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2화 스물한 번째 이야기 - 연연불망(戀戀不忘) (39)
452.
#16. 소꿉장난이라고 해도 그때는 셋.
모든 것이....
생각대로 잘 될 듯 싶었다.
나름...
이제 성인도 되었고...
좋은 사람을 만나서 사랑도 하고....
그녀와 함께 미래를 꿈꾸며...
어엿한 어른의 길을 내 발...
내 다리로....
당당히 걸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앞으로 다가온 이별 또한....
이제는 두렵지 않았다.
잠시...
헤어져 있는 것이라고....
그냥....
하루 일과를 마치고....
각자의 집으로 귀가했던 것처럼....
그게 조금만....
긴 시간이 될 뿐이라고....
생각했다.
이미....
우리 마음은 단단히 이어져 있었고....
군 입대를 해서 복무를 마치고 나오면....
본격적으로 한 남자로서....
사랑하는 이와 가정도 만들고....
알콩달콩 살아가는....
그런 행복한 시간을 그려보았다.
그건....
민희도 그랬고....
나도 마찬가지였다.
그 날을 위해....
결혼이 아니면.....
최소 약혼이라는 약속을....
아니, 맹세를 하고 나면....
잠시 떨어져 있더라도 괜찮을 거라고...
모두 다 잘 될 거라고....
믿고 있었다.
그래서....
오히려....
군 입대라는 것이....
이젠 하나의 행운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나와 민희를 단단하게 만들어주는....
기회.
작은 시련으로....
더 행복한 시간으로 나아갈....
발판이 될 계기라고....
생각했다.
**************
유어 턴 (Your Turn)
그리고....
마이 턴(My Turn).
보통은 복수의 순간에 써야 하는 대사거나...
내가 일방적으로 상대방을 몰아치며.....
신바람 날 때 사용하는 단어였는데....
지금은....
정반대의 의미로....
나에게 다가서고 있었다.
" 훕... 후읍..... "
" 훗... 오빠 머해? "
연신 심호흡을 하는 나를 보고....
민희가 옆에서 웃고 있었다.
하지만....
정작 묻고 있던 그녀의 얼굴도....
그리 여유 있어 보이지는 않았다.
웃고 있어도....
웃음이 묻어있기 힘든...
창백한 얼굴.
잔뜩 긴장하고 있는 그녀를 위해서라도 웃어야 했다.
생각해보면....
우리 집보다 왜 자기네 집에 날 소개하면서...
그렇게 긴장하고 있는지.....
궁금했어야 됐는데....
당시엔 그런 의문을 가질 여유가 나에게 없었다.
고작 한다는 소리가....
" 하하... 기..기합 넣는 중이지. 하... 이런 기분이었구나? 우리 집에 왔을 때 민희 니 심정이라는 게..... "
" 훗... 이제야 알았어? "
" 으아... 우리 민희 생각보다 강심장이었네. 후우우.... 나도 잘해야 할 텐데... 어때? 나 괜찮아 보여? 어디 이상한데 없지? "
민희의 눈이 다시 한 번....
내 몸을 빠르게 전체 스캔에 들어갔다.
그리고 가슴에 단추를 매만져 주었다.
이미 여러 번 잠그고....
옷깃도 만졌으면서 또 그녀의 손이 바쁘게 움직였다.
" 응... 깔끔해 보여. 훗.... 이제 들어가자. "
" 그...그럴까? "
우리 아버지와의 인사가 그럭저럭 끝난 이후...
다음 행보는 당연히 민희네 집에 인사를 드리는 것이었다.
민희는 괜찮다고 몇 번을 말했지만....
나는 과일선물 바구니를 사들고 그녀의 집 앞으로 향했다.
한동안 사람들 입에 오르락내리락 했던 드라마에서....
고작 이런 길거리 과일바구니를 가져왔다고....
상대 어머니에게 개욕 먹는 여주인공이 생각났지만....
민희네 집이 그 정도 재벌가도 아니었고.....
나 또한 스턴트 하는 여자 주인공 같은 설정도 아니었으니....
그래도 이왕 인사를 드리러 가는데....
선물을 들고 가는 것이 좋을 것 같아서 산 과일 바구니였다.
거기에 나오는....
드라마 여주인공도 말했다.
빈손으로 남의 집 찾아가는 것은 아니라는....
그 대사가 마음에 걸려서 무어라고 사고 싶었는데....
아무리 골라도 그....
욕 먹은 과일바구니 만한 것이 없었다.
내 주제에....
무슨 한우 선물 세트를 살 수 있는 것도 아니었고....
고가의 선물 같은 건....
할 여력도 없었다.
그래도....
최선의 능력 속에서....
예쁘고 신선해 보이는 것으로 골라 담아서 즉석에서 포장해주는....
과일 가게 안에서 제일 좋은 것으로.....
한손 무겁게 들고 힘들여서 가지고 왔다.
" 후우.... "
다시 깊은 숨을 들이마셨다.
아니....
연신 숨을 몰아쉬고 있었지만 발걸음이 후달렸다.
그녀 가족들이 모두....
모여 있는 가운데 저녁식사 초대.....
우리 집이야 아버지 혼자였지만....
민희네 집은 아버지, 어머니, 양친에다가 위로 언니가 둘....
그리고 막내 남동생까지 있는.....
이른바 대가족이었다.
왠지 적이 잔뜩 매복하고 있다는....
수두룩 빽빽한 정글에 혼자 들어가는 느낌이랄까.
물론...
<< 적 >>이라는 단어가....
민희네 가족에게 붙일 만한 것은 분명 아니었지만...
내 솔직한 심정은 그랬다.
부담백배.
압살 당하기 직전....
사지로 들어가는....
병사의 마음.
그냥 병사도 아닌....
신출내기 신병의 마음이랄까.
아니다...
절대....
이곳은 따듯하고....
사랑으로 날 맞이해줄....
파라다이스다.....
이미 여러 번 되뇌었던 자기 최면을 걸고는....
마침내 초인종을 눌렀다.
띵동.
조심스럽게 누른 벨소리가 무슨 천둥소리처럼 들렸다.
하마터면....
심장이 뚝 떨어질 뻔 했다.
그리고 그 즉시 튀어나오는....
인터폰에서 들리는 목소리.
[ 아, 민희야? 그래.... 남자친구는 왔고? ]
나 대신 옆에 있던 민희가 빠르게 대답했다.
" 응. 문 열어줘. "
찌이이이잉!
철컥!
요란한 소리와 함께 잠겨있던 대문이 열렸다.
이른바....
아파트가 아닌 단독주택.
높은 담장이 성처럼 느껴지는 가운데....
철문을 열고 들어가는데 문고리가 차갑게 느껴졌다.
" 후우.....하아..... "
또다시 나오는 한숨.
얼굴이 굳어져서 가면을 쓰고 있는 기분이었다.
그리고 짧은 계단을 올라가는데 왜 그리 길고 높은지....
현관 앞까지 가는데 머리가 어찔어찔 거렸다.
현관문이 열리자 금세 새로운 얼굴들이 시야 안에 가득 들어왔다.
" 하하... 민희 니 남친? "
민희와는 다른....
짧은 머리의 웃는 얼굴.
그리고 뒤에 있는 약간 무뚝뚝한 표정의 여자 얼굴이 보였다.
한눈에 자매 임을 알 수 있는 용모들이었다.
유전자의 힘은 위대하다고....
민희를 닮은 여자 둘이서 우리를 맞이했다.
바로 허리가 절로 굽혀졌다.
" 아.. 안녕하세요. 처음 뵙겠습니다. 김우태입니다. "
" 히히... 어서 들어와요. 와.... 무슨 이런 걸 다 들고 왔어요. 무겁겠네. 이리 주세요."
둘 중 한 명이 얼른 내 손에 있는 과일바구니를 낚아챘다.
그리곤....
괜찮다고 말할 새도 없이....
양손으로 들고는 들어올 수 있게 자리를 비워 주었다.
민희는 벌써 집 안으로 들어갔다.
나도 서둘러 신발을 신고 안으로 들어왔다.
왠지 발바닥이 땀이 찬 기분이었지만 그럴 리는 없었다.
얼마 걷지도 않았고 신발도 산지 얼마 안 된 새것이었다.
발 냄새도....
발에 땀이 찰 시간이나 이유도....
있지 않았다.
진...
진정하자.
정신 차려.
김.우.태.
뻣뻣하게 움직이는 다리를 옮겨 들어가자마자....
바로 거실에 앉아계신 민희 아버지가 보였다.
척 봐도 조금 까탈스럽게 생긴 용모가 가슴을 싸하게 만들었다.
난 시선이 마주치자마자 고개를 깊이 숙이고 인사부터 했다.
" 아...안녕하세요. 오늘 저녁식사에 초대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김우태라고 합니다. "
그는 신문을 접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 초대는 무슨..... 그냥 같이 밥이나 먹는 거지. 자.... 어서 식탁으로 가지. 너희들도 어서 가자. 거... 여보. 식사 준비는 다 되었지? "
" 네에~ 어서 들어들 오세요. 이제 바로 국만 뜨면 되요. "
부엌 쪽에서 민희 어머니로 생각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민희 아버지는 성큼성큼 먼저 들어가고 그 뒤를 언니들이 쫓았다.
난 민희 옆구리에 붙어서 쿡 찔렀다.
" 하.... 내가 제대로 하고 있긴 하냐.....? "
" 훗... 잘하고 있어. 자... 밥 먹으러 가자. 오빠 온다고 엄마가 먼가 아침부터 하시는 것 같은데.... 나도 실은 제대로 보진 못했어. "
민희의 작은 손이 내 팔을 잡고 이끌었다.
지금 같아선 어떤 진수성찬도....
입 속으로 들어갈 수 있을지 전혀 상상이 되지 않았다.
나름 나 자신이 담대하다고 생각했었는데...
지금 보니 완전 과장된 평가임이 분명해보였다.
완전 쫄보에....
배짱이라곤 콩알보다도 작아서....
찾아 볼 수 없었다.
**************
긴 식탁.
맨 위쪽 자리에 민희 아버지께서 앉으시고....
그 좌측에 어머니....
부담스럽게 바로 우측에 내 자리가 있었다.
옆자리에 민희라도 앉아 있으면 좋으련만....
반대쪽....
내 앞에 있었다.
큰 언니가 오히려 내 옆에 앉아 있었다.
생글거리는 작은 언니가 민희 옆.
마지막으로....
호기심 어린 눈으로 보고 있는....
남동생이 맨 끝자리를 차지했다.
아직은 고등학생 티가 줄줄 흐르는...
남동생은 궁금함이 잔뜩 담겨서....
반짝거리는 시선으로 날 보고 있었다.
날카로운 아버지와 약간 무뚝뚝한 큰 언니 사이에서....
제대로 아다리 쳐진 상태로....
밥은 먹을 수 있을지 모르겠다고 생각하는데....
건너편 민희 어머니와 작은 언니....
그리고 누나 남자친구라는 존재가 신기한 듯...
말똥말똥 바라보는 시선 또한 만만치 않았다.
그래도 앞에 민희나....
웃는 얼굴의 인상 좋은 작은 언니를 보면서....
희망을 가져볼까 했지만....
헛...
시선이 집중되는 자리라는 것이....
생각 이상 부담백배 라는 점에서....
카메라와 스텝 앞에서 연기하는 연예인들이....
얼마나 대단한 배짱과 엄청난 직업의식의 소유자라는 것을...
새삼 깨닫고 있었다.
그리고...
앞에 차려진 음식들이...
무슨 명절 제사상을 차린 듯한 모습이었다.
가짓수를 보나 그 질과 양이....
고작 셋째 딸 남자친구가 온다고 했었을 뿐인데....
이건 무슨 사위가 온 듯한 차림상이었다.
저절로 헤메이는 내 시선이 민희를 찾았다.
반쯤 정줄을 놓은 내 눈동자와 마주친 민희 역시 얼굴을 붉히며 바로 숙였다.
-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