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화 진입
마침내 모든 준비가 끝났다.
“준비됐지?”
현관문 앞에 선 진이 뒤돌아보며 물었다.
흡사 투기장의 검투사와도 같은 복장으로 당당하게 서 있는 리네와, 활동성 좋은(반쯤 벌거벗은) 복장에 주위로 빛을 퍼트리는 정령들을 데리고 있는 나리가 있었다.
리네는 무법에 상당히 능숙해졌고, 나리는 네 정령과 교감하는 정령술사가 되었다. 모두 하급 정령인지라 강하다 하기에는 부족하지만, 적어도 2계층에서 활동하기에는 충분했다.
둘은 근엄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잘 훈련된 병사를 보는 것 같은 모습에 진은 만족감을 느꼈다.
“좋아. 가자!”
신이 난 진은 문을 박차고 앞서 걸었다. 리네와 나리는 그의 뒤를 따랐다. 던전으로 가는 길이라 그런지 매일 보던 거리가 왠지 낯설어 보였다.
특히 제일 긴장을 많이 한 건 나리였다. 안개의 숲 너머 처음 던전으로 가는 것이기도 했지만, 이번 모험의 목적 때문이기도 했다.
나리에게는 폐업한 가게의 흔적이나마 붙들고, 없는 돈을 아껴가며 아카데미에 다니는 이유가 있었다. 부모님이 운영하셨던 가게를 다시 일으켜 세우는 것 말이다.
하지만 혼자로서는 힘든 일이었고, 나리는 학비로 나가는 돈을 걱정해야 하는 현실에 꿈을 점점 잊어가고 있었다.
‘선생님.’
이젠 이름보다 입에 붙어버린 호칭. 나리는 자신이 그리 부르는 이의 뒷모습을 묵묵히 쳐다보았다. 넓은 등에서 듬직한 면모가 느껴지는 듯했다.
선생님께서는 가게를 다시 일으켜 세워야 한다고, 마치 그게 당연하다는 듯 말씀하셨다. 지금껏 꿈도 못 꾸었던 일을.
갚지 못할 빚을 진다는 자각은 있었다. 이렇게 홀랑 받아버려도 되는 걸까? 그렇다고 이제 와서 부담스럽다 사양할 수조차 없었다. 할 수 있는 거라고는 오직 감사를 표하는 것뿐이었다.
“고마워요.”
길을 걷던 와중, 조금 뜬금없게나마 나리는 감사를 전했다.
특히 리네 언니한테도 고마웠다. 선생님이나 자신처럼 특별한 목표가 있는 것도 아닌데 선뜻 나서주다니.
“별거 아닌걸?”
“서로 도와야 가족 아니겠어?”
뒤돌아 나리와 눈을 맞춘 둘은 피식 웃으며 그렇게 말했다. 가족. 그 말에 나리는 왠지 마음이 싱숭생숭해지는 것 같았다.
‘실수하면 안 돼.’
이번 모험은 나리 자신을 위한 여정이었다. 도움이 되지는 못할망정 짐이 되는 일은 결단코 없어야 했다.
나리는 고개를 들어 저 멀리 안개에 휩싸인 채 우뚝 솟은 고성의 잔영을 바라보며 다짐했다.
실망시키지 않겠노라고.
* * *
“안개의 숲에서는 마력을 바깥으로 운용하기 힘들어.”
진이 안개의 숲 입구에서 안개를 손으로 휘휘 내저으며 한 말이었다. 나리는 놀란 듯 눈을 크게 뜨고 되물었다.
“정말요?”
“응. 안개 분자 하나하나가 덩이진 마력 덩어리에 가깝거든. 통제할 수 없는 마력은 장애물에 불과하지. 마법사에게 이곳은 폭포처럼 흐르는 자갈 더미처럼 느껴져.”
“처음 알았어요. 저번에 왔을 때도 그렇고, 지금도 그런 건 전혀 못 느끼겠는데.”
나리는 진을 따라 안개에 손을 가져다 대며 안개를 살폈다. 하지만 나리는 마법사가 아니었기에 마나의 안개의 중압감을 느끼지 못했다.
나리는 몸 바깥으로 마력을 방출하는 법을 모른다. 그저 계약한 정령이 주체적으로 그녀의 마력을 조금씩 가져갈 뿐이다. 하지만 이곳에서는 그 정령과의 연결마저 끊어질 수 있었기에 주의가 필요했다.
“정령이 몸에서 떨어지지 않게 잘 살펴. 자칫하다가 연결 끊기면 안 되니까.”
“아, 네!”
나리는 주위를 떠도는 정령들을 어르고 달래며 품 안으로 모았다. 솜털 같은 생김새의 빛무리가 그녀의 가슴팍 안으로 스며드는 모습은 마법사인 진이 보기에도 꽤 신기했다.
“준비됐어?”
가만히 둘의 대화를 지켜보던 리네가 물었다. 진가 나리가 고개를 끄덕이자 방패를 고쳐 든 리네가 앞장서 안개의 숲으로 진입했다.
“그런데 2계층은 어떤 곳인가요?”
“2계층? 2계층은 거대한 밀림이야. 육지가 끝나는 부분까지 거대한 나무가 빽빽하게 솟아있지.”
“밀림이요? 그러면 벌레라던가 그런 게 많지 않나요?”
나리는 조금 질색하는 듯했다. 진은 웃으며 고개를 내저었다.
“벌레 같은 건 없어. 던전에는 오직 마수뿐이니까.”
“정말요?”
“생각해 보면 1계층에도 벌레 같은 건 없긴 했는데…….”
나리뿐만 아니라 리네도 흥미를 보였다.
어디서부터 설명을 해야 하나. 진은 간단하게 생각을 정리하고 가르쳐 달라 보채는 둘에게 설명을 시작했다.
“너희는 던전이 뭐 하는 곳이라고 생각해?”
“응? 뭐, 마석이랑 재료 구하는 곳? 근데 그걸 묻는 건 아닌 것 같은데…….”
“던전의 근원에 대해 물으시는 건가요?”
정답을 맞춘 쪽은 나리였다. 역시 한창 공부하는 학생이라 그런지 머리가 잘 굴러갔다.
“맞아. 그럼 다시 물을게. 너희는 던전이 어떤 곳이라고 생각해?”
진은 지금 질문으로 답을 유도하는 화법을 구사하고 있었다. 퍽 선생님다운 짓이라 자조하며 진은 대답을 기다렸다.
“그냥 시원하게 설명해주면 안 돼?”
하지만 리네의 삐뚜름한 표정을 본 진은 뒤통수를 긁적일 수밖에 없었다.
“아, 그래. 간단히 말하자면, 던전의 계층들은 마법으로 구현된 일종의 가짜 세계야.”
“……그게 가능한가요?”
나리의 의문은 합당했다. 마력은 무궁한 가능성을 품고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상식을 벗어난 기적을 일으키는 것은 불가능하다. 아니, 불가능할 것이라는 게 일반적이다.
아무리 마법이라 해도, 비교적 작은 공간이나마 세상을 창조해낸다니. 무슨 신이 창조해낸 것도 아니고 말이다.
하지만 던전은 그 상식을 깨부쉈다.
“보통은 불가능하다고 하겠지. 하지만 불가능하다고 단정 지으면 천 년간 수없이 마석을 품은 마수들을 쏟아내는 던전을 설명할 길이 없잖아.”
“그건 그렇지만…….”
“적어도 던전이 마법으로 만들어진 세계라는 건 지난 천여 년간 마법사들이 오랜 연구를 통해 밝혀낸 진실이라는 거야. 그건 확실해.”
마신의 신성까지 먹어 치운 마왕이 매개체가 되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진실을 아는 제국의 높으신 분들은 이상하다 생각하지도 않고 말이다.
하지만 던전의 시스템이 마왕의 끝없는 마력을 매개로 동작한다는 사실은 세간에 알려져 있지 않다. 그러니 모르는 사람에게 설명하기에는 아리송한 말이 아닐 수 없다.
더군다나 못 알아듣겠다는 리네의 얼굴을 보니 설명할 의욕조차 사라졌다. 진은 한숨을 내쉬었다.
“뭐, 우리가 자세히 알 필요는 없지. 빨리 가자. 잠은 2계층에서 자야 할 거 아니야.”
다시 행군이 시작되었다. 진과 리네는 이미 숲을 돌파해본 적 있었기에 익숙했지만, 나리는 겨우 초입만 한 번 경험해봤을 뿐이었다. 그 때문에 눈빛에서 호기심이 떠나갈 줄을 몰랐다.
숲의 안개는 갈수록 짙어지기에 떨어지면 안 된다. 고성에는 사제의 성법으로도 구제할 수 없는 언데드들이 습격해 온다. 던전의 포탈은 무작위성이 있어 붙어서 진입하지 않으면 각자 다른 곳으로 떨어진다.
같은 이야기를 들려주며 진은 나리의 호기심을 충족시켜 주었다.
“도착했다.”
리네가 안개가 폭포수처럼 흘러내리는 반투명한 장벽 앞을 통과하며 말했다. 그 광경에 나리는 다시 한번 눈빛을 빛냈다.
“어떻게 이런 게 만들어질 수 있었던 건가요?”
“내가 알기로 이건 마법으로 만든 걸걸?”
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한 오백 년 전이었나? 그때 팔레움 영주가 던전의 활성화를 촉구하기 위해서 야심 차게 진행했다고 하던데? 프로젝트는 성공적이어서 모험가들의 진입장벽을 많이 낮췄다고.”
“오오. 그래? 오백 년이나 됐다고?”
“선생님은 어디서 그런 지식을 배우셨나요?”
‘고사기에 적혀 있다.’ 같은 농담이 떠올랐지만, 진은 저만 알아들을 농담을 꾹 참고 마탑에서 배웠다고 둘러댔다.
고성의 꼭대기에서 뿜어져 나오는 마나의 안개가 결계를 유리벽처럼 타고 흐르는 광경은 퍽 장관이었다. 먼지가 얼룩진 것처럼 거무칙칙했지만, 나리는 그에도 많은 관심을 보냈다.
“우리 나리도 모험을 즐기는 법을 깨닫는 것 같아서 아주 기뻐.”
그게 모험의 참맛이라는 거다. 호기심을 원동력 삼아 새로운 것을 탐구하기 위해 나아가는 것. 진이 성욕과 함께 이 도시에서 갈구하는 것 중 하나였다.
“모험이요? 아직 던전에는 들어가지도 않았는데요?”
“아이들이 마을을 돌아다니면서 비밀기지를 만드는 것도 모험이지. 꼭 특별해야만 모험인 건 아니야.”
“그쯤 해, 바람둥이. 이제 들어가야지.”
리네가 고성을 향해 턱짓했다. 각각의 무리를 지은 모험가들이 계단을 쉴새 없이 오르내리는 모습이 보였다. 이제 그들 사이로 끼어들어야 할 차례였다.
“좋아. 가자!”
“네!”
어깨에 힘이 잔뜩 들어간 나리의 어깨를 리네가 툭툭 두들겨 주었다.
“너무 긴장하지 마. 사실 우리도 2계층은 처음이야.”
“그거 참 안심되는 말이다. 그치?”
비꼬는 말에 리네는 강철 각반으로 진의 다리를 후렸다. 진은 다리가 부러진 것은 아닌지 닭싸움으로 쉐도우 파이팅을 하며 정신없이 살폈다.
이제 던전으로 진입할 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