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9화 스물한 번째 이야기 - 연연불망(戀戀不忘) (95)
509.
" 석진씨가? "
생각지도 못한 소식에 눈이 절로 커졌다.
" 응... 매형도 보고.... 옷도 갈아입고 와.... 큰 누나들한테는 내가 말해둘께. "
종석의 말투는 변함없이 잔잔하게 들리는데....
또 다른 울림으로 심장이 빠르게 뛰며 현기증이 났다.
그렇게 종석이가 가리키는 손길대로 일단 층계 쪽으로 오긴 했는데....
위층으로 올라가는 층계를 보면서.....
순간 다리가 후들 거리는 것을 느끼곤 잠시 주저앉았다.
생각을 안했던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역시 예상했다고 해서....
마주칠 용기가 생기는 건 아니었다.
후욱...
후욱....
거친 숨을 몰아쉬고는...
눈을 질끈 감은 채 벽을 짚고 일어섰다.
그리고....
무겁기 짝이 없는 한숨을 내쉰 뒤....
한 계단씩....
올라가기 시작했다.
**************
삐걱....
오늘따라 문을 열었는데 요란한 소리가 나는 듯 싶었다.
그러고 보니....
예전에 열 때 경첩 쪽에 녹슨 듯 뻑뻑했던 기억이 소환되었다.
그래도 이 정도는 아니었는데....
기름칠이라도 해야겠네....
문을 힘주어 닫고는 걸쇠를 걸었다.
며칠 주인이 집을 비웠음에도....
집안 모습은 변한 것이 없었다.
다만 아침 햇살이 들어온 가운데.....
보는 집 안의 모습이 낯설긴 했다.
언제나....
어둑어둑한 상태에서 나가서....
깜깜한 밤에 들어왔는데....
이런 건 휴일에서도 보기 힘든 모습이었다.
휴일 같은 경우엔....
한참 뒹굴 거리며 자다가....
해가 중천에 뜬 시간에나 일어났으니....
아직은 옅은 아침 햇살 속에 보이는 집 안 모습은....
낯설 수 밖에 없었다.
우태는 숨을 길게 내쉬고는....
바닥에 떨어져 있는 물건들을 주섬주섬 집어 들고.....
하나씩 정리를 시작했다.
빨래거리는 빨래 모아두는 바구니에 넣고....
아직 빨지 않을 옷은 옷걸이에....
수건도 접어서 의자 뒤에 걸었다.
빈 페트병도 치우고....
빈 그릇들을 싱크대에 갖다 놓고 보니....
어느새 청소기까지 붙잡고 집안 청소까지 하고 말았다.
창문을 열고....
환기도 하면서 치우다 보니....
땀이 송골송골 이마와 등에 솟아났다.
가끔 지나가는 자동차 소리와 애들 소리....
누구하고 통화하는지...
목소리 큰 아줌마의 걸걸한 소리까지....
휴일과는 다른....
일상이 느껴지는 시간이 무심하게 흘러갔다.
얼마나 청소를 했을까.
간만에....
깨끗해진 집 안을 헉헉 거리며 보고 있자니....
시간이 오후 시간대로 들어가 있었다.
하지만 배고픔 보단.....
씻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진주에서 올라올 때...
민희를 샤워하라고 욕실로 들여보냈지만....
정작 우태는 씻을 새도 없었다.
민희와의 정사....
그 흔적이 그대로 몸에 남아있는 가운데....
그대로 그 위에 옷을 입고 서울까지 올라왔다.
그러고 보니....
더욱 땀을 흘린 뒤라...
사타구니 쪽에서 찝찝한 느낌이 나는 듯 싶었다.
창문을 닫은 뒤....
옷을 훌훌 벗었다.
알몸이 된 뒤 그대로 욕실로 들어갔다.
차가운 물이....
따스한 물로 바뀌고.....
물줄기 속에 한동안 비를 맞고 있는 듯.....
가만히 서있었다.
그렇게 완전 물에 젖은 뒤.....
비누칠을 하며 겉에 남아있는 흔적들을 닦아냈다.
비누거품이...
샤워기 물줄기 속에....
하수구로 흘러들어가고.....
몸에서 뽀숑뽀숑한 느낌과 깔끔해진 자신의 모습을...
뿌연 거울 속에서 보고는 거실로 나왔다.
아직도 덜 닦은 물이 뚝뚝....
바닥으로 떨어지는 것을 보며.....
우태의 시선은 결국 한곳으로 향했다.
어쩌면 지금까지의 시간은....
부지런히 청소하고 샤워하고 몸을 움직였던 것은....
모두 다 이것을 외면하기 위해서 이었을지도 모르겠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핸드폰.
그렇게 애써 외면했건만....
결국 우태의 시선은 자신도 모르게 핸드폰으로 향해...
고정되어버렸다.
서민희....
민희....
민희야.....
아침에 결국 가보지도 못하고....
그렇게 보내버린 것이....
심장에 바위가 되어 올라타 있는 듯 싶었다.
너무 무겁고....
너무 커다란 존재이기에....
잠시 잠깐....
빈 시간이 생기자마자 서민희를 생각하고 있었다.
당장이라도 핸드폰을 들고...
그녀에게 전화를 걸고 싶었다.
아니...
문자라도 보내고 싶었다.
하지만....
그때 장례식장으로 따라 들어가지 않았던 이유가....
다시 그의 손을 잡아끌었다.
한숨을 길게 내쉬며....
눈을 감은 채....
그렇게 우태는 그 자리에 한참을 서있었다.
**************
" 부장님! "
" 어~! 김우태씨! 아니 휴가 내놓고 웬 연락이야? 무슨 직장에 오지 못해서 안달난 사람처럼! "
" 죄송해서 연락드렸습니다. 바쁘신 거 아닌가 하고요. "
" 흐흐흐... 아니 그런 사람이 갑자기 일주일 휴가를 가겠다고 통보했나? "
" 그건 정말... 죄송했습니다. "
입맛이 썼다.
사실 휴가 달라고 했을 때 안 줬어도 갈 생각이었다.
까짓것 그만 두지 뭐.
이런 배짱으로 벌인 짓이기도 했다.
하지만....
까탈스러운 박 부장이 그렇게 쉽게 휴가를 내줄지는....
생각도 못했다.
물론 갑자기 프로그램 하나가 날아가 버리면서....
온통 어수선한 분위기로 붕 떠버린 것은 사실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휴가를 미리 신청한 것도 아니고....
전화로 요청하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그것도 무슨 사유가 있었던 것도 아니고....
어떻게 보면 이정도 타박은 타박도 아니었다.
거기에다가...
웃음기 담긴 그의 목소리가 기분 나빠하는 것도 아니었다.
그냥 작은 구박을 하면서 우태를 놀리는 정도일 뿐이었다.
" 됐어. 이년 넘게 휴가도 안 갔으면 쉬고 싶을 때도 있는 거지. "
" 많이 바쁘면 내일 출근 할까요? "
분명 미쳤다고 할 일이었다.
직장인이 어렵게 낸 휴가를 반납하고 출근하고 싶다라....
아니, 출근하겠다라....
이건 분명 제정신이 박힌 사람의 발언은 아니었다.
아니나 다를까.
박 부장이 큰소리로 웃었다.
" 푸하하하.... 아니 애인하고 여행 갔다가 파토라도 났나? 무슨 출근 타령이야, 이 사람아! 하하하... 참 별 소리를 다듣네. 하하하하. "
윽....
진짜 가만히 연못가에 앉아 있다가...
돌에 맞은 개구리가 된 기분이었다.
어떻게 정확히 지금 상황을 한마디 안에 담을 수 있는 건지....
이래서 부장자리까지 올라가셨나 싶은 생각이 들 정도였다.
하지만...
정작 돌을 던진 당사자는 전혀 눈치 채지 못한 모양이었다.
" 괜한 헛소리 말고 남은 휴가 잘 보내고 출근해. 정말 휴식이 필요하긴 했구나? 흐흐흐... 전혀 바쁠 것도 없고 지금은 출근해도 할 일도 없으니까 잡생각 말고 푹 쉬다 와. "
그렇게 통화를 끝마치고 나니....
한숨을 흘리며 휴대폰을 내려놓았다.
마음에 얹힌 짐 중 하나는 조금 가벼워진 듯 싶었다.
사실...
출근하겠다고 한 것은....
이런 잡념에서 벗어나 일이라도 하겠다는 생각 때문에...
저지른 말이었다.
그리고...
박 부장님의 호통도 각오했었다.
그런데.....
전혀 다른 반응....
출근하라는 말은 끝끝내 듣지 못했다.
아무래도....
아직 부서 폐지가 마무리 지어지지 않은 모양이었다.
하긴...
고작 3일 밖에 안 된 시간이었는데....
정직원도 아니고 계약직인 자신의 처분이....
재빨리 나올 것이라 생각도 안했다.
그리고 보면....
박 부장이 좀 상대하기엔 녹록하지 않지만....
자기 사람만은 잘 챙기는 사람이었다.
괜히 출근해서 잡일 하느니...
쉬게 놔두는 듯 싶었다.
다시 정적의 시간이 찾아왔다.
우태는 들고 있는 핸드폰에 힘을 주어 움켜줬다.
네모난 모서리....
얇은 면의 감촉이 강하게 느껴졌다.
핸드폰을 잡는데도 한참 걸렸다.
결국 잡은 뒤....
회사에 전화를 걸었지만...
마음은 민희에게 가있었다.
자꾸만 장례식장으로 들어가는 민희의 모습만 생각날 뿐이었다.
우태는....
핸드폰을 들어 화면을 깨웠다.
그리고....
그간 왔던 문자 메세지를 열었다.
아무래도 전화는 걸 수 없었다.
갑작스럽게 울리는 전화가 곤란한 일을 만들까 걱정되었기 때문이었다.
받지 못하는 순간이라면....
나중에 연락하겠지 하는 생각으로....
손가락을 놀렸다.
[ 괜찮아? ]
전송과 함께 글자가 창 위에 올라왔다.
앞에 붙어 있는 ' 1 ' 자가 유난히 크게 보였다.
한참을 보아도....
사라지지 않는....
1자.
핸드폰 화면과의 눈싸움을 계속하던 우태는....
한숨과 함께 내려놓으려는데....
순간 마음이 들썩거리며 다시 들어 화면을 보았다.
역시...
잘못 본 것이 아니었다.
1자가 사라졌다!
그리고....
핸드폰 저 너머....
민희가 무언가 작성하는 듯한 표시가 보였다.
그렇게 몇십 초가 흘렀을까?
휙....
떠오른 문자 메세지 하나.
[ 괜찮아 오빠 이따 연락할께 ]
짧은 내용...
짧은 문장인데도....
눈앞에 핑그르르 도는 듯 싶었다.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민희의 문자.
거기에....
이따 연락할께라니....
그것만으로도 심장이 뜨거워지면서....
부풀어 터질 것 같았다.
**************
계단을 하나하나 올라가는데....
끝이 없을 것 같은 계단이 마침내 수평선이 되고....
기다란 통로 끝에 장례용품 대여점 입구가 보였다.
투명한 유리창 너머...
마네킹들이 상복을 입고 서있는 가운데....
그 안에 점원으로 보이는 사람이 서있었다.
마른 침을 꿀꺽 삼키고는....
민희는 아직도 고르지 못한 숨을 내쉬며....
벽을 짚은 채 한걸음 한걸음 입구로 다가갔다.
굳은 마음....
굳은 결심으로.....
집을 나섰는데.....
이렇게 빨리 다시 석진과 마주칠 것이라곤....
생각 못해서 였을까.....
빠른 혈류의 흐름이 느껴지는 가운데.....
자꾸만 도망치고 싶어 하는 마음만 가까워지는 거리에 반비례해서....
두 배 이상 빠르게 커져만 갔다.
하지만....
어디로 도망치겠어?
언니들의 얼굴이 휙휙 지나가고....
방금 전 자신을 맞이했던 종석의 얼굴도.....
빙그르르 돌며 가까워졌다가 멀리 사라졌다.
그리고....
엄마....
갑작스런 아버지 죽음에 어떻게 계실지 모르는....
엄마를 생각하면 역시 도망은 말도 안 되는 선택이었다.
아랫입술을 살짝 깨물고는....
대여점 입구에서 살짝 안을 들여다보는데....
순간 어깨를 툭툭치는 손길이 느껴졌다.
소스라치게 놀라며 개구리가 펄쩍 뛰듯....
손길의 반대방향으로 몸이 날리며 돌아보는데....
그곳에 낯익은 얼굴이 보였다.
그리고....
" 아! 미안.... 미안해. 자기.... 놀라게 할 생각은 아니었는데..... "
그곳엔 평상시....
언제나 그러하듯 담담한 표정의 석진이 민희를 보고 있었다.
어정쩡한...
손을 들고는.....
어색한 미소를 머금은 채.....
검은 상복을 입고 있는 그가 마주보는 중이었다.
- 계속