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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화 라희


054 가스라이팅. 혹은, 심리적 지배. 대상자의 자존감을 깎아내리고, 정서적으로 불안정하게 만들어 자유의지를 무너뜨리는. 교묘하게 이루어지는 세뇌. 가스라이팅의 요점은. 대상자의 자주권을 박탈하고, 행위자에게 의존하게 만드는 것이다. 나는 내 옆을 졸졸 따라오는 라희를 눈으로 훑었다. 심리적으로 불안해 보이는 그녀를 보며 속으로 가늠한다. ‘8할.’ 슬슬 조교의 끝이 보였다. 이때까지의 일들이 문득 떠올랐다. 남녀 관계에서 항상 우위를 점하던 그녀의 자신감부터 꺾었다. 인간으로서 지켜져야 할 존엄성인 대소변을 통제해 자존심을 긁어댔다. 자존심이 긁힌 라희는 당연하게도 나를 적대했었다. 복수하고자 하는 눈빛이 선명하게 기억난다. 그 눈빛이 쾌락에 잠겨버리기까진 일주일이 걸렸다. 그때까지만 해도, 욕정과 이성이 라희의 지배권을 두고 다투고 있던 걸로 기억한다. 아마 속으로 타협하고 있었겠지. 이 정도는 내어줘도 괜찮다. 조금만 더 내어줘도 괜찮다. 어느새 정신을 차렸을 땐. 이미 쾌락 속에 빠져서 허우적거리는 자신을 볼 수 있었을 터다. 그땐 이미 늦었다. 절벽에서 뛰어내려, 자기 파멸의 구덩이로 떨어지는 중이었으니. 나는 라희가 생각이 많아지고 머리가 복잡하다는 반응을 보일 때마다 더 강한 쾌락을 주입했다. 쾌락이 그녀의 이성을 마비시키는 것을 도와주었다. 인간의 욕망은 늘, 더 많은 것을 요구한다. 라희도 그렇다. 이성을 찍어 누르고 라희를 지배한 쾌락은 더 많은 것을 요구했다. 한 번이 어렵지 두 번부터는 쉽다. 이미 자신감이 꺾여나가고, 그것을 받아들인 경험이 있는 라희다. 자존심과 자존감까지 꺾이고 그런 자신을 받아들이는 건 어렵지 않아 보였다. 누구라도 혼란스러울 것이다. 단시간에 찾아온, 자기 파멸적인 변화는 누구나 다 쉽게 받아들일 수 있는 게 아니다. 라희는 의존할 것이 필요했다. 이전보다 더. 혼돈에 빠져 질서가 필요했지만, 스스로 질서를 세울 힘은 없는 그녀에게. 나는 쾌락의 규율을 주입해 주었다. 일종의 당근과 채찍이다. 이후, 라희가 그 규율에만 의존할 수 있게끔. 나머지 모든 걸 부숴주었다. 육체적, 정신적, 사회적인 라희의 원래 모습들을 부쉈고, 그 과정에서 라희가 의존하는 쾌락의 규율을 더 단단하게 만들었다. 누군가를 확실하게 무너뜨리는 방법은. 그 사람의 일부가 되었다가 사라지는 것이라 했다. 나는 라희가 의존하던 쾌락의 규율을 다시 앗아갔다. 쾌락에 짓눌려 있던 이성이 돌아오게끔 유도하면서. 라희는 본인의 손으로 쾌락을 밀어냈다. 그때까지만 해도 라희는 인지하지 못했다. 자기가 그 쾌락에 얼마나 많이 의존하고 있었는지를. 그래서 인지할 수 있게 부추겼다. 자기가 의존했던 걸 다른 누군가에게 빼앗기고, 잃을 수 있다는 사실을 직면하게 해주었다. 효과가 너무 좋아서 극도의 불안 증세를 보이고, 애원하며 실신까지 했던 때가 불과 일주일 전이다. 나는 고개를 돌려 라희의 상태를 확인했다. 시선과 표정, 호흡과 축 늘어진 몸, 걸음걸이까지. 일주일 전 심어주었던 불안감은 아직 라희를 떠나지 않고 남아있었다. 너무 라희를 쳐다봐서일까. “왜, 요?” 내 시선을 느낀 라희가 어정쩡하게 선 채로 나에게 물어왔다. 나는 대답 대신 라희의 뒷구멍에 넣은 로터 진동을 켰다. “흑!” 라희가 화들짝 놀라며 어깨를 움찔거렸다. 동시에 아랫배를 가리는 것처럼 양손을 앞으로 모으고, 무릎을 안쪽으로 모았다. “힘들어?” “......아뇨.” 두 눈을 질끈 감았다가 다시 뜬 라희가 나와 눈을 마주치며 고개를 돌렸다. 대답한 직후, 입술을 깨물며 호흡을 헐떡였다. 그러면서도 표정 관리가 안 되는지. 자꾸 흰자가 보이게 눈을 까뒤집으려 했다. 나는 그런 그녀의 어깨를 끌어안으며 속삭였다. “자꾸 눈깔 뒤집지 말고. 아직 1단계니까.” 라희가 입술을 깨문 상태로 나를 올려다보았다. 두 눈의 초점이 흐릿해졌다가 다시 돌아오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자, 잠깐만...... 꺼주심....며는......... 안.........” “방금 켰는데?” “.........” 라희는 우리 앞에 있는 건물을 확인하고 나를 다시 쳐다보았다. 부동산. 라희의 월세 계약을 해지하기 위해 찾은 곳이었다. 부동산 사장님이 집주인이라나. “정신 똑바로 차려. 계약서에 사인해야 하는데, 옆에서 질질 싸지르지 말고.” 내 말에 라희가 나를 올려다보며 한 손으로 내 옷깃을 꽉 붙잡았다. 순도 100%의 애원하는 눈빛에 아래로 피가 쏠릴 것만 같았다. 다른 사람이 이런 눈빛을 한 것보다. 표독스러웠던 라희가 이런 눈빛을 하니 더 그랬다. “한 번만....요......” “마스크 쓰는 것까지는 봐줄게.” 나는 그것으로 부동산 문을 열고 들어갔다. 라희가 뒤늦게 마스크를 꺼내 쓰고선 나를 뒤따라 들어왔다. *** 월세 계약은 보통 1년이다. 세입자가 방을 빼겠다고 하지 않는다면 1년씩 연장되는 것이 보편적이다. 라희의 경우는 2년째였다. 법적으로 당장 나가는 건 문제가 되지 않지만, 새로운 세입자가 들어오기 전까지 집주인이 보증금을 안 돌려주는 경우가 허다했다. 라희는 그 점을 주혁에게 말했고, 주혁은 알겠다는 말만 했었다. 그리고 오늘. 라희 명의로 되어 있던 거주자를 주혁으로 바꾸게 되었다. 부동산에 들어온 지도 벌써 10여 분. 부동산 사장이자, 집주인인 아주머니는 주혁과 대화하며 계약서를 꺼내주었다. 둘이 무어라 중요한 말을 하는 것 같았지만, 라희의 귀에는 들어오지 않았다. ‘읏...... 하.........’ 라희의 신경은 온통 뒷구멍에 들어가 진동하고 있는 로터에 쏠려 있었다. “후우우......” 최대한 조용하게, 숨을 내뱉으며. 이마에 흐르는 식은땀을 닦아내는 라희를 본 사장이 말했다. “아가씨. 왜 거기 가만히 서 있고 그래요. 이쪽으로 와서 앉아요.” 사장의 말대로. 부동산에 들어와서 계속 어정쩡하게 서 있던 라희가 애써 웃었다. “괘, 괜찮......” “아유. 아가씨 사인도 받아야 하니까, 얼른 와요.” 사장이 자리에서 일어나 라희의 손목을 잡아끌었다. 그러자 라희가 휘청거리며 비틀거렸다. “아가씨, 어디 아파??” “아뇨, 아뇨. 괜찮아요.” 라희는 급하게 사장을 밀어내며 애써 웃었다. 동시에 주혁의 눈치를 보았다. 주혁은 도와줄 생각이 없는지. 가만히 라희와 사장을 지켜볼 뿐이었다. “후우......” 라희가 옅게 숨을 내쉰 뒤. 주혁의 옆자리로 걸어가 앉았다. 앉는 순간. 뒷구멍에서 튀어나오려고 했던 로터가 의자에 눌려 더 깊은 안쪽으로 들어가 버렸다. “읏......” 라희가 입술을 깨물고 고개를 푹 숙였다. 혹시라도, 항문 끝에 걸쳐있는 로터 진동이 의자에 전해져서 사장에게 들리지는 않을까. 하는 걱정이 든 라희는 항문에 힘을 주었다. 그럴수록 진동은 더욱 선명해졌다. “으, 아.......” 라희는 의자에 앉은 상태로 고개를 푹 숙이고, 다리를 달달 떨었다. 뱃속에서만 웅웅거리는 진동이 전신으로 퍼져나가는 것만 같았다. 이명이 들리는 것처럼. 귓가가 웅웅거리는 바람에, 사장이 무어라 말하는 목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씨, ......가씨.” 그 순간. “라희.” 진동이 뚝 끊기며 주혁의 목소리가 머릿속을 파고들었다. “네?! 주ㅇ.........” 라희는 반사적으로 대답을 하려다 입을 다물었다. “아가씨. 진짜 괜찮아? 몸 안 좋으면 빨리 병원이라도 가보지.” “정말 괜찮아요.” 라희가 송골송골 맺혀있는 땀을 닦으며 웃었다. 사장은 그런 라희를 걱정하는 말투로 말하면서도 펜을 내밀었다. “여기, 여기, 여기. 사인하면 돼요.” 로터 진동이 멈춘 지금. 라희는 또 언제 울릴지 모르는 로터를 신경 쓰며 재빠르게 사인을 해버렸다. 사장님이 이것저것 설명을 해주었지만, 라희는 그 말이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진동은 꺼졌지만, 언제 또 켜질지도 모른단 생각에 온 신경이 뒷구멍으로 가 있었다. 사장이 주혁에게 원룸에서 지켜야 할 것들을 설명해 주는 동안에도. 라희는 굳은 표정으로 아랫배에 힘을 주고 있었다. 주혁은 그런 라희를 힐끗 바라보더니. 주머니로 손을 넣었다. 그리고 곧바로 신호가 왔다. “흡......!!” 구부정하게 앉아 있던 라희가 허리를 빳빳하게 세우며 어깨를 움츠렸다. 그 모습에 놀란 사장이 왜 그러냐고 물었지만. 라희의 귀에는 들어오지 않았다. ‘아, 안.... 안돼......’ 지잉- 하는 진동이 뒷구멍에서부터 아랫배까지 뒤흔든다. 가뜩이나 힘을 주고 있어서일까. 더 예민해진 상태로 이젠 자궁까지 진동에 반응해 버리는 게 느껴져 왔다. 라희는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삐-하는 이명과 뱃속의 진동만이 모든 감각을 장악해 버린 것만 같았다. 통제가 되지 않았다. 뒷구멍에서부터 퍼지는 진동에 맞춰 아랫배가 욱신거린다. 질 안에 무언가 들어오기라도 바라는 것처럼. 불수의적으로 힘이 들어가며, 반대로 손과 발의 힘이 풀렸다. 허리를 곧추세우고 있던 힘까지 풀리며 전신이 후들후들했다. ‘가, 갈..... 갈 것 같......’ 쾌락에 절인 저릿함이 오감을 넘어 육체의 제어권을 가져가 버린 지금. 라희가 할 수 있는 거라곤 입을 양손으로 틀어막고 바들바들 떠는 것이 전부였다. *** “과민성 대장염이라서 그래요.” 나는 계약을 마치고 부동산 사장에게 대충 둘러댄 뒤. 부들부들 떠는 라희의 어깨를 부여잡고 빠르게 부동산을 나왔다. 진동은 끄지 않은 상태였다. 부동산에서 나와, 적당히 후미진 골목으로 들어가자마자. 라희가 입에서 신음을 참지 못하고 뱉어내며 쓰러지려 했다. “흑...!!” 나는 그런 라희를 끌어안으며 속삭였다. “계속 걸어.” “가, 갈 것.........” 라희는 내 옷깃을 붙잡으며 푹 숙이고 있던 고개를 들었다. 두 눈의 초점은 이미 없었다. 툭 치면 갈 것처럼 꽉 다문 입이 벌어지자마자 침이 흘러나왔다. “걸어.” 나는 라희의 뒤로 손을 내렸다. 엉덩이를 움켜잡듯, 엉덩이골 사이로 손을 집어넣어 뒷구멍 부위를 중지로 꾹 눌렀다. “히긱!!!” 라희가 비명을 지르다 말고 스스로 입을 막았다. 나는 주변을 훑으며 말했다. “여기 사람 사는 곳이야.” 이곳은 원룸촌이라 불리는. 원룸 건물과 건물 사이의 골목이었다. “빨리 안 걸어나 가면, 반지하 사는 사람이 보짓물 질질 흘리는 거 다 보겠다.” 나는 중지로 항문을 계속 올려 누르며 말했다. 내 말에 라희가 억지로라도 걸어보려는 듯. 힘없이 비틀 거리는 다리를 움직였다. 하지만 몇 걸음 가지 못해 휘청거리며 주저앉으려 했다. 나는 그 순간. 라희의 뒷구멍에 있던 손아귀에 힘을 주었다. 엉덩이가 같이 움켜잡히며 손끝으로 튀어나올 것 같은 로터가 만져졌다. “히긱!!!” 라희의 몸이 반사적으로 뒤로 꺾이며, 그 자리에서 까치발을 딛고 선 채로 경직되었다. 그리고 손끝에 뜨거운 무언가가 느껴졌다. 후두둑 떨어지는 소리에 나는 시선을 내렸다. 라희의 치마 안쪽에서 허벅지를 타고 무언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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