이다. 그에 반해 기름은 안정적이다.
금속의 성질에 따라 방식을 다르게 했지만, 물로도 가능한 경우에 리네는 꼭 물로 담금질했다. 스스로의 실력에 대한 자부심이자, 더 높이 올라가겠다는 향상심에서 비롯된 고집이었다.
“이제 됐다…….”
수십 번의 담금질을 끝마치자 리네는 그제야 쉴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이제 마무리 작업만 하면 끝이었고, 납부일까지는 아직 시간이 있었다.
‘이제 좀 여유가 생기겠네.’
그동안은 의뢰받은 작업물들을 만드느라 여념이 없어 진을 만난 날도 손에 꼽았다. 하지만 이제 리네는 의뢰를 가려 받는 법을 배웠다.
수지타산이 맞지 않는 의뢰는 쳐내고, 아래 등급에서도 충분히 제작할 수 있는 수준의 의뢰는 내려보낸다. 한 사람이 모든 의뢰를 도맡을 수는 없다. 이게 이 업계가, 그리고 세상일이 굴러가는 방식이었다.
이를 뒤늦게나마 깨우친 리네는 드디어 시간적 여유를 손에 쥘 수 있었다. 내일은 뭘 할까? 오랜만에 누리는 휴식을 알차게 보낼 방법을 고민했다.
사실 생각할 필요도 없었다.
‘진.’
리네는 대장간을 정리하고 집으로 돌아가는 내내 진을 생각했다. 못 본 지가 오래되었다. 가끔 진이 공방으로 찾아와 같이 시간을 보내고는 했지만, 리네가 시간 배분을 못 해 그마저도 오래가지 못했다. 하지만 이젠 그럴 필요가 없었다.
길드에서 내준 리네의 집은 기숙사와 흡사한 형태의 방이었다. 개인적으로 소유한 집이 없는 대장장이들은 대부분 이곳에서 생활했다.
리네는 가죽 앞치마를 대강 벗어던지고 욕실로 들어갔다. 그리고 곧바로 물을 틀어 샤워를 시작했다. 눅눅하게 찌든 땀의 소금기가 씻겨 내려갔다.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욕실에서 쏟아지는 목욕물을 맞으며 리네는 가만히 생각에 잠겼다.
‘내일은 진과 뭘 할까?’
둘이서 놀러 갈만한 곳을 떠올렸다. 진은 뭘 좋아할까? 진은 가벼우면서도 동시에 예리한 성격이었고, 또 마법사답게 싸구려는 좋아하지 않았다.
스스로도 취향이 까다롭다는 건 아는지, 진은 하고 싶은 건 스스로 찾아보려 하는 타입이었다. 리네가 멋대로 계획을 짜면 불평은 하지 않겠지만 만족스러운 시간은 되지 못할 것이다. 그러니 같이 찾아보는 게 나을 것 같았다.
그럼 데이트는 이튿날이 되어서야 즐길 수 있겠지만, 이제 리네도 시간적 여유가 있으니 괜찮을 것이다.
‘아마 아침에 만나서 데이트를 시작하겠지?’
아침 식사를 하고 만날 수도 있겠고, 아니면 만나서 같이 밥 먹을 곳을 찾아 돌아다닐 수도 있겠다.
그다음에는 진과 함께 어디로든 놀러 갈 것이다. 진은 취향이 까다로우니까, 어쩌면 극장이나 미술관 같은 의외의 장소로 향할 수도 있다.
그리고 점심을 먹고, 시간을 보내다 저녁도 먹고, 그렇게 밤이 다가오면…….
“아…….”
손이 자연스레 사타구니 아래로 향했다. 손가락 끝에 톡 튀어나온 돌기가 닿자 리네는 순간 움찔 몸을 떨었다. 그 아래로 손을 내리니 꾹 다문 균열이 만져졌다.
“진…….”
리네는 그가 제멋대로 어루만졌던 그때의 느낌을 되새기며 음부를 매만졌다. 그의 커다란 육봉이 비좁은 질내를 헤집으며 억지로 드넓혔던 느낌을 재현하려 손가락으로 비집었다.
“진…….”
부족하다. 그의 손길, 그의 하물로 유린당하며 느꼈던 쾌락에 전혀 미치지 못했다.
오직 제 욕구을 해소하기 위해 자비 없이 질을 쑤셨던 흉악한 육봉. 하복부 안에 쏟아지는 진득한 이물감. 그 어느 것도 충족되지 못했다.
“진……. 진…….”
리네는 욕조에 앉아 다리를 벌리고 자위를 계속했다. 애처롭게 그를 추억하며 정신을 흐트러트리는 그 느낌을 재현하려 애썼지만, 부족해도 한참 부족했다.
“으읏! 하으…….”
작게 절정한 리네는 뿜어져 나온 조수로 얼룩진 바닥이 목욕물에 적셔져 사라지는 것을 보며 숨을 골랐다.
작은 창 너머로 노을이 지고 있었다.
* * *
사실 리네는 진과 만날 방법이 마땅치 않았다. 리네는 언제나 공방의 대장간에서 철을 두들기며 시간을 보냈지만, 모험가인 진은 언제 임무를 나갈지 알 수 없었으니까.
보통은 진이 대장간에 틀어박혀 있는 리네를 찾아오는 편이었다. 그럼 리네는 짬을 내서 진과 이야기를 나누고, 정사를 즐기며 시간을 보냈다.
하지만 오늘은 리네가 진을 찾아갈 생각이었다. 지난 만남에서 서로의 근황을 물었을 때, 진은 남부 대로에 있는 어느 하숙집에서 묵게 되었다고 했다. 그곳을 찾아가면 될 것 같았다.
만에 하나 엇갈릴 것을 대비해 대장간에 메모를 남겨두었다. 만약 진이 의뢰를 수행하러 나갔다면, 하숙집에 있는 사람에게 말을 남기면 될 문제였다.
진이 없다고 해도 빠르면 오늘 저녁, 늦어도 내일에는 만날 수 있을 것이다. 만약 그렇게 된다면 조금 아쉽겠지만, 시간은 이제 많으니까.
“흐흐흥…….”
리네는 저도 모르게 콧노래를 부르며 가벼운 발걸음으로 남부 대로를 거닐었다.
세상이 아름다웠다. 이십여 년간 보아왔던, 새로울 것 없는 옛 모습 그대로의 도시인데도 너무나 눈부셨다. 이게 사랑일까? 한 남자를 사랑하니 세상도 사랑하게 되는 걸까?
“왜 그렇게 신이 났어요?”
화분에 물을 주던 꽃집 아가씨가 지나가던 리네에게 나지막이 물었다.
“아, 네?”
“이런, 너무 뜬금없었나? 미안해요. 차림새가 미묘하게 비슷해서 같은 직종인가 해서요.”
그렇게 말하는 그녀의 차림새는 리네와 비슷한 작업용 앞치마 한 벌 뿐이었다. 다만 리네의 것이 더 투박하고 색도 어두웠고, 그녀의 것은 밝고 하늘하늘했다.
“아무튼, 왜 그렇게 신이 났어요?”
리네는 우물쭈물하며 대답하기를 망설였다.
“그게…….”
“사실 말 안 해도 훤히 보여요. 사랑이죠?”
마음을 꿰뚫어 보는 듯한 눈빛에 리네는 순간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어, 어떻게?”
“후후, 척 보면 알죠. 사랑을 시작한 아가씨란 다 그런 법이랍니다?”
다 그렇다는 게 무슨 말인지는 잘 모르겠다. 리네는 떨떠름한 눈으로 꽃집 아가씨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태연하게 어깨를 으쓱이며 물었다.
“그래서 상대는 누구예요? 아니다. 말하지 말아요.”
“네?”
“꽃집에서는 말이죠? 말이 아니라 꽃으로 마음을 전하는 법이랍니다. 자!”
켜켜이 쌓인 화분 사이를 헤집던 그녀가 갑자기 국화 한 송이를 꺾더니 잘 포장해 리네에게 내밀었다. 리네는 그 붉은 국화를 얼떨결에 받았다.
“이건?”
“붉은 국화의 꽃말은, ‘나는 당신을 사랑합니다.’에요. 로맨틱하죠? 이걸로 당신의 마음을 전해보는 건 어때요?”
“아니, 그…….”
꽃말의 의미에 뺨을 붉히는 리네를 보며 꽃집 아가씨는 귀엽다는 듯 웃었다.
“보통은 남자가 여자에게 꽃을 주지만, 꼭 그러란 법은 없잖아요? 당신의 남자는 꽃이 어울리는 남자인가요?”
리네는 로브의 가슴팍에 국화를 단 진의 모습을 상상해 봤다. 썩 나쁘지 않을지도 몰랐다.
“아마도…….”
“그럼 됐네요! 가서 당신을 마음을 전해요. 연인 사이에 그것보다 중요한 것은 없답니다?”
“……고마워요.”
그녀는 붉은 국화를 내려다보는 리네에게 당당하게 손바닥을 내밀며 분위기를 깼다.
“가격은 동화 2닢이에요. 싸죠?”
상술이었다니. 리네는 허탈하게 웃으며 돈을 쥐여줬다. 솔직히, 완벽하게 당했다는 걸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잘 가요! 좋은 사랑 하시고요”
손을 흔드는 꽃집 아가씨를 보며 리네는 헛웃음을 지었다.
리네와 진을 이어준 게 배덕적인 짐승의 교미와 쾌락이라는 걸 알았다면 그녀는 저렇게 웃을 수 있었을까? 영원히 알 수 없을 테니 아무래도 좋은 일이다.
남부 도로를 거닐며 리네는 진이 말했던 하숙집의 특징이 있는 집을 살폈다. 간판이 걸린 빈 가게. 진은 그곳의 2층이 하숙집으로 사용된다고 말했다.
거리를 한참 둘러보던 리네는 하숙집보다도 먼저 낯익은 뒷모습을 발견했다. 따스한 날씨에 맞지 않게 답답해 보이는 로브. 몇 번이고 안겼던 사이이기에 바로 알 수 있었다. 진이었다.
“……진?”
리네는 곧바로 그를 부르려 했다. 그러나 그의 옆에 팔짱을 끼고 있는 어느 작은 체구의 고양이 수인을 보고 멈칫할 수밖에 없었다.
둘은 사이가 좋은 듯 화기애애하게 이야기꽃을 피우고 있었다. 그러더니 이내 어느 빈 가게 안으로 들어가 사라졌다. 진이 말했던 하숙집의 특징과 똑같은 곳이었다.
리네는 엄습해 오는 불안감을 애써 떨쳐냈다.
“아, 아닐 거야. 아닐 거야.”
그러면서도 그녀의 발걸음은 둘의 발자취를 뒤쫓고 있었다. 리네는 둘이 사라졌던 건물의 뒤편으로 건너가 창문에 귀를 대고 집중했다.
-앗, 아응, 선생님……. 더…….
쾌락을 느끼며 내뱉을 수밖에 없는 열띤 신음소리. 리네가 진에게만 들려주던 유혹적인 목소리. 진에게 안겨 셀 수도 없이 노래했던 정사의 소리.
“왜…….”
다른 여자가, 그에게 안겨 그 야릇한 신음을 흘리고 있었다. 리네가 아니라, 웬 도둑고양이가.
믿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상황은 명확했다. 진은 다른 여자와 사랑을 나누고 있었다. 서로의 몸을 탐하며 배덕의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왜! 왜…….”
리네는 더 이상 듣고 있을 수가 없어서, 도망치듯 자리를 벗어났다.
눈물 자국이 번진 바닥에는 붉은 국화 한 송이가 짓밟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