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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화 #1-1. 전생.


고블린. 판타지 세계의 유서 깊은 악당 몬스터인 이들에겐 대개 제대로 된 이름이 없었다. '고블린 하나가 죽으면 다른 둘이 어딘가에서 태어난다'는 말처럼 무지막지한 생식력을 가진 대신, 동족에 대한 유대감이 지극히 희박했기 때문이다. 출산을 마친 어미 고블린이 갓 태어난 자식이 죽든 말든 신경 쓰지 않고 그냥 가버리는 정도는 보편적으로 벌어지는 일이었고, 당연히 이름을 지어주는 일 따위는 없었다. 그렇게 남겨진 새끼 고블린들은 생존의 첫번째 과정으로 '자신과 같은 처지에 놓인' 근처의 동족을 잡아먹기 시작해야 했고 말이다. -! 당신은 운명의 갈림길에 섰습니다. -21세기 지구인의 영혼을 가진 채 고블린으로 환생한 당신, 이제 겨우 그 사실을 깨달은 당신에게 신들은 두 가지 제안을 내밉니다. -1. 고블린으로서의 운명을 받아들인다. '평범한' 고블린들처럼 눈앞의 동족을 살해해 먹어치운다. -2. 아니다. 육체는 고블린일지언정 나는 여전히 본능보다 이성을 추구하는 인간이다. 동족 포식 외의 다른 방법을 찾아본다. -당신이 무엇을 선택하느냐에 따라 앞으로의 운명이 바뀝니다. 신중하게 선택하십시오. 이때, 방금 어미의 몸속에서 빠져나온 새끼 고블린에게는 좀 더 특별한 선택지가 주어졌다. 그는 환생이라는 특별한 과정을 거친 영혼이기에, 어쩌면 고블린이라는 '종의 한계'를 뛰어넘을 수도 있는 가능성을 부여받은 것이다. 그렇게 선택지를 내민 신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느릿하게 시선을 옮기던 새끼 고블린은 마침내 손을 들어 한 지점을 짚는다. 그의 손가락이 가리킨 곳은 많은 신들의 예상을 깨고 1번 선택지였다. -선택이 완료되었습니다. -[운명 : 고블린] 카드가 부여됩니다. -이제부터 당신은 고블린의 행동 양식에 맞는 선택을 할 때마다 추가 경험치를 얻습니다. 여기서 '행동 양식'이란 현실에 반영되는 모든 능동적 상호작용을 뜻합니다. -반대로 행동 양식을 어긴다면 거부 패널티가 주어집니다. 패널티의 종류로는 주변인의 의견 감소, 부정적인 미래 가능성 증가, 제한적인 능력치 감소 등이 있습니다. 운명 카드가 뜻하는 바는 단적으로 말해서 '고블린처럼 살지 않으면 가만 두지 않겠다'라는 뜻이다. 이를 본 신들은 어리석은 선택을 한 새끼 고블린을 비웃었고 빠르게 관심을 거두었다. -인간의 영혼이 고블린처럼 살아가려 한들 그게 얼마나 유지될는지. 비관적인 이들은 어린 고블린이 하루도 버티지 못할 것이라 이야기했고, 그나마 낙관적인 이들 역시 한 달 이상은 예측하지 않았다. 그의 생존 기간을 가장 길게 잡은 이는 한 달 하고 하루였다. -신들의 흥미가 빠르게 식습니다. -현재 당신에게 관심을 갖고 있는 신 : 1 -고블린들의 주신 하타마다카가 당신에게 이름을 부여했습니다. 당신의 이름은 '위그'입니다. -하타마다카의 관심이 떠났습니다. -현재 당신에게 관심을 갖고 있는 신 : 0 새끼 고블린, 위그는 하늘을 한 번 바라보고는 다시 움직였다. 형제 하나를 넘어뜨리고 목덜미를 물어뜯고 있는 또 다른 형제를 향해서였다. * -당신의 이름은 위그입니다. 나는 상태창이 눈앞에서 사라지는 즉시 몸을 튕겨 동굴 구석으로 달렸다. 보통 태생적으로 약하게 태어난 놈들은 몸을 숨길만한 징소를 찾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본능적으로 나 같은 판단을 한 녀석들이 있었는지 그곳도 마냥 편한 사냥터는 아니었지만, 나는 오히려 사냥에 성공해 배를 채우는 데 열중하느라 방심한 하나를 붙잡아 놈의 목에 매달렸다. 덩치가 나보다 크긴 했어도 갓 태어난 새끼인 건 변함없는지라 체중을 실어 숨통을 조이니 놈은 잠시 버둥거리다가도 금세 축 늘어지는 모습이었다. 콱! 쭈우욱! -업적 달성. '첫 살해', '동족 살해', '동족 포식'. -경험치 280(+140) 획득. 무력화된 사냥감의 목덜미에 이빨을 박고 놈의 체액을 빨아들이자 단숨에 420에 달하는 경험치가 손에 들어온다. 이 경험치는 종합 레벨을 올려 능력치 전반을 강화하는 데에 쓰일 수도 있지만, 보유한 특기나 특성의 레벨을 올리는 데 쓸 수도 있다. 아, 방금 환생한 내가 그걸 어떻게 아느냐고? 그야 나는 전생에도 이런 '시스템'을 갖고 있었으니까. 학대받던 천애고아에서 전장에서 수십 명을 살해한 베테랑 용병이 되기까지, 나는 여러모로 시스템을 잘 써먹었고 이해했다. 그렇게 너무 시스템만 믿고 방심했다가 죽긴 했지만 말이다. '20등급의 [신체 강화]면 절대 안 죽을 줄 알았는데, 설마 핵 미사일이 날아올 줄이야.' 뭐, 설사 살았다고 해도 좋은 꼴은 못 봤을 것이다. 방사능 피폭은 둘째치고 공군 기지 중 하나에서 대기하고 있던 용병인 내가 핵 미사일을 맞았다는 건 상대가 한 발만 쏘진 않았다는 소리니까. '그 시점에서 핵전쟁이 벌어질 것은 기정사실이니, 최종적으로 누가 이기든 지구는 완전히 박살이 났겠지. 오히려 그 꼬라질 안 보고 죽은 게 호상일 수도 있어.' 나는 그런 시답잖은 생각을 하며 계속해서 동족의 숫자를 줄여나갔다. 배는 이미 채울 대로 채웠지만, 사냥 활동을 멈추지 않는 건 단순히 특성을 얻기 위해서였다. -업적 달성. '동족 살해 10회'. -경험치 200(+100) 획득. -[동족 사냥꾼] 특성 획득. -동족 상대 위협도 +5 원하는 특성을 얻은 뒤에는 바로 쌓아놓은 경험치를 모조리 그쪽에 투자한다. -[동족 사냥꾼]의 등급이 6으로 상승. -동족 상대 위협도 +10 '위협도'는 높을수록 상대가 내 앞에서 자연스럽게 위축되고, 허점을 드러내게 된다. 생존 경쟁자들이 주변에 득시글거리는 이 환경에서는 반드시 확보해야 하는 요소인 것이다. 그래야 놈들이 쉽게 덤벼들 생각을 못 할 테고, 설사 덤비더라도 대처가 어렵지 않을 테니까. '물론 위협도만으로 모든 상황을 해결할 수는 없으니 생존에 필요한 다른 수단도 마련해야겠지.' 가장 먼저 갖춰야 할 것은 역시 '무력'이다. 어미가 아이를 가차없이 버리는 환경에서 자라난 놈들의 성정이 어떨지는 뻔하니까. '약하면 버려지고 잡아먹힌다··· 직관적이라 마음에 드네.' 동족 살해를 멈췄음에도 내가 있는 곳으로 다가오지 못하고 피해가는 어린 개체들을 보며 나는 눈을 감았다. 앞으로를 위해 준비해둘 거리는 많지만, 지금 당장은 충분한 휴식을 취하기 위함이었다. '자고로 어린이는 잘 먹고 잘 자야지.' 어린 동족들의 싸움은 밤새 내내 이어졌다. 하룻밤 사이에 이백이 넘어가던 어린 개체들의 숫자는 십분지 일 이하로 내려갔고, 내가 잠에서 깨었을 때는 그마저도 다시 절반으로 줄어있었다. 상황을 살펴보니 서로 더 죽인 건 아니고 상대적으로 힘이 약하거나 부상을 입은 놈들이 동굴 밖으로 향한 것이었다. 생존한 개체들은 슬슬 무리를 이루고 있었고, 그중에는 벌써부터 대장 노릇을 하려는 놈도 보였다. 또래보다 머리 하나는 더 큰 개체. 물론 그래봐야 태어난지 하루된, 변변찮은 전투 기술도 없는 녀석이니 쉽게 잡아 죽일 수 있겠으나 굳이 그렇게 하지는 않는다. 어차피 곧 저 밖에 있는 '먼저 태어나 성장 중이던 개체'들이 몰려들면 이곳에 있는 대부분은 그리 오래 살지는 못할 테니까. 키륵! ···그리고 마침내 피냄새를 맡은 형과 누나들이 몰려든다. 키야악-! 먹이 혹은 노예를 잡기 위하여. 자신들이 앞서 당했던 것처럼 똑같이. * -업적 달성. '출생 후 24시간 동안 생존'. -경험치 100(+50) 획득. -'생존 감각' 특성 획득. 시야가 붉게 물든다. 새로 얻은 특성, '생존 감각'이 보내는 경고다. 붉은색이 진해질수록 생존 가능성이 낮다는 뜻이며 활로 역시 그리 많지 않다는 것. 그러나 지금은 색이 옅었고, 피부에 와 닿는 위협의 수준도 그리 높지 않다. 또래들은 그 정도만 해도 학살에 가깝게 죽어나가고 있지만 말이다. '덩치 차이는 크지 않아. 그런 데도 저렇게 밀리는 이유는 환경 때문이다.' 지금 당하고 있는 어린 개체들은 조금 전까지만 해도 '승리자'였다. 동족을 잡아먹으며 작은 우월감에 도취되었고, 그렇기에 자신들이 곧바로 '사냥감'이 되리라고는 상상하지 못한 것이다. 미리 알았다면 근처에 널려있는 도구를 이용해 방어할 생각 정도는 했을 테지. 빡-! 부러진 종유석을 휘둘러 근처에서 얼쩡거리는 상대를 힘껏 후려치자 대번에 핏방울이 치솟았다. 아직은 살가죽을 찢어놓을 정도로 힘이 세지 않아 상대적으로 약한 부위인 입과 이빨들을 노린 결과였다. 키헥! 입가를 감싸쥐고 웅크린 놈의 뒤통수에 마무리 일격을 날려주자 그제야 바들거리던 몸뚱이가 축 늘어진다. 코앞까지 와서 공격하지 않은 것도 그렇고, 아마 미리 겁을 먹은 상태였던 거겠지. 그 증거로 쓰러진 놈의 사타구니 사이에서는 짓누런 무언가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정신을 잃기 직전에 용변이라도 지린 듯했다. '위협도 10에 이 정도면.' 코를 찌르는 그 고약한 냄새를 맡으며. 나는 짧게 입맛을 다셨다. '···성체들도 조만간이겠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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