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평화주의자의 피곤한 사정(事情)
제2화. 평화주의자의 피곤한 사정(事情)
“망할! 망할! 망할 놈의 체질!”
천무진은 욕설을 쉼 없이 뱉으며 숲을 내달렸다.
알몸이었다.
아니, 정확히는 한 손에 허름한 옷가지를 움켜쥐고, 다른 한 손으로는 자신의 평화롭지 못한 물건을 가린 채 뛰었다.
“거기 서라, 이 변태 놈아!”
“연화를 겁탈하려 한 흉악범을 잡아라!”
뒤에서 성난 고함 소리가 쫓아왔다.
최소 대여섯은 되는 것 같았다.
멧돼지라도 잡을 기세로 숲을 샅샅이 뒤지는 소리가 들렸다.
“오해라고! 평화! 나는 평화주의자요!”
외침은 공허한 메아리가 되어 숲속에 흩어졌다.
그가 원한 건 그저 차가운 계곡물에 몸을 담그고 평화를 즐기는 것뿐이었다.
그런데 결과는 코피 흘리는 알몸 변태가 되어 마을 장정들에게 쫓기는 신세라니.
이건 평화롭지 못했다.
전혀.
‘사부님! 이게 다 사부님 탓이야!’
천무진은 또다시 스승을 욕했다.
쳐다만 봐도 터질 수 있다고 미리 경고해 줬어야 할 것 아닌가!
아니,
애초에 이런 빌어먹을 체질을 물려주지 말았어야 했다!
(스승이 물려준 건 아니지만, 일단 욕하고 본다.)
“헉, 헉, 헉...”
천무진은 거의 반 시진을 내달린 후에야, 간신히 추격자들의 소리를 따돌릴 수 있었다.
그는 거대한 바위 뒤에 웅크리고 앉아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온몸이 땀으로 범벅이었다.
다행히 아랫배의 불덩이는,
아까 그 처녀(연화라고 했다)에게 돌멩이로 맞고,
죽기 살기로 도망치는 과정에서 어느 정도 식어 있었다.
육체적 고통과 생명의 위협이 양기 폭주를 잠시 잊게 만든 모양이었다.
“...일단 입자.”
그는 주위를 살피며 허겁지겁 옷을 꿰어 입었다.
구겨지고 땀에 젖은 무명옷이 찝찝하게 살에 감겼지만,
알몸으로 숲을 헤매는 것보다는 백배 나았다.
적어도 평화에 한 걸음 다가선 기분이었다.
“젠장... 배고파.”
숨을 돌리고 나니, 허기가 미친 듯이 몰려왔다.
양기 폭주, 그리고 이어진 추격전은 그의 체력을 바닥까지 소모시켰다.
그는 비틀거리며 산을 내려왔다.
‘마을은 안 돼.’
방금 그 마을은 절대 피해야 했다.
그의 변태스러운 인상착의가 이미 널리 퍼졌을 터.
그는 산등성이를 하나 넘어, 해가 뉘엿뉘엿 질 무렵에야 겨우 다른 마을 어귀에 도착할 수 있었다.
다행히 여긴 그를 아는 사람이 없는 듯했다.
“...평화롭군.”
천무진은 주머니를 뒤졌다.
다행히 스승이 남긴 엽전 몇 닢이 들어있었다.
그는 주린 배를 움켜쥐고, 마을에서 가장 큰 객잔(客棧)으로 보이는 곳의 문을 열었다.
딸랑-
문 입구에 달린 풍경이 맑은 소리를 냈다.
“어어어어옵쇼! 총각, 혼자유?”
객잔 안은 저녁 식사 시간이라 그런지 시끌벅적했다.
그를 맞이한 것은, 땀으로 번들거리는 얼굴에 풍만한 가슴을 자랑하는 주모(酒母)였다.
그녀는 끈적한 눈웃음을 흘리며 천무진을 아래위로 훑어봤다.
“꼴이 말이 아니네. 어디서 굴러먹다 왔수? 산적이라도 만났... 어머.”
주모의 눈이 순간 커졌다.
비록 행색은 남루했지만, 천무진의 이목구비는 평화주의자라는 신조와는 어울리지 않게 제법 수려했다.
특히 천양신체의 영향으로, 그의 눈은 항상 미묘한 열기를 머금고 있어 어딘지 모르게 색기(色氣)가 흘렀다.
주모는 젖은 행주로 테이블을 닦는 척하며, 과장되게 상체를 숙였다.
그녀의 풍만한 가슴골이 땀과 함께 번들거렸다.
“아이고, 더워라. 총각, 일단 앉아유. 뭘로 줄까? 시원~한 막걸리 한 사발 먼저?”
“...!”
천무진은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
‘크다.’
...아니, 아니지.
‘평화! 평화!’
그는 속으로 청심공을 외웠다. 아까 계곡에서의 트라우마가 되살아났다.
‘쳐다보면 안 돼. 쳐다보면... 코피 난다.’
그는 필사적으로 주모의 가슴이 아닌 얼굴을 보려고 애썼다.
“...밥 주시오.”
“어머, 밥? 밥만?”
“국밥. 뜨끈한 걸로. 그리고 물. 찬물. 아주 차가운 걸로.”
“후후후. 총각, 젊은 사람이 왜 이렇게 불이 많아? 찬물부터 찾게.”
주모가 교태롭게 웃으며 그의 어깨를 툭 쳤다.
그 순간이었다.
화르륵-
가라앉았던 아랫배의 불씨가 다시 피어오르는 것이 느껴졌다.
주모의 손이 닿은 어깨가 불에 덴 것처럼 뜨거웠다.
“...!”
천무진은 의자에서 튕겨나가듯 뒤로 물러났다.
“왜, 왜 이러시오!”
“어머? 내가 뭐 어쨌다고?”
주모는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
‘망했다. 망했어.’
천무진은 절망했다.
이젠 쳐다보는 것을 넘어, 스치기만 해도 이 모양이다.
그의 천양신체는 계곡 변태 사건을 기점으로, 확실하게 한 단계 예민해진 것이 틀림없었다.
“...아니오. 그냥... 더워서. 밥이나 빨리 주시오.”
그는 구석진 자리에 처박히듯 앉았다.
“별꼴이야, 참. 젊은 총각이 숫기는.”
주모는 툴툴거리면서도 묘한 미소를 지으며 주방으로 향했다.
천무진은 탁자에 엎드려 머리를 감쌌다.
“평화... 평화롭고 싶다...”
그의 중얼거림은 객잔의 소음에 묻혔다.
잠시 후, 그가 주문한 국밥과 찬물이 나왔다.
“자, 여기. 뜨끈한 국밥이랑 시원~한 물. 많이 먹어, 총각.”
주모는 이번엔 노골적으로 엉덩이를 흔들며 돌아갔다.
천무진은 그녀의 뒷모습을 애써 외면했다.
그는 찬물을 벌컥벌컥 들이켰다.
차가운 물이 식도를 타고 내려가자, 아랫배의 열기가 조금은 가라앉는 듯했다.
“후우...”
그는 숟가락을 들었다.
국밥.
그가 가장 좋아하는, 가장 평화로운 음식이었다.
뜨끈한 국물에 밥을 말아 후루룩 넘기기만 하면 된다.
반찬도 필요 없다.
아무런 복잡한 과정이 필요 없는, 단순하고 완벽한 식사.
그가 막 숟가락을 뜨려던 참이었다.
“서방님~ 아~ 하세요.”
“허허. 우리 마누라가 최고지.”
바로 옆자리였다.
중년의 부부로 보이는 남녀가 앉아 있었다.
문제는, 그들이 밥을 따로 먹지 않고 있었다는 것이다.
아내가 숟가락에 반찬을 얹어 남편의 입에 넣어주고 있었다.
“어이구, 맛있다. 자, 우리 마누라도 아~”
“어머, 부끄럽게. 호호.”
그들은 서로 밥을 먹여주며,
뭐가 그리 좋은지 히히덕거렸다.
천무진의 숟가락이 허공에서 멈췄다.
‘...저게 뭐 하는 짓이지?’
그는 이해할 수 없었다.
밥은.
각자.
자기 손으로.
자기 입에.
넣는 것이 아닌가?
저건 너무나도 복잡하고, 피곤하며, 비효율적인 행위였다.
‘평화롭지 못해.’
천무진은 미간을 찌푸렸다.
스승이 말한 합체라는 것의 연장선상이 저런 것일까?
서로의 기분을 맞춰주고, 밥을 먹여주고, 쓸데없이 웃어주고.
그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흥. 사부님은 틀렸어.”
그는 똑같은 결론을 내렸다.
“여자 따위가 뭐가 필요해? 이렇게 뜨끈하고 맛있는 국밥만 있으면 되는데. 여자는 귀찮다고. 밥도 혼자 못 먹게 하고, 피곤해. 역시 평화가 최고야.”
그는 다시 국밥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숟가락을 입으로 가져가려던 바로 그 순간.
“...크헉!”
그의 몸이 경직됐다.
화르르르르-!
방금 전, 주모의 터치와는 비교도 안 되는 거대한 불길이 아랫배에서 치솟았다.
계곡에서 겪었던,
그 폭주 직전의 열기였다.
‘...아니, 왜?!’
천무진은 경악했다.
이번엔 보지도 않았다.
벗은 여자를 본 것도, 스킨십을 한 것도 아니다.
그저 밥을 먹여주는 모습을 봤을 뿐이다.
그런데 몸이 멋대로 반응했다.
‘망할 놈의 천양신체!’
그의 몸은, 스무 살 평화주의자의 철학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다
그의 몸은 본능에 충실했다.
암수가 정답게 교감하는 모습.
그것이 바로 음양의 조화의 시작임을,
그의 몸뚱이는 알고 있었던 것이다.
쿠콰콰콰-!
양기가 미친 듯이 날뛰기 시작했다.
“허억, 허억...”
숨이 가빠졌다.
눈앞이 다시 아찔해졌다.
국밥 그릇에서 올라오는 김이,
마치 아랫배에서 피어오르는 열기처럼 느껴졌다.
‘안 돼...! 이러다 또 코피...!’
그는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숟가락을 쥔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그가 그토록 원했던 평화로운 국밥이, 입으로 들어가지 않았다.
열기 때문에, 도저히 뜨거운 국물을 넘길 수가 없었다.
“...젠장.”
그는 숟가락을 내려놓았다.
배는 고파 죽겠는데, 밥을 먹을 수가 없었다.
이건 생존의 문제였다.
‘이대로는 안 돼. 이러다 굶어 죽거나, 터져 죽거나. 둘 중 하나야.’
그는 비틀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찬물 값으로 엽전 한 닢을 탁자에 던져두고, 그는 객잔을 나섰다.
“어머, 총각! 벌써 가? 국밥은 하나도 안 먹고?”
주모가 아쉽다는 듯 외쳤다.
천무진은 대답할 기력도 없었다.
그는 차가운 밤공기를 들이마시며 비틀거렸다.
열기는 가라앉지 않았다.
그때, 객잔 구석에서 떠들던 무림인들의 대화가 귀에 박혔다.
“들었나? 요즘 청성파(靑城派)의 제자들이 이 근처에 머물고 있다던데.” “청성파? 아, 그 정의롭기로 소문난 명문 정파?”
“그렇지. 특히 이번에 내려온 제자들 중에, ‘소선(素仙)’ 아가씨라고... 그 미모가 아주 절색이라더군.”
“흐음. 정파라... 놈들은 너무 딱딱해서 말이야.”
“쯧. 그래도 저잣거리 왈패들보단 낫지. 저놈들, 내일 마을 광장에서 시연을 보인다던데. 구경이나 가볼까?”
천무진은 그 대화를 들으며 걸음을 멈췄다.
‘정파(正派).’
스승이 그토록 피하라고 했던, 위선자 놈들.
“...흥.”
그는 콧방귀를 뀌었다. 정의니, 명문이니 하는 것들. 다 피곤한 짓이다.
천무진은 그들이 말한 마을 광장의 반대 방향으로 걸음을 옮겼다.
엮여서 좋을 것 하나 없었다.
그의 유일한 목표는, 이 망할 놈의 열기를 식히고,
평화롭게 국밥 한 그릇 먹는 것뿐이었다.
“젠장... 덥다. 더워...!”
하지만 그의 뜻과 달리,
아랫배의 불덩이는 점점 더 뜨거워지고 있었다.
그의 평화는, 시작부터 단단히 꼬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