밍키넷 단편야설

한 편 완결 소설

성인소설 목록

최신 단편

야설 읽기
밍키넷 소설
토스트 메세지 나오는곳
텔레그램 공식채널

밍키넷 공식보증업체

144화 144화 말이 안 통해? 쥬지 휘두르면 되잖아?


눈이 차분히 가라 내려 앉은 설산처럼, 순백의 배경이 내게로 빠르게 몰아쳤다. ​ 한순간 세상이 하얗게 변했다. ​ 눈을 감았다 떴다. ​ 아니, 감은 건지 뜬 건지도 모르겠다. 시야 전체가 새하얀 공백으로 채워졌다가, 서서히 형태가 드러나기 시작했다. ​ 바닥. ​ 발밑에 뭔가 단단한 게 느껴졌다. ​ 내려다보니 검은 흑요석 같은 바닥이 끝없이 펼쳐져 있었다. 표면은 거울처럼 매끈해서 내 모습이 희미하게 비쳤다. 한 걸음 내딛었다. ​ 파아아아앙— ​ 발을 디딘 곳에서 파문이 일었다. 마치 잔잔한 수면에 돌을 던진 것처럼, 동심원이 사방으로 퍼져나갔다. 파문이 지나간 자리에서 흑요석이 은빛으로 반짝이다가 다시 검게 변했다. ‘여기가 헬레나의 머릿속?’ ​ 고개를 들어 사방을 둘러봤다. ​ 서가. ​ 끝도 없이 펼쳐진 서가들. 하지만 일반적인 도서관과는 달랐다. 서가는 뼈처럼 하얀색이었고, 유기적으로 휘어져 있었다. 마치 거대한 생물의 갈비뼈 안쪽에 들어온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서가들은 일정한 규칙 없이 배치되어 있었다. 어떤 건 바닥에서 수직으로 솟아올랐고, 어떤 건 허공에 떠 있었다. 심지어 어떤 서가는 거꾸로 매달려 있었는데, 그 위의 책들도 중력을 무시한 채 제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 책들. ​ 서가에 꽂힌 책들은 살아 있었다. 정확히는 살아 있는 것처럼 보였다. ​ 어떤 책은 숨을 쉬듯 표지가 부풀었다 꺼졌다 했다. 어떤 책은 떨리고 있었다. 마치 추위에 벌벌 떠는 것처럼. 또 어떤 책은 스스로 페이지를 넘기며 중얼거렸다. 알아들을 수 없는 언어로, 끊임없이 뭔가를 속삭였다. ​ 몇몇 책은 아예 서가에서 빠져나와 떠다니고 있었다. 나비처럼 펄럭이며 허공을 떠도는 책들. 내가 다가가자 그중 하나가 황급히 도망쳤다. 마치 겁을 먹은 것처럼. ​ 책등에 쓰인 제목들이 눈에 들어왔다. 『예언자의 제47권 - 마계와 천계의 관계론』 『손상된 제88권 조각 - 천상의 문에 대하여』 『불완전한 제203권 - 신들의 오만과 그 대가』 『복원 불가 - 제███권 잔해』 ​ 마지막 책의 제목은 글자가 흐릿하게 번져 있었다. 읽으려고 집중하자 글자가 더 흐려졌다. 마치 읽히기를 거부하는 것처럼. ​ 천장. ​ 위를 올려다봤다. 천장은 없었다. 대신 끝없는 어둠이 펼쳐져 있었다. 밤하늘처럼 깊고 광활한 어둠. 하지만 별은 없었다. ​ 아니, 별 대신 다른 게 있었다. ​ 눈. ​ 무수히 많은 혈색 눈동자들이 어둠 속에서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크기도 제각각이었다. 어떤 건 손톱만 했고, 어떤 건 사람 머리통만 했다. 전부 붉은색이었고, 동공은 세로로 길쭉했다. 뱀이나 용의 눈처럼. 눈동자들은 천천히 움직이며 나를 추적했다. 내가 걸으면 그 눈들도 따라 움직였다. 깜빡이지도 않았다. 그저 지켜보고 있었다. ​ 소름이 돋았다. ​ “뭐야, 저게….” ​ 중얼거렸는데, 갑자기 눈동자 하나가 커졌다. 마치 확대되는 것처럼. ​ 등골이 오싹했다. ​ 숨을 들이마셨다. 공기는 차갑지도 따뜻하지도 않았다. 온도 자체가 없는 것 같았다. 하지만 무거웠다. 마치 물속에 잠긴 것처럼, 공기가 압력을 가했다. ​ 미묘한 냄새가 났다. 피 냄새 같기도 하고, 타버린 종이 냄새 같기도 하고, 아니면 오래된 기억의 냄새 같기도 했다. 형언할 수 없는, 불쾌하지는 않지만 기분 좋지도 않은 냄새. ​ 고요했다. 하지만 완전한 침묵은 아니었다. ​ 귀를 기울이면 속삭임이 들렸다. 책들이 내는 소리, 페이지가 넘어가는 소리, 그리고 먼 곳에서 들려오는 신음 같은 소리. ​ -사각, 사각 -으으… -아아아… ​ 누군가 울고 있는 것 같았다. 아니면 신음하고 있거나. 그 소리는 사방에서 울려퍼졌다가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 더 깊이 들어가 봤다. ​ 서가들 사이를 지나니, 공간이 뒤틀려 있었다. 똑바로 걷고 있는데도 어느 순간 위아래가 바뀌는 착각이 들었다. 바닥이 천장이 되고, 천장이 바닥이 되는 듯한 혼란. ​ 중력도 일정하지 않았다. 어떤 곳에선 몸이 가벼워졌고, 어떤 곳에선 무거워졌다. 마치 공간 자체가 숨을 쉬는 것 같았다. ​ 서가 사이사이로 틈이 보였다. ​ 그 틈 너머로 뭔가 꿈틀거리는 게 보였다. 형태를 알 수 없는 것. 그림자 같기도 하고, 연기 같기도 한 것이 서가 뒤편에서 움직이고 있었다. ​ ‘저게 뭐지?’ ​ 다가가려다 멈췄다. ​ 본능이 경고했다. 가까이 가지 마라고. 그것을 무시한 채 방향을 틀었다. ​ 한참을 걷다 보니, 공간이 넓어졌다. 그리고 그곳에 666층의 복도에서 보았던 흑요석 왕좌와 비슷한 제단이 있었다. ​ 핏빛 잉크가 공중에서 흘러내려 표면에 글자를 새겼다가, 순식간에 증발하듯 사라졌다. 그리고 또 새로운 글자가 나타났다. 마치 살아있는 문서처럼. 하지만 내 시선을 사로잡은 건 제단이 아니었다. 그 앞에 앉아 있는 사람. ​ “헬레나?” ​ 나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 제단 앞, 거대한 책상 앞에 정복을 입은 헬레나의 모습이 보였다. ​ 아니, 정확히는 헬레나와 똑같이 생긴 누군가. ​ 검은색 군복 스타일의 정복. 어깨에는 금빛 견장이 달려 있었고, 가슴팍에는 복잡한 문양이 수놓아져 있었다. 허리는 벨트로 꽉 조여져 있었고, 그 아래로는 타이트한 바지가 다리 라인을 드러냈다. ​ 목 부분은 높게 올라와 있어 카리스마 있어 보였지만, 동시에 단추 몇 개가 풀려 있어서 쇄골과 그 아래 골짜기가 살짝 드러났다. 의도한 건지 아닌지 모르겠지만, 엄숙한 정복과 대비되어 묘하게 선정적이었다. ​ 긴 은발은 뒤로 깔끔하게 넘겨져 있었고, 뿔테 안경을 쓰고 있었다. 안경 너머로 보이는 눈은 헬레나처럼 은색이었지만, 더 차갑고 날카로워 보였다. ​ 그녀는 책상에 앉아 끊임없이 무언가를 쓰고 있었다. ​ 사각사각사각— ​ 만년필이 종이 위를 빠르게 달렸다. 글씨를 쓰고, 책을 읽고, 또 쓰고, 책을 덮고. 반복. 책을 읽다가 덮을 때마다 탁! 소리가 났다. 그리고 다른 책을 펼쳤다. 옆에는 산더미처럼 쌓인 책들. 내가 다가가도 그녀는 고개조차 들지 않았다. ​ 의도적으로 나를 무시하는 건지, 아니면 정말로 자신의 일에 몰두한 건지 알 수 없었다. 나는 기다려주기로 했다. ​ 손을 뻗자, 그 공간엔 처음부터 의자가 있었다는 듯 검은 의자가 생겨났다. ​ ‘뭐야, 이것도 정신계라서 그런가 신기하네.’ ​ 엉덩이를 붙이고 앉아 그녀를 지켜봤다. 무언가에 열중하는 모습. 밖에서 보던 헬레나와는 완전히 달랐다. 666층 자신의 집무실에 앉아 탱자탱자 놀고, 장난치고, 이상한 책들을 보며 시간을 흘리던 그런 이미지의 헬레나와는. ​ ‘이게 진짜 헬레나의 모습인가? 아니면….’ ​ 사각사각사각— 만년필 소리만 규칙적으로 울렸다. 그녀는 한 권의 책을 덮고, 다시 펼치고, 뭔가를 적었다. 그 와중에도 고개는 한 번도 들지 않았다. 몇 번인가 우리 눈이 마주쳤다. 그녀가 책장을 넘기다 고개를 살짝 들었을 때, 그녀의 은색 눈과 내 눈이 부딪혔다. 하지만 그녀는 아무 반응 없이 다시 고개를 숙였다. 마치 나를 본 게 아니라, 그냥 공간을 본 것처럼. ​ 몇 번 더 마주쳤지만, 결과는 같았다. ​ ‘무슨 로봇처럼… 감정이 없는 건가?’ ​ 톡톡! ​ 갑자기 그녀가 쓰고 있던 만년필로 책상을 쳤다. 두 번, 세 번. ​ 톡톡톡! ​ 그러자— 허공에서 백색의 마네킹 같은 존재들이 나타났다. 인간의 형상을 하고 있었지만, 얼굴은 텅 비어 있었다. 눈도, 코도, 입도 없었다. 그저 새하얀 표면만. ​ 그들은 소리 없이 움직이며 책을 갖다 주거나 가져갔다. 어떤 마네킹은 책상 위의 완성된 문서를 가져갔고, 어떤 마네킹은 새로운 책을 가져다 놓았다. 그녀는 마네킹들을 쳐다보지도 않았다. 그저 손을 뻗으면 책이 제자리에 있었고, 완성된 문서는 사라졌다. ​ 완벽한 시스템. 마치 오랜 시간 동안 반복된 루틴처럼. ​ "후…!" ​ 그녀가 긴 한숨을 내쉬며 만년필을 내려놓았다. 안경을 벗어 책상 위에 두고, 눈을 감은 채 미간을 주물렀다. 피곤한 듯. 그리고 천천히 고개를 들어 나를 봤다. 처음으로 제대로 나를 본 것이다. ​ “이곳에 들어오셨다는 건.” ​ 그녀의 목소리는 헬레나와 같으면서도 달랐다. 더 차분하고, 더 낮고, 더 권위적이었다. ​ “그녀에게서 인정받은 분이시군요.” ​ 그녀는 의자에서 일어나 내게 다가왔다. 정복 차림의 그녀가 가까이 오자, 키가 꽤 크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군화 굽까지 합쳐서 거의 내 눈높이까지 왔다. ​ “환영합니다.” ​ 그녀는 가슴에 손을 얹고 경례하듯 고개를 숙였다. ​ “저는 악마문서의 수호와 관리를 담당하는 에스틴입니다.” “에스틴.” “네. 무슨 용무로 오셨죠?” ​ 그녀의 표정은 호의적이었다. 내가 그녀의 작업이 끝날 때까지 기다려준 것에 대해 배려심을 느낀 듯했다. 나는 솔직하게 말했다. ​ “천계로 가는 길을 알고 싶어.” ​ 에스틴은 만년필의 뒷부분으로 자신의 머리를 긁적거리며 곤란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 “제가 아는 헬레나는 그걸 용납할 리가 없을 텐데요?” ​ 또! 똑같은 반응인가. ​ “왜?” “천계로 가는 길이 유출된다면 극도의 상승욕을 지닌 강자병 마족들이 몰려들 테니까요.” ​ 에스틴이 차분하게 설명했다. ​ “절대적인 비밀은 아는 사람이 단 한 명에서부터 시작되는 거니까요.” ​ 그녀의 말에는 일리가 있었다. 하지만 나는 반박했다. ​ “그럼 헬레나를 죽이면 어쩔 텐데. 내게로 이전할텐가? 난 그런 것도 각오하고 온거야.” ​ 나의 말에 에스틴은 당황하지 않았다. ​ 오히려— ​ “그녀를 죽인다고요?” ​ 푸훕. 작은 웃음이 새어 나왔다. ​ “푸하하, 하하하하하!” ​ 웃음이 점점 커졌다. 에스틴은 배를 잡고 웃었다. 정복 차림의 위엄 있던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그녀는 진심으로 재밌다는 듯 웃어댔다. ​ “하하하 미안해요, 하하하.” ​ 그녀는 눈가에 맺힌 눈물을 닦으며 간신히 웃음을 멈췄다. ​ “죄송합니다. 오랜만에 정말 재밌는 농담을 들어서요.” “농담이 아닌데.” ​ 내가 진지하게 말하자, 에스틴은 다시 픽 웃었다. ​ “아, 진심이셨어요?” ​ 그녀는 안경을 다시 쓰며 나를 똑바로 봤다. ​ “그럼 더 재밌네요.” ​ 에스틴은 책상으로 돌아가 엉덩이를 책상 가장자리에 걸터앉았다. 다리를 꼬며 말했다. ​ “헬레나를 죽인다.” ​ 그녀는 그 단어를 음미하듯 천천히 말했다. ​ “수백 년 동안 수많은 자들이 시도했죠. 쥐새끼같은 플레이어들, 영지에서 힘을 키워온 대군주, 마대륙너머에서 온 수호자들, 예전엔 하늘을 날아다녔다던 드래곤들까지.” “결과는?” “전부 실패했죠. 아니, 실패도 못 했어요. 시도조차 제대로 하지 못한 채 사라졌으니까.” ​ 에스틴은 만년필을 빙글빙글 돌리며 말했다. ​ “헬레나는 죽일 수 없어요. 적어도 제가 아는 한으론.” “왜?” “왜곡 때문이죠.” ​ 그녀는 허공을 가리켰다. ​ “뭐 그녀는 자신의 진정한 능력을 깨닫지 못하는게 아쉽지만, 무의식으로 나마 작동하는게 다행인 일인 걸까요. 못헬레나의 왜곡은 물리법칙을 넘어 개념과 존재 자체를 비틀 수 있어요. 죽음이라는 개념조차 그녀 앞에선 의미가 없죠.” ​ 톡톡- ​ “그래서 최종적으로 안전하게 정착한 이 곳이 저는 너무 마음에 들고요. 그 전엔 수명이 다해가거나 상처를 입었을때 문서들이 마구잡이로 훼손됬었어요. 그 덕에 저는 바쁘게 지내고 있지만.” ​ 에스틴은 나를 빤히 보며 섬뜩하게 웃으며 말했다. ​ “당신이 칼로 그녀를 찔러도, 독을 먹여도, 목을 조르려 해도 그녀는 그 결과를 거부할 수 있어요. '나는 죽지 않는다'고 왜곡하는 순간, 당신의 모든 시도는 무의미해지죠.” “….” ​ 에스틴은 웃음기를 거두고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 “그나저나” ​ 그녀는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 “왜 천계로 가고 싶으신 거죠? 당신도 결국 뻔한 상승욕에 취한 강자병환자인가요? 그렇다면 당신을 들여보낸 그녀의 판단이 너무 아쉽군요.” ​ 그녀의 은안이 나를 관통하듯 바라봤다. ​ “헬레나를 돕기 위해서? 아니면 다른 목적이? 그녀가 당신을 이 곳에 들여보낸 이유가 뭘까요?” ​ 나는 잠시 망설이다 대답했다. ​ 에스틴은 책상에서 내려와 내 앞에 섰다. 그녀는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천계에 볼 일이 있어.” ​ 에스틴의 눈이 가늘어졌다. ​ “복수라면 가슴에 묻어두세요.” ​ 그녀의 목소리가 차갑게 식었다. ​ “닥쳐.” ​ 나는 짧게 내뱉었다. 에스틴은 잠시 나를 빤히 쳐다봤다. 침묵이 흘렀다. 위에서 수천 개의 혈색 눈동자들이 우리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 [탐욕의 페로몬(인챈트)이 발동되었습니다.] ​ ​ ​ ​

고객센터 Suppor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