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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9화 79화 식사만 시작하면 꼭 찾아오는 아스. 아니, 어쩌면 식당으로 찾아오면 내가 있는 걸까. 그런 합리적 의심이 들었다.


눈을 떴을 때, 가장 먼저 보인 건 낯선 천장이었다. 몸을 움찔거리자, 등 아래로 느껴지는 푹신한 감촉이 침대 위에 누워 있음을 알려줬다. 으윽. 미레가 의자에 기대어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고개가 살짝 기울어진 채 얕은 숨을 내뱉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러다 문득, 그녀의 손등에 새겨진 탐욕의 심볼이 희미하게 깜빡이는 게 보였다. 그러고 보니 미레는 어떤 능력을 얻었을까? 잠시 궁금함이 머리를 스쳤지만, 아직 멍한 상태라 생각이 더 이어지진 않았다. 그래. 아스테라의 즉위식이자 칠죄제국 개국식이었지. 갑자기 나타난 단검. 그것은 신성력을 가득 머금었고 반드시 누군가를 끝장내고야 말겠다는 의지가 실려있었다. 그 끝은 아스테라의 심장 깊숙이 자리 잡은 마정석을 정확하게 노리고 뻗어왔었지. 단검에서 뿜어져 나오는 기운이 공기를 찢으며 내 피부에 미세한 전율을 일으켰다. 나만이 그 위험을 감지할 수 있었다. 그리고… 본능적으로 아스를 밀쳐냈다. 손바닥이 그녀의 어깨를 강하게 누르는 순간, 시간이 느려진 듯했다. 방어막이 펼쳐지는 속도나 버프가 걸리는 속도보다도, 내가 밀치는 게 더 빠를 것이라고 본능적으로 생각했었다. 단검에 맞는 것까진 생각 못 했지만. 마지막 기억은 탐욕의 가상공간으로 넘어간 순간이었다. 그곳에서 탐욕이 눈물을 흘리며 나를 바라봤다. 그녀의 몸이 서서히 흩어지더니, 부서진 빛처럼 내 안으로 스며들었다. 그 찰나, 그녀의 눈물이 내 가슴에 닿는 듯한 차가운 감각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제길. 탐욕이. 심장 속에 자리 잡은 탐욕을 불러봤다. 평소처럼 대답 없는 건 여전했지만, 예전엔 희미하게나마 느껴지던 그 조그마한 의지의 흔적마저 사라진 듯했다. 마치 날카로운 칼로 도려낸 것처럼 텅 비어버린 자리엔, 순수한 힘의 형태만 남아 맥박처럼 고동쳤다. 아…. 가슴이 무겁게 내려앉았다. 제발. 상황이 너무나도 빨리 돌아간다. 눈이 핑핑 돌고, 정신없다. 조금 안정을 가진다 싶으면 또다시 사건이 덮쳐온다. 나를 밀어내듯, 끝으로 밀어내듯. 마침내 벼랑 끝으로 밀어내 끝을 보자는 듯. 평화로운 생활…그게 내게 올 수 있을까? 그저 눈과 귀를 닫고 살아버린다면……. 플레이어가 된 이상, 다시 손에 쥐기 어려울까. 씁쓸함이 입안에 맴돌았다. 나는 그 쓰디쓴 맛을 삼키며 미레의 푸른 단발을 천천히 쓰다듬었다. 손끝에 닿는 부드러운 머리카락이 미세하게 떨리는 듯했다. 곧이어 미레의 어깨가 살짝 움찔하더니, 그녀가 고개를 들었다. “남주님!” 미레의 목소리가 떨리며 내 가슴을 찔렀다. 그녀의 눈에서 또다시 눈물이 흘러내렸다. 투명한 물방울이 뺨을 타고 굴러떨어지며 햇빛에 반사되었다. 이젠 울보 미레가 되겠군. 저렇게 나를 걱정하며 울어주는 그녀를 보니, 황폐했던 마음에 따스한 물줄기가 스며드는 듯했다. 가슴 깊은 곳이 미세하게 녹아내리는 느낌이었다. “으윽, 걱정마. 다시 이렇게 부활했으니.” 목이 살짝 잠겨서 나온 내 목소리에 힘을 주려 애썼다. “흐흐흑, 어째서 남주님에게 계속….” 미레가 흐느끼며 말을 잇지 못했다. 그녀의 손이 내 팔을 꽉 쥐었다. 그 작은 손에서 전해지는 떨림이 내 피부에 닿아 마음을 더 어지럽게 했다. 진정을 걸어주며 볼을 쓰다듬었다. 그러자 손등으로 눈가를 몇 번 훔치고는, 호흡을 가다듬으며 일어서서 말했다. “우선 아스테라 여제님께 알리겠습니다.” “그래, 부탁해.” 아스테라. 곧이어 문이 열리며 레이더가 방 안으로 들어왔다. 그녀는 붉은 예복을 입고 있었다. 화려한 천이 몸을 감싸며 부드럽게 빛났지만, 예복의 미세한 틈 사이로 내가 만들어준 끈 수영복이 살짝 드러났다. 얇은 끈이 그녀의 어깨를 타고 내려와 붉은 피부와 대조를 이루며 눈에 들어왔다. “남주님, 몸은 괜찮으신가요?” 역시나 걱정이 한가득 앞선 모습. “레이더! 안녕! 인사가 이렇게 되네. 하하.” “…억지로 웃으실 필욘 없다고요.” 그러다 문득, 레이더가 흘깃 웃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입꼬리가 살짝 올라가며, 그녀의 검은 눈동자엔 은은한 빛이 감돌았다. 그 미소를 보는 순간, 마음이 놓이는 듯했다. 긴장이 스르르 풀리며, 어깨가 저절로 내려갔다. 나는 가슴께를 손으로 가볍게 짚으며 인상을 찡그렸다. 몸 여기저기 남아 있는 뻐근한 통증을 연기하듯이, 무슨 일이 있었는지 궁금증이 고개를 들었다. “으… 아직 몸이 좀 뻐근해. 어떻게 된 거야?” 목소리에 약간 힘을 실어 조심스레 물었다. 그러자 미레가 자연스럽게 일어나 자리를 비켜줬다. 그녀의 푸른 머리카락이 살짝 흔들리며 부드럽게 흘러내렸고, 옆으로 물러선 자리엔 레이더가 앉았다. 의자가 삐걱, 소리를 내며 그녀의 몸을 받아냈다. 붉은 예복의 천이 접히며 고운 주름이 생겼고, 레이더는 조용히 나를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순식간이었어요.” 가슴엔, 단검 하나가 박혀 있었다. 모든 일이 순식간에 벌어졌다고 한다. 넘쳐흐르는 신성력 탓에 누구도 쉽게 다가올 수 없는 상황이었고, 그때—내 몸에서 보랏빛 광채가 피어오르며 그 힘에 맞서기 시작했다고 했다. 이윽고, 그 보랏빛은 단검을 감싸더니, 그 단검이 천천히 내 몸속으로 스며들듯 들어갔다고 한다. “어...? 들어갔다고?” “네… 정말, 눈 깜짝할 사이였어요.” 흡수...? 몸에 무슨 변화가 생긴 걸까. 가슴께에 손을 얹은 채, 급히 상태창을 열었다. 그리고 변화는 분명하게 나타나 있었다. [상태창] 김남주 | 종족(플레이어) | 진영(선) 신체(S: MAX) 정신(S: MAX) 신성력(S: MAX) 마력(A: 0) 권능(D: 0) 스킬(8) | 가호(1) | 칭호(2) 저항력: 권능 저항(MAX) 권능(D): 0/20 (+100%) 권능 : 신성력/마력/이계의 힘 중 하나를 선택하여 절대적으로 상대를 ‘멸(滅)’하는 단검(1회용)을 생성합니다. 아직 탐욕의 가호가 있는 걸 보자, 희망이 피어났다. 반드시 그녀를 되찾겠다는. 그런 다짐을 하며 천천히 상태창을 살폈다. 상태창엔 놀라운 변화가 기록되어 있었다. 신성력은 단번에 S등급으로 치솟아 있었고, 마력 또한 A등급으로 높게 상승해 있었다. 권능 스탯 역시 D등급까지 도달해 있었으며, 무엇보다도 가장 눈에 띄는 변화는—권능 수치 20이 모두 사용된 상태라는 점이었다. 마지막으로 본 그 단검의 효과. 그것과 정확히 일치하는 능력이, 이제는 내 능력으로 표기되어 있었다. 그 힘을, 나도 사용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내 몸 안에 자리한 수많은 힘 중, 단 하나를 선택해 밖으로 끄집어낼 수 있다는 옵션도 생겨 있었다. 이 권능은 마치… 탐욕의 진화된 형태 같았다. 보다 정교하고, 보다 강력한 탐식과 지배의 본질을 품은 힘. 정복도를 펼쳐보자, 아스모데우스의 이름은 깨끗하게 사라져 있었다만 그 외 다른 이름들은 여전히 남아 있었다. ‘하하하… 군주의 권역이랑 약자 멸시, 꽤 잘 써먹었는데 말이지. 아쉽네.’ 그리곤 문득— ‘다시 정복을…’ 라는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하지만 그런 잡념은 잠시 미뤄두고, 나는 고개를 들어 레이더를 바라보며 말했다. “레이더, 더 이상 걱정하지 않아도 좋아. 오히려 내 심장에 박힌 녀석을 내 힘으로 만든 것 같거든.” “…! 정말인가요? 축하드려요! 남주님!” “고마워, 그리고 이후 어떻게 됐어?” 그 후, 사건의 배후로 보이는 자들을 빠르게 색출해 나가기 시작했다. 검거가 이어지는 동안, 크고 작은 소동도 함께 벌어졌다. 가장 먼저 체포된 건, 소리를 지르며 자신이 범인임을 자처한 자였다. 루시퍼 휘하에 속해 있던 군단장, 야니. 자신을 미끼 삼아 다른 협력자들을 탈출시키려던 계획으로 추정됐다. 허나, 그것은 실현될 수 없는 계획이었을 뿐. 그를 포함해 이번 사건에 연루된 협력자들도 줄줄이 붙잡혔다고 한다. 하지만, 그들을 심문하는 과정에서 다수의 목숨이 잃어졌다고 전해졌다. 그 배경에는 아스테라의 손끝에 응축된, 해일처럼 거세게 몰아친 분노가 있었다. 정보를 빼내고, 설득해야 한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았을 텐데도 말이다. 그럼에도 분노를 억누르지 못했다는 건, 그 감정이 얼마나 깊고, 얼마나 거대했는지를 증명하는 셈이었다. 나는 그 분노의 크기를, 고요한 잔해 속에서 또렷하게 느낄 수 있었다. “그렇구나…야니라.” 금강자지 인챈트를 처음 쓰게 한 오크 종족의 여자였지. 아마도, 야니랑 섹스했단 걸 알면 바로 죽이지 않을까란 생각이 들었다. “오면서 아스테라님께 알렸으니 곧 오실 거예요.” “고마워.” 진심으로 나를 걱정하는 레이더의 얼굴을 보다가 말했다. 귀를 기울이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여기저기서 분주함이 느껴지는 성의 분위기가 피부에 와닿았다. 특히 참모라면, 단순히 한 부서가 아니라 여러 조직을 이끌어야 하는 위치일 텐데도 직접 와준 것이다. “와줘서 고마워. 지금 일 바쁠 테지? 이 사건 때문에라도 더.” “아, 네… 숙청과 반격 그것들은 언제나 일을 만들죠. 남주님 정말 죄송해요, 옆에 있어 드리고 싶은데.” “괜찮아. 아, 가기 전에.” “네?” “손등의 버프는 어떻게 됐어?” “그건 유지되고 있어요. 헤헤.” “다행이네.” “네, 그럼 어서 완쾌하세요!” 나는 손을 가볍게 흔들었고, 레이더도 환한 미소로 손을 흔들며 복도에 대기 중이던 호위들과 함께 걸어 나갔다. 미레가 조용히 문을 닫고 나의 옆에 앉았다. 꼬르르륵- “남주님, 식당에 가시겠습니까?” “식당이 있어?” “네, 있다고 합니다.” 식당이 있다는 말에 잠시 생각이 멈췄다. 어쩐지, 아스가 내가 이곳에 계속 머물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미리 준비해 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의 세심함, 아니 집요함이 문득 떠올랐다. 미레를 따라 식당으로 향했다. 계단을 오르자 곧, 깔끔하게 지어진 공간이 눈에 들어왔다. 가벽 너머로 정갈한 조리 공간이 보였고, 그곳에선 언제든 따뜻한 식사를 내놓을 수 있도록 준비가 되어 있었다. 받아들인 공물들은 보존 마법이 걸려 신선한 상태로 유지되고 있었고, 필요한 재료는 즉시 조리 가능하게 대기 중이었다. 그렇게 나는 미레가 만들어준 따끈한 한 끼를 대접받았다. "와, 미레 요리도 할 줄 알아?" "남주님이 없는 동안 혼자 익혔어요." "정말?" 맛은 훌륭했다. "와, 너무 맛있어!" 미레가 내 말을 듣곤 배시시 웃으며 고개를 숙였다. 음식이 목을 타고 몸 안으로 스며들자, 잠시 멈춰 있던 머릿속이 다시 천천히 돌아가기 시작했다. 마치 식사 한 번에 정신이 또렷해지는 느낌이었다. 그 순간. “아스테라님을 뵙습니다.” 미레가 조용히 한쪽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였다. 그 순간, 식당 문이 조용히 열리며 한 사람이 들어섰다. 그곳엔 아스가 있었다. 전과는 완전히 달라진 모습이었다. 하지만 그녀의 얼굴에는 걱정이 가득했다. 조심스럽게 발걸음을 옮기며 다가오는 모습엔 어딘지 모를 조바심이 담겨 있었다. 그 빛나는 자태에, 나도 모르게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크게 씨익 웃으며 반가운 마음을 담아 말을 건넸다. “아스테라, 축하해! 그 모습도 너무 예쁘네!” 내 말에 그녀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대신, 조용히 다가와 두 팔로 나를 꼭 껴안았다. 아무 말 없이, 그저 단단하게. …. 말이 나오지 않았다. 입을 떼기에는 그 순간이 너무 고요하고, 너무 따뜻했다. 이유도 묻지 않았고, 설명도 필요 없었다. 조용히, 식당 뒤편에 서 있던 모든 자들이 자리를 비켰다. 문이 닫히는 소리만이 조용히 귓가를 스쳤다. 귓가에는 아스의 조용한 숨소리만이 가득했다. 그녀의 따뜻한 온기가, 천천히 나를 감쌌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멈춰 있기를 바랐다. 이 품 안에, 그대로 머물고 싶었다. “남주… 그만 좀 다쳐라.” 그녀의 목소리는 나직했지만 단단했다. 부드러운 숨결처럼 스며드는 말에, 피식 웃음이 새어 나왔다. 피식. “응.” 잠시의 정적 끝에, 그녀가 다시 입을 열었다. “고맙다. 나의 생명의 은인. 나는 분명 그 자리에서 절명했을 테지.” 아스의 말에 흠칫 떨렸다. 단검에 마정석이 파괴당하고. 그 자리에서 즉시 절명해 버려. 힘을 잃고 바닥에 툭 쓰러진 그녀가 상상됐다. 아스가 나를 더욱 꼭 끌어안았다. 그녀의 부드럽고 따뜻한 가슴이 내 몸에 닿아 조용히 눌렸다. 조금이라도 더 가까이 있고 싶다는 듯한 그 마음이, 피부 너머로 전해졌다. 나는 그런 아스의 등을 천천히 쓸어내렸다. “괜찮아.” 몇 번이고 다정하게 말했다. “이젠 멀쩡하고, 오히려 더 강해졌어.” “더 강해졌다니, 정말 다행이로군. 남주. 내가 너희들의 시간으로 얼만큼을 살아왔는진 모르겠으나, 너처럼 특이한 체질은 내 생에서 처음 본다. 정말로.” “그런가? 나도 나 같은 사람 못 보긴 했어. 하하하.” 내 농담에 아스가 피식 웃었다. “하하, 하나 더 있다면 그건 더 놀라울 따름이고.” 그렇게 잠깐 웃음이 번졌고, 분위기는 한층 편안해졌다. 아스는 조용히 의자에 앉더니, 다리를 꼬고는 고요한 시선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러다 바닥을 보며 마치 생각을 정리한 듯 천천히 입을 열었다. “너의 가슴에 박혔던 그 단검. 본 적이 있는 단검이다.” “본 적 있다고?”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그 기운을 느껴본 적도 있다. 선왕께서 돌아가신 날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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