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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화 뫼비우스의 띠 30.


뫼비우스의 띠 30. 시혁의 바람과는 다르게 하루하루 심각해져 가는 은우 엄마의 상태는 걱정스러웠지만 그 와중에 존스홉킨스대학에서 새롭게 개발 중인 치료법을 적용해 보기로 해 희망을 놓지 않고 있었다. 마치 진짜 가족이라도 된 것처럼 함께 웃고, 아파하고, 슬퍼하며 자신 안에 숨어있던 다양한 감정들을 경험하며 매일매일 신기한 나날을 보내던 중, 여느 날과 다름 없이 은우에게 책을 읽어주고 있을 때 양실장이 나타나 아버지 출장에 동행해야 한다는 이야기를 전해왔다. 그것도 당장 다음 날 출발이라는 양실장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시혁이 차가운 표정으로 말했다. “됐어. 안 가.” 중동 부호의 결혼식에 참석했다 간 김에 해외 지사들도 둘러보고 온다는 아버지의 일주일짜리 일정. 물론 6개월 전부터 정해져 있었던 일인 건 익히 알고 있었다. 그땐 별 생각 없이 알겠다고 했었지만 지금은 상황이 달랐다. 은우 엄마의 치료도 그렇고 은우도 아직 밤에 편히 잠들지 못하는데 일주일이나 두고 간다는 게 도무지 내키지 않았기에 거절했다. “하지만 도련님. 회장님께서 무조건 동행하셔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됐다니까.” “형아, 어디... 가요?” 옆에서 둘의 대화를 듣고 있던 은우가 금방이라도 눈물이 떨어질 것 같은 얼굴로 시혁을 바라보았다. “형 어디 안 갈 거야. 걱정하지 마.” 시혁의 목소리에 그제야 안심한 듯한 표정의 은우에게 다정하게 웃어 보인 뒤 양실장에게 그만 나가라고 눈짓을 했다. 1초 사이 표정 변화가 어찌나 극심한지 양실장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자리를 피했다. 밤중에 또 발작을 일으킨 은우를 겨우 달래 잠드는 걸 확인하고 잠깐 눈을 붙이려고 할 때 아버지에게서 전화가 걸려 왔다. 거두절미하고 네가 멋대로 행동하면 본인도 약속했던 치료며, 지원이며 모조리 끝내겠다는 아버지에게 반항해 보았지만 끝끝내 아버지를 설득하지 못했다. 전화를 끊고 나서도 한참이나 분이 풀리지 않았지만 은우 엄마의 치료를 위해선 아버지의 힘이 꼭 필요하다는 걸 직시하고 일단 아버지 뜻을 따르기로 했다. “망할...” 겨우 잠든 은우를 깨우고 싶지 않았기에 잠에서 깼을 때 자신이 없다는 걸 알고서도 놀라지 않게 메모를 남겨두고, 조용히 병실을 나서는 그 순간까지 맹세코 그게 은우의 마지막 모습일 거라곤 생각하지 못했다. *** “사장님.” “...” “사장님?” “...!” 양실장의 목소리가 순식간에 시혁을 현실로 데려왔다. 어느새 익숙한 공간에 도착해 있는 걸 확인한 시혁이 차에서 내려 걸음을 옮기며 양실장에게 물었다. “정용찬, 그 새끼는?” “두 달 뒤 출소입니다.” 어느새 그림자처럼 다가온 양실장이 시혁의 옆에서 나란히 걸으며 질문에 답했다. “두 달... 두 달이라...” 은우를 그렇게 만든 그 새끼. 그 새끼만은 내가... 이를 악문 채 시혁이 말을 이었다. “그때 알아보라고 한 건, 언제까지 기다려야 하지?” “소실되었다는 병원 기록은 못 찾았지만, 거기서 십 년 넘게 근무했다고 하는 간호사를 한 명 찾았습니다.” “간호사?” “네, 내일 오후에 만나보기로 했으니 만나고 와서 자세히 말씀드리겠습니다.” “내일 오후라... 나도 같이 가지.” “네? 사장님이 직접 말입니까?” “뭐, 문제 있나?” “아... 아닙니다.” 몇 번을 생각해도 이시온에 대한 이 마음을 확실히 인정하기 위해서는 그가 감춘 속내를 확실히 알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양실장의 일 처리를 믿지 못하는 건 아니지만, 이시온에 관한 한 그게 뭐든 직접 확인하고 싶었다. 시혁의 속내를 모르는 양실장이 뭔가 결심한 듯 어렵게 입을 열었다. “사장님.” “...?” “하나만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말해.” “희망의 집에서 대체 뭘 보셨던 겁니까.” 뜬금 없었지만, 그때와 너무 닮은 제 주인의 상태를 염려한 양실장이 고민 끝에 내뱉은 질문에 시혁이 걸음을 멈춰섰다. “뭐...?” “외람되지만 지금 사장님께선 이비서를 통해 은우 그 아이를 찾고 계시는 것 같아 보입니다.” “...” 은우의 이름이 나오자 시혁의 얼굴이 차갑게 굳었지만 굴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지난 며칠간 한 번은 꼭 짚고 넘어가야겠다고 몇 번이나 생각해 왔었기에 내뱉는 목소리에 망설임이 없었다. “듣기 불편하시겠지만 은우 그 아이는 이미 오래 전에... 죽었습니다. 그런데 왜...” “그만. 거기까지만 하지.” 시혁이 얼음장 같은 눈빛으로 양실장의 말을 잘랐다. 은우를 떠올리는 것만으로 괴로운데, 구태여 더 이야기하고 싶지 않았다. 게다가 양실장 말처럼 희망의 집에서 이시온을 마주친 그 순간부터 스스로도 이해할 수 없지만 이시온을 통해 어른이 된 은우의 모습을 찾았던 게 사실이었던 터라 양실장의 말에 반박을 할 수 없었다. “...주제 넘었다면 죄송합니다.” “됐으니까 가서 고윤하 뒤나 더 파봐.” “이미 충분하지 않습니까...?” “가진 패는 많으면 많을수록 좋으니까.” “...네, 알겠습니다.” 양실장이 사라지고 난 뒤 잠시 걸음을 멈춰서 생각을 정리했다. 오랫동안 자신을 최측근에서 지켜본 이의 물음이 지난 며칠간 스스로에게 수도 없이 던졌던 질문이었기에. 수없이 생각해도 애초에 이비서가 은우를 떠올리게 해서 자꾸만 눈길이 갔던 건지, 아니면 단지 우연히 이비서가 은우와 비슷할 뿐인 건 지 결론을 내리지 못했다. 한 가지 확실한 건 이시온이 울지 않았으면 했고, 기왕이면 자신 앞에서 계속 웃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는 사실 뿐이었다. 은우를 그렇게 보내고 자신이 웃는 게, 더 나아가 누군가가 웃길 바란 적이 처음이라 낯설었지만 이런 저런 생각을 정리하며 자신의 이런 변화도 받아들이려던 참이었다. 시온을 보기만 해도 거짓말처럼 웃음이 나는 게 사실이었으니까. 아니, 당황스럽게도 이시온을 떠올리는 순간 이미 자신도 모르게 웃고 있었다. 유리에 비친 자신의 웃는 모습을 확인한 시혁이 헛기침을 하며 걸음을 재촉했다. *** “안녕하십니까.” 우소라와 주하늘의 밝은 인사에 눈으로 대답을 해 주었으나 정작 시혁이 기대했던 얼굴의 주인은 자리에 없었다. 옆자리의 김원형의 모습도 보이지 않아 시혁의 미간이 구겨지려던 찰나 탕비실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 아파요, 김비서님...” “거참. 쫌 만 참아요. 다 끝나가니까. 자, 됐어요. 끝!” 목소리를 따라 자신도 모르게 탕비실로 걸음을 향했다. “이 정도는 진짜 괜찮은데... 그래도 고마워요.” “그러게 누가 그런 걸 맨손으로 잡아요! 하여튼 이비서님, 손이 많이 가는 사람이라니까.” “하하... 죄송해요...” “어! 사장님! 안녕하십니까.” 탕비실 안에서 등을 돌리고 선 시온과 마주 보고 있던 김원형이 먼저 시혁을 발견하고 인사를 했다. 그 목소리에 놀란 시온도 뒤를 돌아 시혁의 존재를 인지한 뒤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그제야 바닥에 깨진 머그잔 조각들과 액체까지 시혁의 눈에 들어왔다. 시온의 손가락에 붙어있는 살색 밴드까지 확인한 시혁의 미간이 사정없이 구겨졌다. “다쳤습니까?” “아, 아뇨. 괜찮습니다.” “아니 손가락이 이만큼 베였는데 괜찮긴 뭐가 괜찮아요.” 시온이 황급히 손을 뒤로 숨기며 대답하자 김원형이 다시 인상을 찌푸리며 손을 뻗어 시온의 손목을 잡으려고 했으나 다가온 시혁이 더 빨랐다. 시온의 손목을 낚아채 탕비실을 나서며 당황한 김원형에게 말했다. “이비서는 나랑 볼일이 있으니 신경 쓰지 말고 시간 되면 퇴근하세요.” “...네, 사장님.” 벙찐 김원형과, 놀라서 시선을 주고받는 우소라와 주하늘까지 뒤로 한 채 시혁은 황망한 표정의 시온을 이끌고 사장실로 향했다. “사장...ㄴ...!” 사장실 문이 채 닫히기도 전에 시온의 얼굴을 감싸 안은 시혁이 그대로 시온의 입술을 삼켰다. 당황한 시온이 버둥거렸지만 입술을 맞댄 채 벽으로 밀어붙이는 시혁의 힘을 당해낼 수 없었다. 쿵 소리를 내며 시온의 등이 벽에 부딪혔고 시혁은 그런 시온을 제 품 안에 완전히 가둔 채 쉬지 않고 시온의 입 안을 탐했다. “읍...!” 단단한 그의 품에서 벗어나려 있는 힘껏 발버둥 쳤지만 등 뒤며 앞이며 모두 벽으로 가로막힌 듯 조금도 벗어날 수 없었다. 얼얼하게 혀가 빨리는 와중에도 시온의 머리 속에선 조금 전까지의 상황이 재생되고 있었다. -사장님 말이에요. 고윤하씨 만나러 가느라 오전에 자리 비우셨던 거래요. 쏟아지는 잠을 쫓기 위해 인스턴트 커피를 한 봉지 타서 물을 붓고 있을 때 들려온 김원형의 목소리에 시온의 움직임이 그대로 멈춰버렸다. -그것도 호텔에서요. 대박이죠? 호텔이란 말을 할 때는 목소리를 낮췄지만 시온에게는 김원형이 내뱉는 단어 하나하나가 박히듯 귓가를 파고들고 있었다. 하하. 시온의 입에서 자조적인 웃음이 새어 나왔다. 별장에서의 시간이 정말로 꿈이었나 의심이 될 정도로 되돌아온 현실은 여전히 자신에게 가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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