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화 은밀한 계약
1. 방패막이
오후 2시, 본사 5층 대회의실.
팀 주간 전략 회의가 진행 중이었다. 창문이 닫힌 회의실 공기는 납덩이처럼 무거웠다.
빔 프로젝터 스크린에는 보윤이 작성한 엑셀 표가 띄워져 있었다.
하지만 그 표는 처참했다.
주요 지표 셀마다 빨간색으로 수정 사항들이 체크되어 있었고, 숫자의 단위조차 맞지 않았다.
명백한 보윤의 실수였다.
"성보윤 씨. 이거 지난주 지표랑 하나도 안 맞잖아. 매출액 단위가 '원'이 아니라 '천 원'이라니까? 입사한 지가 언젠데 아직도 이런 기초적인 실수를 해? 개념이 있는 거야, 없는 거야?"
발표를 맡은 김 대리가 짜증 섞인 목소리로 레이저 포인터를 흔들었다.
볼펜을 책상에 딱딱거리는 소리가 보윤의 심장을 쪼아댔다.
다른 팀원들도 한심하다는 듯 혀를 차거나,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들의 한숨 소리가 비난의 화살처럼 쏟아졌다.
보윤은 얼굴이 불타오르는 것만 같았다.
귀까지 새빨개져서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숨이 턱턱 막혀왔다.
"죄송합니다... 제가 검토를 제대로 못해서..."
"죄송하면 다야? 지금 이거 보고하려고 본부장님 오고 계시는데 어쩔 거야? 이거 다시 하려면 데이터 처음부터 다 뜯어고쳐야 하는데. 오늘 팀 전체 야근 확정이네? 성보윤 씨 때문에?"
김 대리의 날카로운 질타가 쏟아지던 그때였다.
"자자, 그만해. 김 대리, 너무 몰아세우지 마. 사람 민망하게."
테이블 상석에 앉아있던 박민석 차장이 손을 들어 제지했다.
여유롭고 부드러운 목소리였다.
"성 주임이 헷갈릴 만했어. 내가 어제 급하게 지시하느라 데이터를 섞어서 줬거든. 이거 내 책임도 있어. 내가 꼼꼼하게 못 챙겼네."
김 대리가 멈칫하며 박 차장을 바라보았다.
"아... 팀장님이 시키신 겁니까? 그럼..."
"그래. 내가 최종 컨펌했어. 그러니까 내 실수지. 수정은 내가 성 주임 데리고 같이 봐줄 테니까 넘어가자. 본부장님한테는 내가 잘 둘러댈게. 성 주임, 너무 기 죽지 마. 실수하면서 크는 거지."
박 차장은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보윤을 완벽하게 변호해 주었다.
김 대리는 찜찜한 표정이었지만, 팀장이 자기 책임이라는데 더 이상 할 말이 없었다.
입을 다물고 자리에 앉았다. 회의실의 살벌했던 분위기가 순식간에 풀렸다.
보윤은 책상 아래서 주먹을 꽉 쥐었다. 안도감과 함께 거대한 부채감이 쓰나미처럼 밀려왔다.
자신이 저지른 명백한 실수인데, 팀장님이 대신 뒤집어쓰셨다.
나 때문에 팀장님이 욕을 먹을 수도 있었다.
보윤은 이제 이분에게 빚을 졌다. 결코 가볍지 않은, 반드시 갚아야만 하는 빚을.
2. 빚의 무게
오후 4시.
회의가 끝나고 모두 자리로 돌아갔을 때, 보윤의 PC 하단에 사내 메신저 알림창이 떴다.
[박민석 차장]: 성 주임, 잠깐 탕비실로 올래? 커피 한잔하자.
보윤은 반사적으로 벌떡 일어났다.
그녀는 죄인의 심정으로 조심스럽게 탕비실로 향했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좁은 탕비실 안에 달달한 믹스커피 냄새가 가득했다.
박 차장이 종이컵 두 잔을 타놓고 테이블에 걸터앉아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보윤이 들어오자 문을 살짝 닫았다.
하지만 완전히 잠그지는 않고, 틈을 조금 남겨두었다.
그 애매한 개방성이 보윤을 안심시키면서도, 묘하게 긴장하게 만들었다.
"죄송합니다, 차장님... 저 때문에 곤란해지셔서... 정말 면목이 없습니다..."
보윤이 90도로 허리를 숙였다.
"아유, 괜찮아. 그럴 수 있지. 김 대리가 원래 좀 깐깐하잖아. 성격이 불같아서 그래. 많이 놀랐어? 얼굴이 하얗게 질렸네."
박 차장은 보윤에게 김이 모락모락 나는 종이컵을 건네주며, 자연스럽게 그녀의 팔뚝을 쓰다듬었다.
위에서 아래로, 아주 천천히. 그의 손바닥은 뜨겁고 축축했다.
얇은 여름용 블라우스 너머로 그 끈적한 열기가 고스란히 전해졌다.
"네... 감사합니다..."
보윤은 소름이 돋아 팔을 빼고 싶었지만, 방금 자신을 구해준 생명의 은인에게 그럴 수 없었다.
감히 뿌리칠 수 없었다.
"보윤 씨는 너무 착해서 탈이야. 그러니까 사람들이 만만하게 보고 더 쪼는 거야. 좀 더 당당하게 어깨 펴고 다녀. 네 뒤엔 내가 있잖아."
그의 손이 팔뚝을 타고 스르르 올라와 보윤의 어깨를 감싸 쥐었다.
그리고 엄지손가락으로 쇄골 아래, 브래지어 끈이 지나가는 윗가슴의 살을 꾹 눌렀다.
"으윽..."
"봐봐. 이렇게 긴장하고 다니니까 어깨가 돌덩이처럼 뭉치지. 쯧쯧. 좀 풀어야겠네."
그는 안마를 해주는 척하며 보윤의 어깨와 쇄골, 그리고 윗가슴 주변을 집요하게 주물렀다.
그의 손가락이 쇄골을 타고 내려올 때마다 심장이 쿵쿵 뛰었다.
불쾌했다.
명백히 불쾌했다.
하지만 보윤은 입술을 깨물고 가만히 있었다.
'이건 격려야. 나를 걱정해서 근육을 풀어주시는 거야. 이상하게 생각하는 내가 나쁜 년이야. 팀장님은 좋은 분이잖아.'
보윤은 스스로를 세뇌하며, 돌처럼 굳은 채 그의 손길을 견뎌냈다.
그것이 빚을 갚는 방식이라고 착각하면서.
3. 야근
그날 밤 9시. 다른 직원들은 모두 퇴근하고, 적막한 사무실에는 보윤과 박 팀장 둘만 남았다.
천장의 형광등은 절반만 켜져 있어 어둑했다.
보윤은 아까 지적받은 보고서를 수정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성 주임, 아직 안 갔어?"
팀장실 문이 열리고 박 차장이 나왔다.
그는 답답한 듯 넥타이를 풀고, 재킷을 벗어 셔츠 소매를 걷어붙인 상태였다.
"네, 이것만 마무리하고 가려고요. 거의 다 했습니다."
"고생이 많네. 저녁도 못 먹고 이게 무슨 고생이야. 미안해서 어쩌나."
박 팀장은 보윤의 자리 옆으로 바퀴 달린 의자를 끌고 와 앉았다.
드르륵.
의자가 부딪힐 만큼 너무 가까웠다.
그의 튼실한 허벅지가 보윤의 허벅지에 닿을 듯 말 듯 스쳤다.
그에게서 나는 독한 남자 스킨 냄새와 탕비실에서 피운 담배 냄새가 훅 끼쳐왔다.
"어디 봐. 잘하고 있나? 내가 좀 봐줄게."
그는 모니터를 보려는 척하며 상체를 보윤 쪽으로 깊숙이 기울였다. 보윤은 숨을 멈췄다.
그의 시선이 모니터 속 엑셀 파일이 아닌, 책상 위에 올려진 보윤의 가슴으로 향하는 게 노골적으로 느껴졌기 때문이다.
야근하느라 자세가 흐트러져, 타이트한 블라우스 단추 사이가 살짝 벌어져 있었다.
그 틈새로 하얀 속살이 보일락 말락 했다.
보윤은 본능적으로 팔짱을 껴서 가슴을 가리려 했다.
수치심이 올라왔다. 그러자 박 차장이 피식 웃으며 보윤의 팔을 툭 쳤다.
"아유, 답답하게 왜 가려? 사무실에 우리 둘뿐인데. 편하게 있어. 보윤 씨는 그게 매력인데 왜 자꾸 숨기려고 해?"
"네...?"
"솔직히 말해서, 우리 팀... 아니 우리 회사 여직원들 다 합쳐도 보윤 씨 몸매 따라올 사람이 없잖아. 남자 직원들이 뒤에서 다 보윤 씨 얘기만 하는 거 알아? 김 대리가 아까 짜증 낸 것도 다 질투라서 그래. 보윤 씨가 너무... 눈에 띄니까. 섹시해서."
섹시해서. 상사가 부하직원에게, 그것도 야근 중에 단둘이 있는 상황에서 할 말은 아니었다.
그의 눈빛은 끈적했다.
그는 보윤을 유능한 부하직원이 아니라, 먹음직스러운 암컷으로 보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선을 넘지는 않았다.
그저 말로, 끈적한 시선으로 보윤의 전신을 핥을 뿐이었다.
직접 만지지만 않았을 뿐, 이미 시선 강간이나 다름없었다.
"보윤 씨, 내가 보윤 씨 특별히 아끼는 거 알지? 내가 왜 아까 회의 때 쉴드 쳐줬겠어."
그의 손이 책상 아래, 보지 않는 사각지대로 내려와 보윤의 무릎 위에 올려졌다.
"네... 압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그래. 나만 믿어. 다른 놈들은 다 늑대야. 내가 회사 생활 편하게 할 수 있게 도와줄 테니까. 보윤 씨는 나한테만 잘하면 돼."
그는 보윤의 무릎을 한 번 꽉 쥐었다가 놓았다.
손가락이 허벅지 안쪽을 살짝 스쳤다.
그것은 무언의 계약이었다.
'너의 보호막이 되어주는 대신, 너의 무릎을, 너의 어깨를, 그리고 언젠가는 너의 모든 것을 내놓아라.'
4. 덫
밤 10시 30분.
드디어 수정이 끝났다.
보윤은 지친 몸을 일으켜 가방을 챙겼다.
박 차장도 기다렸다는 듯 같이 나갈 채비를 했다.
"수고했어. 가자."
엘리베이터 안.
단둘이 있는 밀폐된 공간.
윙- 하는 기계음 소리만 들렸다.
보윤은 벽 쪽으로 붙어 섰다.
박 차장의 거친 숨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1층 로비에 도착했을 때, 박 차장이 불쑥 제안했다.
"보윤아."
호칭이 바뀌었다. '성 주임'도, '보윤 씨'도 아닌, '보윤아'.
마치 아주 친밀한 오빠 동생 사이인 것처럼.
혹은 연인인 것처럼.
"네...?"
"오늘 진짜 고생했는데, 그냥 보내기 좀 마음이 그렇네. 오빠가 술 한잔 사줄게. 저녁도 못 먹었잖아. 맛있는 거 먹으면서 스트레스도 풀 겸. 어때?"
오빠.
직장 상사가 부하직원에게 해서는 안 될, 가장 위험하고 불쾌한 호칭.
보윤의 머릿속에서 빨간 경보음이 요란하게 울렸다.
'안 돼. 거절해. 피곤하다고, 집에 간다고 해. 이건 위험해.'
하지만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오늘 자신의 치명적인 실수를 덮어준 사람이다.
지금 거절하면 그는 "내가 그렇게 도와줬는데 무시하냐"며 화를 낼 것이다.
그러면 내일부터 다시 김 대리의 갈굼을 방어해 줄 유일한 방패가 사라진다.
보윤은 다시, 그 지옥 같은 고립된 섬으로 추방당하고 만다.
그리고 무엇보다, 보윤은 지금 너무 외로웠다.
해주에게 버림받고, 지은에게 배신당하고, 텅 빈 방에 혼자 들어가 소주를 마시는 그 처절한 고독이 끔찍했다.
누구라도 좋으니 붙잡고 술 한잔 마시고 싶은, 썩어 문드러진 마음이 이 위험한 제안을 뿌리치지 못하게 만들었다.
설령 그게 악마의 손길이라 할지라도.
"......네. 딱 한 잔만요."
박 차장의 입꼬리가 비릿하게 올라갔다.
승리자의 미소였다.
"그래, 잘 생각했어. 가자. 내가 아주 조용하고 분위기 좋은 데 알아. 우리 둘이 얘기하기 딱이야."
그는 자연스럽게 보윤의 허리에 손을 올렸다.
옷 위가 아니라, 블라우스가 살짝 들린 맨살에 닿는 느낌이었다.
보윤은 몸을 움츠렸지만, 그 손을 뿌리치지 않았다.
그의 손바닥 열기가 허리를 태울 듯이 뜨거웠지만, 동시에 그 온기가 사무치게 그리웠다.
두 사람은 어둠이 내려앉은 강남의 뒷골목을 나란히 걸었다.
마치 도살장에 제 발로 걸어 들어가는 눈 가린 짐승과, 그 짐승의 고삐를 단단히 쥔 주인처럼.
밤공기 사이로 위험한 짐승의 냄새가 진동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