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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화 100화 미끼 투척, 살랑살랑 흔들기


내가 놀란 눈으로 바라보자, 그는 쑥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닳아버린 명찰을 가볍게 흔들었다. 오래되어 가장자리가 헤진 명찰이 그의 손가락 사이에서 흔들릴 때마다, 마치 그 낡은 테두리를 벗고 새것으로 거듭나길 바라는 작은 바람이, 조심스레 손끝에 얹혀 나풀거리는 듯했다. 그리고 그가 바랄 ‘새 명찰’에는, ‘3급’ 따위의 초라한 글씨는 없을 것이다. '탐욕의 힘을 넘긴다?' 터무니없었다. 상상조차 해본 적 없는 제안이었다. 신체 강화에 도움이 되는 평범한 버프 정도라면 모를까. 설마, 바헬무토 공작에게 탐욕의 힘을 나눠줄 상황이 오긴 할까? 없다고 본다. 하지만 곱씹을수록, 스산한 가능성이 문득 스쳐 지나갔다. 마치 버프를 추출하듯, 그 힘도 액체든, 수정이든, 어떤 형태로든 ‘보관’ 할 수 있다면? 마력을 추출한다. 신성력을 추출한다. 그리고… 탐욕의 힘을 추출한다. 어쩌면, 정말로… 내 안에 자리 잡은 힘들의 일부분을 추출해낸다면! 놈의 강해지고자 하는 갈망은, 인정하기 싫지만 나보다 한 수 위였다. 그건 단순한 열망을 넘어, 이미 신념에 가까웠다. 그렇기에 나는, 어쩌면 지나치게 이성적인 나 자신과는 다른 방식으로, 그의 방식에서 뜻밖의 영감을 얻을 수 있었다. 속에서는 미소가 스며 나왔지만, 겉으론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그 이야긴 지금 나누기엔 적절하지 않다고 생각하는데.” 그는 짧게 눈을 깜빡이더니 고개를 숙이며 말끝을 누였다. “제가 너무 앞서갔군요. 무례를… 용서하시길 바랍니다.” 나는 어깨를 살짝 으쓱이며 말을 이었다. “다만 마왕을 만날 수 있게 힘 쓴다면 확실히 강해지게 해주겠단 약속을 하지” “감사합니다!” 그의 얼굴에 환한 빛이 퍼졌다. 뻘쭘한 듯 뒤통수를 긁적이며 웃었지만, 그 눈빛엔 어린아이처럼 진심이 묻어 있었다. 마족의 힘에 대한 집착은, 늘 내 예상을 뛰어넘는다. 그 힘이 자신을 죽음의 문턱까지 끌고 갔음에도, 그는 여전히 그것을 동경하고 있다. 나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고, 눈을 가늘게 뜬 채 낮게 대답했다. “그래.” 이윽고 소파에 앉아 기다리고 있을 때, 단정한 양복을 입은 직원 하나가 조심스레 다가왔다. 그는 공작의 귓가에 무언가를 조용히 속삭였고, 바헬무토는 고개를 끄덕였다. “저를 따라오시면 됩니다.” 나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 순간, 옆에 있던 미레도 나란히 일어섰다. 그 모습이 어쩐지 습관처럼 느껴져, 짧게 미소가 번졌다. 하지만 곧 공작이 차갑게 말을 던졌다. “넌 여기 있어라.” 미레의 표정이 단번에 구겨졌다. 입이 툭 튀어나오고, 눈썹이 아래로 처졌다. 뾰로통한 얼굴로 나를 올려다보며 중얼거렸다. “맨날 따라가다가 기다리게 되네요. 헤헤…” “미레! 대신 이걸 줄게.” 손등에서 신살을 불러내어 섬세한 손짓으로 조형을 완성하자, 마치 내 얼굴을 작게 옮겨 놓은 듯한 인형이 손바닥 위에 완성되었다. 맥동하듯 천천히 숨을 쉬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신살(골렘폼)] 내가 너무 어린애 취급하는 건 아닐까, 문득 그런 생각이 스쳤지만 미레가 인형을 받아든 순간 얼굴에 꽃이 핀 듯 환히 웃는 걸 보고, 괜한 우려였음을 알았다. “와아… 잘 다녀오세요.” 그녀는 인형을 두 손으로 꼭 쥔 채, 귀엽게 고개를 숙였다. 이리저리 돌려보며, 옷도 벗겨보려는 장난기 어린 시늉까지 했다. 나는 다시 공작 쪽을 향하며 짧게 말했다. “바헬무토. 미레에게도 나를 대하듯 말하도록.” 그는 예상치 못한 요구에 눈을 조금 부릅뜨더니, 곧장 예의를 갖춰 고개를 숙였다. “심기를 건드렸다면 정말 죄송합니다. 이것은 고의가 아님을 밝힙니다.” “남주님….” 미레의 글썽이는 눈망울이 가슴을 찌르듯 아릿했다. 나는 조용히 그녀의 머리를 한 번 쓰다듬고, 뒤를 돌아섰다.조금 전보다 한층 무거워진 걸음으로, 바헬무토 공작을 따라 복도를 걸어 나갔다. * * * 얇은 가벽으로 나뉜 공간. 그가 명찰을 보여주고 무언가를 간단히 작성해 건네자, 잠시 후 철제문이 털컥— 기계음 섞인 소리를 내며 옆으로 스르륵 미끄러지듯 열렸다. 미로처럼 꼬여진 긴 복도를 따라가며 마침내 ‘심문실’이라 적힌 공간에 도착했다. “이곳에 앉아 계시면 되겠습니다.” 그리고 그는 문을 닫고 나갔다. 투박한 책상과 의자가 전부인 공간. 밝은 조명이 밝히고 있었고 왠지 모르게 저 벽너머에서 이곳을 주목하고 있을것이라 생각됬다. 귀에 힘을 주자 말소리들이 소근소근 들려왔는데, 제대로 들리진 않았다. 침묵이 찾아오고 대화를 마쳤는지 잠시후 이곳을 향하는 발걸음과 함께 한 팔에 서류를 낀채 바헬무토 공작과 같이 들어온 인물이 내게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십니까. 수사관 타이먼입니다.” 그는 단정한 미소를 띠며 의자를 뒤로 밀었다. 드륵— 가벼운 금속음이 바닥에 스치는 소리와 함께 의자가 꺼내졌고, 뒤이어 바헬무토 공작도 조용히 자리에 앉았다. 의자 끌리는 소리가 겹쳐 울렸다. 마치 그것만으로도 본격적인 심문이 시작되었음을 알리는 개막의 신호처럼 느껴졌다. 타이먼 수사관의 말투는 공손했고, 미소도 친절했지만, 그 눈빛엔 아무 감정도 담겨있지 않았다. 나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네, 안녕하세요.” 그는 곧장 서류철을 책상 위에 올려놓으며 말했다. “이 곳에 오신 이유를 알고 계십니까?” 심문은 그렇게, 지루하고도 전략적인 톤으로 시작됐다. 나는 속으로 숨을 죽이고, 연기의 무대에 오른 배우처럼 표정을 다듬었다. 나는 시선을 흐트러뜨리지 않은 채, 덤덤하게 말했다. “암살 사건. 그 때문이죠.” “맞습니다.” 타이먼은 여전히 시선을 떼지 않은 채, 손끝으로 서류를 넘기고 있었다. 서걱이는 종이 소리가 조용한 공간을 가볍게 베고 지나갔다. “우선 그곳에 계셨던 건 아스테라 개국공신의 공을 인정받으셨기에, 1열에 착석하신 것으로 파악됩니다. 맞습니까?”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다음 페이지를 넘겼다. 스치는 활자들 사이로 익숙한 단어들이 눈에 밟혔다. 야니. 전 루시퍼. 천족과의 내통. 문서 속 문장들이 마치 검은 비늘처럼 겹겹이 깔려 있었다. “전 루시퍼의 복수를 위해, 전 군단장 야니가 벌인 일. 단검이 사용되었죠.” 그는 여전히 시선은 문서 위에 두고, 그러나 단단하게 다듬은 말투로 이어갔다. “그 단검은ㅡ” 여전히 서류와 나를 번갈아 보며 말을 이어나갔다. 잠시 말을 멈춘 그는, 의도적으로 호흡을 고르며 내 반응을 살폈다. 그 다음에 내뱉는 말은, 무언가의 결론이었다. 하나하나 단계별로 확인해가며. 마지막 층에 오르듯이. “천족과 관련되어있죠.” 그 순간, 타이먼의 표정이 서서히 일그러졌다. 이전까지 유지하던 무표정이 깨지며, 입 안에서 이가 갈리는 소리가 들렸다. ‘빠드득’— 마치 억제해온 분노가 치아 사이로 스며 나오는 듯한 소리. “타이먼.” 바헬무토 공작이 짧게, 조용히 그를 부르자 타이먼은 눈을 질끈 감고는, 다시 감정을 접은 얼굴로 돌아왔다. 잠시의 침묵. 그리고 곧, 차분한 톤으로 이어지는 질문. “공작님. 말씀해 주십시오.” 그의 시선이 나를 깊숙이 파고들었다. 허나 질문은 공작을 향했다. “천족과 손잡은 자는 누구입니까? 아스테라, 그 여인입니까?” 나는 슬그머니 무명의 반지를 풀 준비를 했다. 언제든 대응할 준비. 하지만 겉으론 아무 변화 없이, 고요한 물처럼. 되도록이면 기세만으로 해결된다면 좋을테지만. “야니, 그 여인이었습니까? 당신은 누구라고 생각합니까?” 바헬무토의 입술이 천천히 열리기 시작했다. 그 짧은 순간, 나는 그의 선택을 예측해보려 애썼다. 윗선에서 지시받은 대로, 모든 걸 아스테라의 자작극이라 몰아붙일 것인가. 내 힘 따윈, 자신의 위력으로 강제로 뽑아내는 길을 택할테냐! 아니면… 진실을 말하고, 나를 동맹으로 선택할 것인가. 그렇게 스스로 안전하게 힘을 얻는 길을 모색할 것인가. 그는 선택했다. “…야니. 그녀의 짓이다.” 무명지에 닿아 있던 손끝에서 힘을 뺐다. 준비했던 대응이 더는 필요 없음을 직감하며. 타이먼은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그 말은, 충분히 큰 결론이었다. “그렇군요… 야니. 그녀의 짓이군요. 감사합니다.” 그는 손에 들고 있던 서류를 조용히 책상 위에 내려두었다. 두 손을 깍지 낀 채, 마치 머릿속의 퍼즐을 정리하듯 가만히 생각을 정리한 뒤 다시 입을 열었다. “그 단검은 남주님의 몸에 박혔고… 그 이후, 어떻게 되셨습니까?” 말끝이 날카롭게 꺾였다. “마왕성의 사절로 나간 데베르토 공작의 보고서에는 신성력이 느껴졌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가 눈길을 들었다. 서류에서, 나에게로. 나는 간결하게 대답했다. “맞습니다. 단검에서 신성력이 감지됐습니다.” 잠시 기억을 더듬듯 눈을 감았다가, 다시 떴다. “그리고… 눈을 떴을 땐, 사라져 있었습니다.” 말끝을 흐리며 나는 시선을 자연스레 책상 위 서류로 흘렸다. “거기엔, 뭐라고 적혀 있나요?” 서류를 향한 내 눈짓은 자연스러운 듯 보였지만, 그 안에 담긴 의도는 분명히 전달했다. 너희가 알고 있는 것, 그걸 먼저 내게 보여줘. 타이먼이 서류에 눈을 고정하며 입을 열었다. “일치합니다, 말하신 그대로 입니다. 게다가 …그 단검에 신성력이 서려 있었다는 건, 사실이군요. 교차검증입니다.” 그 말에 섞인 감정은 경악과 만족이 섞여있었다. “천족과 내통한 증거로는 확실하겠군요. 그리고 사라졌다? 아이러니하군요. 어떻게 된 겁니까?” 나는 조금도 당황한 기색 없이, 무심하게 답했다. “그 부분은, 잘 모르겠습니다. 저를 치료했던 동료들의 말에 따르면… ‘증발’했다고 하더군요.” “증발했다고라…” 그는 고개를 숙인 채 중얼거리며, 이내 눈빛을 번뜩였다. 가면처럼 고요하던 얼굴에, 탐욕이 스며든 균열이 생겨났다. “혹시 신성력을 지닌 단검에 심장이 뚫린 뒤 몸에 변화가 있습니까? 아주 큰 부상을 입었을 것 같은데요. 여기엔 쓰여져 있지 않습니다.” 타이먼이 바닥에 고개를 내리깐채 말했다. 어쩌면 지금 그의 머릿속에선 이 수사 결과에 따라 전쟁이 일어 날 수도 있다고 인식하고 있는 걸까. “신성력을 사용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타이먼과 바헬무토 공작의 눈이 크게 부릅떴다. “신성력이라고요?” 왔다. 이 순간을, 나는 기다려왔다.놈은 미끼를 덥석 물었다. 나는 차분히 고개를 끄덕이며 천천히 손바닥을 펼쳤다. 그곳에 의식을 집중하자, 마치 수면 위에 맺히는 이슬방울처럼 보이지 않던 힘이 응결되기 시작했다. 순백의 회오리가 손바닥 위에서 살짝 일렁이다가, 곧 하나의 구체로 응축되었다. 그 빛은 맑고 차가웠으며, 무게도 없었고 열도 없었다. 그저 ‘존재한다’는 사실만으로 공간의 기류를 바꾸는 절대적인 정적. 작은 구체는 몇 번 회전하다, 이내 바람에 날린 안개처럼 스르륵 흩어졌다. 책상 너머의 두 사람은 말이 없었다. 그들의 시선은 아직도 내 손바닥 위에 머물러 있었다. 마치 거기, 아직 그 힘이 머물고 있는 것처럼. “이렇게나마 조금 유지하는게 한계입니다.” 수사관은 한 걸음 물러섰다. 그의 눈빛은 경악과 놀라움이 뒤섞인 채로, 여전히 공기 중에 퍼져 있는 신성력의 잔여물을 쳐다보았다. 그 눈길 속에서 무언가 불안한 기운이 깃든 듯했다. “정말, 역겹군요! 저주받은 몸이 되어버린 겁니까?” 놈이 얼굴을 찡그리며 말을 이었다. '역겨워?' 바헬무토 공작이 타이먼 앞으로 손을 뻗어 저지하며 말했다. 그리곤 아주 놀란 눈으로 내 눈치를 살살 봤다. “말 조심하게…타이먼!” 공작의 떨리는 손을 타이먼이 눈치 챘다. 이제야 자신이 큰 실언을 했음을 깨달은 건지. 고개를 푹 숙이며 말했다. “죄송합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그 반응 이해합니다… 저도 역겹다고 생각했으니까요.” 나의 능청스러운 대답에 공작이 크게 한 숨을 쉬었다. 그러곤 품에서 손수건을 꺼냈는데 그의 이마와 눈가엔 식은 땀이 주륵ㅡ 흘러내리고 있었다. “이해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신성력 이라니. 마력은… 어떻게 된 겁니까?” 그의 목소리는 비난과 혐오가 섞인 낮은 음성이었지만, 그와 동시에 호기심에 불타는 듯했다. 불을 궁금해하는 나방이었으며 날갯짓을 펄럭, 펄럭ㅡ! 불을 향해 뛰어드는 꼴이었다. 응축된 마력이 손끝에서 지직거리는 소리를 내며 엉겨붙었고, 나는 그것을 점점 더 응축시켜 나갔다. 마치 내가 이 공간의 온도를 올려놓는 듯한 기분이었다. 그리고 한순간, 손을 휘저으며 마력을 흩어버렸다. 그것은 마치 폭풍이 지나간 후의 고요함처럼, 작은 회오리가 되어 공기 속으로 퍼져 나갔다. 그 흔적이 공기 중에 얼어붙을 듯했지만, 그 공기는 점차 더 뜨거워졌다. 타이먼은 그 변화를 눈앞에서 느끼며, 숨을 한 번 깊이 들이켰다. “마왕님의 권역안에서…? 신성력도 놀랍습니다, 마력까지 사용 가능하시다니. 저, 정말 당신은!” 그의 목소리는 흠집이 난 듯, 떨리고 있었다. 눈동자 속에서 그가 느끼는 두려움과 경외가 교차하는 순간이었고, 그는 그 사실을 받아들이기 힘들어하는 듯했다. 바헬무토 공작은 타이먼의 동요를 눈치채고, 한 발짝 다가섰다. 그가 덧붙였다. “은거마족의 밑에서 자라셨다고 하네. 어쩌면 이 일은 운명일지도 모르지. 신성력과 마력, 두 가지의 힘을 다루는 경우는… 마왕님의 입에서 밝혀지는것도 좋겠지.” 타이먼은 잠시 멍하니 있다가, 부드럽게 웃어보이며 입을 열었다. “그 말에 동의합니다. 이건 이번 사건과 별개로, 저희의 손을 떠난 케이스입니다. 운명이요? 정해진 삶이 있다는 그런 말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의 웃음은 비꼬는 듯했지만, 그 안에 얼핏 느껴지는 불안정함이 그의 마음을 드러냈다. 무엇을 감추고 있는 걸까? 공작은 그 웃음을 보며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흘려듣게나.” 그 말 속에서 공작의 눈빛은 타이먼에게 무언의 경고를 던지는 듯했다. 상황이 절대 녹록지 않다는 걸 느끼고 있었다. “은거마족의 밑에서 어떤 수련을 받으셨기에… 정말 대단하십니다. 그나저나, 정말 농후한 마력이군요… 본디 마족이신 걸로 알고 있습니다. 의심해서 죄송합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담담하게 답했다. 그의 눈빛은 표면적으로는 예의를 차리고 있지만, 그 속에는 깊은 의문과 경계가 섞여 있었다. “괜찮습니다. 오래전 천족과의 전쟁과 관련이 있으셨던 분이셨군요.” 그 말에, 공작의 표정이 잠시 굳어졌다. 그의 과거가 나의 입을 통해 드러나는 순간, 그 속에 담긴 무언가가 분명히 그를 자극했을 것이다. “예, 저의 부친…” 그의 말이 조용히 흘러나오면서, 말문을 잇지 못한 채 고개를 숙였다. 비록 짧은 대답이었지만, 그 안에는 깊은 상처와 미련이 엿보였다. 그렇게 시시콜콜한 것들을 물으며 시간이 갔고, 그때,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조용히 울렸다. 똑똑- 그 소리는 곧 이어서 긴장된 기운을 실어 문을 여는 여인이 등장했다. 그녀는 침을 크게 삼키며 말했다. “야니 그녀에 대한 취조가 끝났습니다.” 타이먼은 그 여인의 표정을 보고, 무언가 중요한 순간이 다가오고 있음을 직감했다. 그의 얼굴에선 피로와 긴장이 번져 있었다. “…우린 역사의 한 순간에 있는거야…!” 타이먼의 목소리는 낮고 긴박하게 들렸다. 그 말 속에는 이제까지의 상황을 넘어서야 하는 중대한 순간이 다가왔다는 무게가 실려 있었다. 그녀는 급히 대답했다. “네!” “심문을 마저 하고 갈게, 어디지?” “33번방 입니다.” “알겠다.” “네, 수고하십니다!” 일의 전선에 뛰어들 때 뭐든 해서 . '뭐든지 해서 살아남고야 말겠다는' 는 예전의 내 모습이 겹쳐보였다. 바헬무토 공작이 타이먼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 그는 말없이 타이먼을 데리고 가벽 뒤편으로 향했다. 내게 들리지 않게 하려는 속삭임. 하지만 이 정도 거리라면, 내 귀엔 마치 바로 옆에서 말하는 것처럼 또렷하게 들렸다. “야니, 그녀는 이상한 점이 있네. 그렇게 밝혀지면 자신에게 돌아올 벌이 클 텐데도 순순히 전부 말하고 있어. 그 점이 아직도 걸리는군.” “정신계 공격 가능성은요?” 공작은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바르티스코가 탐마경으로 살펴봤지만, 어떤 연결된 선도 없었네.” “그렇다면… 본인의 의지라는 겁니까? 세뇌나 고문의 흔적은요?” “그것도 없었지. 몸의 흉터들은 원래 존재했던 전장의 훈장이라더군. 게다가 아스의 성에 있으면서도 그런 죄를 저질렀건만, 그들은 그녀를 전쟁 포로로 예우했다고 하네.” 잠시 침묵이 흘렀고, 곧 타이먼이 뜨겁게 말했다. “오히려 잘된 일입니다! 천족놈들과 전쟁이라도 일어난다면 기뻐할 마족은 저 하나만이 아닐 겁니다. 은거마족이 대거 모습을 드러낼 것이고, 약한 자들은 자연스럽게 도태되겠죠. 강한 자들은 살아남고, 마족은 그들을 중심으로 다시 부흥할 것입니다. 지금의 마족은—” “타이먼.” 공작의 짧은 부름에, 타이먼은 자신을 추스르며 말했다. “죄송합니다. 또… 흥분했군요.” “자네 마음을 모르는 건 아니야. 우리가 같이 한 세월이 얼마인가.” “페롱드 절벽을 끼고 있던 마왕성 시절부터죠. 그땐 벽마다 슨 곰팡이들이 옷에 들러붙던 시절이었는데…” 공작이 낮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이젠 아니지. 마왕님이 ‘빌딩’으로 밀어붙이신 이후로, 판도는 달라졌네. 천계로 넘어가 생사고비를 넘던 야생의 시대는 막을 내렸네. 마족의 변화는 이미 예견된 것이었어. 우린 그저 강자에 따르기만 하면 되는 시대에 살고 있는 거야. 자네가 강해졌다면, 도전해도 괜찮겠지.” “…강자지존(強者之尊)의 법칙.” 잠시, 두 사람 사이에 묵직한 침묵이 흘렀다. 그러다 타이먼이 낮은 목소리로, 결연하게 말했다. “반드시… 그녀 입으로, 천족과 어떻게 내통했는지 듣고 싶습니다. 서류에 적힌 것만으론 부족합니다. 제 촉이 계속해서 신호를 보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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