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1화 "700년 지난 빙의"
처절한 혈투를 증명하듯 바위 곳곳에는 칼날이 할퀴고 지나간 섬뜩한 흔적이 가득한 절벽 아래 숨이 끊어질 듯한 거친 숨소리가 메아리처럼 되돌아온다.
넝마처럼 찢어진 도포 아래 드러난 육신은 이미 수많은 칼날에 난도질당해 형체를 알아보기도 힘겨운 모습으로 한 남자가 서 있다.
“크으윽.. 이.. 이놈들.. 정파라 자처하는 네놈들의 꼴이 우습다.”
끊어질 듯 이어지는 신음과 함께 겨우 한 마디를 뱉는다.
금방이라도 산산이 부서져 무너져 내릴 듯한 육체로 버티고 서 있는 남자.
무림 역사에 다시 없을 악명을 새긴 희대의 광이자 혈마교의 일대 종사 ‘혈마’ 태운학이었다.
그는 마지막을 받아들이는지 형형한 광기가 서린 붉은 눈으로 허공을 바라본다.
그의 주위에는 마지막까지 혈투를 벌였던 무림의 절대 고수들의 싸늘한 시신이 즐비하게 널려 있었다.
그 하나하나가 백 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한 절정의 고수들이었지만 굶주린 맹수처럼 날뛰는 혈마의 검 앞에서는 그저 스러지는 낙엽과 같았다.
그러나 무림 전체를 상대하기는 역부족.
수많은 영웅호걸을 베어 넘겼던 그의 칼날은 부러져 날이 나갔고 온몸의 기혈은 내상으로 뒤틀려 죽음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의 핏발선 붉은 눈은 자신을 향해 검을 겨누고 있는 무림인들을 향해 저주를 쏘아 보내고 있었다.
그리고 최후의 힘을 쥐어짜듯 태운학의 몸 안에서 격렬하게 요동치는 검은 기운이 들끓었다.
“환혼전생(幻魂轉生) 혈육의 끈을 따라...”
낮게 읊조리는 그의 목소리는 말라비틀어져 갈라져 있었다.
그 안에는 필멸의 순간에도 사그라지지 않는 강렬한 의지가 담겨 있었다.
온몸의 핏줄이 터지고 심장이 녹아내리며 검은 기운과 함께 그의 육신이 서서히 붕괴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쿠우우. 콰아앙.
처절한 파열음과 함께 혈마 태운학은 그렇게 무림에서 영원히 사라지는 듯했다.
****
“야 현수야 저새끼 죽은 거 아냐? 안 움직이는데?”
일진 무리하나가 쓰러진 학생을 가리키며 말했다.
“그거 좀 맞았다고 안 죽어. 원래 저 새끼 비리비리하잖아. 괜찮아.”
현수라 불린 일진은 패거리를 데리고 현장을 빠져나가려 한다.
“아니.. 그래도 이번에는 좀 위험해 보이는데. 119라도 불러주고 가야 하는 거 아냐?”
퍼억.
현수가 119를 부르려 폰을 꺼내는 창현의 배에 주먹을 꽂아 넣는다.
“미쳤어? 우리가 그랬다고 자수하려고? 이거 완전 또라이 아냐?”
현수는 창현의 목덜미를 잡아 일으켜 세우고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어두운 골목을 빠져나가려 한다.
배현수와 윤창현 그리고 박성배 일진 패거리는 평소 괴롭히던 같은 반 학생 태성우를 집단 구타하고 정신을 잃자. 버려두고 간다.
그때 꿈틀대며 움직이는 태성우를 발견한 박성배.
“어? 현수야 쟤 움직인다.”
“거봐. 저 정도로 안 죽는다고 했잖아.”
창현과 성배의 어깨에 팔을 올려 양쪽에 끼고 골목을 나서는 현수.
“크으윽...혈혼전생이 성공한 건가? 으윽...근데 이 고통은 또 뭐지?”
유성우가 몸을 일으키며 중얼거렸고 현수 일당이 뒤돌아본다.
[[ 이 비릿한 피 맛 나는 고통 낯익다. ]]
혈마 태운학.
그가 정신을 잃고 쓰러졌던 태성우의 몸에 전생 술을 시전했던 태운학이 빙의했다.
“끄으윽...이..이건 또 뭐야? 이 육신의 기억인가? 끄윽..”
태성우의 지금까지 삶이 빙의한 혈마에게 전해졌고 순식간에 방대한 양의 정보가 유입 되면서 머리가 터질 듯한 고통이 밀려왔다.
그리고 잠시 후 기억 전이가 완료되고 정신이 돌아온 혈마.
스무 살의 태성우.
워낙 약골이고 병약해 반년씩 쉬기를 반복하다 보니 복학생 아닌 복학생이 돼 있었다.
나이만 스무 살이지 웬만한 중학생에게도 맞고 다닐 만큼 허약한 체질이었다.
그런 태성우의 몸에 혈마의 영혼이 깃들면서 변화가 찾아온다.
흐릿했던 그의 눈동자에 섬뜩한 광채가 어리는 순간. 혈마는 비릿한 미소를 짓는다.
“설마 했는데 진짜 성공했군. 크크크. 크하하하. 기다려라 무림맹 피의 복수가...”
혈마는 육체의 주인인 성우의 기억에서 무림맹은 이미 사라졌고 내공과 무공이라는 개념 역시 사라졌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2024년? 원이 멸망하고 명이 세워진 지 벌써 700년이 흘렀단 말인가? 전생 술이 실패 한 건가?”
혈마는 자신이 뿌려 놓은 수많은 씨 중 한 명으로 전생하려 했다.
환혼전생(幻魂轉生) 자신의 피를 이은 후손에게 영혼을 깃들게 하여 전생하는 금기 술.
“내가 전생했다는 건 내 핏줄이라는 건데. 왜 대륙이 아닌 이 먼 동방의 횃불에서 살고 있는 건가?”
혈마는 다시 그 자리에 주저앉아 성우의 기억을 찬찬히 뒤진다.
그리고 조금 전 상황까지 완벽하게 이해한 혈마.
“나 천존 태운학의 후손이 이런 꼴로 살다니... 내게 육체를 내어준 보답은 해야겠지.”
엉덩이를 털고 자리에서 일어난 혈마는 골목을 빠져나와 번화가로 향했다.
그리고 몇 걸음 옮기지도 못하고 그 자리에 얼어붙어 버리고 만다.
‘도원향’
눈앞에 펼쳐진 세상은 무림에서 환상이라 불리던 도원향과 일치했다.
어두운 밤을 밝히는 눈부시고 아름다운 형형색색의 불빛.
하늘을 뚫을 듯이 솟아 있는 마천루.
거기에 배를 내놓고 풍만한 가슴을 겨우 가린 채 엉덩이가 보일 거 같은 짧은 치마와 바지인지 천인지 모를 하의를 입은 길쭉길쭉하고 늘씬한 여자들.
성우의 기억으로 옷이라는 개념은 알지만 무림의 기억을 고스란히 가져온 혈마의 눈에는 그저 신비롭기 그지없었다.
그 자리에 멈춰서서 멍하니 지나다니는 가슴을 쫓아 시선을 옮기기에 바빴다.
“이..이 무슨 불경한 복장인가? 어허...”
말과 다르게 혈마의 눈은 여자들의 엉덩이를 훔쳐보며 고개를 빼 들고 가슴골을 들여다보기 위해 기웃거린다.
그가 살았던 중원 대륙 그 어디에도 볼 수 없었던 아름다운 광경이었고 장관이었다.
웃음 가득한 여자들의 치아는 하얗고 피부 또한 백옥과 같았다.
무림에서 본 여자들은 누런 이와 거칠고 까맣게 타버린 말라비틀어진 여자들이 다였고.
그나마 기녀나 궁녀쯤 돼야 여자 냄새를 맡을 수 있었다.
“설마 내가 그놈들에게 죽어. 지옥에 떨어졌단 말인가? 어찌 저리 상스러운 모습을 하고 있단 말이야.”
가슴골이 거의 반이나 드러난 옷을 입고 혈마의 근처에 서서 누군가를 기다리는 듯한 여자 한 명이 더운지 손부채질한다.
출렁이며 흔들리는 가슴에 시선이 꽂히는 혈마.
“어머. 학생 왜 그래? 뭘 그렇게 뚫어지게 보는 거야?”
변태 고딩의 시선을 의식한 여자가 인상을 구기며 말했다.
그러나 그의 귀에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고 황홀경에 빠져들고 있었다.
가까이 다가와 초점이 풀린 혈마의 눈앞에서 손을 흔들며 의식이 있는지 확인하는 그녀의 가슴은 더욱더 출렁이며 자극한다.
“크으읍. 읍.”
갑자기 목에서 컥 하고 무언가 올라오는 느낌이 들었다.
코끝이 시큰거리고 머리가 띵하더니 뇌수가 코로 쏟아지는 듯한 기분이었다.
뜨끈한 액체가 콧구멍을 타고 흘러내렸다.
손으로 닦아내자, 피가 흥건하게 묻어 있다.
“이...이런 이런 하찮은 몸뚱아리가.”
그는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이런 천박한 광경에 반응하는 것에 대해 격렬한 거부감을 느꼈다.
허나, 동시에 의식 깊은 곳에서 느껴지는 묘한 끌림이 그의 호기심을 자극했다.
“이것이. 육체가 기억하는 그 ‘꼴림’이라는 건가? 흥미롭군...”
경악과 당황은 순식간에 이해하기 힘든 흥미로 바뀌었다.
“어허. 내가 지금 이럴 때가 아니지. 어서 돌아가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
육체의 기억 속에 있는 집으로 향하는 혈마.
그런데 눈은 계속 여자들을 향해 빠르게 굴러다니고 있었다.
****
“여기가 돌아갈 때까지 지내야 하는 집이라는 곳인가?”
높은 벽으로 가로막힌 저택 앞에 서서 바라보고 서 있는 혈마의 혼잣말.
성우의 기억을 따라 벨을 누르고 도우미 아주머니가 열어주는 문을 열고 집 안으로 들어섰다.
“성우 학생 저녁은 먹었어? 아이고 이게 무슨 일이야? 얼굴이 왜 이래? 누구랑 싸웠어?”
만싱창이가 된 얼굴을 본 도우미 아주머니가 걱정가득한 표정으로 물었다.
[[ 뭐..뭐야? 모친도 아닌데 이렇게 다정하게 대하는 건가? 도우미? 하인 같은 건가? ]]
무림의 공적으로 살았던 태운학은 다정한 말투와 걱정 가득한 눈빛이 어색했다.
고개만 숙인 채 가볍게 인사하고 방으로 향하는 혈마.
“성우 학생 저녁 차릴까? 아니면 방으로 가져다줘?”
아주머니의 물음에 손을 흔들어 거절한 혈마는 급하게 방문을 닫는다.
“돌아가는 방법을 찾을 때까지는 이 육체의 주인 행세할 수밖에 없지. 일단은 내공 심법을 운용해야 한다.”
혈마는 침대에 앉아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이 몸은 아직 동정을 간직하고 있어 동자공을 사용할 수 있고 혈교의 마공과 번갈아 운용할 수 있다.”
눈을 감은 혈마는 성우의 육체를 천천히 살펴본다.
“허어... 이럴수가. 이러니 육체가 이리 연약할 수밖에 없었지. 무공이 사라진 세상에서는 빛을 볼 수 없는 공령지체(空靈之體)가 아닌가.”
공령지체란 내공이 있으나 없으나 자연의 기운과 동화되며 기감이 뛰어나고 영적 능력마저 탁월한 체질을 말한다.
내공 심법을 통해 내공을 쌓을 수도, 자연의 힘을 빌려 쓸 수도 있는 그야말로 무공에 있어 만능인 신체.
“무공을 연마하기에 늦은 나이긴 하나 동자공과 운기조식(運氣調息)으로 기초를 다지고 공령무극심법(空靈無極心法)으로 내공을 대신한다.”
조용히 눈을 감고 육체의 혈과 혈관은 물론 기가 움직일 수 있는 길을 찾는 혈마.
그리고 텅비어 있는 단전에 조그마한 주머니를 만든다는 상상을 한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모를 만큼 집중하며 운기조식을 하던 몸에 식은땀이 비 오듯이 쏟아져 내렸고 시큼하고 비린내 같은 역한 냄새가 방 안에 퍼진다.
그리고 뜨거운 기운이 몸을 감싸더니 흐르던 땀이 수증기가 될 만큼 열기가 방을 뒤덮는다.
[[ 크으윽.. 체내의 독기가 빠져나간다. 이건 내가 상상했던 것보다 더 빠르지 않은가? ]]
그때.
쾅쾅쾅.
“얘 성우야. 이게 무슨 냄새니? 문은 왜 잠근 거야? 너 뭐 하니? 이 문 열어 봐.”
쾅쾅쾅.
방문을 두드리며 사람들의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 젠장. 집중해야 한다. 이제 시작인데...]]
문고리에 열쇠를 꽂아 돌리는 소리가 들렸고 문이 벌컥 열렸다.
놀란 혈마가 눈을 뜨는 동시에 그의 코에서 피가 쏟아져 내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