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3화 133화 악신진영 플레이어 장미연(7) 수호심계(守護心界)
미연은 자신의 몸이 반투명한 채 공중에 떠 있다는 사실을 알아채자, 심장이 철렁 내려앉으며 숨이 턱 막혔다.
끝이 보이지 않는 꿈속을 오래 헤매다, 어딘가에서 날아든 거친 굉음이 머릿속을 쪼개듯 파고들자 이마가 저릿해지고 눈살이 절로 구겨졌다. 억지로 끌려 나오듯 의식이 수면 위로 떠올랐다.
왜 하필 지금 정신이 번쩍 들었는지 곱씹던 끝에, 그 굉음의 정체를 마주했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스쳤다. 나와 같은 시간을 살아온, 나와 연결된 듯한 한 소녀. 그녀를 보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지배계급의 딸로 태어나 좋은 뒷배로 끝없이 면제되는 악행을 일삼다가, 몰락과 쿠데타.
그 단 한 번에 밑바닥까지 추락해 가는 그 전 과정을. 자신은 플레이어가 됬지만 그 소녀는 땅 깊숙한 곳에 묻혔다는 사소한 차이가 있지만.
그 생각에 닿자, 이곳에 발을 들인 순간부터 지금까지 눈에 담아온 장면들이 물속의 침전물이 가라앉듯 서서히, 그러나 맑게 떠올랐다.
예고도 없이 입을 벌린 포탈의 푸른 틈, 그 앞에서 숨을 고르던 원주민들의 떨리는 눈빛과 손등의 미세한 경련, 허공을 가르는 알림음과 함께 찾아온 플레이어 각성의 전율, 그 뒤를 잇던 수많은 분쟁이 남긴 먼지와 금속 냄새, 그리고 마지막엔 숨죽인 침묵 속에서 울린 게임 클리어까지—.
차이점이라면, 예전엔 차원단위로 그룹을 나누어 경쟁이 벌어졌다는 점이었다.
지금은 같은 차원에 발 딛고 선 자들끼리마저 선과 악으로 가르며 서로를 겨누고 있지만.
눈가는 미세하게 떨렸고, 마른 입술이 한 번 젖었다 마르는 사이, 숨마저 얕아졌다. 그 눈엔 기다림이 번개처럼 번뜩였고, 입으로 뿜어지는 뜨거운 숨이, 대답을 향한 열망이 공기까지 뜨겁게 데우는 듯했다.
발치 아래에선 모든것이 너무나도 빠르게 지나가고 있었다. 자라나고 무너지고를 반복했다.
머리 윗쪽에선 구름이 빨려들어가듯 빠르게 지나갔고 낮과 밤이 돌림판처럼 돌아가고 있었다.
색을 띠면서도 서로 섞이지 않는 상극의 액체들을 함부로 부어 한 그릇에 담아놓고, 그 가운데서 소용돌이가 일어 휘감기는 광경을 내려다보는 것과 비슷했다.
오랫동안 물속에 잠겨 있던 사람처럼 한꺼번에 숨을 터뜨리며 깊게 공기를 들이켰다. 그리고 자신처럼 반투명한 육신으로 허공을 미끄러지듯 날고 있는 엘프에게 말을 걸었다.
“허억, 허억-. 짐승의 가면을 쓴 수호자, 풀의 안개 속에서 낮게 숨 쉬는 존재! 내가 여기에 온지 얼마나 됐지?”
짐승의 가면을 쓴 수호자, 풀의 안개속에서 낮게 숨 쉬는 존재라고 불린 긴 이름을 가진 엘프는 무서운 눈으로 자신을 쳐다보는 미연을 물끄러미 보다 손을 꽉 쥐었다.
그러자 모든 것이 멈췄다.
마치 처음부터 그렇게 설계된 세계처럼, 숨결 하나까지 얼어붙었다.
느릿하게 흐르던 구름이 하늘 한가운데서 주름진 천처럼 고정되고, 허공을 가르던 새와 비행류 몬스터의 날개짓이 공기 속에서 굳어졌다. 땅굴의 입구에서 진흙을 털며 기어오르던 토류 몬스터들 역시 반쯤 드러낸 발톱과 흙먼지를 남긴 채 멈춰 섰다. 바람 소리도 사라져, 고요가 귓속을 눌러왔다.
엘프는 미연이 자신을 부른 호칭 하나에 매달려, 그녀의 기억이 어디에서 끊겼는지 가늠하려고 눈을 가늘게 떴다. 심장이 한 박자 늦게 뛰는 사이, 그 호칭의 무게와 뉘앙스를 더듬으며, 잊힌 시간의 경계선을 조심스럽게 더듬어갔다.
‘내 이름으로 부르고 있네. 엘프까진 아니라 다행이군.’
미연 또한 엘프를 어째서 그런 호칭으로 불렀는지 당황해했다.
‘내가 어떻게 저 엘프를 그런식으로 부른거지?’
허나 부릅뜬 눈빛은 넘치는 호기심이 답을 재촉하듯 흔들렸다. 마치 학구열에 사로잡힌 박사가, 마침내 전지전능한 신을 정면으로 목도하고는 입술을 다물지 못한 채 질문을 던져놓고 그 회답을 기다리는 듯했다.
“얼마나 됐냐고 물었지. 1,095,777일.”
“뭐?”
미연은 속으로 그 숫자를 365로 나누기 시작했다. 머릿속에서 숫자들이 서로 부딪히고 미끄러지며 흩어졌다가 다시 모였다. 몇 번이나 셈이 틀어져 숨을 고른 끝에, 약 3000년이라는 결론에 간신히 도달했다. 그러나 성취의 기쁨은 없었다. 심장이 웅크리듯 움찔했고, 몸은 얼음처럼 굳어버렸다. 공기가 갑자기 무겁게 가라앉아, 숨이 목구멍에서 멎어버리는 듯했다.
꿀꺽-
“3천 년!?”
“네가 알려준 걸 기준으로 말한 거야. 네게선 현실과 어긋나는 감각에서 오는 부정이 느껴지네. 내 기준에선초대 수호자의 기억부터 지금까지라고 말하는 편이 맞겠지만. 수호심계(守護心界).”
미연은 어릴 적부터 플레이어들이 포탈에 들어가는 뉴스를 볼 때마다, 흐르는 시간조차 아깝다는 듯 시선을 시계에 고정하고 손끝으로 정확히 1초씩 톡, 톡, 나눠 쟀다. 생방송 화면의 잔상과 앵커의 목소리가 겹칠 때마다 그녀의 리듬도 미세하게 달라졌고, 그때마다 손끝에는 규칙적인 진동이 심장 박동처럼 깃들었다.
사람들은 그저 무심코 나오는 손버릇쯤으로 여겼지만, 미연에게 그것은 매번 시간을 또렷이 붙잡아 즐기기 위한 작은 의식이었다.
손끝이 공기를 툭툭 두드릴 때마다 보이지 않는 초침이 움직이듯 박자가 맞아떨어졌고, 메트로놈처럼 놀랄 만큼 흔들림 없이 정확했다.
엘프는 자신의 손가락을 들어 한번 왕복했다.
“이것이 1초. 60번 했다면 1분, 그것이 60번이면 1시간, 그것이 24번이면 하루. 그것을 머릿속으로 하면 될 일이다.”
1초도 안되는 사이 1일, 그 경이로운 비율에 미연은 경외감마저 들었다.
“현실 시간을 묻는다면 이제 약 300시간 정도.”
“어?”
미연은 문득, 먹을 것을 구하러 나가겠다던 엘프를 붙잡아 이런 사달이 벌어진 탓에, 현실의 육신이 굶주림으로 한 발 더 쇠약해졌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가슴을 훑고 지나가는 것을 느꼈다.
“빠, 빨리 나가야해.”
“그래. 몸에 영양결핍으로 인한 사망을 걱정하고 있구나.”
“으으…300시간이나 먹지 않으면 죽는다고.”
“걱정마. 너와 내가 연결되어있으니, 대기에서 마력을 흡수해 내게 주고 있으니까.”
연결되었다는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미연은 반사적으로 다리 사이로 손을 내렸다.
찌걱—.
엘프가 만든 정신공간에 들어서기 직전, 방금 전 그 길고 뜨거운 것이 몸속 깊숙이 비틀리며 파고들던 감각이 희미한 잔향처럼 되살아났다. 손을 더 내려가자, 미세하게 떨리는 손끝에 끈적한 애액이 스치듯 묻었다. 은근한 열기가 피부를 타고 번지며, 얇게 퍼지는 습기와 함께 아랫배가 서서히 조여들었다.
“이건?”
“부정할 수 없지. 현실의 영향을 받는 것. 나 역시 몇번은 쌌을지도.”
“…또 배가 빵빵해졌을까?”
“아마도.”
몸이 아직 회복하기도 전에 연속으로 정액으로 가득찬 배를 겪게 된 것에 미연은 벌써부터 걱정이 치달았다.
“이 수호심계에서 나를 부르는 지칭에 스스로 놀라는게 느껴져. 뭐,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몇천번도 그랬지.”
“수호심계?”
“지금 우리가 흐르는 것.”
“왜 나에게 이런걸 보여주는거야?”
“너라고 생각했다.”
엘프의 엉뚱한 대답에 미연은 눈썹을 살짝 치켜올리며 되물었다.
“무슨 말이야?”
“우리 나르도스 부족은 운명을 판가름 짓는 부족이라고 불려왔다. 나는 그것을 부정하지 않고있지.”
“근데?”
“넌 운명의 사람이다.”
미연은 자신도 모르게 콧방귀를 뀌었다.
미친년처럼 굴며 살아온 자신이, 인포탈 안의 원주민 부족 수호자라는 자에게서 운명의 사람이라는 말을 듣게 되다니.
“뭘로 판단하는데?”
“내 본능이 너를 죽이는 것을 막고있다.”
“……참 말되는 근거네.”
속으로는 어떻게든 생존권을 확보했다는 안도감에, 미연의 팽팽하던 긴장이 조금 느슨해졌다.
“여기서 나가…….”
“더 많이 보여달라한건 너다. 미연.”
처음이었다. 엘프가 미연의 말을 끊은 것은. 좁은 통로 한가운데 서서, 출구를 막아선 사람처럼 길을 틀어막는 기색이었다.
“……내가 그랬다고?”
“그래. 아니, 어쩌면 내 욕심이었을까. 이것만은 모르겠군. 그리고 내세우는 인격을 자주 교체하지 마라. 지금처럼 본신의 인격이 무의식에서 헤어나오려면 큰 기력이 든다. 지금도 거의 행운에 가까웠지. 난 네 다른 인격들이 하는 말 조차도 들을꺼니까.”
자신에게 그런 능력 따위는 없다고 항변하려 입술을 떼던 순간, 다른 인격이 내뿜는 속삭임이 뇌 속에서 가늘게 번졌다. 귓불을 스치는 바람처럼.
그 미묘한 비림을 좇듯 고개를 약간 기울이고, 숨을 고르며 귀를 기울였다.
-미연, 쟤가 널 괴롭히고 있어? 괴로우면 언제든 나랑 교체하자. 난 네편이야. 잊지마. 널 위해 싸워줄게.
-누구야?
자신이 드디어 미쳤다고 여겼던 것도 잠시, 미연은 금방 머릿속이 번쩍이며 깨질 듯한 과부하가 몰려오는 걸 느꼈고, 무의식적으로 미간을 깊게 찌푸렸다.
“짐승의… 뭐였지? 윽, 아무튼 나 좀 안아줘. 아윽, 머리가—!”
엘프에게서는 살갗에 스며든 특유의 풀내음이 은근히 올라와, 새벽숲의 이슬 내음처럼 코끝을 간질였다.
“또 내면인격이 의식의 수면아래에서 말을 거는건가. 그러지 말라고 경고했을텐데.”
“으,윽. 모르겠어. 머리가 너무 아파.”
“미연. 민을 조심해라.”
“응?”
“네가 내게 해달라고 한거다. 표정이 안좋다면 꼭 말해달라고 했다. 민씨는 사기꾼, 거짓말쟁이라고.”
엘프는 미연이 입가에 얹어 부르던 애칭이 사라지고, 자기 이름마저 손에서 모래처럼 흩어져 잡히지 않는다는 사실에 깊은 슬픔을 삼켰다. 하지만 그는 그 감정을 드러내지 않았다. 가면 아래로 숨길 수 없는 미세한 숨결만이 잠시 흔들렸을 뿐, 눈빛도 목소리도 끝내 평온을 가장했다.
“1000년에 하나씩 만들어졌고, 3개의 인격이 있다고 했다.”
“아윽. 내가? 왜 그런 짓을?”
“그 이유는 나도 모른다. 내게 설명하기 부끄럽다고 했다. 난 그저 고개를 끄덕일 뿐.”
“아윽ㅡ!”
엘프가 미연의 손을 조심스레 감싸 쥐었다. 피부를 타고 스며드는 따스한 온기가 촛불의 열처럼 번져왔다. 뻣뻣하던 통증이 물러가듯 서서히 가라앉기 시작했다.
“민, 헤리비츠, 체르토.”
“망할을 붙이고 사는 자는 헤리비츠. 늘 불평하는 자. 모든 것을 혐오해. 심지어 자신까지도. 늘 자살하려하지. 브레인 붐을 자주 일으켜서 말썽인 놈이다.”
“섹스만 원하는 것 처럼 보이지만, 실은 내 몸까지 뺏으려는 자는 체르토. 몇번의 시도가 있었지. 내겐 통하지 않았지만.”
내면의 말ㅡ
이 모든 것이 너무도 자연스러워, 말투도 호흡도 대화의 흐름도 흘러가듯 이어지는 것이 스스로도 믿기지 않아 미연은 잠시 멍해졌다.
‘맞아, 나는… 환영받는 존재가 되고 싶었어. 이제야 내게 기회가 찾아온거야… 절대 놓지 않겠어.’
포탈로 들어서기 전, 플레이어들의 얼굴에는 얇은 막처럼 긴장이 내려앉아 있었다. 손끝은 미세하게 떨렸고, 옷 사이로 스친 숨은 마른 쇳내를 품었다. 서로 말 한마디 없이, 마치 유언을 가슴 속에 접어 넣은 사람들처럼 죽음을 각오한 눈빛이었다. 포탈 주변의 공기는 낮게 윙— 하고 울렁이며, 발밑의 바닥이 아주 미세하게 진동했다.
마침내 포탈 붕괴에 성공했을 때, 그들이 돌아온 모습은 처참했다. 찢긴 장비, 핏자국이 말라붙은 피부, 억지로 꿰맨 상처들이 서투른 봉합선처럼 몸을 가로질렀다. 그러나 그들 눈동자에는 지침만 있을 뿐, 휘청임은 없었다. 고개를 단단히 들고, 서로의 어깨를 두드리는 손길에는 조용한 자긍심이 배어 있었다. 인간의 경계를 넘어선 듯한, 어쩌면 순교에 가까운 결의였다. 그것이 설령 보상을 노린 일이었거나, 자신의 목숨을 갉아먹는 퀘스트였다고 해도, 그 감정만큼은 거짓이 아니었다.
그러다 어깨에 전해지는 따뜻한 체온과 부드러운 머릿결의 감촉에 이끌리듯, 엘프를 더욱 꼬옥 끌어안았다. 마치 포근한 물속에 천천히 잠겨드는 것처럼 숨을 고르며 낮게 물었다.
“넌 괜찮아?”
“괜찮다. 나 역시 너와의 교감으로 몇 개의 인격이 새로 떠올랐지만, 나는 인내심이 깊다. 설득을 거듭한 끝에 모두 의식의 수면 아래로 가라앉았다. 다들 평온히 잠들었다.”
“내가 정말로 방금 안아달라고 한거야? 너에게?”
“그렇다.”
“왜?”
“우린 연인이었으니까. 다른 이유는 없다.”
“……섹스도 했어?”
“그렇다. 많이도.”
뒷말이 끈적이듯 이어 붙었다.
“대부분은 네가 나에게 요구했지.”
추억을 더듬는 그 자연스러운 흐름 끝에 찾아온 것은, 조용히 막이 오르듯 스며드는 각성이었다.
깨진 유리 조각을 주우려다 손끝이 스치는 순간 번쩍 놀라는 것처럼, 미연의 기억 속 파편들 중 중요하다고 여겨진 것들이 찰칵찰칵 맞물려 앞에 펼쳐졌다.
부족단위를 이루던 숲의 세상.
능력사용대상은 오로직 엘프종 이외의 것에게만 그리 하지 않으면 추적조가 붙었다.
어느날 포탈이 열리거나, 대족장의 집이 던전화 되는 사태가 발생.
이 외에도 집회실이나 가축을 기르던 곳이 어두컴컴한 반구의 장막에 휩쌓였다.
그것은 평범한 마을도 예외가 아니었다. 학살과도 같은 상황이 일어나며, 다른 차원에서 넘어온 플레이어들은 쉬운 던전이라며 좋아했다. 끔찍한 모습이었다.
그들은 어느새 플레이어들의 경험치로 갈아 넣어지는 먹잇감이 되는가 하면, 한편으론 엘프들 중 혈기왕성한 자들에게는 오랜 세월 눌러왔던 본능을 거리낌 없이 풀어헤치는 보복의 전장이 되어버렸다.
피비린내와 흙냄새가 뒤섞인 공기 속에서 비명과 환호가 엇갈려 메아리쳤다.
그 마지막에는 숲의 주인, 바다의 주인, 하늘의 주인이 차례로 무너졌다. 거목이 쓰러지듯, 파도가 꺾이듯, 바람이 찢기듯. 그 사체들은 차갑게 식어 성물이 되었고, 플레이어들은 자세장을 차리고 숨을 고른 뒤 제를 올려 ‘무엇’에게 봉헌했다.
묵직한 정적과 함께 피와 향의 냄새가 한데 올라가, 보이지 않는 곳으로 스며들었다.
세계가 지탱하던 기둥이 부서지자 균열은 금세 번져, 모든 것은 마치 예정된 각본처럼 붕괴의 절차를 따라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땅은 낮게 울리고, 하늘은 가늘게 떨렸다.
진실을 알아차린 소수의 플레이어들은 잠시 말문이 막혔다. 무릎이 미세하게 흔들리고, 손끝에서 체온이 빠져나가듯 식어가며, 그들은 뒤늦게 밀려드는 충격을 삼키지 못했다.
영사기 안에서 쉴 새 없이 돌아가는 필름은, 닮은 그림들이 미묘하게 엇갈리는 프레임들의 연속으로 이어진 결과물이다.
그러나 프레임마다 전혀 다른 장면이 들쑥날쑥 섞여 빠르게 흘러간다면, 그것은 영화로선 명백한 실패일 것이다.
미연의 경우는 달랐다. 애초에 그것은 영화가 아니었고, 눈앞을 훑고 지나가는 속도는 너무도 빨랐지만, 모든 장면이 그녀 스스로 머릿속 깊숙이 새겨 올린 것들이었기 때문이다.
-수수, 나 네가 좋아. 이제껏 내 인생은 전부 쓰레기였어.
-그런가. 나도 너가 좋다.
-응, 나는 사실 모두랑 잘 지내고 싶었어. 하지만 어머니와 아버지는 항상 우린 지배자임을 잊지말라했지.이젠 그런것 따윈 개나줘버리라 해. 나랑 계속 있어주고 나 많이 안아줘. 나 원래 이런 성격 아닌거 알지?
-그렇게 할게. 네가 원하니까.
-무뚝뚝하긴, 좀 웃어.
고백한건 자신이었다.
“수수.”
미연의 귓등위로 뜨거운 눈물 한방울이 툭 떨어져 타고 내려갔다. 엘프의 것이었다.
“다시 기억해내줬구나. 미연.”
“잊어서 미안해. 이제 정말로 그만 이곳에서 나갈때가 됬나봐. 왜 방금 나가자고 말할때 말을 끊은 건지 알겠어.”
“그럼 나가자. 현실에 처놓은 결계도 아슬아슬 하네.”
“어떻게 알아?”
“나는 동시에 깨어있다. 이곳과 밖에서.”
“그렇구나…대단하네. 그럼 이곳에서 있었던 기억들과 만들어진 인격들은 어떻게 되는거야?”
“나도 모른다. 추격을 위해 짧게 여러번 나무와 정신적 수호심계를 나눈적은 있지만. 이렇게 길게 있던 적은 처음이다.”
“풋.”
수수의 말에 미연은 저도모르게 웃었다. 추적을 위한 수호심계를 위해 나무에 박을만한 구멍을 찾는 수수의 모습이 떠올려졌기 때문이다. 이후 간신히 찾아낸 나무옹이에 자지를 푹 찔러넣는 모습이라니.
“킥킥, 나무박이.”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수수는 입을 열었다.
“……그런 표현은 사양하겠다. 그리고 내 추측으론 아마 기억과 인격 대부분이 증발될꺼다. 네가 중요하다고 생각한 것들만 남게되겠지. 바람이 있다면 애칭만이라도 기억해줬으면 좋겠군. 미연.”
“내게 부르는 애칭은 없어?”
“불리는 것은 좋지만 부르는 것은 쉽지 않군.”
수수가 가볍게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재밌었어. 내겐 한 2시간정도 밖에 있는것 같지 않았지만. 서운해하진 말아줘. 마음이 편해.”
“네 덕분이다. 수호심계가 즐거웠던 건 처음이다, 이렇게 길어질 줄은 몰랐지만. 특히 네가 원래 살던 세계의 이야기는. 언젠간 한번 가보고 싶네. 우린 스스로 감정을 짜낼줄 모른다. 그런 것들이 모여있는 부족에서 넌 내게 감정을 느끼게 해준 사람이다.”
“밖으로 같이 갈래? 어떻게든 방법을 찾아볼게!”
또 다시 그 수려한 은발이 고개를 살짝 저을 때, 숨결 같은 바람을 타고 좌우로 잔물결처럼 부드럽게 흩어졌다.
“난 이곳을 지켜야 한다. 아니면 수호자의 자리를 내려놓거나.”
“그러면 되지 않아?”
“그럴 수 없다.”
“왜?”
“후계자가 없다. 부족장이 점지해주지만 아직 그런 인재가 나타나질 않았어. 아직 태어나지 않은 것일수도.”
미연은 생긋 웃으며 엘프의 말을 듣다가 이제 곧 나갈 시간임을 느꼈다.
“……나 두려워. 만일의 한에 옛날의 나로 돌아가는 거잖아. 너와 만난지 얼마 안되는.”
“그렇다.”
“지금처럼 참회나 고해성사도 안하고 삐뚤어질때로 삐뚤어진 인격파탄자 사이코 미친년이란 말이야.”
수수가 피식 웃으며 미연을 더욱 꼬옥 끌어안았다.
“시간이 흐르면, 결국 지금처럼 될꺼다.”
그 위로에 미연의 입가에 웃음이 걸렸지만, 동시에 눈시울이 뜨겁게 붉혀졌다.
입을 맞댄 인사ㅡ
“사랑해, 수수. 밖에서도 꼭 기억해내볼게. 수수라고 부를게”
“나도 사랑한다, 미연. 수호심계에서 나가면 너의 퀘스트를 전적으로 도와주마. 복수를 해야 한다며. 그게 니가 숙원하는 것이라면 기꺼이.”
“더 큰 목표가 생겼어. 아버지의 죽음을 파헤쳐볼꺼야.”
“그런가. 한다던 복수는?”
“당연히 해야지. 하지만 이제 그건 부산물이야.”
미연은 믿음직스러운 선서 같은 말을 듣자, 자신의 영혼 깊숙한 곳에 결코 지워지지 않을 문장을 조심스레 새겨 넣었다. 다만 그 순간조차, 본인도 다 헤아리지 못할 만큼 우습고도 서글픈 상황이라는 사실이 어쩐지 씁쓸하게 웃음을 불러왔다.
-현재 게임은 3회차.
-그것들은 우리의 고통과 희열등 감정을 짜내기 위해 모든 수단을 가리지 않고 있음, 1,2회차의 플레이어중 대부분은 사망했을것으로 추측.
-2회차 우승자 팔뮈를 반드시 찾을 것. 그는 현재 진행되는 3회차에 참가했다.
-추적결과 현재 머물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되는 곳은 악마문서를 보관하고 있다는 마왕성이 존재하는 마대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